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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한국인 - 金東華(뇌허 김동화)

•- 목 차 -
1.과거의 불교와 우리 민족
2.현대 우리 민족의 급선무적인 과업
3.불교의 근본이념과 현대의 우리 민족

 

〈파스칼〉은 인생의 특성과 그 위대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생은 한 대의 갈대에 불과하다. 자연계내에서도 제일 약한 물건이다. 그러나 이 갈대는 생각(思惟)하는 갈대이다. 인생을 짓밟아 없애는 데는 우주 전체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一洙의 물거품이나 一滴의 물로도 인생을 죽이는데 충분하다. 그러나 인생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훨씬 유력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주는 그것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생은 인생을 죽이는 물건보다도 훨씬 고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존엄은 오직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점에 있다. 우리는 사고력에 입각하여 자기를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향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하자.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도덕의 근본원리인 것이다.』

일체 만물 중에서도 동물의 동물다운 특징은 움직이는 데 있는 것이요, 또 모든 동물중에서도 인간의 인간다운 특징은 사고하는 데 있는 것으로, 동양에서 일찍 『天地之間 萬物之中에 惟人이 最貴』라 한 것이라든지, 또 불교에서 『蠢動含靈者는 皆有佛性』이라 한 것 등은 모두 정신을 소유한 점을 말한 것으로, 東西가 동일한 견해를 道破한 것이다. 사실 그렇다. 자연계에는 문화가 없고, 역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며, 하등동물계에도 그것은 없다. 문화와 역사는 오직 인류계의 특산물로서, 그 원동력은 실로 인생 특유의 사고력에 있는 것이다. 이 사고력은 사상을 자아내고, 사상은 또 문화를 형성하며, 그 문화는 인류의 역사를 창조하여 가는 것이다.

우리 나라 고대민족은 과연 어떠한 특색있는 사상을 가졌었던가?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문제요, 또 퍽 궁금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뚜렷한 무엇이 있다거나, 또는 그것을 찾아볼 만한 근거라도 남아 있다면 연구·탐색해볼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우리 고대민족의 생활 및 思索에 관한 것이라고는 유물·유적은 물론 문헌조차도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실정이니 실로 막연한 일이다. 중국문헌에 의한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漢나라 사람인 司馬遷의 《史記》에 우리 나라 고대민족생활에 관한 記事가 있다고는 하나 그것 역시 그대로 신용할 수는 없는 「箕子封朝鮮國說」이요, 그 다음 1900여년 전 後漢사람인 班固《漢書地理志》에 보이는 記事에는 『우리 고대민족의 생활상은 그대로 믿을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서도 구체적인 사상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어느 나라 고대민족에서도 흔히 있었던 「敬天崇神」의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문헌에 의하는 한, 우리나라 고대민족의 독특한 사상이 발생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북부 대륙으로부터는 漢민족의 사상이 전래하고, 또 중국을 통해서는 인도사상인 불교사상이 전래하여 고대민족들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은 국내외 문헌이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이다.

 

1. 과거의 불교와 우리 민족

古문헌에 의하는 한 한민족사상의 정화인 유교사상이 어느 때에 우리 나라에 수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불교보다도 먼저 수입되었을 것은 지리적으로 보나, 국교상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다. 문화적으로 중국과 국교가 맺어진 것은 삼국시대부터로서, 지리적 관계로 중국은 고구려와 가장 먼저 국교를 맺었을 것이니, 그것은 서기 372년, 즉 소수림왕 2년의  일일 것이며,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삼국사기) 했으므로 이것은 틀림 없이 유교사상을 토대로 한 국민교육기관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유교의 수입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인 교육기관을 세워서 국민교육을 실시한 그 이후로도 일반문화상으로는 이렇다할 공적을 남긴 것은 없었던 모양 같고, 다만 불교에 관한 記事만이 내외 문헌상에 散見된다. 그러면 불교가 수입된 후 이 나라 이 민족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가? 이에 그 鳥瞰圖的인 고찰을 하기로 하자.

