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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19:03

부처님의 10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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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10대 제자

1.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舍利弗)

사리불은 생김새 또한 단정했을뿐더러 브라만교의 성전 4베다를 줄줄 외울 정도로 영특했다. 그는 이지적이었으며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색과 고정 관념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기성의 제도에 도전하는 일종의 반항아적인 청소년이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그는 절친한 친구 목건련과 함께 마가다 국 영축산에서 벌어지는 큰 축전인 산정제(山頂祭)에 참석하게 된다. 아마 그것은 일종의 종교 의례였던 모양인데, 두 소년은 번다하고 괴기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환멸을 느낀데다가 그 무의미성에 깊은 허무감에 빠진다. 게다가 제전이 끝나고 난 뒤 사람들의 발자취가 모두 사라지고 찬바람만 스산하게 이는 그 빈 공간에서 느끼는 적막감과 허무감이 조금전까지 떠들석하던 들뜬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무상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이지적인 두 소년은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 중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산자야(Sanjaya)의 문하로 출가하여 사문(沙門, sramana)의 길을 걷게 된다. 얼마 안 되어 이들은 산자야가 거느리고 있던 250명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섰다.
   육사외도란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정도(正道)가 아닌 이단의 가르침에 따르는 여섯의 무리들을 말한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사상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과감한 실험 정신이 펼쳐지던 제자백가의 시대였다. 이들은 형식적이고 제사 만능적인 정통 브라만교(Brahmanism)에 반기를 들고 베다나 우파니샤드의 권위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등 신(神)이나 아트만(Atman)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세도 없고 신도 없으니 마음껏 먹고 즐기자는 유물론적 쾌락주의에서부터 땅 위에 기어다니는 미물조차 밟지 않는다는 불살생(不殺生)의 아힘사(ahimsa)를 철저하게 고수하는 자이나교(Jainism)에 이르기까지 가히 새로운 사상의 모험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산자야 벨랏티 풋다(Sanjaya belatthi putta)는 그러한 육사외도 중 한 사람으로서 진리란 어떻게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회의론을 전개했다. 사실 우리들이 이성과 오감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입각지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등, 어느 곳 어느 때나 절대 부동의 사태 파악이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세계와 영혼, 삶과 죽음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산자야는 어떤 입장에도 서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나갈 뿐이었다. 그의 말은 '마치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따라잡기 어려운 이론'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입각지를 정하고 확실한 윤리 의식과 실천적 태도를 견지하기가 힘들었다. 회의를 위한 회의를 거듭할 뿐, 어떤 이론의 구축이나 재생산이 아예 없었다. 희랍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만을 일삼은 채 그런 놀이에 자신의 생명을 탕진했던 것이다.

  지혜로운 이의 발걸음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와 결별하고 누구든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 주기로 약속하고 다시 구도의 행각에 나섰다. 그러던 어느날 사리불은 한 수행자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부처님께 최초로 귀의한 다섯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앗사지(Assaji, 阿說示)였다.
  그는 가사를 단정히 차려 입고 발우를 들고 왕사성 거리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그 고고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하였다."
  '아마 이 세상에 참다운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그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사람에게 그 스승이 누구이며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리라.'
  사리불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앗사지는 자신은 석가모니불께 귀의했으며, 출가한 지 얼마되지 않아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모르나 그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가르침을 게송으로 읊었다.
  "모든 법은 원인에 따라 생겨나며, 또한 원인에 따라 사라진다. 이와같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우리 부처님은 설하시었다." (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如是滅興生 沙門說如是, <佛本行集經>)

  사실 이것은 인연의 도리에 따른 모든 것은 모여서 사라진다는 이치를 설명한 것인데, 이 대목에서 사리불은 그만 화들짝 놀라면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유신론적이거나 일원론에 입각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무적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 사물 간의 무아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유신론적이거나 일원론에 입각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무적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물과 사물 간의 무아의 이치를 통한 연기의 법칙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참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는 기쁜 마음에 친구인 목건련에게 달려갔다. 멀리서 그가 오는 모습을 보고 목건련은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매우 청정하며, 피부 빛은 아주 흽니다. 벗이여, 그대는 불사의 경지에 도달한 것 아닙니까?"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레 행동으로 절도 있게 배어 나오게 마련이다. 사리불이 앗사지를 보고서 '아, 저 사람은 성인임이 틀림없구나'하고 느낀 것이나 목건련이 진리를 깨달은 사리불의 모습을 보고 말한 내용에서 그런 정경이 잘 그려진다.
  목건련 역시 사리불이 전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 진리에 따르고자 굳은 결의를 하고, 다시 의기가 투합한 그들은 산자야를 따르던 무리 250명과 함께 석가모니불께 귀의한다. 이 일로 해서 부처님 교단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지혜의 일인자가 된 이유

  사리불은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아난(阿難) 존자가 교단의 전면에 등장하기 이전에 목건련과 더불어 부처님의 양대 제자로 손꼽힐 정도였으며, 부처님의 여러 제자 중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 제일(智慧第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사리불은 당시의 일반 철학이며 종교에 대해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만 승려를 비롯한 외도들과 대론하여 그들을 절복시켜 불교로 귀의시켰다. 부처님의 사촌 데바닷타(Devadatta)가 5백 명의 비구를 이끌고 부처님께 반기를 들었을 때도 목건련과 더불어 그들을 타일러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부처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장본인도 바로 그였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 사리불을 일컬어 "나의 장자(長子)"라 했을 정도다.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로서 사리불의 이러한 특징은 대승불교에도 그대로 이어져 그는 대승경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설하는 공의 도리를 깨우치는 상대역으로 무대에 나타난다. '유마경'에서는 유마거사가 사리불에게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충만한 제자였던 것이다. '법화경' 방편품에서는 앞으로 오는 세계에 깨달음을 이루어 그 이름이 화광여래(火光如來)라 불릴 것이며,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게 되리라는 수기를 받기에 이른다.
  사리불은 부처님보다 먼저 나라카 마을에서 춘다의 간호 아래 열반에 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으며 부처님은 80세. 그의 유골이 부처님 곁으로 돌아오자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애닯아했으며, 수닷타 장자는 탑을 세워 그의 유골을 안치하였다. 그로부터 200년 후 아쇼카 왕은 기원정사에 들러 사리불의 탑에 공양하고 10만금을 희사하였다고 전한다.

2.신통제일(神通第一) 목건련(目楗連)
   
사리불과 더불어 초기불교 교단의 쌍벽을 이룬 인물이 목건련 존자다. 좌 사리불 우 목건련이라고나 할까, 이 두 사람은 부처님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던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사리불과 목건련은  이지적인 청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가정 환경과 교육 수준, 그리고 아름다운 우정으로 언제나 자리를 함께했으며,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도 학문과 인생,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서로 진지하게 토론해 가면서 구도의 길을 걸었다.

  목건련은 마가다 국 왕사성 근처의 콜리타(Kolita)라는 마을의 한 부유한 브라만 사제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도 역시 콜리타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의 어릴 적 이름도 역시 콜리타로 불렸다 한다. 그는 유복한 가정 환경과 바라문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특권, 그리고 영민한 두뇌로 4베다를 비롯해 당시 고도의 학문 세계를 훌륭하게 학습하였다.
  사리불과 함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선 콜리타는 모계(母系)의 성(姓)을 따서 마우드갈라야야나(Maudgalyayana)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음역이 목건련(目楗連) 혹은 목련(目連)이다. 그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온 후 맹렬하게 수행한 결과 진리를 깨닫고 십대 제자의 반열에 끼게 된다. 열명의 제자 중 목건련의 두드러진 특기는 신통력이었다.
  그는 신통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날아 다니는 물체를 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증일 아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나의 제자 중에 신통 제일은 목건련이다."라고 하셨다.

  신통력의 진정한 의미

  사실 신통력이란 요가 등의 선정 수행으로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다 보면 생겨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부처님 역시 이 신통력을 획득했다. 신통력에는 모두 6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를 일러 육신통(六神通)이라 한다.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이 그것이다.
  천안통이란 가시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멀리까지도 볼 수 있을  뿐더러, 일상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뛰어넘은 세계마저 보는 눈이다.
  천이통이란 천안통의 신비한 능력처럼 듣는 데 뛰어나고 비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소리를 다 듣는다.
  타심통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차리는 능력이다.
  숙명통이란 인간의 과거 운명을 꿰뚫는 능력을 말한다.
  신족통은 생각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고 마음 먹은 대로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는 신통력이다.
  마지막으로 누진통이란 번뇌를 모두 끊어 사바 세계에서 결코 고통을 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러한 6가지 신통력 중 누진통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는 다른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도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따라서 누진통을 통과한 다음의 신통력과 그렇지 못한 신통력에는 차이가 있다.
  번뇌를 끊지 못한 자의 신통력은 잘못 쓰여 혹세무민하는 삿된 길을 조장할 수 있다. 그러한 폐해를 막고자 부처님은 신통력의 사용을 자제시킬 정도였다.
  목건련은 육신통을 적절하게 발휘하여  포교와 부처님 교단 유지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사실 오늘날도 신통력이 미치는 불가사의한 힘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마당에, 아주 먼 그 옛날 인지가 발달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신령스러운 능력이 끼치는 사회적 파장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건련은 오직 중생을 교화하는데만 신통력을 쓸 뿐 삿된 목적으로 악용한 적이 없었다.

  우란분절과 목건련

  목건련은 효성 또한 지극했다. 중국에서 찬술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를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효자 역할을 충실히 한다.
  목건련의 어머니는 출가 사문을 비방하며, 미신을 믿어 축생을 함부로 죽여 귀신에게 바치고, 바른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효심이 지극한 목건련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신통력으로 천상계와 인간계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옥계를 돌아보자, 느닷없이 거기서 아귀도의 굴레에 묶여 고통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아귀란 배는 남산만큼 큰데 입은 바늘구멍만큼 좁아 배가 고파도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중생을 말한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음식을 장만해서 지옥계로 내려가 어머니를 먹이려 했으나, 순간 갑자기 아귀도의 고통을 받는 어머니 입에서 불길이 솟아나와 준비해 간 음식을 깡그리 태워 버렸다.

