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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19:10

불교와 정보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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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정보화시대
#. 디지털 시대를 바라보며

 

-효림스님/ 본 회

인터넷을 선두로 정보산업이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불교계에도 정보화 운동이 급류를 타면서 발전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가치있는 정보를 발굴하고, 양질의 내용을 다수가 공유하는 긍정적인 역할과 함께 시대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과정과 오늘의 현실을 냉정한 시각으로 돌이켜보면 정보화에 대한 개념이해와 방향, 정체성이 없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본 편집부는 앞으로 불교정보화운동의 방향과 올바른 대안 마련을 위해 다양한 의견과 견해를 수렴하고 이를 시리즈화해서 제출할 생각이다. 이번호와 다음(12월)호에는 본회 2000년 정진도량 「금강산기행」행사 중 "선상토론 -불교와 인터넷"에서 발표된 효림스님의 발제문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 편집부 -

목차

1. 글을 시작하면서
2. 우리가 살아온 세상에 대하여
3. 그동안 우리 불교계는 시대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4. 칠십 년대의 산업사회에서 94년도 종단개혁 때까지
5.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문화 6. 새로운 제안으로서 다시 산중사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글을 끝내겠습니다.

1. 글을 시작하면서

인터넷이라고 하면 상당히 기능적인 면이 강하고, 정보화시대의 정보를 검색하고 그것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정보산업화를 연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컴퓨터의 기능적인 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문명을 상징한다는 디지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참고로 요점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초고속으로 상호 쌍방향 통신을 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주) 디지털(Digital) : 번역하면 계수형(計數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과 1이라는 이진법의 숫자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정보처리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디지털과 상대되는 말로 아날로그라는 말이 있다. 아날로그는 주로 전압의 양을 크고 작게 이용하여 정보를 처리했다. 이러한 아날로그는 애매한 부분이 많아 정확도가 떨어진다. 여기에 비해 디지털은 0과 1의 숫자로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오차가 없이 정확하고 엄밀하다. 이러한 디지털의 정확성은 수치를 계산하는 것에 뿐만 아니라, 문자와 소리나 영상 등 모든 분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컴퓨터, 오디오 디스크, 전화, 텔레비전, 방송, 녹음, 팩시밀리, 디지털 화상전송 시스템 등에 이용되고 있고, 심지어 인간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 요점 젊은이들의 사고는 기성세대하고는 달리 디지털 사고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생각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뿐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디지털 방식이어서, 아무 거리낌없이 하고싶은 말을 정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금명간 디지털 방식의 전자화폐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처럼 디지털은 인간의 문명과 문화의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가니까, 상당히 무언가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보다 하고 골치 아프다고 생각 할 분도 있겠는데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나는 익히 알다시피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는 싫어하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오늘 이야기는 편안하게 들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울러 오늘 이야기는 상당히 계몽적인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오해를 하실 분도 계실 것인데(사실 여기 계신 분들은 컴퓨터에 대하여 나보다 더 수준이 높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만 상대 한 다기 보다 폭넓게 불교대중 전체를 향해서 다소 좀 모자라는 사람이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교대중들에게 충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은 또 전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데, 우리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롭게 의식을 바꾸고 생각을 전환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강요하기 위해서 입니다. 왜냐 하면 컴퓨터에다가 종전에 사용하든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디지털방식이 도입되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현재 문명전체의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문명의 시스템이 바뀐다고 하는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정도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살아온 세상에 대하여

나는 산골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도록 전기불도 없었습니다. 겨우 나중에 전기 불이 들어온 것이 마을 앞에 방앗간에서 수력으로 일어 키는 전기였습니다. 초저녁에 들어왔다가 밤이 깊어지면 저절로 꺼지는 그런 전기였습니다. 겨울에는 그나마 물이 얼어붙으면 전기를 일어 키지 못해서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 마을에 한전이 들어온 것은 내가 스님이 되고 나서도 한참 있다가 고향에 가니까 그때 들어 왔었습니다. 70년대 새마을 운동 때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66년도에 중학교를 다니다가 절에 들어 왔고, 68년도에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전기가 들어온 절이 별로 없었습니다. 전국 본사가운데 아마 부산 법어사가 진입로도 일직 포장하고 아주 빨리 전기가 들어온 사찰로 알고 있습니다. 해인사 같은 절에도 내가 처음 가보니까 전기불도 없고, 나무 불을 때는데 선열당(禪悅堂) 아래 공터에 나무 삐까리를 집채만하게 해놓고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나무가 겨울을 나고 나면 싹없어졌습니다.