1) 고구려시대 - 철학적 이해의 불교

고구려에 불법이 전래된 것은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왕 2년(서기 372)의 일로서, 이 때 秦王  堅이 使者로 하여금 浮屠 順道와 불상 및 불경 등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 다음 제 18대 故國壤王 8년(서기 392)에는 일반 국민에게 불법을 崇信해서 복을 구하라는 령을 내렸다 하니, 이것은 불교를 국교로 정한 頒布이었다. 그러면 그 후 불교는 우리 고구려 민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고구려에 처음으로 전래한 불교가 어떠한 불교(小乘·大乘中)이었던가 하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불교가 수입된 170-80년 후에, 유명한 僧朗이라는 고승이 있었는데 그는 「삼론종」의 대학자이었다. 그의 명성은 본국에서보다도 중국에서 더 높았던 것으로서, 그 당시의 중국은 梁나라 武帝시대(서기 501∼558)이었으며, 梁의 무제는 승랑의 위대한 학덕을 알고 그의 문하에 학승 열명을 파견하여 「삼론학」을 계승케 하였다. 그러한 결과, 드디어 중국에도 「삼론종」을 개설한 吉藏(549∼622)이 배출되었다. 중국의 삼론종조인 길장은 승랑으로부터 작접 수학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삼론종학을 수립함에 있어서는 모든 학설의 근거를 승랑의 설에 두었던 것이며, 이로써 그가 승랑의 학설을 얼마나 권위있게 보았던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삼론학」을 전해준 것은 물론 중국이었지만, 그러나 중국에서는 당시 아직도 그것을 一宗으로 독립시킬 만한 學解가 완비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고구려의 학자인 승랑의 학설에 의하여 비로소 길장이 일종을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승으로서 중국에 가서 「삼론학」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은 승랑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즉 질장과 같은 시대의 고구려 사람으로서는 實法師와 印法師등이 있었고, 그들 역시 권위있는 삼론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모두 중국 문헌에 나타나 있는 사실들이므로 명확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또 고구려의 慧灌(605)이라는 삼론학자는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삼론종을 개종하여, 초기 일본불교인 「奈良六宗」中의 一宗이 되게 하였으며, 또 그 후 고구려僧 道登(628)도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종지 闡揚에 노력하였다. 이것도 일본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그 밖에도 중국문헌에 의하면, 智先(581)이라는 薩婆多宗의 학자와 波若(598)라는 천태종의 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 우리 나라의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 말기에 普德(650)이라는 「涅槃宗」학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상의 「三論」「薩婆多」「天台」「涅槃」등의 諸宗은 순수한 철학적 이론과 체계를 갖춘 철학적 불교인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철학이 당시 고구려민족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요, 실로 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적 사고에 세련된 역대 철학자들로서도 오히려 아직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형편인데, 지금으로부터 3400년전의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쉽게 이해하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해가 틀림 없는 사실이라는 것은 모두 중국이나 일본의 그 당시 학자들이 증명하여 준 것에 의하여서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철학사상을 가지지 못하였던 고구려 민족들이 이러한 고등철학을 수입하여, 타민족을 능히 지도할 만큼 되었을 정도로 소화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고구려의 불교는 우리 민족에게 철학을 준 불교라 할 수가 있다.

2)백제시대 - 생활화의 불교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제 15대 枕流王 원년 9월, 胡僧 마라난타에 의하여 晋으로부터 불법이 들어온 것이라고 하며, 그 다음 제 17대 阿華王 원년(392) 2월에야 국내에 下敎하여, 불법을 숭신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복을 구하도록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셈이다. 백제민족이 불교사상을 소화한 실적을 찾아볼 만한 국내 문헌이라고는 없으나, 주로 일본에 전래시킨 역사에 의해서 본다면, 서기 602년에 觀勒이라는 백제의 고승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바, 그는 일본의 초청에 의하여 갔으며, 渡日후에는 勅命에 의하여 元興寺에 거주하게 되었고, 俊秀한 자들은 선발해서 그에게 취학케 하였다 하는데, 그의 불교학의 전공은 「삼론학」이었다. 그리고 道藏이라는 고승도 서기 684년에 역시 일본에 건너갔었다는데 그는 성실학자이었다. 그는 49세 때에 일본에 가서 41년간이나 살다가 90세에 입적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成實論疏》16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이 책이 일본에서 「成實學」을 연구하는 데 없지 못할 지침서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후 일본에도 「成實宗」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는 실로 일본 「성실종」의 종조가 된 셈이었으며, 「성실종」도 「奈良六宗」中의 一宗이었다. 이상 2宗은 철학종이기는 하나, 그리 특색있는 발전은 하지 못한 것 같고, 그러한 반면 백제나라 사람들은 실천과 불교사상의 실생활화에 보다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20대 聖王 4년(526)에는 사문·謙益이 인도에 가서 범문을 공부한 후 《論藏》과 《律藏》을 구해가지고 돌아와 국내 학자 28명과 더불어 「律部」72권을 번역하여 백제율종의 鼻祖가 되었다 한다. 중국서도 이미 그 이전부터 여러 가지 《律藏》이 번역되어 있었다지만,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인도에 가서 《律藏》을 구해왔다는 데는 그 이유가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백제의 실천불교인 이 「율종」은, 그 당시 외국에까지도 상당한 권위를 떨쳤던 모양 같고, 일본에서도 두 尼僧이 와서 3년 동안이나 공부를 하고 간 사실이 있다.