  목건련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그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별 도리가 없음을 직감하고 부처님께 도움을 청한다.
  "네 어머니의 죄가 너무나 커서 너의 신통력으로도 구제할 방도가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출가 사문들이 하안거를 마치고 자유스러운 수행에 들어가는 음력 보름 7월 15일에 시방의 여러 부처님과 사문들에게 진수성찬과 그 해에 농사 지은 신선한 햇과일들로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인해 일곱 생  동안의 선친과 현세의 부모들이 모두 재앙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들은 장수와 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을 듣고 그는 스 님들께 공양을 올려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구해내게 되었다.

  이 '우란분경'의 가르침으로 오늘날도 우리 사찰에서는 돌아가신 선조들을 천도하는 우란분재(盂蘭盆齋)가 열리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올리며 사자(死者)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천도재(薦度齋)를 우란분재라 한다.
  우란분재는 다른 말로 백중(百衆) 또는 백종(百鐘), 중원(中元)이라 불리면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 명절로 자리잡아 왔었다. 백중 혹은 백종이라는 말은 100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께 공양을 올려 저 세상으로 간 부모님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법회에서 나온 것이다.(우란분(盂蘭盆)은 음식을 담아 공양하는 쟁반(盆)이라는 뜻도 있다.)
  이러한 우란분재 행사가 중국에서 찬술된 '우란분경'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목건련의 지극한 효성이 그 만큼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사리불과의 우정

  목건련 역시 사리불처럼 부처님 대신 설법할 정도로 부처님의 신뢰를 받았다. 장아함 제1 '대본경'에서는 말한다. "나에게 두 제자가 있는데, 첫째는 사리불이요, 둘째는 목건련으로서 모두 제자 중에 제일이다."
  또한 목건련은 사리불과 더불어 부처님을 배반한 데바닷타의 무리 500명을 부처님 품안으로 귀의시키는 등 부처님 법을 널리 펴는 데 매진했다. 심지어 그들이 한때 포교의 길을 떠나 1년 이상 정도 걸리는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갔다고 했으니, 둘 사이의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진리를 전하려는 그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목건련은 불행하게도 포교의 길에 나서다 난폭한 이교도에게 매를 맞아 순교한다. 신통력이 으뜸인 그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첫 번째 그런 위기에 접하여 신통력으로 죽음을 모면했지만, 두 번째는 이것이 자신의 업인 줄 알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목건련이 이렇게 비명에 저 세상으로 떠나자 그와 절친했던 사리불도 "목건련과 함께 입멸을 맞고 싶다."고 부처님께 간청할 정도로 애절해 하다가 이승을 떠난다.
  석가모니는 이렇듯 아끼는 두 제자를 보내고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한다.
  "비구들이여, 사리불과 목건련이 세상을 뜬 후 이 모임이 텅빈 것 같구나. 그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쓸쓸하기 그지없구나."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간 이들 두 제자를 예를 들어 자기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수행해 나갈 것을 당부한다.
   "커다란 나무가 있어 때로는 그 가지 몇 개가 먼저 시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두 사람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상응부 경전)

3.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
   
영축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들으려고 숨소리마저 죽이고 앉아 있자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인다. 그때 좌중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제자가 조용히 미소를 보낸다.
  그가 마하가섭 존자다. 그는 부처님이 꽃을 들어보인 마음을 읽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말 없이 미소지은 것이다.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일컫는 염화시중의 미소는 이 두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잉태되어 생명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선(禪)의 커다란 동맥으로서 염화시중의 미소는 거듭거듭 선의 길을 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말없이 건내져 오늘날 또 한점의 미소를 이 시대의 눈밝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제6칙 '세존염화'에서는 이심전심의 미소 뒤에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는 모습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제 진리에 대한 바른 안목과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과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테두리를 넘어선 가르침(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부처님이 선을 마하가섭에게 전했다는 이 일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가섭 자신의 이론을 초월한 직관적 깨달음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부처님과 그 사이의 긴밀한 일체감을 잘 암시해 주고 있다.

  걸림없는 두타 행자

  마하가섭은 마가다국 왕사성 마하사타라 마을의 핍팔라(pippala)라는 나무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므로 그 어릴적 이름이 핍팔라야나(pippalayana)라 했으며, 그가 속한 종족이 마하카샤파(Mahakasyapa)였으므로 훗날 마하카샤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음역이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핍팔라 나무는 칠엽수(七葉樹)로 그 부근에 굴이 있어 핍팔라 굴이라 했는데, 이곳이 제1차 경전 편찬 장소로 유명한 칠엽굴(七葉窟)이다.
  그의 아버지는 왕사성 제일의 부호인 느야그로다(Nyagrodha) 브라만으로서, 마하가섭은 브라만 계급의 여자와 결혼하여 12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지낸 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가업을 넘겨받아 일가의 가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세속적 생활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부처님 교단으로 아내와 함께 출가한다. 그는 영특한 기질을 타고 났음인지 부처님 곁에서 수행한 지 불과 8일 만에 아라한의 지위에 다다르게 된다. 그 후 가섭은 자신의 가사를 부처님께 바치고 대신 부처님이 입던 분소의(糞掃衣)로 갈아 입고 두타행의 길을 간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 두타(dhuta)에서 나온 말로 번뇌를 털어 내고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수치(修治) 또는 기제(棄除)라고 한역되었다. 바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불교 수행의 원형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두타행을 12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다.

  1)조용한 곳에 거주한다. 2)항상 걸식한다. 3)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4)하루에 한번만 먹는다. 5)과식하지 않는다. 6)정오 이후에는 과즙이나 설탕물을 마시지 않는다. 7)헤지고 헐은 옷을 입는다. 8)삼의(三衣)만 소유한다. 9)무상관을 체득하기 위해 무덤 곁에 머무른다. 10)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버리기 위해 나무 밑에서 지낸다. 11)아무것도 없는 한데 땅(露地)에 앉아 좌정에 든다. 12)항상 앉아 있으며 눕지 않았다.

  훗날 이러한 두타행은 산야와 세상을 순역하면서 세상의 온갖 고통을 인내하는 행각으로 변하는데 마하가섭은 이러한 두타행을 실행하는 데 으뜸이었다. 그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간소한 생활로 일관했다.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금욕 생활은 그의 사문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성문 제자로서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 두타행을 모두 다 구족한 사람은 바로 장로 마하가섭 비구이니라"라고 했다.

  부처님의 마음을 세 곳에서 전해 받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 즉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할 때의 일이다. 마하가섭은 오랫동안 아란야(aranya: 조용한 수행처)에서 수행한 결과 머리는 길게 자라 헝클어지고 수염은 한참 깎지 않아서 무성한 데다가 옷 또한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어느날 그가 멀리 숲속에서 부처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비웃고 깔보았다. 세존은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 차리고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가섭이여. 내가 앉은 이 절반의 자리에 앉으시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그를 일러, 나와 같은 선정에 머무르고 있으며 나와 같이 번뇌가 다했으며, 나와 같이 지혜를 갖추었으며, 나와 같은 광대하고 훌륭한 공덕을 갖추었노라고 칭찬했다.(잡아함 제41권 <납의중경(衲衣重經)>)

  이러한 사연은 다자탑전 반분좌(多子塔前 半分座)라는 선(禪)의 고사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그 잔상을 해맑은 물결 위에 아련하게 흘려놓고 있다.
  부처님이 중인도 북쪽에 있던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남루한 차림으로 마하가섭이 그 자리에 늦게 도착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반쯤 내어 주어 같이 앉는 것이었다.
  부처님과 마하가섭 사이에 말없이 이어지는 긴밀한 교감은 다음의 일화에서 신비로움의 극치를 달린다. 부처님은 80세을 마감하시고 사라 쌍수 밑에서 조용히 열반에 잠겨 법신(法身)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열반하시는 모습을 못본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흐느껴 울자, 부처님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였다.

  이 이야기를 간결하게 표현해 주는 언어가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이다. 우리는 부처님과 가섭 사이의 이러한 말을 떠난 상징적 대화에서 죽은 이와 산 자를 갈라놓는 죽음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이심전심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축산에서 가섭에게 꽃을 들어보인 일을 시작해서 다자탑과 사라 나무 아래의 세 장소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보였다 하여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마하가섭의 뛰어난 선적 직관은 아마 그의 철저한 수행, 즉 두타행의 소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기 선종의 역사를 일군 중국 선사들의 가슴 속에는 그의 두타행이 고스란히 살아서 움직였다. 중국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 입적 직후 초기 선종의 구도자들은 북부 중국을 중심으로 일정한 선원이 없이 두타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전을 편찬하다.

  마하가섭은 부처님께서 입멸에 들자, 그분의 말씀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경전을 편찬하는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앞서 마하가섭과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늙어 나이가 들어 80이 다 되었다. 그러므로 이 법을 너희 두 사람에게 부촉한다. 잘 기억하여 외워서 가르쳐 끊어지지 않게 하고 세상에 널리 펴야 한다. 성문 중에서 가섭과 아난, 너희들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증일아함 권35)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마하가섭은 자신의 고향인 왕사성 칠엽굴에서 최초로 경전 편집에 나선다.(이것을 제1차 결집이라 한다.) 부처님 말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이후 교단의 실질적인 통솔자가 없어지자,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혼란을 불식시키고자 교법을 통일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려는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전 편집 장소를 그가 태어난 고향으로 정한 데서 그러한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전 편집에 따른 재정적 지원으로서 당시 아사세 왕의 후원을 받았다고 하나 이는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가섭 본가의 재력이 동원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최완수 선생은 말한다.
  사실 여러 경전에서는 그가 일체의 재산을 다 버리고 출가하여 철저한 두타행을 했다는 증거가 여실하게 보이나, 그가 버린 재산은 항상 그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경전 편집의 일대사 인연을 펼쳤다는 것이다.