내가 왜 전기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느냐 하면 전기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절 집 문화도 전기가 들어오기 이전하고 이후하고 아주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사찰에 전화가 없고 텔레비전 없고 세탁기 없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과 7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것은 절 집에서 아주 귀한 것이고, 또 금기시 하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내가 어려서 시계를 얻어서 하나 차고 다녔는데, 그 시계를 차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시계가 보이니까 사람들이 스님이 시계를 다 차고 다닌다고 쑤군쑤군 하더라고요.
우리가 나무 불 때고 촛불 켜고 살든 때는 완전 고대사회의 생활입니다. 아주 멀리 고조선시대에서부터 그렇게 생활한 것입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천육백년이라고 합니다. 그 천육백년동안 우리는 촛불 켜고 장작불 때고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그때 그 생활에 비유하면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전기 안 들어가는 사찰이 없습니다. 난방을 나무 불 때고 하는 사찰은 이제 완전히 없어 졌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아니 특수한 사정이나 경우가 아니면 그의 장작불 때는 곳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찰마다 찻길이 뚫리고 모두 자가용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60년대나 70년대에 촛불 밑에 살면서 어떻게 우리가 자가용 타고 다닐 것을 생각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변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변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지금 그 변화를 제대로 보고 있고, 이해하고 있고, 잘 수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차는 그랜저 타고 다니면서 사찰은 비가 세고 생활문화는 세상사람들에 비하여 완전 낙후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점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3. 그동안 우리 불교계는 시대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호롱불과 촛불 밑에서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세상이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실제 우리의 역사는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를 우선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공연히 범위를 확대하려고 한다고 하지 마시고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8. 15가 가장 중요하게 시대를 구별하는 시점이 됩니다. 따라서 8. 15를 가운데 두고 그 이전과 이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구한말에서 시작된 개화기에 불교는 매우 빠르게 개화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 동령 스님이나 유대치 김옥균 등은 불교인이면서 당시 개화를 주도한 인물들입니다. 이때는 불교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하연튼 불교인사가 한국사회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정치하에서도 불교계에는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고 시대를 주도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일본 유학생에 불교계가 가장 많았다고 하는 것 등이 그것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승려가 사회적인 지도자로 존경을 받으면서 활동했습니다. 근자의 고승들이 사찰 안에서의 영향은 절대적인 방면 사회적인 지도력은 절대 부재한 것과는 달리 일제시대는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등의 스님들은 사회적인 지도력이 막강했었습니다.

여기에 백용성, 한용운 스님은 지금 우리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서 갔습니다. 한용운 스님은 이미 불교유신론에서 그의 불교혁신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백용성 스님도 지금 우리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개혁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불 정책의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불교계의 교세라고 하는 것은 구한말이나 일제시대는 사실 형편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백용성은 서울장안에 대각사(大覺寺)라는 포교당을 세우고 풍금을 켜면서 노래를 부르고 경전을 한글화하고, 정기적인 법회를 개설하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포교방법과 법회의식은 이미 백용성 스님 때 그 형식이 다 갖추어 졌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때 이런 선각자가 앞장서서 정기 법회를 하는 등의 현대화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우리는 불교 현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예로 그때 그 스님들이 불공의식을 한글화 해놓지 못한 탓으로 지금도 한글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일부를 한글화해서 사용하는 것은 모두 이미 그때 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스님들에 비교해서 너무나 개혁을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한용운이나 백용성 스님이 주장해온 개혁론이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특히 백용성 스님은 도시화하고 산업화하는 사회를 예견하시고 불교계도 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불교가 도시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포교당도 짓고 사업을 시도하는 실천을 보인 것입니다. 요점 큰스님이 포교당하고 사업하는 스님이 있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면 아무도 큰스님으로 취급을 안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스님들의 개혁정신이 8. 15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후퇴한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정화운동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정화운동의 당위성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운동이 우리 불교계에 미친 영향에의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화운동의 주체는 비구승입니다. 당시 비구승은 산중의 은둔승려들입니다. 지금도 선을 수행하는 선승들이 산중에 있는 선원에 은둔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은둔하게 되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화운동이 일어난 그 당시도 비구승들은 청정수행승인 것은 확실하지만 시대 흐름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정화운동이 일어나는 시점은 6. 25 직후인 54년도입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겪으면서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고, 또 지리산 등지의 빨치산이 대부분 소작농들로서 농지개혁에 불만을 품고 투쟁을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산으로 도망가 빨치산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국가 사회를 흔드는 갈등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지개혁은 당시 매우 중요한 정부의 시책이었습니다.