백제민족은 철학적 사상이나 관념적인 신앙사상에만 기울어지지 않고 실생활을 중요시하여 불교의 사상을 실생활화하고 실천했는데, 그 뚜렷한 사실은 제 29대 法王 원년(599) 10월에 국내에 布告하여 살생을 금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민가에서 기르는 鷹· 등은 놔주게 하고 魚獵의 도구들은 모두 불질러 버린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不殺生」이라는 불교의 一戒律을 실천하였다는 것보다도 동물을 수호하는 자비의 사상을 실행함으로써 그것을 국민도덕의 하나로 삼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三國 중 일본과 가장 國交가 돈독하였던 나라는 백제로서, 이 양국간의 관계를 전하는 문헌이 국내에는 없으나 일본의 문헌에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 그에 의하면, 백제는 사상으로서는 유교와 불교가 중심이고, 일반문화로서는 불교적 문화를 주로 하여 이것을 일본에 전달했던 것이라 한다. 불교를 일본에 전한 것은 백제 聖王때의 일로서, 그때 백제는 석가불금동상과 幡蓋·《經論》등을 보냈다 한다. 그 후 불교적인 建築工 및 畵工·製紙工·瓦工 등과 기타 일상생활의 발전향상에 이바지할 많은 기술자들이 일본의 초청을 받아 끊임없이 왕래하는 실정이었다. 백제문화를 알려면 우리 국내에서는 미약한 그 유적이나 전설로써 알 뿐이지만,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지상에 엄연히, 그리고 웅장하게 남아 있는 백제문화에 의하여 이룩된 伽藍·當塔·繪畵·彫刻 등에 의해서 자세하고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백제의 불교는 백제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되고 소화되어 실생활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신라시대 - 민족적 躍動의 불교

지리적인 관계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화의 혜택은 신라가 가장 나중에 받게 마련이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헌이 있지만, 그 가장 고대의 설에 의하면, 毗處王 10년(488)에 이미 그 궁중에 內佛殿이 있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나 백제 등 나라들로부터 불교가 들어왔으리라고 생각된다. 불교가 정식으로 국교화되어 일반 국민들이 마음 놓고 믿게 된 것은 23대 法興王 15년(528)때부터의 일이다. 신라에 불교가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삼국통일 후 즉 서기 650년 이후의 일로서, 이 때의 불교는 麗·濟 양국에 유포되었던 불교가 모두 신라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는데, 또한 唐나라에 유포되고 있던 13종의 불교도 거의 다 신라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상 내용은 이론불교와 실천불교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전자는 즉 철학적 불교로서, 앞에서 말한 三論·薩婆多·成實·涅槃·天台등 제종 외에 攝大乘·唯識·華嚴 등 제종이 더 나타났고, 실천불교로서는 彌陀·彌勒·秘密·禪 등 제종이 새로 유포되어 호화찬란한 불교의 여러 가지 사상이  存하였던 것이다. 환언하면 신라 통일 이후의 불교는 철학적으로도 이해될 대로 이해되어, 唐나라 불교와 어깨를 겨누어 學解의 경쟁도 했었고, 또 신라 學解의 우수성이 그들에게 인정되어 인용되는 일이 적지 않았으니, 전자에 속하는 것이 圓測과 道證이요, 후자에 속하는 것이 원효등이다. 그리고 실천불교로서도 당나라에서 실천되던 여러 종이 모두 유포되어, 이 강토의 불교로ㅗ서는 실로 蘭菊의 美를 다투던 最盛期의 불교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니라의 불교는 다만 이애에만 그치는 철학의 불교도 아니요, 또 다만 형식에만 치우친 실천불교도 아니었다. 불교의 철학적 이념이 곧 신라백성의 생각이 되고, 또 그 실천적 불교가 그들의 일상생활의 행위·행동이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신라의 국가적 통일 대업과 그 찬란 무비한 문화를 산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불교의 정신이 신라의 백성을 약동하게 하였던 것이니, 그 정신이라 함은 다름아닌 대승불교의 「眞俗一如」의 사상으로서, 眞이라 함은 불교의 이상이요, 俗이라 함은 세속적인 일상 생활상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은 일상생활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을 충실히 하는 동시에 국가를 완전히 확립하여 가는 데 있는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실천되었던 증거로서 우리는 僧俗의 渾然一體, 花郞道, 鎭護國家行事 등의 사실을 들 수 있다. 먼저 僧俗渾然一體의 예를 본다면, 국정을 다스리고 국가를 보호하여 가는 데는 僧俗의 別이 없었다.  승려들이 執政官도 되고(文武王時, 信惠法師), 자장·의상 등과 같이 정치고문도 되어서 국가의 安泰에 항상 마음 쓰기를 잊지 않았었다. 그 다음에 활화도 교육의 정신은 儒佛仙 3敎의 사상이라 하나, 기실 그 당시 청년들의 師表가 된 인물들은 불교의 고승들로서, 圓光法師같은 사람은 그 좋은 예다. 그 다음 鎭護國家의 원리를 가진 것은 불교의 특징이요 또 이것을 집행하는 것도 승려의 특권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소승불교에는 전혀 없는 대승 특유의 사상인 것이다. 元曉大師 같은 이는 이 眞俗一如사상의 대표적인 실천자요 또 선포자이었다. 이 사상을 선포·실천하기 위하여서는 僧俗의 직위에 구애됨이 없이, 또 곳의 구별과 사람의 高下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그 정신을 보급시켰던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전무후무한 신라 특유의 문화를 이룩하였던 것인데, 신라의 문화는 곧 불교정신을 체득한 신라백성의 躍動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고려시대 - 惰眠的 불교

