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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11:51

불교 기본 교리/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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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나라

    불교 기본 교리/교설

    1. 육바라밀
    2. 팔정도
    3. 사성제
    4. 삼법인
    5. 연기설
    6. 십이연
    7. 업보윤회의 사상

    1. 육바라밀

    보살은 이와 같이 사회와 중생을 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그와 함께 보시(布施,dana)·지계(持戒,sila)·인욕(忍辱,ksanti)·정진(精進,virya)·선정(禪定,dhyana)의 5바라밀도 함께 행하게 된다. 이것을 보살이 닦아야 할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① 보시바라밀(dana-paramita)은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아함의 교설에서도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시여(施與)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뭄이(住)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소리·냄새·맛·촉감·법에 머뭄이 없이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베풀어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주는 물건(施物)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품반야 卷7>

    ② 지계바라밀(sila-paramita)은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을 뜻한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의 오계가 있고,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지계바라밀은 이러한 법과 계율들을 잘 지키는 것인데, 이 때도 계율을 지킨다는 부담감이나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된다. 죄(罪)와 비죄(不罪)를 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不可得)의 공관에서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준법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품반야 卷1>

    ③ 인욕바라밀(ksanti-paramita)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苦忍)이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경우에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니, 제법이 본래 不生임을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석존은 다음과 같은 전생담을 설하고 계신다. "옛날 가리(Kalinga) 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 만일 내게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진한(瞋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상이 없었나니라."

    ④ 정진바라밀(virya-paramita)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법을 증장시키는 데에 정진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아함교설의 여러 가지 행법(三十七助道品)에는 정진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석존이 열반에 임하였을 때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라. 불방일(不放逸)로써 나는 정각(正覺)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선을 낳는 것도 불방일이니라."고 유촉하고 계신다. 공관의 실천을 무사안일에 빠지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⑤ 선정바라밀(dhyana-paramita) : 선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靜慮)을 뜻한다. 신(God)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존재의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 선은 특히 중요한 행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원시불교에서도 사선(四禪)의 행법이 설해져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육바라밀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머물음이 없는 법(不住法)'속에서 행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⑥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에 대해서는 다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禪定)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기반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섯 바라밀은 모두가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인연화합하여 생장이 있게 되는데, 이 때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생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속에 머물러 증장함을 얻는다."<소품반야 卷2>

    육바라밀은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아낌없는 시여, 자율적인 준법생활, 끝없는 인내, 굽힐 줄 모르는 정진, 한없이 심오함 사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끼는 마음·계을 범하는 마음(犯戒心)·화내는 마음(瞋心)·게으른 마음(懈怠心)·산란한 마음(散亂心)·지혜가 없는 마음(無智心)이 있을 때 큰 자비(maitri-karuna)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空에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대자대비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대품반야 卷1>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모든 분별망념을 초월하여 말할 수 없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선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며,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할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놀람이 없고 거꾸로 된 생각(顚倒)을 멀리 떠나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고 반야심경은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무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이다.<반야심경> 소승불교의 출세간적인 종교적 행위는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지극히 적극적인 종교적 행위로 지양된 것을 볼 수가 있다.

    2. 팔정도

    먼저 이 팔정도의 각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卷7 분별성체경> 정사유(正思惟,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思惟)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 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samyak-vac)와 정업(正業,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오,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동상경>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心)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절 십이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의식(凝視)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正念) 마음(心)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타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samatha)와 관(觀,vipasyana)의 拄수(修)라든가, 정(定,samadhi)과 혜(慧,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正見), 정정(正定)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決擇)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四聖諦)'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존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존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을 띠게 되었다. 석존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은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3. 사성제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滅)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절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苦蘊)의 집(集)과 멸(滅)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四聖諦) 또는 줄여서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事實,fact)·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諦)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四聖諦,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괴로움의 집(集)·괴로움의 멸(滅)·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도(道)의 네 가지 성제(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 15>

    "뭇 교설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된다."<중아함 卷7 상적유경>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聖諦)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고(死)·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卷7 분별성제경>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生)·노사(老死)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苦蘊: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聖諦)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직지하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탐애(愛貪,chanda-raga)' <잡아함 卷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락착(樂着,abhinandin)하는 애(愛,trsna)"<잡아함 卷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色)은 희애(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受)·행(想)·행(行)은 촉(觸)이, 식(識)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卷2> 괴로움의 집(集)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苦聖諦)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集)이라는 개념의 최승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한다(udaya)'는 뜻으로서, '모은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緣起)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集)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둘째 번 성제(聖諦)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聖諦)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滅諦)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聖諦)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八正道)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가리킨다.

