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해도 노래는 영원하리’직장인 포크그룹‘ 햇빛세상’

by 선재 posted Mar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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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해도 노래는 영원하리’직장인 포크그룹‘햇빛세상’
경향신문 김정선기자 200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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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서울 구로동의 한 연습실. 기타를 들고 마이크를 잡은 10명이 무대에 선다. 푸석한 얼굴, 희끗희끗한 흰머리, 피곤한 표정…. 무대에 선 사람들 중 누구에게서도 ‘가수다운’ 분위기를 찾기는 어렵다.

‘푸르름으로 사는 나무야, 눈 내린 겨울엔 새하얀 고운 옷 입고,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중략) 다시 맞을 봄날엔 한가닥 나이테를 더하고, 더욱 커진 푸른 꿈들을 두팔벌려 세상에 펼치리~’

1970년대 포크계열의 감미로운 음색. 고운 화음이 작은 연습실을 가득 울린다.

직장인 포크그룹 ‘햇빛세상’. 밤만 되면 구로동 연습실로 모여들었던 것이 햇수만으로도 13년.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음악인으로 변신했던 세월이다. 멤버의 직업은 천차만별이다. 퀵서비스 기사, 기아자동차 노동자, 레코딩 엔지니어, 자영업자, 피아노 조율사 등. 그들은 일터에서 느끼는 부분을 노래로 풀어간다. 물론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환경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함께 해보자고 뭉친 것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다. 결성 당시만 해도 혈기 왕성한 젊은이었던 이들도 30을 넘어선 지 오래. 이젠 힘에 부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무대에 설 때만은 ‘살아있다’고 느낀다.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감동을 잊지 못해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구로동 연습실을 뜨지 못했다.

멤버들이 처음 ‘노래’를 알게 된 것은 1990년. 산돌 노동문화원이 주최한 ‘구로지역 노동자 합창단’ 공개 모집에서 오디션을 통과하면서부터다. ‘산돌 노동자 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재봉틀을 돌리고, 망치질을 하던 노동자들이 손에 기타와 마이크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공단 주변에는 많은 인파로 넘실댔다. 그러나 공단의 주변에 가득한 것은 순진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퇴폐적인 상업문화뿐. 산돌노동자 합창단은 이곳에 인정이 숨쉬는 문화를 뿌리내릴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호응으로 공연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93년 ‘산돌…’은 음악의 색깔을 조정하고, 이름도 ‘햇빛세상’으로 바꿨다. 90년대 중반 들어 구로지역의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업종전환을 했고, 가리봉 거리도 황량해졌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이념적인 노래는 빛이 바랬고 잘나간다고 했던 노래패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진오씨(36)·박영선씨(31)·김태열씨(35)는 처음으로 고민다운 고민을 했다. 매일 밤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봐”

“너희는 노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노래를 한다면 대체 무슨 노래를 해야 하는 거야?”

절망과 희망을 오가는 설전 속에서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결론은 따뜻하고 잔잔한 이웃들의 이야기, 생활 속의 노래를 해보자는 것. 그룹 이름도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이웃을 따뜻하게 보듬어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아 ‘햇빛세상’으로 바꿨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팬’들은 노래에 노동현장의 치열함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등을 돌렸다. 멤버들도 하나 둘 떠났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때에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절절한 상황에도 노래는 살아가는 희망을 주지 않았던가.

삶은 여전히 초라했고, 노래에도 예전같은 뜨거움은 없었지만 그들은 또한번 일어섰다.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멤버 전원이 오선지를 집어들고 작곡·작사를 했다. 삶에서 느끼는 그대로를 노래하는 음악. 남이 알아주건 말건 그저 노래를 불렀다. 일년에 한번 창작발표회와 정기공연을 꼬박 올린 열성을 보인 탓일까. 햇빛세상이 울리는 희망의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녹음실도 빌리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였지만 98년 12월 1집 음반을 내고, 발표 공연도 성공리에 마쳤다.

황상호씨(30)나 전길선씨(29) 같은 새로운 멤버도 속속 햇빛세상에 새 멤버가 됐다. 99년에는 10주년 행사까지 근사하게 마쳤고 올초 3집 앨범을 손에 들었다. 세월만큼 사람도, 음악도 성숙했다.

멤버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비정규직으로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하는 불완전하고 어려운 삶. 그러나 피곤한 삶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주는 것이 바로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를 버리겠다는 생각은 이젠 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꿈’을 부르는 것과 같다니까요. 노래가 있는 한 고단한 삶 속에도 희망찬 내일이 있다고 믿게 되는 거지요”. 물질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큰 행복이 ‘햇빛세상’ 속에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