  내막이야 어쨌든 마하가섭은 수행승 중에서 대표자를 모아서 그들이 기억한 교법을 표현하게 한 다음, 그 교의(敎義)를 통일하는 편집회의를 열어 교의의 산실을 막고 교권을 확고하게 확립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편집이란게 문자로 써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곁에 항상 머물렀던 아난 존자가 부처님 말씀을 기억해 내서 외우면 거기에 참가한 500제자가 그 말에 동의를 표현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 정리해 넣는 식의 편집이었다.
  혹자는 그 방대한 경전을 외워서 기억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구도의 길로 나서는 인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도 베다며 우파니샤드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다.
  오늘날 전하는 500나한도는 이때 모인 5백명의 아라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거기에서 마하가섭의 모습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염화시중의 광경을 그린 불화나 그 밖의 석가모니 후불탱화에서도  마하가섭은 백발이 성성한 데다 길고 흰 수염이 나부끼는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4.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阿那律)
   
영원한 비구의 표상

  바람직한 수행자상의 모범을 제시한 부처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뽑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아나율 존자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번뇌를 여읜 청정 비구의 모습으로서 걸림없는 삶을 살았다. 천안제일이라는 그의 별칭도 그의 이러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아나율 존자의 산스크리트 명은 아니룻다(Aniruddha)이다. 여기서 니루다(niruddha)란 '멸하다' '떠나다' '끊어지다' '없어지다'라는 동사원형 '루드(rudh)'의 과거분사형으로 거기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 무멸(無滅), 불멸(不滅) 등으로 의역된다.
  그리고 아니룻다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형용사로서 장애가 없는, 내지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뜻에서 여의(如意), 이장(離障), 선의(善意) 등으로 의역된다. 아나율(阿那律), 아니루다 등은 그 음역이다.

  아나율은 석가모니불의 사촌형제다. 말하자면 그는 부처님의 작은 아버지 감로반왕(甘露飯王)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아나율에게는 마하남(Mahamana) 이라는 형이 있었다. 어느 날 마하남은 자기 가족 중에는 출가한 사람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동생 아나율에게 출가를 권유해 보았다. 그러나 아나율은 형의 권유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형은 그렇다면 내가 출가를 할 터이니 너는 일가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복잡한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자 그때서야 석연치 않은 출가를 결심했다.
  형제가 아나율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어머니에게 요청하자, 어머니는 출가를 막으려는 속셈으로 이미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고 있던 사촌형 발제(跋提, Bhaddiya)가 출가한다면 허락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나율은 발제뿐만 아니라 아난, 우바리 등을 동반하고 출가를 감행하였다.

  석연치 않은 출가 때문인지 아나율은 출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는 그에게 진정한 회심의 순간이 다가왔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출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재가 신도들을 모아 놓고 기원정사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날 아나율은 설법하는 부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것을 본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도대체 출가한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호되게 주의를 주었다. 부처님의 이런 말 속에는 다시 한번 출가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멸찬 정진을 해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순간 아나율은 이제부터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면서 일 주일 동안이나 자지 않는 정진에 들어갔다. 그 결과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실명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명의(名醫) 지바카(Jivaka)에게 가서 치료받도록 명했다.
  그러나 아나율은 "부처님께 맹세한 것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하고 계속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실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지만 직관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꿰뚫어 보게 된 것이다. 미세한 사물까지 멀리, 그리고 널리 볼 수 있으며, 중생들의 미래에 생사하는 일도 알아내는 천안(天眼)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찰나찰나 사멸하고 마는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자유의 신통스러운 능력, 그 화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눈은 잃었지만 정신의 눈, 즉 영혼의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천안제일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일컬어 『앙굴리마라경』에서는 "아나율 같은 이는 천안이 제일이어서 참으로 공중의 새 발자국을 본다"라고 했다.

  수행자의 조건

  자, 이제 아나율의 흔들림 없는 수행자의 표상을 보여줄 차례다.
  어느 날 아나율 존자가 사밧티에서 코살라로 가는 도중 한 마을에 이르러 여인숙을 겸한 기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과부의 집에서 하루를 묶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 음심을 품고 격렬한 유혹의 숨길을 보내오자, 그는 단호하게 이를 물리친 데다가 교화까지 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출가 비구는 부인이 있는 집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나왔다고 한다.

  아나율은 8가지 수행자의 조건을 제시해서 그것을 구도자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팔대인념(八大人念)이다. 팔대인각(八大人覺)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대인 또는 대인이 되기 위한 8가지 마음가짐 내지는 그러한 각오라는 뜻인데, 대인이란 보살, 아라한 등의 위대한 성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알아보자.
 
  첫째, 지족(知足)할 줄 아는 마음가짐(知足者)
  둘째, 시끄럽지 않고 적정한 곳에 머무르는 마음가짐(閑居者)
  셋째, 욕심 없는 마음가짐(小欲者)
  넷째, 계율을 지키는 마음가짐(持戒者)
  다섯째, 생각이 고요한 마음가짐(三昧者)
  여섯째, 지혜로운 마음가짐(智慧者)
  일곱째, 많이 들으려는 마음가짐(多聞者)
  여덟째, 정진하는 마음가짐(精進者)
 
  아나율이 이러한 여덟 가지 위대한 인간의 조건을 제시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고귀한 일이며 또한 가장 뛰어난 일이라고 칭찬한다.(증일아함37권『팔난품』)
  아나율은 또한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인 교리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목건련 존자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러 덕목인 37각지(三十七覺支 ; 37菩提分法이라고도 한다.)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사념처(四念處)에 대해서 물었으며, 여러 동료 비구들도 그에게 역시 37각지에 포함되어 있는 칠각지(七覺支)에 대해서 설해 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사실 이 37각지에는 사념처를 필두로 해서 팔정도(八正道), 사섭법(四攝法),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설해져 있어 부처님 생존 당시 수행체계 전체가 모두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나율은 사념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신(身; 바깥 대상), 수(受; 감각기관), 심(心; 우리들의 마음), 법(法; 바깥 대상)은 각각 부정(不淨)하고 고통스러우며, 무상할뿐더러 무아라고 설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지 말고 그 부정과 긍정의 양극단을 떠나는 것이 정지(正知)요 정념(正念)이라고 설했다.(잡아함 제19)

  잡아함 제27권에서는 아나율이 칠각지에 대해서 비구들에게 설명한다. 칠각지란 우선 법의 진위(眞違)를 알아차린 다음[擇法], 그 진실한 법에 따라서 정진(精進)하여 참된 법에 대해서 기쁨을 맛보는 것[喜]이며, 마음을 가볍고 편안히 하고[輕安], 집착을 버리며[捨], 정신을 집중하고[定]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기능을 균등하게[念] 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할 모든 덕목을 빈틈없이 알고 있었을뿐더러 그것을 동료들에게 설해 줄 정도로 탁월한 지적 능력과 행동을 소유한 걸림 없는 비구의 표상이었다. 이는 천안을 가진 그 자신의 자연스러운 능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마음 또한 침착하고 의젓하여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시자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 하는 제자들의 안정처가 되어 부처님의 열반을 공표하고 그 뒷 수습을 맡았다.
  석굴암 십대 제자상에서 아나율은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네 번째로 등장하는데 눈에 이상이 있는 듯한 모습니다.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아 홀(笏)을 다소곳이 부여잡고 있는데, 그 홀의 윗부분이 아랫 입술에 닿아 있다. 그 조용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에 아나율 존자의 침착하고 의젓한 모습이 서려 있는 듯하다.

5.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阿難)
   
뛰어난 외모를 지닌 사문, 아난

  부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많이 듣고 기억하여 그 육성을 우리에게 전해준 주역은 십대 제자 중에서 아난 존자라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가슴엔 진리 추구에 대한 열기가 활활 타 올랐을뿐더러 기억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그 곁에서 끝까지 시중을 든 부처님의 사랑스러운 제자였다.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었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 사이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감로반왕(甘露飯王)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반왕(白飯王)이라고 밝히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얘기의 전개상 곡반왕의 아들로 해 두겠다.

  그는 싯다르타가 아직 정각을 성취하기 전에 태어났던 모양인데, 그의 아버지 곡반왕은 그 출생 사실을 사자를 시켜 싯다르타 태자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에게 알렸다. 정반왕은 그 말을 듣고는 "오늘은 대길(大吉)하도다. 바로 환희로운 날이구나. 그 아들의 이름은 마땅히 아난다(Ananda)라고 해야 하리라"하고 기뻐한다. 아난다란 바로 기쁨, 환희를 뜻한다. 그가 태어나서 기쁘니 그의 이름을 기쁨을 뜻하는 '아난다'라고 한 것이다. 환희(歡喜), 경희(慶喜)는 그 의역이며 아난(阿難)은 음역이다.
  아난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가 되어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8세였지만 석가족의 자연스러운 출가 분위기에 따라 사촌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교단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는 생김새가 굉장히 출중한 미남이었다. 얼굴은 둥근 달과 같고 눈은 푸른 연꽃과 같았다. 몸은 밝게 빛나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외모를 지닌 탓으로 그는 많은 여인들로부터 유혹을 받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예화가 『마등녀경(摩鄧女經)』에 잘 나타난다.

  어느날 아난이 걸식을 하러 우물가를 지나가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물을 길러 나온 젊은 여인이 아난을 힐긋 보는 순간 사지가 얼어붙는 듯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었다. 상사병이 걸린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아난을 남편으로 삼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수 없노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어미 마등가가 아난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자 그의 딸은 뛸 듯이 기뻐했다. 마등가는 현재 자신의 딸이 스님을 보고서 사랑에 빠져 누워 있느니 제발 딸의 소원 좀 들어달라고 간청했다. 들어주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까지 놓아가면서. 그러나 아난은 자신은 출가 사문이기 때문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노라고 거절하면서 위기의 순간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여성의 출가를 강력하게 천거하다.

  이러한 아난에게 불교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몇 가지 일이 벌어진다. 첫째 부처님의 시자로서 그 인류의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보필한 일이요, 둘째 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여 받아 낸 일, 그리고 경전 결집(結集)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이다.
  부처님은 정각을 성취한 후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해 나갔으나 점점 연로해져 가면서 그리고 점차 교단의 조직이 커지자 그를 옆에서 보좌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시자(侍者)라 한다. 여러 제자들은 그 시중을 들 적 격자로서 아난을 천거한다. 그러자 그는 세 가지 조건을 들어서 시자직을 수락한다.