    4. 삼법인

    일체는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라고 석존은 단정하신다. "색(色)은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卷1>

    일체의 속성에 대한 이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의 특성(dharma-laksana)'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涅槃)은 고요함(寂精)'이라는 항목을 보태 삼법인으로 할 때가 있다.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卷10> 또는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아함 卷18>

    그러나 불교의 초기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라는 맨 처음의 형태이다. 이제 이 삼법인(三法印)의 각항을 고찰해 보자.

    1).일체무상

    인생으로서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有爲四相)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불사영생(不死永生)을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變)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과 같은 물질적 요소는 어떨까? 순세파(順世派)와 사명파(邪命派)에서는 이것을 불변적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그것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하신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원소가 원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에너지(energy)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jiva)이나 자아(atman)와 같은 것은 어떨까? 대개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비록 사멸하여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또는 다른 몸을 만나 재생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불변의 존재일까?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자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불교의 오온설을 살피는 곳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의 자아(atman)나 생활파의 명(命,jiva), 이계파의 영혼(jiva) 등은 모두가 오취온설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기에 석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불변적 아체(我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그들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렇게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 卷3>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말하는 자아나 사문들이 말하는 영혼도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취온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색온인데,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니, 오취온의 무상성은 재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발생시키는 인(因)과 연(緣)이 벌써 무상(無常)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색(色)이 어찌 유상(有常)하겠는가.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러하다.
    "<잡아함 卷1>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이처로부터 사대·오온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항구 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sarvamanityam)."고 석존은 단언하신다. 이 단안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성구(成句)로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말 속의 '행(行,samskara)'은 오온 중의 행온(行蘊)을 가리키는데 무상한 세계 속에서 개체를 유지하려는 행의 작용이야말로 무상함을 가장 실감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이렇게 덧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의 임종을 보며 生의 덧없음을 느끼고, 고대문명의 유적을 보며 하염없는 탄식을 보낸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탕에서부터 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바라문이나 사문들까지도 그러지 못하였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유상(有常)하다고 본다. 백 년이나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재산과 권력과 명예는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착(貪着)과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일생동안 남에게 선심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깊은 회한 속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의 무상설(無常說)은 중생들의 이러한 뒤바뀐(顚倒) 착각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코자 하면 먼저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일체무상(一切無常)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2).일체개고

    삼법인의 둘째 항목인 '일체는 괴로움(dukkha)'이라는 단안은 첫째 항목의 판단이 성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석존은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라고 설하신다.<잡아함 卷1> 불교의 이런 단안에 대해서, 세상에는 그렇게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젊고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거기에 금상첨화로 미워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구하는 바를 얻을 때 그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에 있다. 영원히 머물어만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영원히 머물어 주지 않는 곳에, 다시 말하면 무상한 곳에 불안과 서글픔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라.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저 불행한 사람들을 보라. 그러한 불행이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운 것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느낌(受)에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그 중간(不苦不樂, 捨)의 세 가지가 있다. 삼법인설에서의 괴로움은 이 중에서 괴로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중간의 느낌까지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 그러냐면 그들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면, 이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뒷일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하며 괴로워할 필요는 무엇인가.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현재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김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무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즐거움이 느껴지고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즐거움을 그렇게 즐거움으로 볼 수가 있을까? 인간실존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오취온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금 그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취온의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색온(色蘊)은 항구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四大要素)가 이미 무상한 것이므로 그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분산하려는 무상성(無常性)을 지니고 있다.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사온(四蘊)은 이런 색온에 입각해서 개체를 지속하려는 비물질적(정신적)인 노력이며 그러한 노력의 중심은 행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몹시 힘이 들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死). 괴로움(duhkha)이라는 말은 원래 '힘이 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실존을 그 밑바탕에서부터 관찰할 때는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석존은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신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세상에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은 괴로움이다.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은 괴로움이다."<증일아함 卷17 사체품>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 가지 괴로움을 들 때가 있는데,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은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가리킨다. '행의 괴로움(行苦)'은 개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온(行蘊)의 괴로움을 뜻하고, '부서짐의 괴로움(壞苦)'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상 부서지게 되는 죽음의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오취온을 중심으로 해서 괴로움의 종류를 구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를 현실부정적 염세종교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괴로움의 교설을 보고 그러한 자신들의 견해를 더욱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보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그러나 불교의 입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실존이 만일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입각해서 생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나 진실에 미치지 못한 천견(淺見)을 석존은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3).일체무아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잡아함 卷3>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인 범(梵,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說)에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常一性)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主宰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實體,mama atman)'라고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없다. 귀·코·혀·몸·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卷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色)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오(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잡아함 卷1>

