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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01:15

사찰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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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사찰.

    절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합니다.
    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절은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서 기거하며 수행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던 장소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절은 그 이전에서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불하신 그리고 설법하시고, 열반을 보이신 4대 성지가 모두 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 교리에서 보면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그 진리를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보이셨던 분이고, 스스로 진리를 구현하신 분이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합니다. 법신불은 온 세상에 불법이 두루 미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인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예경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형상화하여 일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그 곳에 찾아가 스님들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들으며, 예불을 올리는데 그곳이 바로 절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 이전에 인도에는 우리가 절이라고 부르는 정사는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인도의 수행자들을 사문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이땅에 오시기 전부터 있었던 사문들은 정해진 곳에서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고행을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신 후 부처님은 미혹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셨습니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위하여 최초의 설법을 하신 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을 향하여 떠나셨습니다. 그 당시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은 부인 베데이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짓기로 마음 먹고 왕사성 북쪽 교외에 있는 가란타 장자의 소유인 죽림(竹林)을 희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역사상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인 것입니다.
    이 정사 중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당시부터 이름난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천축5정사(天竺五精舍)라고 하는데 기수급고독정사, 축령정사, 미후강정사, 죽림정사가 그것입니다.
    또한 범어 상가라마(samgharama)라고도 하는데 승가람마(僧伽藍摩), 가람(伽藍)이라 음역하고, 중원(衆園)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정사(精舍)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정사나 상가라마가 상가(僧伽)의 거주처이지만, 정사는 주로 부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신 곳을 말하고, 상가라마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의 제자들만이 거처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절이나 사찰의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인도에 있어서는 절이라고 하는 곳을 정사나 가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 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寺)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이전에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사(寺)로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 경전)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다고 합니다. 그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있어서 사찰의 효시라고 합니다.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원(院)이라는 말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주원(周垣),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관사의 이름에도 쓰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대에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번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에는 나라에서 세운 큰 사찰에 원호(院號)가 붙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寺)를 절사(寺)라고 읽는데 절은 오로지 불교의 가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절(寺)은 흔히 절에 가면 절(拜禮, 배례)을 많이 해야하므로 절(배, 拜)이라고 한다고 하고, 일본인이 지은 책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게 한 것으로, 2년 뒤에는 다시 진(晉)으로부터 아도(阿道)가 들어와 다음해 2월 나라에서는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있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가람이라고 합니다.
    또한 신라에서는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털례’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털례’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털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털례’가 절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사(寺)를 일컫는 데라(寺)도 털례에서 변천된 것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2. 사찰의 구조.

    산문 / 법당 / 법구

    1) 산문

    일주문 / 금강문 / 천왕문 / 불이문 / 당간지주 / / 부도와 석등

    사찰의 입구에 있는 문으로서 총문 또는 삼문이라 하고 보통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으로 배열되어 있다.

    일주문

    절의 문은 부처님의 세계,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작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이 바로 일주문(一柱門)이다. 일반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는 사방에 4개의 기둥을 세우기 마련이나 일주문의 경우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 그래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일주문의 이러한 독특한 양식은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흩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둥 두 개를 세워 일주문을 완성시키지만 범어사의 일주문은 돌기둥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올린 네 개의 기둥이 한 줄로 서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금강문(金剛門)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 분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입니다. 왼쪽에 입을 벌리고 서 계신 분은 밀적금강이고, 오른쪽에 입을 다물고 서 계신 분은 나라연금강입니다. 이 두 분을 합쳐서 우주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상징하는 진언 “옴”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상체를 벗고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서 아무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법을 훼방하는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밀적’은 자취를 드러내지 않음이고, ‘나라연’은 힘이 몹시 세다는 것입니다.

    #. 금강력사(金剛力士)

불교의 수호신으로 대체로 불탑(佛塔) 또는 사찰의 문 양쪽에 서서 사악한 것이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왕(仁王), 이왕(二王), 집금강신(執金剛神)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인도의 약차(藥叉)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형(神將形)으로 표현되었지만 차츰 반나(半裸)의 몸에 천의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역사(力士)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한 상은 입을 벌리고 손에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상은 입을 꽉 다물고 주먹으로 치려는 권법자세를 하고 있으나 그 형상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수호신으로 사찰이나 불전(佛殿)의 입구와 석탑의 탑신부 등에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얼굴은 분노형이며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신체의 근육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유물 중에서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의 문 양쪽에 있는 신라시대의 인왕상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역시 대표적인 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인왕상이라고 하겠다.