  먼저 부처님께 보시된 옷이나 음식을 저에게 나누어 줘서는 안 되며, 제가 받은 보시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둘째, 부처님을 뵈러 온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거쳐 당신 앞으로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부재시에 하신 법문은 나중에 다시 들려 주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아난은 그 뒤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그 날까지 20여 년 동안 부처님을 곁에서 극진히 모시게 된다.

  그렇게 부처님을 곁에서 모시다 보니 그는 부처님 말씀을 빠짐없이 듣는다. 아니 어쩌면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모조리 듣기 위하여 시자직을 허락한 듯 그 설법을 듣는 데서는 가히 삼매의 경지에 오를 정도다. 등창이 나서 종기가 난 부분에 메스를 가했을 때도 부처님 설법을 들려 주자 그는 거의 아픔을 몰랐다고 한다.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그의 별명은 이렇게 부처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었을뿐더러 그 법문을 듣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성격이 다정다감한 그는 인간이 불성을 지닌 이상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서 여성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한다. 이는 여성을 하찮게 여기던 당시의 인도적 시대 상황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아난은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하는데, 놀라운 일은 유비가 제갈공명을 정치, 군사 고문으로 모시고자 감행한 삼고초려의 과정마저 뛰어넘는 네 번째 부탁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이다. 그 정경을 그려보면 이렇다.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왕자 시절의 싯다르타를 길러냈을뿐더러 당신의 부친인 정반왕을 극진히 모셨다.

   정반왕 사후 부처님이 카필라 성의 니그로다 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녀는 불문에 귀의하고자 찾아왔으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부처님은 카필라 성을 떠나 바이샬리로 거처를 옮겼다.
  마하파자파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부처님 뒤를 따라 다녔다. 발은 돌부리에 채어 피가 흘렀다.
  그렇게 그녀가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바이샬리로 오자 아난이 그 처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마하파자파티는 아난에게 자신을 비롯해 여성 출가를 부처님께 말해 달라고 애걸했다. 아난은 그 말을 듣고 세 번씩이나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부처님께 다시 물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성일지라도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한다면 성과(聖果)를 이룰 수 있습니까?"
  드디어 부처님은 침묵을 깼다.
  "그렇다, 아난아. 여인도 법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수행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허락받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교단의 질서를 위하여 여성 출가자들은 따로 여덟 가지 계를 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구니 팔경계(八敬戒)라 한다. 이 계율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진 않지만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여성 출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독일의 불교학자 폴커 초츠(Vilker zotz)는 이를 두고 여성들이 너무 많이 부처님의 비호 아래 속세의 억압을 버리고 떠난다면 '부처님 교단의' 전체 운동에 대해 공적인 반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와, 비구 공동체는 같은 소속의 여성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유혹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몇 가지 이유를 설득력 있게 거론하고 있다.

  경전 편찬 과정에서 벌어졌던 아난과 마하가섭의 갈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난의 가장 뛰어난 공적은 경전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교단의 통솔자가 없어지자, 교단에 혼란이 발생함에 따라 교법을 통일하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그래서 여러 갈래로 분산된 수행승들 중에서 대표자를 모아서 그들이 기억한 교법을 표현하게 한 다음, 그 교의를 통일하는 편집회의를 열어 교의의 산실을 막고 교권을 확고하게 확립시키게 된다.

  이것을 결집(結集)이라 한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 편찬 모임에서 아난은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을 외워 보인 뒤 거기에 참가한 500나한들의 지지를 받고 정식으로 경(sutra)을 성립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오늘날 경전의 첫머리에 상용구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은 바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전 편집 과정에서 애초에 마하가섭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해 참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참담한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 얘기인즉슨 이렇다.
  부처님 열반 후 마하가섭과 나머지 제자들은 다비를 마친 후에 왕사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난은 그곳에 남아 7일 간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하고 기원정사에 들러 불적(佛蹟)에 절한 후 최후의 공양을 하고 왕사성으로 갔다.
  그러나 아난이 그 경전 편찬 모임에 참여하려고 하자 마하가섭은 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그를 책망하고는 편찬 장소인 칠엽굴 출입을 금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난은 어떤 죄를 지었길래 경전 결집 장소에 참여 하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난 비운을 겪은 것일까? 그 죄목 하나하나를 나열해 보자.
  첫째, 여인을 출가시켜 정법을 500년이나 감퇴시킨 일. 둘째,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를 갤 때 발로 밟은 일. 셋째, 부처님 입멸 전 물을 찾으실 때 바로 드리지 않은 일. 넷째, 부처님께 수명 연장을 청하여 이 땅에 더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일. 다섯째, 부처님 입멸 후 음장상(陰藏像)을 여인에게 보인 일이다.
  이 밖에도 소소계(小小戒)가 무엇인지 자세히 묻지 않은 일, 불멸 후 여인을 막지 않아 불족(佛足)을 눈물로 더럽힌 일(『사분율』의 6죄)을 거론하는 경전도 있다.

  사실 이것이 아난이 번뇌를 끊지 못한 증거며 죄라면 어느 누구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어떤 근거에서 여인이 출가하여 불법이 500년 후퇴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소소계의 문제도 사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사소한 계는 버려도 좋다는 부처님 말씀에 아난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여쭈어 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그 수많은 계율 조항을 묻고 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물을 제 때 드리지 못했거나 부처님 수명 연장 등 시자직을 충실히 이행해 내지 못했다는 마하가섭의 아난에 대한 비난은 지극히 사소하며, 상식 밖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마하가섭은 아난을 곱게 보지 않았을까? 아난은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허락받아 여성 출가의 문을 열어 놓는데, 사실 마하가섭은 아난의 이러한 행동이 못마땅했으며, 그 결과 마하가섭은 비구니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경전 속에 묘사된 밑그림을 떠올려 보자.

  어느날 아난은 가섭과 함께 왕사성으로 걸식을 나가던 도중 때가 너무 일러 비구니 정사에 들르자 비구니들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하여 법을 청했다. 마하가섭이 법상에 올라 설법을 하는데 한 비구니 왈, "가섭이 아난 앞에서 설법하는 것은 마치 바늘 파는 애가 바늘을 만드는 집에 찾아가서 바늘을 팔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웃는다 (잡아함 권41).
  이 일이 있고 난 직후인지 모르지만 아난이 또 가섭에게 설법하기 위해 비구니 처소로 가자고 권유하자 가섭은 "너 혼자 가라. 너는 참 바쁜 모양이로구나"하며 언짢은 투로 말하는 구절도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난다.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자네는 아직도 미숙하다"고 책망하자 아난은 "가섭 존자이시여, 나의 머리카락도 이제는 잿빛이 되었는데 아직도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행동을 금해 주시오"라고 반박했다.
  이 대화를 듣던 한 비구니가 말한다. "전에는 이교도였던 자가 정통 제자인 아난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사실 위의 인용 구절에서 마하가섭이 여성 출가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시종일관 비구니들의 가섭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비구니를 싫어하는 그의 언행에서 그가 여성 출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여성 출가에 대한 불만 섞인 감정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비구승 전체의 입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대목들에서 아난과 마하가섭은 여성의 출가 문제로 의견 대립이 심했던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거기에다 두 사람 사이의 성격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하가섭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냉철할뿐더러 직관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면 아난은 모성적이고 다정다감하며 논리적인 성격의 소유자라 볼 수 있다.

  논리적인 무리를 감수하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지 않았을까. 마하가섭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전혀 상반된 입장에 처해 있는 아난이 부처님의 사랑을 받고 그 곁에서 시중 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부처님 사후 그는 노골적으로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을 토로한다. 그리고 아난의 굴복을 받아낸 뒤 그를 경전 편집에 참여시키게 된다.
  물론 경전상에는 아난이 번뇌를 모두 없앤 뒤 경전 편집에 참여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말이다.

  부처님의 사랑스러운 제자

  아난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애제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난이 부처님의 열반이 다가왔음을 알고 흐느껴 울자 당신께서는 조용히 말한다.

  "아난아, 슬퍼하지 마라, 탄식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가르치지 않았더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생겨난 것은 모두 사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난아, 그대는 오랫동안 내시자로서 지극하게 시봉해 주었다. 그것은 참 훌륭한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더욱 정진하여 하루 빨리 궁극의 목표를 실현하도록 하라.
  아난아, 혹 너희가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우리의 스승은 이제 안 계신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아,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아난아, 내가 설하고 가르친 교법과 계율은 내가 죽은 뒤에도 너희의 스승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아난 존자, 그는 아무도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부처님께 간청한 사실로 보건대 그와 부처님 사이에는 격이 없는 대화가 오갈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아난이 옳고 마하가섭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마하가섭이 그 나름대로의 누구도 갖지 못한 이심전심의 직관적 투시력과 카리스마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난은 논리적으로 이치를 추구해 나가는 합리적 판단력과 남에게 봉사하는 동체 대비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 형식 중 마하가섭과 아난 존자가 협시로 등장하는 양식이 있을 정도로 마하가섭과 아난이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막중하기 그지없다.
  석가모니불의 십대 제자상에서나 여러 후불 탱화에서 아난은 머리를 단아하게 깎은 젊고 용모가 바른 비구의 모습으로 부처님 우측에 등장하고 있으며, 마하가섭은 그 좌측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로 자리 잡고 있다.
  석굴암에서 아난은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向左〕 맨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두 손은 단정히 깍지를 낀 채 가슴에 대고 있으며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는 젊은 비구로서 옷깃을 세운 미남형 비구의 모습이다. 갸름한 얼굴, 단아한 이목구비, 상큼한 미소에서 단박 아난 존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6.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優婆離)
   
계율이란

  하나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 간에 해서는 안 될 원칙이라거나 약속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무너질 경우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만다. 부처님 초기 교단도 이와 마찬가지로 교단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규약이 필요했다. 그것을 계율(戒律)이라 한다.