이렇게 농지개혁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정화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연이라고 해도 이것은 불교의 정화운동과 농지개혁은 어떤 정치적인 합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선 나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이승만 정권과 정화운동은 합수관계가 있다고 보고 이것은 따라서 이승만 정권의 더럽고 유치한 정치음모라고 보는 것입니다. 시대흐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든 당시의 비구승들이 쉽게 그 음모에 말려 들어간 것입니다. 알다시피 정화운동은 이승만의 유시에서 촉발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승만이 토지개혁을 하는 시점에 왜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유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불교계의 물적 기반은 농지입니다. 사찰경제가 신도들의 시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농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소작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6. 25 전쟁으로 사찰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50년대의 불교계는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것에 전력해야 할 그런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한 농지가 농지개혁으로 지가배분을 받으면 그것이 사찰의 복구경비를 충당하는 것에 결정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한데 하필 그 시점에 정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일시에 불교계를 피폐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사찰이 망실재산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 전쟁직후 혼란한 시기에 농지개혁과 아울러 정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보광사도 그때 정화당시 망실한 토지를 지금 찾고 있고, 일부 상당한 량을 찾았습니다.

정화운동으로 인하여 불교는 이후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지도력을 일어버리고 맙니다. 아니 지도력만 일어버린 것이 아니라, 만신창이가 되어 서서히 망해 가는 것입니다. 피폐한 경제력 속에서 계속해서 분쟁을 했습니다. 그것은 고질병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4. 19가 일어났을 때도 불교는 분쟁을 했고, 5. 16이 일어나도 분쟁 중이었습니다. 불교의 현대사는 분쟁의 역사라고 기록해도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같은 고질 병적 분쟁은 불교가 시대에 적응하고 대응하는 힘을 읽어 버리게 했습니다. 아니 사회적 변혁기에는 더욱 분쟁이 가속되고 더욱 부패해졌습니다. 그것이 10. 27 법난을 불러온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10. 27 법난에 대하여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역사적인 청산을 못하고 있지만 아울러 10. 27 당시의 불교계의 혼탁상과 시대를 읽어 내지 못한 어리석음에 대하여 자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점도 놓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때 그 당시의 변화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디지털문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아무 준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변화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주) 농지개혁(農地改革) : 토지개혁이나 농지개혁은 그 역사가 매우 깊고 오랜 것이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은 개혁자들이 주창하든 토지개혁을 전반적으로 이룩하였다. 따라서 농노제가 패지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에도 농노들이 소작농을 청산하고 도시로 이동하였고, 스웨덴과 덴마크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이미 19세기에 토지개혁과 농지개혁을 이룩하였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토지개혁과 농지개혁은 대대적으로 이루어 졌다. 그 중에 우리의 이웃 국가로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난 뒤에 이루어진 토지개혁은 중국의 인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것으로서 대단한 효과와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북한도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1946년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빈농, 소작농들은 자기 앞으로 분배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 정부에게 대대적인 인민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북한의 이러한 토지개혁은 남한 사회의 소작농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45년도 처음부터 일본인들의 소유 토지를 유상분배를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서 토지소유제 자체에 별다른 변화를 일어 키지 못했다. 