    천왕문

    번뇌로 어지러진 마음을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로 다진 뒤에 계속 걷다보면, 금강력사(인왕)나 사천왕 같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을 모신 건물이 나타나게 된다.
    사찰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서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사천왕은 본래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에 거주한다.
    금강력사상이 자리잡고 있는 문은 금강문(金剛門)이고 사천왕상이 모셔진 문은 천왕문(天王門)이다. 보통 사찰로 들어서서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을 만나게 되나 금강문이 없는 경우에는 바로 천왕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왕문의 대문에다 금강력사의 모습을 그려 놓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세우기도 한다. 천왕문은 사천왕과 금강력사의 힘으로 절을 외호하고 나쁜 귀신 등을 내쫓아 사찰을 청정한 도량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 그리고 방문자의 마음을 다시한번 더 엄숙하게 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이곳에는 수미산 중턱의 동,서, 남, 북에서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신음하는 마귀를 발로 밟고 커다란 칼을 손에 든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천왕은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지만, 착한 이에게는 상을 내린다고 한다.

    #. 사천왕상(四天王像)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을 말한다.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즉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동서남북에 배치한 것이다.
    사천왕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호세신(護世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찍부터 불교에 받아들여져 원시경전인 장아함경(長阿含經)에 등장하고 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형상화된 사천왕상은 간다라 출토의 부조(浮彫)나 불전도(佛傳圖)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 인도의 귀인(貴人) 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무인형(武人形)의 사천왕으로 변해 갔으며 이는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도상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지물(持物)도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칼과 창, 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다문천은 손에 항상 보탑(寶塔)을 들고 있어 사천왕의 명칭을 확인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한편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계통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증장천이 검, 광목천이 새끼줄, 다문천이 보서(족제비) 또는 보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은 중생을 두루 보살피고 국토를 지키며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고,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자신의 덕망으로 만물을 소생시키며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위로 들어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엄지와 중지로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왕은 웅변으로서 온갖 나쁜 말들을 물리치기 때문에 다른 천왕들과는 달리 입을 벌린 형상으로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왼손은 보탑을 받들고 있다.
    이 보탑 속에는 많은 보물이 들어 있어서 이를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복과 덕을 베푼다고 한다.
    그리고 북쪽을 지키는 왕은 도량을 지키면서 항상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다문이라 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광명신이 되었으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수미산 북쪽을 지키는 천왕이 되었으며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챈 환한 미소를 띠면서 비파를 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다문천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삼국유사 권 4에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라는 명장(名匠)이 영묘사(靈妙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했다고 하는 기록에 따라 7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전(679년)을 비롯하여 감은사지 삼층석탑 출토 사리기에 부착된 사천왕상(682년)과 석굴암 사천왕상(750년경)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불이문

    천왕문을 지나서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不二門)이 서 있다. 이 불이문을 통과하여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부처가 되고 해탈을 이룬다고 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불이(不二)란 분별을 떠난,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뜻한다.
    즉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不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불국정토인 것이다.

    당간지주

    절로 가는 길목에는 이제 곧 부처의 세계로 진입하게 됨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 그것은 깃발을 거는 막대기와 받치기 위한 돌기둥으로, 찰간지주(刹竿支柱)라고도 한다. 깃발을 거는 막대기라는 의미의 당간과 이 당간을 세우는 기둥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형태는 두 기둥을 60~100cm의 간격으로 양쪽에 세운 것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면이 편평하고 수직인데 반하여 뒷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고 둥글며 옆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해서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아랫부분에는 당간을 세우는 간대(竿臺)나 기단이 마련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은 석재 또는 철제로 만든 것이나 대개 목재를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재료상의 이유로 부석사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숙수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당간지주, 금산사 당간지주, 중초사지 당간지주(827년) 등 주로 당간을 세웠던 통일신라시대의 석재 지주만 남아 있지만 드물게 갑사(甲寺)와 용두사지(龍頭寺址)에 철제로 된 고려시대의 당간이 전해지고 있다.