「盛者必衰」란 말을 당연한 원리인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나, 결코 그것은 그런 것은 아니며, 「盛者益益盛」하는 것이 도리어 원리일 것이다. 신라의 국력이나 문화 등 모든 것이 전례 없이 盛勢하였던 것이 어찌하여 쇠퇴하게 되었던가. 그것은 오로지 治者들의 驕傲와 태만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國權은 드디어 王氏에게로 넘어가서 高麗朝로 변하고 말았다. 비록 정권은 교체되었을 망정 국민의 민심은 의연히 前朝의 崇佛思想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새 집권자도 이것만은 꺾을 수가 없어서, 역시 숭불정택으로 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太祖「十訓要」의 제 1조에 『我國家大業은 必資諸佛護衛之力이라 故創禪敎寺院하고, 差遺住持焚修하여 使各治其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고려 태조는, 민심의 숭불사상에 영합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불보살의 진호국가적 신념에 철저하였고, 따라서 그는 그 신념을 자자 손손에게 철두철미하게 지킬 것을 遺訓하였던 모양이다. 즉 그는 수많은 승려를 국사·왕사로 추대하고, 또 일반 승려도 극진히 대우하는 뜻에서 宮內에서 무수한 飯僧會를 개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歷代朝가 이와 같이 불교를 극력 보호한 것은 좋았으나, 반면에 승려들은 그 중책을 자각하지 못하고 다만 명예와 優遇에만 팔려서 형식만 갖추고 실력배양에 태만했던 것이 결국 麗末에 이르러 유생들로부터 빗발치듯한 불교배척론에 開口도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麗朝 初中期에도 불교에 인물이 전연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으나, 王家와 宰相을 제외하고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하여 교화에 힘썼던 고승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麗朝의 불교는 왕가와 재상을 상대로 한 귀족불교요,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惰眠的 佛敎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麗末이 되어 李朝로 정권이 바뀔 때 抑佛政策을 썼으되, 승려로서는 일언반구의 항변도 할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니, 이야말로 自業自得이다. 王氏登極이 서기 918년, 그 이후 불교교학계가 얼마나 피폐하였던가 하는 것은 제 12대 文宗王의 第 4子인 義天이 당시 교학계의 不振을 개탄하며 宋나라에 건너가서(1085년) 華嚴·天台·禪旨 등을 널리 求學하여 온 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일반의 說로서 의천은 宋에 가서 천태학을 再求하여 왔다 하나, 그것은 천태학을 주로 한 견해에서 나온 말일 것이고, 사실 그가 宋에 가서 求學한 것은 그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모두 다 求學하고자 하였으니 (50여 고승을 歷訪), 그가 그와 같이 불교를 널리 구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본국의 교학 실정이 그만치 부진하고 있었던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후 제 20대 神宗朝에 출세한 知訥은 부진하는 禪宗을 재흥시켜, 松廣山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로 그 門孫의 偉才들이 배출되었으니 그것이 즉 16국사의 배출이었다. 그러나 그의 법력이 과연 全禪林을 지배하였던가는 의문이다. 義天은 교학계의 부흥에, 지눌은 선종의 재흥에 각각 온 정성과 힘을 기울였다. 이와같이 길러진 불교 내부의 역량은 일반대중에게까지 파급되었어야 할 것인데,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승려는 다만 국가의 安泰를 諸佛菩薩에게 기원하는 것으로써 유일의 能事로 알았을 뿐, 일반 민중과는 접촉이 적었었다.