따라서 소작농들의 불만만 높아진 것이다. 농지개혁법은 48년도에 제정 공포되었으나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고, 소작농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50년도 3월달에 개정 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6. 25 전쟁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시행은 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시점에 이루어 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1968년도 3월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러한 농지개혁은 시행착오와 정부당국자와 지주들의 방해와 의지 부족으로 성공했다고는 할 수는 없어나, 일단 한국에 대지주는 없어지고 일본인이 소유한 농지는 농민에게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대지주들은 지대로 받은 자금을 산업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실상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측이 바로 불교계라고 본다. 아직도 불교는 정화운동과 농지개혁, 그리고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실행 과정에서 대규모의 토지와 농지를 분실하고 망실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지금도 그 망실재산을 되찾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시대사항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엄청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경우라고 해야 하겠다. 정화운동(淨化運動) : 사실 정화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운동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한 역사적 논란이 끝나지 않은 운동이다. 그리고 정화운동의 시기를 청담스님 등이 1926년도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한 시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8. 15 이후 48년도 종단명칭을 조계종으로 개칭한 시기로 보느냐. 또는 1954년도 선학원에서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시기로 보느냐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정화운동이 시작된 시기를 어느때로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54년도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때를 정화운동의 본격적인 시기로 선택했다. 따라서 이것은 이승만이 유시를 발표한 것에 자극 받아 시작된 운동이고, 그랬기 때문에 이승만의 노회(老獪)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정화운동의 정당성은 나두고라도 정화운동으로 인하여 불교계는 3분의 2 이상의 재산상 손실을 입었다고 본다. 아니 보이지 않고 계산 할 수 없는 재산까지 따진다면 오히려 그 이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0. 27 법난(法難) : 79년도 박정희가 죽고 모처럼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소위 서울의 봄인데, 이때 사회 전체적으로는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양상으로 상당히 혼란한 시기였다. 이때 불교계는 개운사와 조계사로 양분되어 있었든 총무원이 통합하고 새로운 집행부인 송월주 체제가 들어섰다. 그리고 총무원은 새로운 종단분위기 쇄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내 놓았지만 지극히 형식 적었다. 그리고 불교계 전반적으로는 사회혼란을 틈타 더욱 부패해졌다. 솔직히 우리가 부정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몇몇 사찰들의 주지가 얼마나 부패해 있었던가 하는 것은 승려들의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총무원은 총무원대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준비가 없었고, 권승들 역시 당시의 시대 사항을 정확하게 읽지 못했다. 그 결과 10. 27을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10. 27 이라는 말이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는 것 역시 부정 할 수 없다.

4. 칠십 년대의 산업사회에서 94년도 종단개혁 때까지

 계속되는 분규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사회발전을 앞서가는 것은 그만두고 뒤에서 따라 가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불교계 스스로가 인정하는 봐와 같이 가장 낙후된 집단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우선 가장 큰 것이 사회는 교육수준이 높아 졌는데 승려교육은 사회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식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고난도의 한문교육을 받고도 학문으로서 지식이 사회적으로 활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대다수는 그런 교육조차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하는 승려들이 질서를 어지럽히고 사회적인 빈축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분규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폭력 승들의 막가식의 행동은 불교의 위상을 승려들 스스로 떨어트렸습니다.