      탑(塔)

      일반적으로 사찰의 법당 앞에는 열반의 길로 들어선 부처의 영원한 몸이 머물고 계신 탑(塔)이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하는 건조물로 솔도파(率堵婆), 수두파(藪斗婆), 탑파(塔婆)라고도 한다.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돌이나 흙 등을 높게 쌓아올린 무덤을 말한다. 마하승기율 제33에서는 사리를 묻지 않고 다만 기념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공양, 예배하는 뜻으로 세워진 탑을 지제(支提)라 하여 탑파와 구별하고 있으나 뒤에는 이 두 가지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탑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묘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불교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사리탑으로서의 성격은 석존이 열반한 후 시신은 다비(茶毘,화장)하였고, 그 사리를 여덟 곳으로 나누어 탑을 쌓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들 부족들은 각각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이라고 한다.
      유골을 분배받지 못한 부족은 재를 가지고 가서 회탑을 세웠다.
      이것이 불교의 최초의 탑이다. 원래 유골을 봉안한 것을 탑이라 하고, 봉안하지 않은 것을 지제라고 하였으나 후세에는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고 한다.
      , 2~3세기 무렵에는 인도 아쇼카왕이 팔만사천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탑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나라에 널리 세워졌으나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의미나 양식이 변하게 되었다. 보통 사리는
      사리용기에 담아 탑 안에 봉안하게 된다.
      인도의 불교미술 초기에 나타나는 기원 전후경의 산치대탑은 복발형(覆鉢形:엎어 놓은(覆) 바루(鉢盂, 음식을 담는 승려의 그릇으로 일반 밥그릇과 비슷하다) 같은 모양을 말한다.)으로 마치 분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나 점차 시대가 내려갈수록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형식이 만들어졌다.
      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 벽돌로 만든 전탑, 돌로 만든 석탑으로 분류하는데, 중국은 주로 전탑을 많이 건립하였고, 한반도에서는 석탑, 일본은 목탑을 많이 건립하였다.
      탑에 대한 예배는 먼저 탑을 향해 합장 반배를 한 다음 합장한 채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고나서 다시 합장 반배를 한다.
      시계 방향으로 도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 예법대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항상 탑 쪽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탑은 1,500여 기에 이르며, 국보와 보물의 약 25%가 탑이라는 점만으로도 탑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부도와 석등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석조물을 말한다.
      불탑이 주로 사찰 안에 있는 반면, 부도는 대부분 사찰 밖에 있다.
      석등은 등공양과 연등을 상징하는 석조물이다.
      어둡고 깜깜한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닫은 진리로 비추어서 불성을 밝혀주는 법등인 것이다.

      2) 법당

      법당(法堂)은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모신 전각(殿閣)으로, 절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전각을 금당(金堂)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법당보다는 금당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초기까지는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사찰의 중심건물을 금당이라고 하였다. 절 안에는 대웅전,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 여러 전각들이 있는데 그 명칭들은 안에 모셔진 본존불의 성격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즉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각각의 부처님의 세계를 축소하여 표현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부처의 가르침과 불국정토임을 상징하는 여러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예배의 중심이 되는 본존불과 양옆에서 본존을 보좌하는 협시보살이
      불단(佛壇) 위에 모셔져 있고 그 뒤와 좌우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위쪽에는 천개(天蓋)가 있어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대들보와 천정에는 하늘을 날으는 용과 극락조(極樂鳥), 아름다운 연꽃과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많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불단 위에는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한 향로와, 화병, 촛대가 놓여 있다. 이외에도 음식이나 물, 차를 담는 발우(鉢盂), 정병(淨甁), 다기(茶器) 등이 배치되기도 한다.

      법당은 통상 상단, 중단, 영단의 삼단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상과 보살상을 모신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선신들을 모신 중단, 그리고 영가를 모신 영단이 그것입니다.

      상단(上壇)
      법당의 어간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가장 높은 단상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부처님상을 모시는데 이 단상을 상단이라고 하며, 부처님과 보살상을 모셨기 때문에 불보살단(佛菩薩壇)이라고 합니다. 혹은 줄여 불단(佛壇)이라고 합니다. 이 상단에는 그 절의 본존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는게 상례입니다.

      중단(中壇)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 신장단(神將壇)을 중단이라고 합니다. 여러 신장님을 모신 단상이기 때문에 신중단(神中壇)이라고도 합니다. 제석천이나 사천왕, 대범천 등의 천상 신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마, 마후라 등 팔부신장 등을 모신 곳입니다. 또한 우리 민속신앙에 의해 칠성과 산신이 모셔져 있기도 합니다.

      영단(靈壇)
      영가(靈駕)의 위패가 모셔진 단상이며, 후불탱화로서 통상 아미타여래영도와 감로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이곳을 하단(下壇)이라고도 합니다.