    석존은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오, 이것이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 수(受)·상(想)·행(行)·식(識)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卷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六根·四大·五取蘊)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常一)·주재성(主宰性)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實體)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나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판단은 이 무아설(無我說, an-atma-va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사상(atman-va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철학사상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석존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一切行)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卷10>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존은 "나에 의지하고 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나의 主人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라."<법구경>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석존의 뜻이 참다운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마친 석존은 우루벨라(Uruvela)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잠기신 일이 있었다. 이 때 마침 그 부근에 남녀쌍쌍으로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유녀가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난 일이 생겼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그늘에 안좌한 석존을 보고, "혹시 그런 유녀를 보시지 않았는가?"하고 물었다. 이 때 석존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계신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 <사분율 卷32>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음 절에서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5. 연기설(緣起說)

    석존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연기(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불타(佛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 교설들은 모두 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연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근본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사상은 근본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기대승, 중기대승에 있어서도 항상 불교의 중심문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기대승은 물론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전한 불교에서도 각각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고찰되고 있다.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일체의 사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성립한다고 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나 그것을 둘러싼 세계는 모두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근본불교에 있어서 연기의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하나의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기설이란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것이 어떤 것의 결과가 된다고 하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연기의 정의를 나타낸 귀절 중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원만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얼어난다’고 하는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연기에 의한 현상간의 관계방식에 대해 상세한 고찰은 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불교에서는 그에 대한 여러 각도에서의 고찰이 행해져 왔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

    6. 십이연기

    1).십이연기설의 내용.

    제법(諸法)의 실상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지혜(智慧,prajna:般若)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온 일체의 구조(十二處·四大·五蘊)와 속성(三法印), 인과(因果), 인연(因緣), 상의상관(相依相關), 법칙성(法則性) 등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法則性)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明)'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明)의 유무(有無)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無常)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해답을 우리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명(明)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avidya)'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無明)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行)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 발생)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 卷15>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열 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제 그 형성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무명(無明, a-vidya)'은 명(明)이 아닌 것(非明) 또는 명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재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또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라고 말할 수도 있다.

    ② 이러한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것을 연(緣)하여 '행(行,samskara)'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대학자들 속에는 그 말을 형성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이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業)이라고 볼 수 있다.

    ③ 행(行)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 곳에 '식(識, vijnana)'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識)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 곳에 분별(分別)하는 인식(認識)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④ 식(識)을 연하여 '명색(名色,nama-rupa)'이 일어나는데,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名)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온설(五蘊說)로 설명하면 색온(色蘊)은 색(色)에, 수(受)·상(想)·행(行)·식온(識蘊)은 명(名)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색(名色)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形色)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다.

    ⑤ 이렇게 명색(名色)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 sad-ayatana)'가 일어난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귀·코·혀·몸·의지의 육근(六根)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인간 실재(六根)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五取蘊)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名色:五蘊)의 다음에 육처(六處)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⑥ 육처(六處)를 연하여 '촉(觸,sams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위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⑦ 촉(觸)에 연하여 '수(受,vedana)'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자가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⑧ 수(受)를 연하여 '애(愛,trsna)'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thirst)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所知障)요, 애는 마음(心)을 염착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⑨ 애(愛)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취(取)라는 술어는 오취온설(五取蘊說)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인데, 거기에서도 오온(五蘊)을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⑩ 취(取)를 연하여 '유(有,bhava)'가 발생한다. 유(bhava)라는 말은 'b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인데 '있다(be)'·'된다(be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계(三界)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⑪ 유(有)에 연하여 '생(生,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는 뜻이다. 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위에서 살폈는데, 유가 그렇게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⑫ 생(生)이 있으므로써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는 바로서 다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곳의 생(生)과 사(死)는 육체적 생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생사 다음에 우(憂)·비(悲)·뇌(惱)·고(苦)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온(蘊)'이라는 술어는 오온설(五蘊說)에 등장했던 말로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한 온(蘊)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삼법인(三法印)의 괴로움을 소개하는 곳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집(集,samudaya)'이라는 말이 새로 나오고 있는데, 이 술어는 다음 장의 사제(四諦)를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한 설명이 따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발생'을 뜻하는 불교 술어의 일종이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 요는 무명(無明)이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생사(生死)라는 중생의 괴로운 존재방식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無明)의 멸진(滅盡)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無明)이 멸(滅)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내지(乃至)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12>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dva-dasa-anga-pratityasamut-pada)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라고 부른다. 십이지(十二支)는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에 이르는 지분(支分,anga)이 열 둘이기 때문이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연(緣)하여(prati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인데, 각 지분(支分)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蘊)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無明)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緣起)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無明)의 멸에서 생사(生死)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이 십이지연기설(十二緣起說)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명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眞理)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 실존(實存)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존은 오랜 각고의 구도求道)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존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주고 있을까. 연기(緣起)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석존이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緣起)의 법(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오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法)은 무상(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으므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으므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無明)이 멸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12>