그런 중에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를 이루면서 70년대부터 불교의 가장 큰 과제는 산중불교를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백용성 등의 선각자가 이미 30년대 40년대에 주장한 것을 70년대에 와서야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도심에 포교당이 들어서고 그것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이었습니다. 이미 70년대에 광덕 스님이라든지 몇몇 스님들이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80년대가 되어서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광덕 스님의 불광사라 든 지 삼선포교원 같은 몇몇 사찰이 도심포교에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모두 80년대에 들어서서야 활성화되었습니다. 그 뒤 정우 스님의 구룡사, 지광 스님의 능인선원 대행 스님의 한마음 선원 등이 도심포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냈고 기성 사찰보다도 더 큰 사찰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몇몇 사찰뿐이었고, 나머지는 아직도 건물임대료를 내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이것은 도심포교당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타종교에 비하여 스님들이 아직도 도심포교에 미숙하고 안이하게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포교에 있어서는 아직도 불교는 초보적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포교의 중요성을 입으로 말하고는 있으면서 동국대학이나 승가대학 등 종립 대학 안에다가 포교학과 하나를 개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교원이 있고, 포교사가 있어서 효과 있는 활동을 하려면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포교학을 가르쳐지는 전문학과가 개설되어 할것이 아닙니까?  

불교가 산업사회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도심포교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 이미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소위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농경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든 불교가 이제 겨우 산업사회화 하려고 하는데 사회는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었든 것입니다. 그렇게 불교계의 80년대는 넘어 갔습니다. 물론 한쪽에서는 10. 27 이후 새롭게 역사를 인식하기 시작한 승려들이 등장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합니다. 그것이 80년대 불교계의 유일한 수확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성불교의 80년대는 70년대의 산업사회화 하는 연장선상에 있었을 뿐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자기 존재 자체를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90년대로 넘어 왔습니다. 불교 사에 있어서 9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미 80년대부터 불교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일군의 개혁세력은 10. 27 이후 새롭게 역사를 인식하기 시작한 승려들입니다. 이들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들이 불교역사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분산되어 있든 활동가들을 하나로 집결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93년도 지리산 모임입니다. 그 후 지리산 모임의 결실로 실천승가회가 창립을 했습니다.  비로소 실천불교운동의 시대를 연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94년도 종단개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실로 불교 사에 있어서 일대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불교의 운동은 그렇게 간단한 운동이 아닙니다. 불교계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운동인 만큼 어려움도 많습니다. 아직도 자체정비가 미약하고 자기 철학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안팎으로 수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큰 시련은 98년도의 종단분규와 99년도의 분규일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실천불교운동의 진영도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종단개혁은 답보상태에 있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98년도 종단사태 때 분규를 막고 화해와 타협을 이루어 내지 못한 것이 천추에 한으로 남았습니다. 아울러 실천승가회 역시 실천불교의 운동을 하는 단체라고 한다면 당연히 화해와 타협을 이끌어 내는 일에 보다 큰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일을 해 내지 못하면 종단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실천불교를 표방하고 있는 실천승가회가 보다 역사적인 자기 역할을 수행 하기 위해서는 역시 디지털시대에 맞는 실천불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94년도 종단개혁은 대외적으로는 불교계가 비로소 한국사회에 자기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안으로는 엄청난 개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송월주 체제가 들어서면서 다시 종단개혁은 침체되었습니다. 나는 그 원인을 송월주를 위시한 그 체제가 개혁정신과, 개혁의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고 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며, 왜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비전이 전무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송월주는 구시대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개혁된 종단에서 새로운 시대의 불교로 나아갈 준비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작금 총무원은 현재 종단개혁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급속히 94년 이전의 종단병폐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개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개혁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종단을 이끌어 가고 운영하는 방식이 과거의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가장 첨단을 달린다고 해야 할 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 형태입니다. 종무원(宗務員)이 수십 억을 횡령해 먹었는데도 몇 년 동안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는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94년도 종단개혁은 제도 면에서 개혁을 이루었어나 종단운영의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과거 종단에서 일어나든 관행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당시 종단개혁에 앞장선 사람의 한사람으로서 나도 오늘날의 디지털화하는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단개혁은 큰 털에서 종단의 제도개혁을 이루는 것에 초좀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몇 년사이에 완전히 사회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우리 종단도  종단운영을 디지털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종단운영, 포교, 사찰운영 등이 모두 디지털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종단개혁도 디지털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진행해야 합니다. 


(주)
지리산 모임: 92년도 초여름 정토구현전국승가회의 스님들이 주도하고 대승불교전국승가회에서 활동하든 스님들과 기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든 스님들이 모여서 지리산 노고단 등반을 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이모임은 불교운동에 있어서 하나에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 후 무등산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의 뜻을 모아 실천승가회가 창립된 것이다. 