      대웅전 / 극락전 / 대적광전 / 약사전미륵전(용화전)관음전(원통전) / 문수전 / 보현전
      천불전 / 응진전 / 조사전 / 장경각 / 강당 / 포살당 / 선방 / 승방 / 명부전(지장전) / 영산전(팔상전)
      나한전 / 산신각 / 칠성각 / 독성각 / 범종각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항상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大雄'이란 대웅(大雄)은 산스크리트 마하비라를 번역한 말로서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두루 펼친 위대한 영웅이란 뜻이다. 즉 이곳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불 좌우에는 협시보살로 보통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위치하나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에 배치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로서 역사적인 부처이다.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현명한 사람이란 뜻이므로 곧 석가족의 성자(聖者)라는 말로 석존이라고도 부른다. 이름은 싯달타, 성은 고타마에 해당한다.
      석가의 모습은 처음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열반한지 약 500년이 지난 1세기경 전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그 형상이 규범화되었다. 형상에는 부처의 일생과 관련된 탄생불, 반가사유상, 고행석가상, 항마성도상, 최초 설법상, 열반상 등을 비롯한 단독상 이외에 석가삼존상, 석가 다보이불병좌상(釋迦 多寶 二佛幷坐像) 등이 있으며 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팔상도(八相圖)와 석가설법도, 석가 중심의 군상도(群像圖) 등도 있다. 인도의 초기 불상은 대부분 석가불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에서도 석가불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석가불은 입상일 경우에는 시무외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하고 좌상은 선정인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서는 항마촉지인과 지권인을 한 불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극락전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 극락을 인도하시는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명장수의 성격을 갖고 있는 무량수불을 모시지만 아미타불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경우는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이다.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한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가지고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48대원(四十八大願)을 세웠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 부르면 극락왕생 시켜 준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로 정토사상의 발달과 함께 중국, 우리나라, 일본 뿐만 아니라 인도 및 서역 등에서도 일찍부터 널리 퍼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아직 조상의 예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경우는 6세기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7세기 후반경에 많이 제작되었다. 그 형상에는 단독상과 삼존상이 있는데 보통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손모양을 취하고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대세지보살 자리에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 아미타불을 보편적으로 신앙하게 되어 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감산사 아미타석불입상을 비롯하여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상, 황복사 삼층석탑 출토 순금아미타불상 등이 단독상으로서 유명하고 대표적인 극락전은 천은사와 무위사에 있는 극락전이고 무량수전으로는 부석사가 유명하다.

      대적광전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삼신(三身)이라고 한다. 법신은 報, 化의 근본이 되는 몸이다. 따라서 법신불을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보신은 과보신(果報身)으로 수도의 결과로 이루어진 몸이란 뜻이다. 화신은 응화신(應化身)으로 역사적인 현재의 이 육신을 뜻한다. 그러므로 法, 報, 化가 별개의 몸인 동시에 한몸이기도 하다.
      청정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법을 설한다고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다.
      화엄종 사찰에서 비로나자불을 본존불로 봉안한 건물을 말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화엄전, 비로나자불을 봉안하였으므로 비로전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장엄된)세계는 깊은 선정과 지혜의 빛으로 충만한 세계이므로 대적광전이라 한다.
      그래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의 주존불은 역사적인 존재인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되어 있다. 좌우로 보신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 보살이고, 보현은 덕행(德行)을 상징한 보살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청정한 법신(法身) 안에는 지혜와 덕행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형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특히 9세기 중엽경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보림사 비로자나철불(858년),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865년), 축서사 비로자나석불(867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약사전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인 약사불(藥師佛)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일명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광세계(淨瑠璃光世界)에 살면서 12대원(十二大願)을 발하여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의왕(醫王)으로서 신앙되었던 부처이다. 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하면 약사불의 정유리세계는 아미타 정토와 같고 그 좌우에는 일광과 월광의 두 보살이 모시고 있으며 또 권속으로 12신장(十二神將)을 거느린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다른 여래와는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원래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약사경변상도(藥師經變相圖)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조상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법사가 약사경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했다는 삼국유사 권 3 및 권 5의 기록에 따라 7세기 중엽부터 약사불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인 예로서 신라시대의 분황사 금동약사불을 비롯하여 백률사 금동약사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방어산 마애약사불(801년) 등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 전각이 상당히 많은 편으로 통도사 약사전, 송광사 약사전, 관룡사 약사전, 고운사 약사전 등이 남아 있다.