  원래 계율이란 계(戒)와 율(律)이라는 두 가지 말의 합성어다. 계란 산스크리트 쉴라(slla)에서 나온 말로, 그것은 행위, 습관, 경향 등을 뜻하는데, 명상, 봉사, 실천을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스스로 행위하는 자율적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윤리적 행위 내지는 도덕을 강하게 내포하며 양심에 따른 행위를 강조할 뿐, 타율적인 강제 조항은 없다. 반면 율은 비나야(vinaya, 毘奈耶)에서 나온 말로 제거, 훈련, 교도 등을 의미하며 규칙, 규범, 규율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당사자에게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 타율성이 작용한다. 규율을 범할 경우 그에 해당하는 벌이 따른다. 요즘의 법률을 보면 그러한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다.
  요컨대 계율이란 양심의 소리에 의한 자율적 행위와 조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타율적 강제 조항이 섞여 있는 말로서 보다 원만한 공동 생활의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소승적 의미에서 계율이라 할 경우, 그것을 범할 경우 제재를 당하는 타율적인 금계적(禁戒的) 의미가 강하며, 대승적 의미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할뿐더러 적극적인 이타적 선행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계율에 대해서 우리가 떠올려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그것은 청허휴정(淸虛休淨) 스님의 말씀대로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율 준수는 수행자들이 아주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

  지금 소개할 우바리 존자는 계율을 지키는 데 있어 타의 모범이 되었을뿐더러 그 계율 조항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부처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노예 출신으로 부처님 교단에 입교한 대표적인 인물로 계급을 떠난 부처님 교단의 평등성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우바리의 산스크리트 명은 우팔리(Upali), 한역하여 우바리(優婆離)라 했다. 그는 노예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불경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인도 사성 계급 중 최하층인 수드라(sudra)출신으로 샤카 족의 이발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모시고 있던 밧디야(Bhaddiya), 아니룻다(Aniruddha), 아난다(Ananda), 난다(Nanda), 브리구(Bhrgu), 킴바라(Kimbara), 데바닷타(Dvadatta) 등 7인의 석가족이 한꺼번에 출가하면서 살림살이를 모두 그에게 넘겨주었다.
  우바리는 자신만이 천민 출신이라 출가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다음과 같이 마음을 굳게 다지고 출가를 감행하게 된다.

  '나는 본래 이들 석가족 아이들에 의해서 살아왔는데 오늘 나를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자 떠났다. 나도 차라리 그들의 뒤를 따라 출가하리라. 만일 그들이 얻는 바가 있으면 나도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바리는 그들 석가족의 사촌 형제들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왕자들은 출가에 따른 무소유와 평등 정신을 보다 철저하게 되새기려 했음인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사뢰는 것이었다.

  "......바라건대 우바리를 먼저 득도(得度)케 해 주십시오. 그 이유는 저희들은 교만한 생각이 많았으므로 그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바리가 제일 먼저 수계를 받고 윗자리에 앉게 된다. 출가 교단에서는 사성의 차별이 없고 대신 출가한 순서에 따라 자리를 정했기 때문이다.

  난다(Nanda)는 부처님의 이복 동생으로서 정반왕과 그의 이모 마하파자파티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 역시 수계를 받고 출가하여 먼저 출가한 사문들에게 차례차례로 예를 표해 오다가 우바리 앞에 이르렀을 때 예 올리기를 머뭇거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교단 안에서는 오직 수계 순서에 따른 전후가 있을 뿐, 귀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계급과 신분의 차별을 떠난 승가 사회의 평등성과 승가 사회만의 엄격한 규율을 살필 수 있다. 사성 계급의 차별은 거기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 교단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수행자의 길을 갔다. 게다가 그는 사회에서의 직업이었던 이발사의 기능을 살려 부처님의 머리를 깎아 주게 되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친히 전한 계율에 관한 사항을 꼼꼼히 기억해 내 거기에 따라 빈틈없이 행위한다. 그래서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 "나의 제자 중에서 지계 제일은 우바리이니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초기 교단에서 수계 의식은 삼귀의 내지는 오계(五械)에 대한 맹세가 전부였다. 그 삼귀의란 주지하다시피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귀의를 말하며 오계란 살생과 도둑질과 음란한 행위, 거짓된 말, 그리고 음주를 불허하는 다섯 가지 금계를 말한다.
  우바리나 여덟 왕자 모두 이 삼귀의 내지는 오계를 받아들이는 수계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불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 수계의 과정을 거쳐 출가 사문이 되는 것이다. 그 수계의 과정을 거쳐 출가 사문이 되는 것을 득도(得度)라 한다.

  그러나 맨 처음에 다섯 가지에 불과했던 계율은 승려들의 비행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금지 조항을 만들어져 계속 늘어나 최종적으로 비구 250계, 비구니 338계로 확정된다. 승려들의 비행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에 걸맞는 계율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범죄한 행위에 따라서 계를 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일러 수범수제(隨犯隨制) 또는 범계수제(犯戒隨制)라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바리는 부처님 곁에 늘 붙어 다니면서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계율조항을 빠짐없이 기억해 내고, 그것을 실천해 내는 데 당연 앞선던 것이다.
  그 결과 우바리는 왕사성 칠엽굴에서 벌어진 첫 번째 결정 결집 과정에서 율(律)을 빠짐없이 외워내고 500나한의 공인을 받아 율장(律藏)을 만들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바리는 불교 율장의 제1조로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 계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바리는 한때 인가에서 떨어진 한정처(閑靜處)인 아란야(aranya)에서 수행하고 싶어 했으나 부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교단 내에서 계속 수행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우바리여, 아란야로 들어가서 수행하기 알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아란야에 들어가서 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바리여, 그대에게 아란야는 걸맞지 않다. 그대는 교단 안에서 수행을 계속 하도록 하라. 그대는 그러는 편이 좋다."

  어떤 불교 학자는 진정으로 지계 제일이라고 불리는 자가 인가에서 동떨어진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수행한 사람이 아니라, 교단 안에 있으면서 수행한 우바리였다는 사실을 중요한 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불교는 도심 속으로 계속 내려오고 있는 중이며 도심 속에서 둥지를 틀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산중 사원의 스님들에게 알맞게 짜여진 계율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선원이며 우리 나라의 청규(淸規)도 따지고 보면 당시 중국 선찰의 자급자족적 승단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논을 갈고 밭을 일구는 것은 인도불교의 계율관에서 보면 분명히 계율 위반이다. 그러나 청규는 오늘날도 그 빛을 발하면서 선승들의 생활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계율의 제정이 한날 한시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제정된 것이라면 오늘날의 계율도 현대의 실정에 적합한 계율로 다시 정립되어야 하며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옛날에 인도 사회에서 제정된 계율을 오늘날 첨단 문화를 걷는 한국의 승가사회와 재가 신도들에게 고스란히 적용시킨다는 것은 마치 성경의 한 자 한 획도 바꿀 수 없다는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교조주의자들이다.
  "산업 사회적 기초 위에 농경 사회적 윤리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부자연스럽다"는 어느 철학 교수의 말을 곰곰 새겨 볼 일이다.

  율장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우바리 존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계율을 제정한 부처님이 오늘날 우리 곁에 오신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응답을 내리실까?
  이 자리에서 원효 대사가 말한 지범개차(持犯開遮)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계율의 조항에 얽매어 생기 발랄한 삶을 구속하기보다는 그 계를 지키고 범하며 열고 닫는 데 자재로워야 할 것이다. 지범의 행위보다는 행위의 주체로서 본성의 더러움과 깨끗함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에 고개를 약간 치켜 든 상태에서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간 매서운 인상의 비구가 우바리 상이다. 오른손으로 커다란 발우를 껴안 듯 들고 있는 당당한 모습에서 율사(律師)다운 면모를 읽을 수 있다.

7. 설법제일(設法第一) 부루나(富樓那)
   
법을 설한다는 것

  설법이란 법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법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납득시키는 매개체로서는 말 이상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때로는 말보다는 침묵이 그 이상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공공 생활에서 역시 일차적인 매개 수단은 말이다.

  불교는 말이 지니는 허위성과 그 일의적 기능 때문에 말을 떠난 자리, 그 궁극의 자리를 중요시한 게 사실이다. 궁극적 진리는 이성적인 논리의 전달 매체인 말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선에서는 급기야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 궁극적 진리에 오르기 위한 메개체로서 말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논리적인 말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부루나 존자는 그런 말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 뛰어난 부처님의 제자다. 그는 말을 구사하는 데 있어 가히 천부적이랄 수 있는 탤런트였는지 뛰어난 수사법을 구사하면서 물 흐르듯 가르침을 전한다.
  그의 본명은 푸르나 마이트라야니 푸트라(Purna maitrayani putra)다. 푸르나란 '충만된' '만족된' 이라는 뜻의 과거수동분사이며 마이트라 야니는 자애심이 깊다는 뜻의 마이트레야(maitreya)에서 나온 여성 명사이고 푸트라는 그 자식이란 말이다. 풀어보면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된 여성의 자식이랄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은 만자자(滿慈子), 만족자자(滿足慈子) 등으로 의역되었으며,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는 그 음역으로, 줄여서 부루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아함 제2 『칠거경(七車經)』에서는 "내 아버지의 이름은 만(滿)이고 내 어머니의 이름은 자(慈)이다. 그러므로 모든 범행자(梵行者)들은 나를 만자자(滿滋子)라고 부른다"라고 전한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최초로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귀의한 다섯 비구 중 최고참인 아약교진여(阿若橋陳如, Annatakondanna) 누이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두 가지 출가설

  부루나는 봄베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고대 무역항 수나파란타카(Sunaparantaka) 국 수파라카(Supparaka)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무역을 통하여 부를 많이 획득한 대부호였다. 그러나 부루나는 노비의 신분인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는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그는 해양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인도의 해상 무역업은 상당히 성행하여 멀리 메소포타미아까지 교역을 나갈 정도였다. 그는 상선을 타고서 장사를 하게 된 결과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웬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은 허전했다. 어느날 그의 배에 사위국 사람들이 승선했다.

  부루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듣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형에게 주고 사위국으로 달려갔다. 당시 사위국에는 기원정사를 부처님께 헌납한 수닷타 장자가 살고 있었다.
  부루나는 그의 소개로 부처님을 뵙고 무소유의 교단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불본행집경』에서 전하는 그의 출가 이전 생애와 출가 동기는 이와 다르다. 여기서는 그의 출생일이 부처님과 같은 날이었고 그가 태어난 곳은 코살라에서 카필라에 이르는 중간 마을 드놔바투였으며, 아버지는 정반왕의 국사로서, 브라만 신분의 큰 부자였다고 한다.