5) 이조시대 - 은둔불교

麗末부터 국내 유생들은, 국가가 많은 국비를 들여가면서 승려를 우대하고 사원을 보호하는 정책을 누누히 비난 공격하는 上疏를 정부에 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李朝로 바뀌게 되자, 정부로서는 민심수습책으로도 抑佛揚儒의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억불정책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더 가혹해 가기만 했으며, 심지어는 승려의 도성 출입까지도 제한을 받게 되었으니, 세태가 변하는 것도 無雙한 노릇이지만 유생들의 雪寃政策도 너무나 심하여, 오히려 그들의 인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이에 대항하는 승려들의 표면적인 上疏나 義擧가 한 번도 없었으니 과연 忍辱道人들의 소행이라 할 것인가. 이 모두는 종교인으로서의 신념이 薄弱하고, 救敎扶宗의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自敎가 멸망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멸망한다기보다도 국가가 망하고 민족이 자멸하는 것이라는 각오가 있었던들 어찌 그 苛酷한 정책을 앉아서 감수할 수 있었겠는가. 이조시대 승려들의 무기력·무자각은 麗朝 惰性의 연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로 불교사상 수치스러운 일이다. 산속으로만 숨어들어간 것이 이조 승려들의 태도였다. 그러다가 李氏가 왕업을 계승(1392)한지 2백년만인 宣朝 25년(1592)에 일본군이 침입하여 倭亂이 벌어지자 당시 유생출신인 관리들이나 儒徒들은 우왕좌왕할 뿐 능히 이 적병을 물리칠 용기 있는 자라고는 찾기 어려웠던 모양으로, 平北 義州에 蒙塵하였던 宣朝는 묘향산에 은거중인 淸虛休靜을 불러서 국난 타개를 부탁하자, 청허는 이것을 마다 않고 八道에 檄文을 띄워, 老病의 승려는 앉은 자리에서 焚修祈願케 하고 그 나머지의 승려들은 총궐기하여 외적퇴치의 僧軍을 편성케 하였으니, 죽 松雲은 700여승을 이끌고 關東(江原道)에서, 處英은 1,000여승을 이끌고 湘南(全羅道)에서, 淸虛 자신은 5,000승을 이끌고 順安(平北)에서 각각 일어나 왜병을 퇴치하여 국난 타개에 큰 공을 세웠다. 산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있던 사나운 범이 위력을 떨침에 野獸들이 힘을 못쓰는 격이었다. 危急存亡之秋에는 물론 이런 것도 가상할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자신들의 정당한 임무는, 신라시대에 있어서와 같이, 평소에 일반국민으로 하여금 일조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총궐기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정신적 훈련을 시키는 데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에 일반 국민대중과 접촉이 없었으므로, 外敵들도 이러한 틈을 타서 侵寇하게 되었었다.

이조 500여년간의 불교는 다만 산중에 깊이 숨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수양을 쌓은 상당한 高僧碩德들도 없지 않았다. 그 교화의 방법은 구법하러 오는 자만을 상대로 하되, 다만 威儀와 道德으로써 하였던 것이 그 특색이라 할 수 있다.

6) 현대인 - 관망적 불교

이조 말엽(1910)이래 이 나라 山中불교는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고, 외래의 종교도 국내에 퍼지게 됨으로써, 일반대중도 옛부터 내려오는 자기의 고유한 것을 찾는 의식에서 자연히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 470여년간의 불교가 惰眠的이요, 이조 500여년간의 불교가 은둔적이었다 해서 전민족이 불교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뜻이 있는 자는 불교의 교리를 연구도 했을 것이요, 신앙도 했을 것이지만, 전민족적으로 볼 때는 관심이 적었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민족은 불교에 대해 그 前期와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부 識者層에서는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들어옴에 따라 피차를 비교하여 볼 필요성에 의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대부분의 無識大衆層으로서도 서양적인 종교는 그 사고방식과 의식 등이 전연 생소한 것이므로 그런 것을 보고 들을 때마다 은연중 동양의 종교를 연상하게 되는 관계상 재래의 종교인 불교를 상기하게 되는 것인 바, 이제는 전민족이 불교를 신앙하고 연구까지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두 다 무관심할 수는 없는 시대적 기운이 조성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해방 이후 도시의 일부 청춘남녀가 12월 25일의 「이브」를 유흥적으로 즐기는 반면, 전국 각지 鄕村의 일반 국민들은 음력 4월 8일을 공휴일 아닌 휴일로 정하고 각각 그 고장의 사원 참배라기보다도 절 구경을 하러 간다는 현상은 해방 전에는 보지 못하던 일로서, 이것은 일반 무식대중도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명확한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불교가 이 나라에 들어온 이래, 그간 興(고구려에서 고려까지 1018년간) 亡(이조 500년간)의 起伏은 있었을망정 陰陽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정신계를 주도하여 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麗·濟 양시대에는 불교적 철학·문화사상으로, 신라시대에는 불교적 민족·국가의식으로, 고려시대에는 國家祈護思想으로 각각 그 시대의 민심을 지배하여  왔다. 이조시대에도 불교 자체로서는 항상 국가안태를 기원하는 행사를 쉬지 않았었다. 시대별로 본다면 이와 같이 서로 다른 특색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교 도입 이래 근 1600년이 지난 오늘까지에, 불교에 의하여 培養되고 一貫되어온 민족적 인생관이라 할까 실천관이라 할만한 것은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勸善懲惡」의 사상인데, 이것은 현재의 우리 민족으로서는 벌써 상식화되어 있는 사상으로서 별반 다른 느낌도 없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있어 이 사상의 기원을 찾는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밖엔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諸惡莫作 衆善奉行」하라는 것은 三世諸의 공통된 교훈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서, 가장 중하게 여기는 교훈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선행을 해야하고 악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처음이었다.