      미륵전/용화전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로, 미륵불 또는 자씨(慈氏)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륵전 혹은 용화전(龍華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끝을 위로 향하게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과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로 왼손끝은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로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혹은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을 모신다.
      원래 석존의 제자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석존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세상에 출현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석존 때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불이다. 인도에서는 보살형의 모습으로 과거 7불과 함께 조성된 예가 있으며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부터 유행하여 북위시대에 조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당, 송대에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미륵정토변상도(彌勒淨土變相圖)도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 때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으며 회화나 조각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고 특히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도 일반적으로 미륵보살로 볼 수 있다.

      관음전/원통전

      관음보살을 모신 사찰의 전각이 관음전이다. 사찰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대자대비를 기원하는 관음신앙의 성행과 함께 관음전(觀音殿)이 매우 많이 건립되어 있다. 이 관음전에는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 등의 편액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관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대자대비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觀世音), 광세음(光世音),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고도 한다. 초기 대승불교 경전에서부터 나오지만 특히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 위난을 만났을 때 그 이름을 외우기만 하면 중생의 성품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로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협시하는 보살로서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화불을 새기고 손에는 보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는 도상으로 표현된다. 또한 화엄경에 의하면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 보살은 관음신앙이 발달함에 따라 여러 가지의 변화관음으로 나타나는데 11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 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을 비롯하여 여성형인 준제관음(准提觀音) 그리고 마두관음(馬頭觀音)과 같은 분노형도 나오게 되었다. 이 밖에 수월관음(양류관음), 백의관음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엽의관음(葉衣觀音), 다라존관음(多羅尊觀音) 등 특수한 이름을 가진 여러 관음을 모은 33관음도 있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신앙되었고 대중에게도 가장 친숙했던 보살로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문화 지역에 조각이나 회화 유품으로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단독상과 아미타삼존의 협시로서의 예가 있는데 그중에서 경상북도 선산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상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상 등이 단독상으로서 유명하다.

      문수전

      문수전(文殊殿)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시고 있다. 석존의 교화를 돕기 위해서 나타나는 보살로 여러 보살 가운데 대표라 할 수 있고 관음보살 다음으로 많이 신앙되었다. 대승경전 중에서 특히 반야경의 내용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보살이다. 석가의 왼쪽 편에 서서 보현보살과 함께 삼존상을 형성하였으며 후대에는 비로자나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회화에서는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상대자로서 표현되는 예가 상당히 많다. 형상은 대일여래의 5지(五智)를 상징하는 5계를 머리에 맺고 있는 동자형으로 표현되지만 보통 보살의 모습으로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이나 경전을 들고 있고 왼손은 연꽃을 쥐고 있다. 대좌는 연화대좌가 일반적이나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獅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오대산(일명 청량산)을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는데 이 신앙은 신라 자장법사에 의해서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문수보살상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1466년)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드물게 사자좌와 흰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문수 보현보살상이 경주 불국사와 합천 법수사지에서 각각 출토되어 현재 대좌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보현전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자비나 이(理)를 상징하는 보살로, 보현전(普賢殿)은 이 보살을 주불로 한 전각이다. 대승불교의 보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살로 모든 부처의 이법(理法)을 실천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또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덕을 가졌다고 해서 보현연명보살,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10대원(十大願)을 발해서 그 역할을 행하는 보살로 되어 있고 법화경에는 이 경의 수행을 권하기 위해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출현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어 석가불의 양 협시보살로 왼쪽에 문수,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서 있는 삼존형식이 되었다. 형상은 일반적으로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밀교에서는 연화좌 위에 검을 쥐고 있는 보살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유행하지 못했으나 삼국유사 권 3에 의하면 신라 경명왕 때 흥륜사 벽에 보현보살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유품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감실에 있는 보현보살상 등이 남아 있다.

      천불전(千佛殿)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이를 의미함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각각 천불씩 존재한다는 의미로 천불전이라 이름한다. 천불전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륵불(彌勒佛)을 위시하여 누지불까지 현겁천불을 모시며,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의 삼천불을 모신 사찰도 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응진이란 ‘존경받을 만하다’, ‘공양받을 만하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여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했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16나한의 각 명호는 빈도라발라사, 가낙가벌차, 가낙가발리타사, 소빈타, 낙거라, 발타라, 가리가, 벌사라불다라, 술박가, 반탁가, 라호다, 나가서가, 인게타, 벌나바사, 아시다, 주다반탁가 등이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더불어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갖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민간신앙에는 무수한 설화들이 등장하며 서민들의 기복신앙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500나한을 모신 곳으로 유명한 곳은 금산사 나한전, 옥천사 나한전, 기림사 오백나한전, 송광사 나한전 등이다.