  부루나는 총명하여 베다는 물론 당시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갖가지 종교나 철학에 대해서 통달했다. 논리학, 언어학, 문법, 기예, 의학 등에 능통한 만물 박사였던 것이다. 부루나는 이렇게 다재다능한 재주를 지녔음에도 마음속에는 세간을 싫어하고 초세속적 해탈을 향한 욕구가 강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부모와 의논도 없이 친구 30인과 더불어 야반 도주하여 히말라야 산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치열한 고행과 수행 끝에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부루나는 신통력으로 부처님이 어디 계신가 관찰하던 찰나 몰록 녹야원에서 설법하시는 깨달은 이의 장엄한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그때 부처님은 법을 설하고 있었는데, 그만 그는 그 말씀에 자연스럽게 젖어들고 만다.
  자나 깨나 해탈도를 구하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나머지 벗들과 더불어 한 걸음에 부처님께 귀의한다.
  이러한 두 가지 부루나의 출가 이전 신분이며 그 고향, 그리고 출가의 계기에 대한 얘기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당혹스럽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그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하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언행일치와 인욕의 모범을 보여주다

  부루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제일(設法第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증지부 경전). 사리불도 그를 극구 칭찬한다. 사리불이 어느날 부루나에게 석존을 따라 범행(梵行, brama carya ; 청정한 행위)을 닦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현자여(사리불이여), 계행이 깨끗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함을 얻고, 마음이 깨끗함으로써 깨끗한 자신의 견해를 얻고, 그러한 깨끗한 견해로써 의심을 없앤 깨끗함을 얻고...... 지혜의 깨끗함으로써 사문 고타마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연설하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부루나님이여, 그대는 여래의 제자가 되어 행동하고 지변(智辯)과 총명함은 확고하고 안온하며 두려움이 없어 마음먹은 대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셨으니 큰 변재(辯才)에 통하셨습니다."

  신념에 차 있으며 논리적일뿐더러 설득력 있는 그의 달변은 올곧고 자신감 있는 행위에서 나왔다는 문답 내용이다. 그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영위해 나갔던 것이다.
  부루나는 약장수처럼 입만 나불거릴 뿐 진실한 행위가 없는 속빈 샐러리맨이나 논리게임에 놀아나는 현대의 지식인들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설법이 탁월한 부루나의 이러한 능력은 대승불교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유마경』에서 그는 유마거사로부터 한 방 얻어맞지만 『법화경』「오백제자수기품」에서는 그의 걸림이 없는 언설로 부처님 말씀을 잘 전해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푼 결과, 장차 법명(法明)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는다.

  너희들은 부루나미다라자니를 보았느냐? 나는 항상 설법하는 사람 가운데서 그가 제일이라 칭찬했을뿐더러 여러 가지 그의 공덕을 찬탄하였느니라.
  그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나의 가르침이 세상에 바르게 행해지도록 지켜 왔으며, 나를 도와 가르침을 잘 말해 주어 사부대중에게 가르쳐 보여 이롭게 하고 기쁘게 했다. 게다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해석하여 같은 범행자를 크게 이익되게 하였느니라. 여래를 제외하고는 그 언론의 변재를 당할 자 없느니라. (「오백제자수기품」)

  잡아함 권13『부루나경』에는 이러한 뛰어난 변재의 힘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잘 그려져 있다. 부루나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 민심이 몹시 흉악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들로 득실대는 수나파란타카 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부처님은 묻는다.
  "그들이 나무나 돌로 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칼을 가지고 해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칼로 상처를 입힌다면?"
  "그들은 지혜롭기에 그런 무기로 저를 해치기는 하되,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내 칼로 죽인다면?"
  "온갖 고뇌 때문에 칼이나 독물로써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 했던 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좋은 사람입니다."
  "훌륭한 일이로다. 너는 능히 인욕을 배웠으니 수나파란타카 국 사람들 사이에 머물 만하다. 너는 거기에 가서 제도 못 받은 자를 제도하며, 안심 못 얻은 자를 안심케 하며, 열반 못 얻은 자를 열반에 들게 하라."

  석굴암 제자상 중에서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세 번째로 등장하는 비구가 그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정병을 비스듬히 거머지고 있는 상태에서 왼손을 입 언저리까지 자연스레 들어올려 설법하고 있는 자신만만한 모습니다.

8.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
   
공(空)을 보는 눈

  지금 소개할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수보리 존자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그가 공(空)의 도리를 밝히는 데서 제일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사실 공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은 대승불교의 반야 사상인데, 그것은 초기 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대 제자 중 수보리의 위치는 대승불교권에서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수보리의 산스크리트 명은 수부티(Subhuti)로서 브라만 부티(bhuti)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기서 수(su)는 '잘' '훌륭히'라는 뜻의 부사로서 선(善)이라 번역되었으며 부티는 존재, 능력, 행복을 뜻하는 여성명사다. 게다가 '존재하다' '나타나다'라는 뜻의 동사원형 부(bhu)에서 파생된 과거수동분사 부타(bhuta)가 '존재하는, 현존의'라는 뜻이기에 수부티는 선현(善現), 선생(善生), 선업(善業), 선길(善吉) 등으로 의역되었다. 수보리 또는 소부제(蘇部帝) 등은 그 음역이다.

  이러한 이름과 관련하여 그의 용모가 단정하고 출중했다 하여 선현(善現)이라 했다는 설도 있는데, 후대에 들어서는 그의 탄생 사건 자체가 신비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수보리가 태어날 때 꿈을 꾸니 창고가 텅 비어 공생(空生)이라 하고, 일 주일 후에 다시 창고가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 선현(善現)이라 했다 하며, 그의 장래를 점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직 길(吉)하다 해서 선길(善吉)이라 했다는 얘기도 그렇거니와 『법화문구(法華經文句)』 제3에 "존자가 태어났을 때 집안에 있는 창고나 광주리, 상자, 그릇이 모두 비었기 때문에 공생(空生)이라 하였고 공행(空行)을 닦았기 때무에 선업(善業)이라고 이름했다"는 설도 그렇다. 아무래도 이러한 얘기는 대승불교권에서 공 도리에 뛰어난 그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또 하나 전한다.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나와있는 얘기다. 하루는 그가 먹을 것을 청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하녀가 이미 밥상을 치우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냈기 때문에 음식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수보리가 그 그릇 뚜껑을 열자 그 속에 음식이 가득차 있는 게 아닌가. 신기하게도 온 집안 식구가 다 같이 그것을 먹자 심신이 안온해졌다. 그러자 부모 형제들이 그의 비범함을 깨우치고 부처님과 보살들을 청하여 음식을 베풀었다. 그리소 난 뒤 수보리는 출가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되었단다.

  그런데 『장로게』의 주석에 따르면 그는 코살라 국에 부처님 가르침을 최초로 알린 수닷타 장자의 동생 수마나의 아들로 사위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수닷타가 기원정사를 부처님께 바치던 날 그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출가하는데, 부처님은 그에게 무공제일(無空第一), 혹은 소공제일(小空第一)이라는 칭호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 불전에서 공과 관련된 구체적인 그의 일화를 읽어내려 가면서 그가 파악한 공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자.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를 뵙고 석 달이 지난 뒤 사바 세계로 돌아오는 날이 되자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섰다.
  그때 수보리는 영축산 바위굴 안에서 옷을 꿰매고 있던 중 밖으로 나가려다가 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옷을 꿰매기 시작했다. '내가 서둘러 부처님을 맞이하러 가려고 하다니. 부처님의 형상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결국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원소이니 부처님께 예배하려거든 그 오온과 육근(六根)이 무상한 것이라 관해야 한다. 또한 그것들이 모두 공하며 무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무릇 일체의 법이 공적(空寂)하니 무엇이 나인가. 나는 지금 진실한 법취(法聚)에 귀의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계속 바느질을 했다.

  한편 제자들 중 우발화색(優鉢華色) 비구니가 제일 먼저 부처님을 뵙고 예를 올리면서 자신이 첫 번째로 예배를 올린다고 하자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한다.
  "우발화색이여, 그대는 매우 착하다. 그러나 제일 먼저 마중한 것은 네가 아니라 수보리다. 수보리는 모든 법이 다 공함을 관찰하여 여래를 예배하고 있다. 공무해탈문(空無解脫門)이 바로 예불이며 공무법(空無法)을 관찰하는 것을 예불이라 이름한다."(증일아함 권28)

  이 대목에서 보듯이 수보리가 파악한 공은 무아로서의 공뿐만 아니라 법에 대한 공도 포함되어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말하길, 나(我)는 오온의 일시적인 화합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므로 실체가 없어 무상하며 무아다. 반면 오온 각각은, 즉 법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그 오온 자체도 공하므로 나는 물론 법도 공하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천명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본 법에 대한 공은 후대에 가필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도리와 아주 유사한 개념, 즉 무아(無我)나 무상(無常), 내지는 연기(緣起)의 도리를 꿰뚫은 결과 궁극적으로는 공(空)을 깨우치는 데 으뜸가는 제자로 자리잡아 간 것으로 보인다.

  은둔자요 무쟁도의 일인자이며 능히 공양받을 만한 자

  대승불교는 공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촉구하여 그 공이 다시 현상으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대긍정으로 방향 전환을 한다. 반면 근본불교에는 이러한 대긍정으로의 방향 전환은 없다. 어떻게 보면 염세주의적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적극적인 행위 자체, 즉 업을 만드는 일을 꺼려한다. 근본불교의 공관(空觀)은 적어도 그렇다.

  그러기에 수보리 존자는 시끄러운 것보다는 고요를, 형상보다는 무상(無相)을 즐겼을 것이다. 아마 그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은둔적 페시미즘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증일아함 제3 「제자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옷을 즐겨 입지만, 행이 본래 청정하여 항상 공적을 즐기고 공의 뜻을 분별하여 공적의 미묘한 덕업에 뜻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은둔자 중에서 제일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고요한 곳에서 은둔한다고 해서 그가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숨어 지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보리는 사람들 속에서 생활할지라도 내면의 고요를 응시하면서 대립과 다툼이 끊어진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다툼이 없는 무쟁행(無諍行)은 바로 맑고 향기로운 행이요, 무아의 빛이 외면으로 비추어진 행이다.
  그래서 그는 무쟁도(無諍道)의 제일인자로서도 거론된다. 그런데 그 무쟁행에 관련된 그의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그의 신비한 탄생설과는 사뭇 다르다. 한번 소개해 보겠다.