둘째는, 「因果應報」의 사상인데, 이것은 인생이 선행은 해야 하고, 악행을 해서는 안 될 그 이유와 그 근거를 밝힌 사상이다. 선행이나 악행은 그것이 반드시 한 原因力을 구성해서, 그에 상당한 결과를 초래할 때까지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善因에는 善果가, 惡因에는 惡果가 반드시 따르는 것이므로 악행을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서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來世觀 즉 영원의 생명관인데, 인과의 관계는 今生 중에서도 성립되는 것이지만, 대개는 내세까지에 인과관계가 성럽되는 것으로, 현재의 우리의 상태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이 내세관은 결국 우리 인생의 생명체는 현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명의 영원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생은 이러한 인생 생명의 理想下에서, 인생 생활의 실천으로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 교리 중의 한 가지인 것이다. 현대 우리 민족은, 이러한 사상의 논리적인 관계는 잘 알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대체로 이러한 인생관 밑에서 생활의 실천을 하고 있는 것만은 또한 일반에게 있어 공통된 사실일 것이다.

 

2. 현대 우리 민족의 급선무적인 과업

현대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각자의 소견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과제를 내세올 수 있을 것이되, 국토의 통일이니, 국력의 충실이니, 민족문화의 창작 등등, 모두가 다 시급하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없다. 그러나 物에는 本末이 있고, 事에는 始終이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부과된 과업도 물론 많지만, 먼저 할 것이 있고 또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급선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민족적 이념수립의 필요성

이상에서 고찰하여 온 바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불교라는 외국의 사상에 의하여 그 시대 그 시대의 민심이 지배되어 왔었고, 또 이조시대에는 유교의 논리적 정치사상에 의하여 민심이 追從되어 왔을 뿐이니, 불교나 유교다운 사상으로부터 우러나온 우리 민족 고유의 독특한 이념의 발견이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불교사상에 지배되기 千여년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유교적 정책을 쓴다고 하니 하루 아침에 유교적으로 일반민심이 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청년들의 마음 속에서 유교적인 냄세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素絲는 皆可染」이란 말이 있는데, 우리 민족성이 그렇다고 한 대서야 너무나 섭섭한 일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 민족성에 변화성이 많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민족적 이념을 가지지 못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인도의 예를 본다면, 아리아종족은 그들이 우주의 근본 원리로부터 分生된 것이라는 自信을 가졌고, 중국인은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라(天生烝民)는 신념이 있어, 「원리」와 「하늘」에 각각 그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上古로부터 그 귀일점이 없었으므로 「此一時 彼一時」의 格으로 시대에 따라서 민심이 항상 동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 만년의 앞날을 위하여, 三천만의 이 민족만이라도 異體同心이 될 만한 민족적 이념을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선결문제이다. 그것은 민족적인 氏神도 좋고 이론적인 원리도 좋다. 그러나 氏神이라면 역사적 전통과 민족을 단결시킬 보편성이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이론적인 이념이라면 앞으로 우리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다 할지라도 변화되지 않을 보편타당적이고도 最高度的인 이념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이다.

2) 민족적 생활의 지표

전항의 민족적 이념은 민족 전체의 과제이지만, 민족은 원래 각 개인 발전의 집합체이므로 개인이 먼저고 민족은 나중이다. 전자는 민족을 통일할 원리임에 반하여, 민족생활의 지표라 함은 민족 各個體의 문제인 것이다. 즉 민족을 구성하는 각자는 무엇을 목표로 하여 일상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국민은 一君主를 위하여, 또는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 하라고 하며 국민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던 일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 제국주의시대의 제도였고, 때는 바야흐로 민주주의시대이다. 또 아무리 강압적인 제국주의시대에 살던 過剩忠誠者라 할지라도 자기 개체를 아주 무시한 忠君愛國者가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기실 忠君愛國한다는 것도 그 시대에 있어서는 최대의 명예이며 입신출세하는 첩경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생활방법의 한 표준으로 되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각 개인의 생활지표는 사람에 따라서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정치가가 되겠다는 사람, 대부호가 되겠다는 사람, 학자·종교가·교육가 등등 무수한 지표가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생활지표란 결국 그 개인 혼자만으로는 아무런 의의도 없는 것이요, 사회와 국가·민족족의 존재를 인정한 위에서만 비로서 그 지표의 진정한 의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인류는 하등동물과 달라서, 나면서부터 사회적 동물이요, 또 국가적 동물인 것이다. 과거의 동서대정치가나 대성인, 대학자 중 어느 한사람인들 사회와 민족·인류를 무시하였던 이가 있었는가. 인도의 석가는 인도 민족의 한 사람이요, 〈소크라테스〉는 그리이스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데서 특히 그 위치가 뚜렷한 것이지, 그냥 단순한 한 개인으로서는 그렇게 훌륭한 명성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 인류는 사회나 국가나 민족을 상대로 하여 생활의 계획을 세우는 데서 비로소 생활의 강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醉生夢死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 한다면, 人間有史이래 그러한 인생은 무수하게 왔다가 갔다. 그러나 그중 누가 왔다가 갔는지 알려져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가. 이름을 남기지 못한 허망한 인생살이라면 그것이   의 생이나 禽獸의 생애와 무엇이 다르랴.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기본적인 민족적 이념을 수립하여야 하고 그런 다음에 생활의 지표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민족적 이념을 가진 민족이라면 그 민족 각 개인의 생활 지표도 자연히 이에 따라 서게 될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민족적 이념이라는 데서 결국 민족의 한 사람 한 사람이 크게 살자는 것이겠으므로 그 생활의 지표도 또한 小我的이고, 近視眼的일 수는 없을 것이다.