      조사전(祖師殿)

      조사전은 역대 조사나 그 종파의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역대 주지스님 등 해당사찰과 관련하여 후세에 존경받는 스님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조당, 조사당, 국사전(國師殿) 등으로도 부른다. 특히 통도사의 영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정을 보존하고 있으며, 송광사 국사전과 해인사 조사전, 신륵사 조사당 등이 대표적이고 불영사의 의상전에는 의상조사의 영정과 더불어 원효대사, 종봉대선사, 청허대선사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장경각(藏經閣)

      장경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佛經)이나 목판(木板)을 봉안한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大藏殿) 혹은 판전(板殿), 법보전(法寶殿) 등으로 불리운다. 대표적인 곳으로 합천 해인사의 장경각과 예천 용문사 대장전, 선암사 장경각, 용주사 경각 등 많은 예가 있다. 특히 용문사 대장전에는 경을 넣어 돌리면서 열람하거나 예배하는 윤장대라는 것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강당(講堂)

      강당은 불교의 교설을 강의하는 곳으로 조선시대의 선종에서는 법당이라 불렸다. 신라 때까지는 모든 절에 강당이 반드시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법당 앞에 있는 만세루 등의 누각(樓閣)이 강당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며, 모든 설법은 원칙적으로 이 곳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설법전(說法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포살당(布薩堂)

      스님들은 보름마다 모여 참회하는 포살법회를 갖는데, 이 때 모이는 곳을 포살당이라 하며, 이때 계를 설하기도 함으로 설계당(說戒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방(禪房)

      스님들이 참선하시는 방으로, 선종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각이라 하여 선불당(選佛堂)이라고 한다.

      승방(僧房)

      스님들이 거주하시는 방으로 석가모니불 생존 당시부터 필수적인 건물이다. 삼국시대나 신라시대에는 금당(金堂)의 동서(東西)로 배치되어 동서승당이라 했으며, 조선시대부터 요사채라 불리고 있다.

      명부전/지장전 

      명부전(冥府殿)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석가불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해 주는 보살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 지옥의 시련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신앙되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 특히 민간들의 깊은 믿음을 받았다. 지장시륜경,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이미 여래의 경지에 이르렀고 무생법인(無生法印)을 얻었다고 한다. 형상은 보관을 쓰고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반면에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두건을 쓰고 손에는 보주(寶珠)와 석장(錫杖)을 지닌 스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지팡이(석장)로 지옥의 문을 두드려 열고, 밝은 구슬(보주)로는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비추기 위해서 이다. 또한 단독상일 경우는 좌우에 명부를 주재하는 10대왕[시왕(十王)]을 거느리고 있으나 그 외에는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나 아미타 8대보살의 하나로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단독상 또는 육도도(六道圖),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로 그려진 예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서 지장보살이 신앙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이르러 더욱 유행을 보게 되었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시대의 선운사 지장보살상이 있다.

      영산전(靈山殿)/팔상전(捌相殿)

      영산전은 영산회상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 또는 5백나한을 모시기도 하고,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팔상전이라 부르는데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존상을 모실 경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함께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을 모신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에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되실 분이고 제화갈라보살은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신 분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더불어 이 두 협시보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상징하고 있다. 법주사, 쌍계사, 운흥사, 선암사, 범어사, 보경사 등의 팔상전이 알려져 있다.

      나한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자들을 봉안한다.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아라한은 번뇌를 완전히 끊은 성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공양받아야 하므로 응공, 진리와 함께 하므로 응진, 더 배울 것이 없으므로 무학이라고 번역하며 이 아라한의 경지를 아라한과라고 한다.
      나한전에는 보통 오백나한이나 십육나한을 봉안하는데 나한은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하여 많은 나한전이 건립되었다.