  그는 총명하였지만 성질이 포악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이며 짐승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못살게 굴었다. 그 도가 지나치자 부모와 친구들도 그를 외면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산으로 들어가서도 마주치는 짐승이나 나뭇가지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산신의 도움으로 부처님을 뵈어 교화를 받고 출가, 이윽고 무쟁도를 깨닫고 무쟁제일자가 되었다. 출가 전의 난폭한 인물이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한 이후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수보리 존자는 조용한 곳에서 무쟁의 삼매를 닦아 모든 법의 공적을 관찰하여 은둔제일, 무쟁제일, 해공제일의 인물로 떠올라 마침내 공양을 받을 만한 모든 성문, 아라한 가운데서 으뜸이신 분, 즉 소공양 제일(小供養第一)로 찬탄받는다.

  이러한 수보리에게 하늘마저 감복했던 모양이다. 수보리가 우연히 왕사성에  갔을 때의 일이다. 빔비사라 왕이 그를 존경하여 작은 집을 지어 머무르게 했는데, 그만 지붕 이는 것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수보리의 덕력을 찬탄한 하늘이 그가 물에 젖을까봐 비를 내리지 않자 백성들이 곤경에 처했다. 이때 존자가 우러르며 말했다. "나의 작은 집은 잘 이어져 바람도 들지 않아 기분이 좋다.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라. 나의 마음은 잘 정주하여 해탈을 얻어 기분좋게 머무노니, 하늘이여, 비를 내려라." 그제서야 하늘이 비를 내리니 왕은 자신의 과실을 알고 다시 지붕을 이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증일아함에서는 이런 얘기도 전한다.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실 때 수보리 존자는 병에 거려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명상하고 있을 때, 제석천이 파차순(波遮旬)을 데리고 와서 문병하며 병환이 어떠한가를 묻는 광경이다.

  착하다, 제석이여. 모든 법은 스스로 생기며 스스로 멸한다. 또한 스스로 움직이며 스스로 쉬는 것이다. 마치 독약이 있으면 다시 그 독을 해독시키는 약이 있는 것처럼 법과 법은 서로를 어지럽히고 서로를 고요하게 하니 법은 능히 법을 일어나게 한다. 흑법은 백법으로써 다스려야하고 백법은 흑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이처럼 탐욕의 병은 자비심으로 다스리며, 어리석음의 병은 지혜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일체의 소유는 공(空)으로 돌아가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수명도 없고 형상도 없다. 바람이 큰 나무를 쓰러뜨려 가지와 잎사귀를 마르게 하고 우박과 눈이 내려 꽃과 열매를 망치게도 한다. 또한 비가 오면 시든 초목도 스스로 생기를 얻는 것처럼 법과 법은 서로 어지럽히다가도 다시 서로를 안정시킨다. 나의 아픔과 고통도 지금은 다 사라져 심신이 평안하다.

  이렇게 사물의 본성을 명확히 꿰뚫는 그의 탁월한 식견은 대승불교에 와서 확연하게 부각된다. 초기 반야계 경전의 정수이자 우리 나라 조계종의 소의 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金剛經)』에서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 공의 모습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하모니를 이루어 결국 깨달음이라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

  석굴암 십대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 수보리 존자는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의 두 번째로 등장하는 비구로 어깨가 올라간 구부정한 모습이다. 두 손을 턱 밑에 모아 왼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오른손을 덮어 독특하게 포개고 있는데, 은둔자로서의 그의 개성을 강조하려는 듯 잔뜩 웅크린 포즈다.

9. 논의제일(論議)第一) 가전연
   
논리적 해설이 의미하는 바는

  불경을 대별하여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으로 나눈다. 이 중에서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논은 그 말씀에 대한 해설이다.
  가전연 존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탁월한 논리적 분석력으로 간명하게 설한 부처님 말씀에 살을 보태고 피가 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논의제일(論義第一) 또는 분별제일(分別第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더불어 말을 하는 데는 논리적 구사는 필수적이므로 설법제일이었던 부루나 존자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굳이 설법제일인 부루나와 논의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이렇다.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한 사문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가전연은 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전연 존자의 산스크리트 명은 마하카차야나(Mahakatyana)로서 대가전연 또는 마하가전연으로 한역되었다. 그는 16대국 중 하나인 서인도 아반티(Avanti) 국의 수도인 웃제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크샤트리야 계급으로서 아버지는 아반티 국의 국왕인 악생왕(惡生王)을 보필하는 재상[보좌관]이었다고 한다.
  '장로게주(長老揭註)'에 의하면 그는 악생왕의 명을 받아 부처님을 아반티 국으로 초청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갔다가 부처님을 뵙자마자 그 인격에 감복되어 그대로 출가하여 왕을 불교에 귀의시키고 이어 많은 사람들을 출가시킨다.

  웃제니는 마가다 국에서 보았을 때 아주 먼 변방이다. 어느 정도 변방이었냐 하면 원래는 비구가 10명 이상 무리를 지을 때라야만 구족계(具足戒)를 주었는데, 이곳에서는 5명만 모여도 계를 줄 정도였다. 그렇다면 가전연은 자신의 고향인 변방에 가서 정확하게 부처님 말씀을 파악해서 전해 주려고 정확한 논리 훈련에 열과 성을 다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설법제일인 부루나도 변방 출신임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설득력있는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본행집경'에서는 가전연의 출신 계급이 크샤트리야가 아닌 브라만이며 부처님 성도 후 12~13년 지난 시절, 베나레스에서 출가하였다고 말한다. 그 사연은 이렇다. 그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서기 전에 외숙인 아시타 선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웃제니 성(城) 부근의 빈드야(Vindhya) 산에서 수도한 결과, 사선(四禪)과 오신통(五神通)을 얻고 산을 내려왔는데, 어느날 그가 베나레스 외각에서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거주하고 있을 때 부처님을 만나 뵙고 사문의 길을 가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아무튼 그는 총명한 머리로 명석 판명한 논리를 구사하여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는 데 걸림이 없었다. 사실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논리가 발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에 버금가는 오단 논법(전문 용어로는 五支作法이라 한다)을 탄생시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도구로 삼아 왔다. 그것을 인명론(因明論)이라 한다. 아마 그는 인명론을 충실하게 학습한 결과 논리적 기반을 공고히 다졌을 것이다.
  그래서 증일아함(제2 '지품(智品)')에서는 "뜻을 분별하여 진리를 펴는 데는 가전연 비구가 으뜸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같은 경전 제3 '제자품'에서는 그를 지칭하여 이렇게 말하다.

  "비구들아, 마땅히 알라. 나의 이 성문 대중 가운데 민첩하게 뜻을 취하고 많이 들어도 총민하기 때문에 모두 깨달으며 조금만 듣더라도 남을 위해 널리 분별해서 설하는 데 으뜸이 사람은 바로 대가전연 비구이니라."

  바로 가전연 존자가 언어를 분석하여 해설하는 데 있어 많은 분량의 내용을 듣더라도 그것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을 뿐더러, 설명이 거의 없다시피한 압축된 내용도 그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파악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구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아함 제28 '밀환유경(密丸喩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법을 설하시면 마하가전연은 그 법의(法義)를 잘 분별하였으므로 부처님의 칭찬을 받았다."
  "세존이 약설하신 설법을 비구들의 요청으로 광설(廣說)하였다."(증지부 경전)

  어째서 그는 논사(論師)로 불리었는가

  가전연 존자가 뛰어난 논리력을 구사하여 긴 것은 짧게, 짧은 것은 길게 자유자재로 부처님 말씀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하자 후기의 불교학파에서는 그를 뛰어난 논을 지은 논사(論師)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시간의 벽을 넘어서 그의 위치를 비약시킨 결과로 그것은 시대상 맞지 않는 설정이다. 즉 부파불교의 핵을 이루는 아비달마 논사들이 가전연을 자파로 수용한 결과 그러한 시대와 일치되지 않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에서는 자파의 근본 녹장인 육족론(六足論) 중 '시설족론(施設足論)'이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으며, '부집이론소(部執異論疏)'에서는 "대가전연은 부처님 재세 중에 논을 지어 분별하고 해설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심지어 용수(龍樹)의 저작으로 알려진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에서는 그를 일러 말하길, 부처님 말씀을 해설하여 '비륵(毗勒)'이라는 논서를 지었다 한다.
  이 책은 비유비공(非有非空)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역유역공(亦有亦空)의 도리를 설한 논서다. 유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을 천명하다가 다시 그 유와 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그 지점에 집착한 결과 그러한 집착마저 떠나라는 역유역공의 논리를 폈다는 얘기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대지도론' 권5에서는 '지도론(指導論)', '장론석(藏論釋)' 등의 논서들이 가전연의 작품으로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렇게 부풀어진 그에 대한 설명 속에서 우리는 그가 논의를 전개하는 데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부처님의 소중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가전연은 빈틈없는 논리를 바탕으로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탁월한 변재를 구사하여 중생 교화에 힘쓴다. 그는 뛰어난 포교사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먹을 것마저도 구하기 힘든 악조건으로 부처님도 꺼려했던 마두라로 포교의 길을 떠난다. 그곳 한 숲에서 가전연은 국왕 아반티풋타를 만나 사성(四姓)의 무차별을 설득력 있게 구사한다.

  국왕이 묻는다.
  "브라만은 스스로가 제일이고 다른 사람은 비열하다 하며, 브라만은 청정한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것은 말로만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업에 의한 것입니다."
  왕은 이해가 안 가는 듯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묻는다.
  "당신이 브라만으로서 왕이 되어 여러 계급의 사람들을 권력으로 다스리면 시키는 대로 말을 듣습니까?"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계급의 왕이 되어 시키면 백성들은 그 말을 들을까요?"
  "듣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계급의 사람이 왕이 되더라도 모두 왕의 말을 듣는다면 네 가지 종성은 다 평등한 것으로 차별이 없습니다. 또 브라만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왕은 벌을 줄 것이며 그를 도둑놈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은 차별이 없으며 평등한 것입니다. 바라문이 제일이요, 청정하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업에 의한 것입니다."(잡아함 권 제20)

  그야말로 기막힌 수사법이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 언변으로 인도 내 많은 지역을 불법으로 교화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호근 교수는 "사리불과 목건련의 입멸, 그리고 뒤이은 부처님의 입멸은 교단 내의 가전연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한다.