3) 국가의식의 재확립

우리 민족의 민족적 이념이 수립되고, 또 그 이념을 실현할 이상하에서 민족적인 생활의 지표가 서게 된다면 그 다음으로 필요한 문제는 그 이상을 실천해 나아갈 무대로서의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동물 중에서 사회와 국가를 가졌다는 것이 인류의 자랑거리다. 인류는 자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또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국가라는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국내에만 살고 있을 때에는 국가의 중요성과 국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나, 일단 발을 한걸음 국외로 내디디고 국제무대 위에 서서 자기의 위치를 돌아볼 때에는 국가라는 것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통감하게 되며, 애국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양 某國人이 서양 某國에 가서 머무르고 있을 때, 때마침 그 나라에서 동양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동양인이 살고 있는 가옥에 放火하고 그 위에 모욕적인 폭행을 했을 때에, 강약이 不同하여 속수무책이라, 한 마디의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면서 다만 하는만 쳐다보고 통곡하며 국가의 무력을 골수에 사무치게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나 나 자신은 그 당시 도리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나라에게 압박을 당하고 있던 사람이었는지라 그 사람의 悲憤哀痛이 또한 내 자신의 서러움으로 변해져서 暗淚를 흘렸던 일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국가를 잃은 민족의 비애, 국력이 약한 나라 사람들의 무기력이야말로 거지 신세나 스스로 죽어가는 사람의 기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나라는 해방 후에 많은 애국자를 낳았다. 또 많은 구국정치가도 나섰다. 말만이라도 대단히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자들이 많았던들 남북통일이 지금까지 안 되었을 리 없을 것이고, 또 반쪽인 이 남한에서나마 두 번씩이나 혁명이 일어났을 리도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 우리 국민의 그 동안의 과오를 여기에 나열하거나 푸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다만 한마디로 잘라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동안에는 한 사람의 애국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즉 애국자가 있었다면 정치가들의 실정도 있었을 리 없고, 혁명도 일어났을 리 없으며 또한 현재와 같이 남의 탓만을 늘어놓는 정치투쟁도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는 「국가의식」을 재확립하자.

 

3. 불교의 근본이념과 현대의 우리 민족

이제는 문제를 완원시켜 불교의 근본 이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불교가 과거의 이 나라 민족에게 인연이 깊었던 것은 이미 고찰한 바와 같거니와, 불교사상의 근본이 되고 중심이 될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된 바가 없었다. 불교교리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므로 한마디로 간단히 그 내용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에 去頭截尾하고 그 근본 이념의 줄거리만을 들어 간단히 피력하여, 이로써 현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이념을 수립하는 데 참고로 제공하고자 하는 바이다.

불교의 전 교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그것은 불교 법과 승의 三條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 三條를 三寶라고 한다. 이것을 「寶」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 이 세상에서는 이 세가지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먼저 佛이라 함은, 범어로 「佛陀」라는 말을 佛로 줄인 것으로서, 이를 번역하면 「覺者」,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 입산 수양한 결과 覺者가 되었다고 하는 바, 그 깨달은 내용이 무엇이었던가 하면 일반적으로 「悟道」「成道」등이라고 한다. 道라는 것은 진리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이 진리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일반 지성인들이 매우 궁금히 여기는 문제다. 진리라고 하면 객관적인 어떠한 존재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기실 불교에서는 객관적 존재인 우주 창조신이나 또는 철학적인 원리 같은 것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석가가 6년간 沈思·冥想·思惟에 사색을 거듭하여, 그 궁극에 상치한 것이 자기 一心의 본성적 광명이었던 것이며, 이것을 「回光返照, 本地風光」이라 한다. 즉 , 자기 자신의 근본(主觀)과 이 우주(客觀)의 근원은, 객관적인 신이나 또는 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인 一心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니, 결국 석가의 「悟道」란 다름 아닌 자기 발견이었던 것이다. 석가가 이와 같은 자기 발견을 하기 전까지는 그도 객관계에 예속되어 객관계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나, 「悟道」를 한 그때부터는 세계의 중심이 자기었던 것으로, 「天上天下 唯我獨尊」의미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우리 인류문화상 인류의 존귀성과 究竟的 가치가 발견된 것은 석가에 의하여 비로소 있은 일로서, 우리 인간의 生의 지표도 이에 처음으로 서게 된 것이다. 즉 우리 인생의 그 진면목을 찾아내기 이전의 생활은 아직 假面의 생활로서,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醉生夢死의 생에 허덕이고 발버둥친 데 불과한 것이었으니, 석가의 체득이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준 이상 어찌 이 虛假의 生으로서 만족할 수 있으리오.