실천불교운동 : 나는 평소 우리들의 운동을 실천불교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다. 실천불교운동은 대승불교운동을 오늘날의 사회에 실현하는 운동이다. 종단개혁운동 역시 실천불교운동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아울러 불교의 사회적 활동이나 수행자의 자비실천 운동이 모두 실천불교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종단의 고질병인 분규를 극복하는 것도 실천불교운동으로 극복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실천불교운동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든 스님들의 실천적인 운동이 계승되고 발전된 것이기도 하다. 

사찰운영의 디지털화 : 디지털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선 정확도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사찰운영이나 종단운영, 그리고 포교 등을 주지나 총무원장의 개인적 재량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대충한다는 것이 된다. 앞으로는 이 대충한다는 것으로는 안 된다. 모든 관리나 운영 자체를 시스템화해야 한다. 그 시스템화를 디지털화하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우선 삼보정재를 관리하는 방법 하나만 해도 완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컴퓨터 등의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보다 치밀하고 철저한 장부 정리와 관리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재정을 관리하는 종무원이 수십억 돈을 은행에서 인출해 갔는데도 통장을 찍어 보지 안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하는 식으로는 면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요점은 은행에 가서 통장을 찍어 보지 않아도 전화 한통화면 확인이 되고 더욱 명확한 것은 컴퓨터 인터넷으로 방안에 앉아서 통장에 돈이 들고나는 것을 다 확인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아주 기초적이고 간단한 방식조차 도입하고 있지 못하고, 통장에서 돈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것은 남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6.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문화

현대문명이 디지털화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인터넷입니다. 컴퓨터가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그것이 통신에 이용되면서 발달한 것이 인터넷인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실제 인터넷을 이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터넷이 날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너무 그 발전의 속도가 빨라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말합니다.

정부기관 같은 곳에서도 지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인터넷에 정책이나 행정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현재 인터넷을 통해 행정을 공개화 하는 것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시민과 시청간에 간격이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부분 투명성을 확보해 가고 있습니다. 시민은 스스로 네티즌이 되어 정부의 정책 결정에 참여 할 수도 있고, 민원을 제기 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인터넷 행정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기업이나 정부 행정기관이 인터넷을 이용하므로 해서 기업은 경영의 투명 화를 가져 올 수 있게 되었고, 정부 행정기관은 정책과 행정을  투명 화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특징은 우선 공개성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업이 무엇을 하고 있고, 정부의 행정기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시민이나 소비자가 그 냉용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자판기 앞에만 앉으면 누구나 인터넷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4. 13 선거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앞으로 정치에 있어서도 인터넷은 크게 그 영역이 확대 될 것입니다. 그동안은 선거에 임하는 후보들이 당의 조직과 돈, 그리고 유세중의 언변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고, 유권자들도 후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정보라고 하는 것이 유세 장에서 연설을 들어보고 유인물을 통하여 얻는 정보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선거에도 인터넷이 그 위력을 발휘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권자는 출마후보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얻는 정보는 정보의 질이 다릅니다. 정치가가 의정 활동을 어떻게 하고 점수를 얼마나 받는지  낱낱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유권자가 원하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취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알고 싶은 정보를 선별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치인은 더 이상 유권자를 속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위력은 지금 벤처기업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컴퓨터 하나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일약 수백 억 수천 억을 버는가 하면 세계적인 재벌이 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빌 케이트이고 일본의 손 정의입니다. 특히 손 정의는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업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업체들에게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 할 수 잇도록 정보유통망을 제공하는 것으로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세계 최고의 정보 인프라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고, 사실 지금 그 꿈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손 정의는 앞으로 미래사회는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또 재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손 정의라는 사람모양 컴퓨터 하나로 재벌이 되는 꿈이야 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도 컴퓨터로 포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찰을 홍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계도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는 사찰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몇몇 앞서가는 사찰이고, 아직은 보편화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앞으로 종단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총무원과 전국의 본말사가 인터넷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국내의 각 종교단체 가운데 그래도 우리 조계종은 총무원과 본 말사로 이어지는 행정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활용하여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만약 전국의 사찰이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총무원을 중심으로 인터넷 상에서 네트워크가 이루어진다면 그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혁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이것은 행정상의 신속성은 물론이고 사찰경영과 종단운영의 투명성을 가져 올 수도 있고, 전 종도를 소외시키지 않고 종단 일에 참여시키는 효과도 가져 올 것입니다. 

