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 과 석불

by 선재 posted Aug 1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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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의 성주사지 삼층석탑 과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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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동삼층석탑 [聖住寺址東三層石塔] 충남유형문화재 제26호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聖住寺) 창건시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삼층탑이다. 성주사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것이다. 서쪽에 있는 서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이지만 높이 4.6m로 크기가 다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중앙삼층석탑은 보물 제20호,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47호, 동삼층석탑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이다.
이중 기단 위에 탑신(塔身)이 3층 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1971년 해체한 뒤 수리하였고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성주사지서삼층석탑 (聖住寺址西三層石塔) 보물 제47호

성주사터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뒷쪽으로 나란히 서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이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놓여 있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성주사지중앙삼층석탑 (聖住寺址中央三層石塔) 보물 제20호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얼굴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성주사지 석불입상 지방문화재자료 제3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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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성주사 강단지 한 쪽에 위치하고 있다. 얼굴 모양은 타원형이고 마모가 심하여 원래의 모습은 알기 어려우나 머리는 소발하고 있고 왼쪽의 귀는 훼손이 심하여 없고 "코를 긁어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미신으로 마모되어 시멘트로 때움하였다.
얼굴은 인자하고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위로하여 배를 감싸고 있다. 양 어개에 두른 법의와 팔과 손을 돋을 새김하여 서있는 모습으로 석불을 조성하였다.
조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발굴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이전하여 건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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