      산신각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뒤쪽 한편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여 모셔 놓은 조그마한 전각이 있다. 재물을 주는 산신(山神),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七星),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獨聖)은 인간의 복을 관장하는 신들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구복(求福)적인 기도을 하였다.
      3칸일 경우에는 산신과 칠성과 독성을 함께 모신 삼성각(三聖閣)이 되고, 한 칸의 건물을 지어 산신, 독성, 칠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이라는 독립된 이름을 붙였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 없는 민족 고유의 토착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어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되었다.
      이 곳에는 주로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을 한 산신상이나 이를 그린 탱화,치마 저고리를 입고 호랑이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상, 백발의 수염에 긴 눈썹을 날리며 손에는 깃털부채나 불로초를 들고 있는 산신을 그린 탱화 등을 봉안한다.
      그리고 독성·칠성·산신을 함께 봉안한 곳을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칠성각

      자손에게 복을 주고,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구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하고, 수명을 연장, 길게 한다는 칠성신을 봉안한 전각이다.
      칠성은 중국의 도교와 관련 있는 것이었으나 한반도에 전래되어 불교에 흡수되면서 불교적으로 변용되었다.

      독성각

      나반존자를 봉안한 전각이다.
      이 존자는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혼자서 스승없이 깨친 독각의 성자였다고 하여 이 전각을 독성각이라고 한다.
      나반존자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일을 꿰뚫어 알고 있고,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말법시대의 중생에게 복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한다.
      이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을 봉안하기도 하지만 보통 독성탱화를 많이 봉안하는데 이 탱화는 천태산을 배경으로 하여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늙은 비구가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범종각

      범종각(梵鍾閣)은 범종이 있는 곳으로, 그 전각이 2층의 누각일 경우에는 범종루(梵鍾樓)라고 한다.
      이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불이문과 동일선상에 위치하는데, 그 까닭은 글자 그대로 범종각에서는 범천(梵天)의 종소리가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범천은 수미산 정상의 하늘에서 불이문으로 들어오는 구도자를 환영하고 그가 불이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하늘의 주악을 연주한다.
      이 범종각에 때로는 범종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 있는 절에서는 범종 외에도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 등을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3) 법구(法具)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 / 목탁 / 요령 / 염주

      범종(梵鍾)

      사찰의 종루에 걸어놓고 당목(撞木)으로 쳐서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에 사용하는 큰 종을 말하며, 경종(鯨鐘), 조종(釣鐘), 당종(撞鐘)이라고도 한다. 종소리는 뭇 생명 있는 이들을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설법이다. 탐욕과 번뇌로 가득 찬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맑게 정화하기 위해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 아침에는 28번을, 저녁에는 33번을 울립니다.
      범종을 울리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옛날 인도에는 건치라고 불리우는 악기가 있었다. 부처님의 설법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모을 때 아난이 친 이 건치는 그 뒤 인도의 불교 교단에서 사람을 한 곳에 모을 때 널리 사용되었다. 이 건치가 오늘날 종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분명한 생김새를 알 수 없다. 중국에서는 은과 주나라에 종이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에는 타원형이나 둥근 모양의 동탁(銅鐸)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동탁이나 풍탁(風鐸)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쇳소리를 내는 작은 금속악기들이 크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이 범종이라고 보고 있으나 그 기원에 대한 뚜렷한 설은 아직 없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으나 그 빼어난 소리에 걸맞게 크고 우람하면서도 날씬한 통일신라 종이 으뜸이며, 중국이나 일본 종의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형태는 매달기에 편리하도록 용뉴(龍紐)와 음향의 효과를 위한 용통(甬筒)이 종의 맨 윗부분에 있으며 그 아래 몸체는 대부분 상대(上帶), 중대(中帶), 하대(下帶)로 구분되고 이들 사이로 유곽(乳廓), 당좌(撞座)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당좌 사이에는 비천(飛天)이나 불, 보살, 나한상들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특히 비천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나서 통일신라 종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청동으로 만든 것이 많지만 드물게 철로 주조된 예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상으로 삼국유사 권 4에 신라 경덕왕이 754년 황룡사에 길이 1장 3촌, 무게 49만 근에 달하는 큰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금속공예의 주조기술과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유물 중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상원사 동종(725년)이 가장 오래 되었으며 또 크기와 형태미를 대표하는 성덕대왕신종(771년)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범종의 전통을 이어 많이 제작되었으나 형태가 투박해지고 주조기술이 정교하지 못하는 등 약간의 퇴보를 보여줄 뿐 아니라 크기도 작아져서 30cm 정도의 공예적인 성격이 강한 소종(小鐘)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예로는 천흥사 동종(1010년), 내소사 동종(1222년), 탑산사 동종, 용주사 동종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홍천사 동종(1462년)을 비롯하여 낙산사 동종(1469년), 봉선사 대종(1469년), 갑사 동종(1584년) 등 많은 종들이 전해지고 있다.