투명성 : 고금을 통하여 국가가 패망 할 때는 사치와 부패의 조짐을 보인다. 지금 우리나라는 IMF이후 가장 큰 국가적 과제가 부패와의 싸움이다. 과거 정권은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없고 김영삼 정부도 부패로 실패했고, 현 김대중 정부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부패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상대적으로 과거 정부에 비하여 들 부패했다는 주장도 제기 될 수 있겠으나 과거 정부에 비하여 국민들이 더 청렴성을 요구하고 기대 한다고 하는 것을 감안 할 때 부패의 심각성은 과거 정부에서 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보아진다. 만약 김대중 정부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부패 때문 일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라서 우리 종단도 종단개혁의 첫째도 부패와의 싸움이고, 두 번째도 부패척결이고 그 다음 그 다음도 부패와의 싸움이다. 조계종이 부패만 일소하고 청렴성, 투명성만 확보하면 그 나머지 일은 모두 저절로 해결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울러 그 청렴성, 투명성을 위해서도 종단행정을 디지털화해야 하리라고 본다.   


  7. 새로운 제안으로서 다시 산중사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 했든 바와 같이 산업화 사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산중불교를 극복하고 사찰이 도심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디지털화의 시대에는 사항이 변했습니다. 따라서 이제 사찰은 도심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심에서 나와 산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그러한가? 문화의 틀이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선진국일수록 산업의 형태가 이차산업에서 서비스와 레포츠 산업으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사람들이 삶의 질과 형태를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휴일을 단순히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날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즐기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살고 있는 보광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우리들이 보광사로 올 때만 해도 그냥 한적한 서울 외곽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음식점과 러브호텔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보광사 주변은 이제 새로운 유락(遊樂) 시설로 한 불럭을 이루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룹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주말에 사찰을 찾아오든 사람들이 지금은 사찰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주변에 다른 유락 시설이 많기 때문에 그쪽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보광사 반경 몇 키로 안에 유원지가 몇 개나 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 유원지에 가면 가족이 다 합께 하루 종일 즐겁게 놀 수 있는 시설이 다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이상 사찰에 찾아 올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찰에는 와 봤자 법당에 들어가 참배하면 그 후에는 다른 놀이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내 실증을 내고 가자고 합니다. 어른들도 잠시 나무 아래 산책이나 해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한번 오고 그 뒤에는 다시 오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찾아온 신도들도 형편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유원지에 가서 아이들과 어른이 하루를 즐기려고 하지 누가 사찰에 찾아오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앞으로 갈수록 더 심화 될 것입니다. 