    석존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i-buddha)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했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제수 아래서 십이연기 순(順)·역(逆)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설해져 있다.<잡아함 卷15> 순관(順觀)은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順逆)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逆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卷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生死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逆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順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生死의 발생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 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卷46>

    십이연기설은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또한 보여 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논(五蘊)·십이처(十二處)·생사(生死)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因果)·인연(因緣)·상의상관(相依相關)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2).십이연기설의 음미.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선 그 가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無明·行)·현재(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미래(生·老死)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해 현대 불교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緣起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 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7.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

    근본 불교사상은 당시 인도사상과 비교할 때 거기에는 불교사상이 인도 일반의 사상과 공통되는 점도 있고, 인도의 다른 사상에서 보이지 않는 불교 특유의 사상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시대 환경이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고, 후자는 시대 환경을 초월하여 불교라고 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사상을 성립시킨 것이다. 그 가운데 인도 일반사상과 공통된 것으로는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과, 수행해탈(修行解脫)의 사상이 있다.
    선을 행하면 행복한 결과가 오고 악을 행하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보사상이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에 이미 초기 우파니샤드 시대에서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설은 인도뿐 아니라 동서고금에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선이나 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끌기까지의 사이에 그것은 어떠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인가, 또 원인과 결과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하는 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업보사상에서는 원인과 결과와의 연쇄가 반드시 동일 인격내에 즉 자신에거 한정되는 것으로 스스로 행하여 스스로 그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자업자득의 원칙이 있다. 이 경우 원인으로서의 선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끄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연쇄는 전세(前世), 금세(今世), 내세(來世)라고 하는 삼세(三世)에 걸쳐서 행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선인은 사후에 천국락토(天國樂土)에 태어나고, 악인은 악계지옥(惡界地獄)에 떨어진다는 사고는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 발생 수백년 전 아타르바베다 시대부터 브라흐마나 시대에 걸쳐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윤회설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었다. 윤회설은 삼세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음으로 해서 여러 세계를 거쳐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 육도(六道)에 걸쳐 윤회한다고 한다. 이 윤회설이 성립한 것은 불교 발생 2, 3백년 전인 우파니샤드 시대라고 여겨진다.
    석존은 당시의 사문고 바라문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의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올바른 업보설을 채용하지 않고 그릇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고, 그 주장을 다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하였다.
    첫번째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된다.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악업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악의 행위를 하고 노력을 기율여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규정하는 원인을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다.
    세번째 결합인설(結合因說)은 이 세계 인생의 모든 것은 지수화풍 등의 몇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발생하고 그 결합 상태의 좋고 나쁨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결합상태는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확정되어 그것이 한평생 일정불변하게 존속하기 때문에 금세의 우리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변화시킬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합인설도 일종의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 계급인설(階級因說)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흑(黑), 청(靑), 적(赤), 황(黃), 백(白), 순백(純白)의 여섯 가지 계급으로 구별되어 있어,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성격, 지혜, 환경, 가계 등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숙명론으로 후천적인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번째 우연인설(偶然因說)은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사상계가 혼란한 당시의 인도에서는 위와 같은 여러 학설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인과업보의 설도 일반적으로 유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업보윤회설에는 많은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체념할 수 있는 소지도 많다.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행위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업보윤회설에 있어 불교의 특징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업 자체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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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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