      법고(法鼓)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으로, 불법을 널리 전하여 중생의 번뇌를 물리치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법고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구성하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양면은 소의 가죽을 사용한다. 이 소가죽을 댄 법고는 축생(畜生)을 제도하기 위하여 친다고 한다.
      짐승을 비롯한 땅에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 법고는 예불시간에 가장 먼저 울려 퍼지는 것이다.
      특히 이 양면에는 암소와 숫소의 가죽을 각각 부착하여야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하여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는 음양의 조화에 따른 것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소리, 조화의 소리야말로 중생의 심금을 울려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의 몸체 부분에는 보통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며, 두드리는 부분의 가운데는 만(卍)자를 태극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고 진언(眞言)을 적어 넣기도 한다.

      목어(木魚)

      나무를 깎아 긴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서 사찰의 종루나 고루 또는 누각에 걸어놓고 아침, 저녁 예불 때 치는 불구의 하나로, 목어고(木魚鼓), 어고(魚鼓), 어판(魚版)이라고도 한다.
      물고기의 배부분을 파내고 배부분 안쪽의 양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게 한다.
      선종에서 사찰규범의 지침서로 삼았던 백장청규( 百丈淸規)에 따르면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자지않고 도를 닦으라는 뜻으로 목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는 새벽과 저녁예불과 큰 행사가 있을 때 이 목어를 두드려서 물 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식당이나 창고 등에 걸어 두고 오로지 대중을 모으는 데에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길게 두 번을 두드려서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고, 한 번 두드려서 대중을 모으는 데만 사용하였던 것이 뒷날 독경이나 의식에 쓰는 법구(法具)로 용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그 형태도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모양이었으나 차츰 용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취한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변형되어 갔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많이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둥근 형태로 변한 것을 특히 목탁이라고 부른다.

      주로 청동이나 철로 얇게 만들어 두들겨 소리를 내는데, 그 생긴 모습이 뭉게구름 같다 하여 운판이라 부르게 되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할 수 있다고 한다. 형태를 살펴보면 맨 위에는 매달기 위한 구멍이 2개 뚫려 있고 그 아래로는 당좌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형식에는 문양의 장식에 따라 단면식과 양면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운판이 인도에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선종(禪宗) 사찰에서는 부엌이나 재당(齋堂)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한다. 이를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도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불을 다루는 부엌에 걸어 두어 화재를 막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부엌에서는 밥이나 죽이 끓을 때 세 번을 치므로 화판(火版)이라고도 하였고, 끼니때를 알리는 경우에는 여러 번 길게 치므로 장판(長版)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는 부엌에서 운판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차츰 불전사물의 하나로 바뀌어 조석예불 때에 치는 의식용구가 되었다.

      목탁(木鐸)

      목어와 같이 주로 깨우침의 뜻이 있습니다. 목탁은 대중을 모으는데 사용하는 신호이기도 하며 모든 의식 집전에 가장 많이 쓰이는 법구입니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어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나무로 만든 것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목탁은 목어에서 유래 그 형태 또한 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긴 고기 모양을 취한 목어와는 달리 둥근 형태로 만들어지며, 사실적인 조각이나 색칠보다는 앞 부분의 긴 입과 둥근 두 눈으로 고기임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목탁은 목어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그 소리를 듣고 목어에 얽힌 전설이나 잠을 자지 않는 고기를 연상하여 더욱 열심히 수행할 것을 유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탁이라는 단어는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둥근 형태의 목탁도 목어라고 표기한다.
      이 법구들은 거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요령(搖鈴)

      요령은 남방계통에서는 볼 수 없는 법구입니다. 본래 밀교계통에서 사용하던 도구로서 북방계통의 사찰에 전해져 지금은 모든 의식 집전에 없어서는 안될 법구입니다.

      죽비

      죽비란 중국 선원에서부터 대나무 통이나 뿌리로 만들어 쓴 것인데, 목탁과 같이 선방에 앉고 일어서고 입선과 방선, 그리고 공양할 때 행동 통일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선방에서는 언제나 정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목탁보다 조용하고 간편한 법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염주(念珠)

      염주는 부처님께 기도하거나 절을 하면서 참회할 때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법구인데 보통 108개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의 상징으로 신앙되고 있는 보리수 열매로 만들어 사용했으나, 지역에 따라 독특한 나무나 그 밖의 재료(율무열매, 용안주, 금강주, 다양한 보석 등)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법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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