  가전연은 석굴암 제자상중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다. 왼손을 옷 속에 넣은 채 오른손을 올려 첫째, 둘째 손가락으로 둥근 원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죽 펴들어 설법하는 모습니다. 얼굴은 왼쪽으로 약간 돌려 쳐든 채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며, 두 발을 활짝 밖으로 벌려 버티어 서서 굳은 의지를 내 보이고 있는데, 상대방과 자신있게 논쟁하는 가전연 존자의 특징을 잘 그려내고 있다.

10. 밀행제일(密行第一) 라후라

장애(障碍)라는 이름

  라후라 존자는 석가모니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가운데도 은밀하게 스스로 행할 바를 실천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밀행제일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배운 바 그대로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도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충실히 실행한 결과 그렇게 불리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인욕행(忍辱行)과 계율 준수를 남이 보지 않는 데서도 철저히 해 나갔던 모양이다.

  라후라의 산스크리트 명은 라훌라(Rahulla)이다. 이 말은 월식(月蝕), 복장(覆障), 장목(障目)이라는 뜻으로 흔히 장애로 의역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라훌라'라는 이름은 아수라의 일종으로 그 아수라의 무리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일컫는다.
  바로 라후(Rahu) 아수라는 신[수라]과 악마[아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불사의 감로수인 아무리타를 얻는 과정에서 몰래 신의 무리에 끼여들어 아무리타를 목까지 삼키는 슨간 그만 비슈누의 칼에 맞고 만 자였다.

  해와 달이 비슈누 신에게 라후 아수라가 신의 무리 속에 있다고 일러바쳐 일격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 아수라는 목까지 아무리타를 마셨기 때문에 얼굴만 살아서는 자기에게 행한 원수를 갚기 위해서 해와 달을 삼키지만 너무 뜨거워서 금방 토해냈고, 그 결과 일식과 월식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신화에 근거하여 '라훌라'라는 말은 월식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며 결국에는 장애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석가모니불의 아들이 장애(障碍)로 불리게 되었을까? 우리들의 귀에 가장 많이 알려진 얘기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훌라[장애]가 생겼구나"라고 통탄했다는 일화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 한국선의 커다란 별, 성철 스님도 속가와의 인연으로 낳은 친딸에게 불필(不必)이라 이름했다는 얘기가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다.
  혹자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가혹한 처사라고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길로 들어서려면 세속의 끈끈한 정을 끊어 내야만 한다. 그것을 절연(絶緣)이라 한다. 그 결과 크나큰 자비가 보편성을 확보하면서 모든 존재를 똑같이 사랑하는 박애로 열매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라후라의 출생은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한 뒤 얼마 후의 일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거론되고 있다. '불본행집경'과 몇몇의 경전에서는 라후라가 태자의 출가 전에 입태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 한 날 밤에 출생하였다는 설을 펴고 있다.
  이 얘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태자가 출가한지 6년 후에 정각을 성취했으므로 어머니 배속에 6년 동안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는 너무나 심한 과장이다. 만약 이 얘기를 사실 그대로 믿는다면 라후라의 어머니 야수다라 비는 다른 남자와 불륜을 맺고 그를 낳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전에서는 설화의 형식을 빌어 그녀가 정절한 여인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행간에 숨어 있는 본래 의미를 끄집어 내보자. 태자의 출가 후 야수다라 비는 정상적으로 라후라를 분만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가 깨닫기까지의 6년 고행기에는 가족들도 인도의 풍속대로 고행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으므로 라후라의 출생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을 뿐이며, 성도의 소식과 함께 그의 출생이 공표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출생일 날 월식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를 '라후라'라고 불렀을 것이다.

  출가와 묵묵한 실천행

  라후라의 유년 시절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출가에 대한 인연만 전할 따름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고향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지만, 야수다라 비는 부처님께 미소조차 보내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이 대각을 성취하여 붓다가 되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버림받은 여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이러한 그녀의 응어리진 마음은 라후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잘 나타난다. 라후라는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저 분이 너의 아버지다. 가서 나는 왕이 되려 하니 물려줄 재산을 달라고 하라."
  너무나 냉혹한 말이다. 그러나 어린 라후라는 어머니의 말대로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물려줄 재산을 요구했다.
  부처님은 그녀의 마음을 간파하고 '차라리 그에게 보리도량의 거룩한 보물을 주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법의 상속자가 되게 하리라'고 생각하고는 사리불에 명해서 라후라의 출가 의식을 명령했다. 당시 그의 나이 6세 혹은 10세라한다. 이렇게 라후라는 사리불을 스승으로 삼아 최초로 사미가 되었다.

  손자 라후라가 부처님 교단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정반왕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막내 아들 난다(Nanda)마저 출가한 마당에 손자가 집을 떠나는 상황에서 왕위는 물론이요, 대가 끊기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눈에 아린다. 그 후 정반왕은 부모의 허가 없이는 출가를 금하도록 부처님께 제안해서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 라후라의 출가 생활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자기 방에 와보니 객승이 먼저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아닌가. 당시로서는 비구계를 받지 못한 사미승 및 재가 불자는 비구와 한 방에서 머물수 없는 규칙 때문에 라후라는 방에 들어갈 엄두도 못내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소나기가 내려 그는 구린내 나는 뒷간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그 날 부처님이 라후라가 걱정이 되어 그곳에 와서 라후라를 부르자, 그는 뒷간에서 뛰쳐나와 부처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다. 그 후부터 사미는 이틀 밤을 비구와 같은 방에서 거처할 수 있게끔 되었다.

  17세가 되던 어느 날, 라후라는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난기가 심하여 때때로 잦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는 고소해 하는 것이었다. 결국 부처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고 만다.
  "사문으로서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거짓말로 사람을 괴롭히다니 죽을 때까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미혹에 헤매이고 말지니 뜻을 가다듬으라."

  그 후부터 라후라는 계율을 충실히 지키며 정진하다. 20세가 되던 어느날 부처님과 더불어 탁발 나갔을 때, "모든 삼라만상과 몸이며 마음과 생각이 모두 무상하다고 생각하여라. 그러면 모든 집착이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법문을 듣고 마음이 열린다. 그는 홀로 기원정사에 들어와 좌선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밀행(密行)의 진정한 의미

  라후라의 두드러진 특징은, 계율 및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남이 보든 안 보든 은밀하게 실천하는데 으뜸이라는 밀행제일이라는 별명에서 찾을 수 있으며, 거기에 인욕행 또한 영롱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리불과 더불어 왕사성으로 탁발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들은 길가에서 악한과 부딪혔다. 악한은 사리불의 발우에 모래를 들어 붓고 그의 뒤를 따라가는 라후라의 머리를 후려쳐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 자리에서 사리불은 라후라에게 부처님의 제자된 자로서의 본분, 즉 참고 자비심을 베풀며 인욕하라는 조언을 했다.그 말을 들은 라후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아픔을 견디며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자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좋지 않은 일이 많이 벌어 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화내지 않겠습니다. 다만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교화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대자비를 가르치십니다. 광폭한 자는 잔악한 짓을 즐겨 하지만 사문은 인욕을 지키고 높은 덕을 쌓겠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라후라의 태도를 칭찬하면서, "자신이 붓다가 되어 제천(諸天)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오직 홀로 삼계를 거닐며 안온한 마음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이 인욕의 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한 나라를 계승할 태자의 신분인 데다가, 부처님의 외아들이라면 그만큼 주위로부터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후라는 수행자로서 조용히, 너무나도 은밀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얼마 전 대통령의 아들인 모 인사가 그 후광을 뒤에 업고 전횡을 휘두르다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은 사건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 교단, 그 출가 수행 집단의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을뿐더러 라후라의 고결하고 겸손한 인품을 읽을 수 있다. 밀행이 라후라에게서 유독 아름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후라는 출가했을 망정 부모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듯싶다. 그는 아들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병에 걸린 어머니에게 애정어린 간병을 했으며 아버지인 석가모니불께서 열반에 들자 슬프게 흐느낀다.

  불화에 등장하는 십대제자상에 대한 안타까움

  석굴암 십대 제자상 중에서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다섯 번째로 등장하는 라후라 존자는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활달하게 들어올려 옷자락을 잡은 모습니다. 만면에 미소가 감돌고 있는 미남형의 중후한 부구로서 단정한 자태다.
  일반적으로 불화에서 라후라 존자는 아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단아하게 깎은 젊은 승려로 나타난다. 그 화면 구성을 보면 부처님 좌측에 마하가섭, 우측에 아난 존자가 머무는데, 라후라는 가섭이 위치한 자리에서 약간 위에 젊은 비구의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자리에서 안타깝고 아쉬운 점을 말해 보겠다. 부처님 후불 탱화 십대 제자 중 마하가섭과 아난, 그리고 라후라는 도면을 보면 어느 정도 확인되는데 나머지 제자들은 전혀 분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불화를 그리시는 분[金魚]들이 이 점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그 인물 성격에 걸맞는 모습을 묘사해야 하는데, 전혀 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는 당사자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그저 고정된 틀에 붓칠만 하는게 과연 옳을까? 물론 그러한 작업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인 줄은 알고 있다. 붓글씨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몸에 배이게 되는 일종의 통(通)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그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예배와 존경의 대상으로서 십대 제자상을 보는 사람 역시 그 화면의 주인공이 누구인 줄 알고 자신의 마음을 보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금어(金魚)들이 십대 제자에 대한 특성을 잘 포착하여 그에 걸맞는 인물상을 화폭에 담아 내어 초본(草本), 화본(畵本)을 만들 때부터 십대 제자 각각의 인물에 맞는 개성을 살려 내야 한다. 나아가 그 틀에 따른 창조적 변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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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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