방면에 도심 안에 있는 포교당들은 또 어떻습니까. 앞으로 일요법회는 갈수록 참여율이 낮아 질 것이라고 봅니다. 교회나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일요일날 한가하게 법회에 참가하고 하루해를 보내기보다는 귀중한 휴일을 짬지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서 레포츠를 즐기려 외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런 현상은 지금 벌써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제 산중의 사찰은 넓은 땅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불러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다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포교를 해야 합니다. 이제 사찰은 단순히 참배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문화와 함께 여가를 활용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휴일 사찰에 찾아 와서 법회에도 참가하고 사찰이 제공하는 다양한 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따라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사찰 안에 다양한 시설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을 사찰에서 보내더라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불편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변화가 필요 할 것입니다.  사찰 안에 사찰환경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각종의 레포츠 시설도 있어야 합니다. 문화 시설도 들어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요점 사찰 경내에 들어서고 있는 전통찻집 같은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전통찻집으로는 부족합니다. 찻집도 기왕에 할 바에는 시설을 더 확대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백양사 같은 곳에서 시도했든 화랑 같은 것을 유치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만 있다면 사찰마다 특성 있는 박물관을 갖추고 테마가 있는 전시를 하는 것도 좋고, 사찰의 수준에 걸맞은 공연장 같은 것을 갖추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공연장에서 연극도 할 수 있고, 국악이나 불교 음악 같은 것을 공연하기도 하고 라이브 가수들의 리사이틀 같은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찰이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불교는 앉아서 사람을 사찰로 불러들일 수 있고, 불러들인 사람을 상대로 상당히 효과 있는 포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찰이 납골당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나는 납골당이 사찰에 들어서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납골당이 유행처럼 들어서는 것과 같이 산중 사찰 내에 새로운 문화 시설이 들어서는 것도 유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일수록 더욱 좋은 조건이라고 보아집니다. 사찰이 이렇게 변화한다면 사찰을 찾아오는 사람이나 사찰측이나 서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사찰 안에다가 새로운 문화의 장소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설을 급진적으로 사찰 안에 끌어 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스님들에게 거부반응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제 스님들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바로 디지털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은 고정관념을 버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할 때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가 디지털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이며, 새로운 시대의 디지털화 철학은 불교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나는 이제 스님들이 디지털문명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불교의 철학을 가르칠 좋은 기회가 왔다고 봅니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고 사찰을 과감하게 변화 시켜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산업사회에서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아먹고 살아 왔습니다. 이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조상의 유물을 팔아먹고 살아온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사들이 어떻게 사찰에 들어 오는데 관람료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시대가 변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찰 안에 박물관이 들어서듯이 공연장이 들어오고 미술관도 들어오고 납골당도 들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찰음식을 사먹는 식당도 들어오고 전통 차를 마시는 찻집도 들어서고 사찰문화를 체험하는 수련원 형태의 숙박시설도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9. 글을 끝내겠습니다. 

나는 지금과 같이 불교계가 디지털 시대에 대한 아무 사전 준비 없이 무대 책으로 있다가는 반듯이 엄청난 피해를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있다가 토지를 빼앗기고, 자주성을 빼앗겼는가 하면, 역사에 치욕으로 남을 법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여러 가지 수난과 격변 속에서 그래도 오늘날과 같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나름으로 발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예는 다소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앞에서 대충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더 예를 든다면 우리 국가사회가 산업화하면서 사찰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찰은 관광객에게 입장표를 팔아 사찰의 경제에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하촌의 사찰 소유 땅이 관광지 유락 시설로 개발되었지만 사찰은 여기에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사찰 땅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사찰은 자기 땅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되고 있지만 주인으로서 권리 행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더 나은 개발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준비는 충분하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교단은 지금도 예전과 같이 별다른 준비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만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94년 종단개혁 이전의 부정부패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종단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찰행정이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불자 외의 일반 대중들 다시 말해서 시민단체들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감히 시민단체들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시민단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 불자들이 모두 시민이고 신도회가 바로 시민단체입니다. 소위 NGO라고 하는 것이 그것인데, 시민들의 영향과 활동 영역이 무한대로 넓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계의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교단 밖의 시민단체들도 우리의 부정하고 부패한 사항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저들이 무서워서 개혁을 해야 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비판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우리는 교단의 부패가 정화되고 화합을 이루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와 같은 준비의 운동을 지금부터라도 한다면 우리 교단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미래는 보다 밝아 질 것입니다. 

시민단체 : 나는 근자 시민운동을 해온 탓으로 금년도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NGO2000 대회를 치렀다. 젊은 벤처기업가들이 돈을 기증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여 치러진 행사였다. 여기에서 나는 상임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여했었는데, 대전 유성에서 모여 토론회를 할 때였다. 그때 NGO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로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장 부패한 집단 가운데 종교계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리고 불교계의 부정부패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제 불교계의 부정부패는 시민단체들의 중요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98년도와 99년도 같은 종단사태가 반복될 때 더 이상 시민단체들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번 의약분업에서도 잘 들어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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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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