그러면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우리 인류의 一心, 즉 마음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하는 문제이다. 석가가 체득한 바에 의하면, 우리 인생의 마음은 양면성을 가진 것인데, 그 하나는 일심의 본질면·본성면이요, 그 다른 하나는 일심의 현상면·假性面인 것이다. 그 본성면은 원래 不生不滅·不增不減하는 것으로, 大海의 靜的인 물의 본성과 같은 것이며, 假性面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日常心으로서, 감각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무한한 생멸을 거듭하면서 변화하는 번뇌방상으로, 그것은 마치 「大海의 動的 波浪」의 假現象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假性인 망상심은 무한한 감각작용을 함에 따라서 모든 行爲·行動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이 행위·행동이 일일이 세력을 구성해서 그 세력이 因이 되어 장래의 자기 자신(正報)과 그가 의거할 세계(依報)와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모든 감각작용에 의하여, 즉 망상심에 지배되어 행위·행동을 하는 한 고통의 자신과 苦의 세계를 초래하는 것은 면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번뇌망상심을 퇴치함으로써 자기의 본성도 理心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상적인 번뇌망상의 事心은 올바르지 못하지만 우리 본성의 理心은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이 본성의 理를 위해서도 현재의 生을 사랑해야 한다. 이 理心이 證得될 때를 「悟道」라 하고, 또 證得한 자를 인격적으로 부를 때 佛陀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佛陀란, 다름 아닌 인격도야의 완료자인 것이라고 보아서 틀림 없을 것이다.

그 다음, 법이라 함은, 범어의 「達磨」라는 것을 번역한 말이다. 「달마」의 어의는 「能持自性故로 各爲法」이 정의하는 바와 같이 자성을 보존 執持하여 改變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석가모니불 「悟道」의 내용을 일컬어서 「達磨」라 하는 것이다. 불타가 체득한 진리의 핵심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우주만물의 總源은 自己自心이요, 그 自心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이나, 그 假性인 번뇌망상심은 생멸변화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자기의 주관체와 객관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가모니불은 자기가 체득한 이 진리를 자기 혼자만이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不避風雨 쉴 날도 없이 45년간 동분서주하면서 설법하였다. 석가가 이와 같이 남을 위하여 설법을 하게 된 근본 취지가 무엇이었던가.

그때 여래는 無障 한 淸淨天眼으로써 일체중생을 관찰하였다. 관찰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奇哉奇哉로다. 어째서 여래가 구족한 지혜가 身中에 있으되 知見하지 못하는가. 나는 마땅히 저 중생을 가르쳐서 성도를 깨달아 모두 길이 妄想顚倒의 垢縛을 여의고 여래의 지혜가 그 몸 안에 있어서 불타와 다름이 없음을 갖추어 보게 하리라. (화엄경 제 35, 性起品)』

여기에 그의 설법의 동기가 있었던 것이다. 즉 석가 자신만이 그 一心의 본성인 지혜의 광명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 즉 일심을 소유한 모든 동물은 모두 그러하다는 것으로, 그오 같이 본래 훌륭한 여래들이 어째서 그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垢縛, 즉 번뇌망상심에 속박이 되어 고통을 받고 있단 말인가. 이것을 본 석가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서 드디어 일체중생 교화의 설법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의 심중에서 체득된 진리는 석가의 언설을 통하여 일체중생에게 전달되게 되었으니 이 45년간의 설법도 곧 그대로 진리인 것이다. 석가가 그 진리를 開示하는 데는 苦諦·集諦·滅諦·道諦 등 四諦說로써 하였으니 그 四諦說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苦諦라 함은, 우리 인생의 현실계는 모든 것이 고통 아닌 것이 없으니, 따라서 일체 皆空라는 것이 진리인즉 이것을 뜻하여 諦라 한 것이다. 그러면 인생의 현실이 苦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 苦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 즉 集諦로서, 集은 生起招集의 뜻이다. 즉 우리의 현실적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은 일체중생 각자의 번뇌망상심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현실고를 招集한다는 것이니, 바꾸어 말하면 일체중생 각자의 현실은 그 원인이 전혀 각자의 망상심에 있는 것으로 이것은 자업자득의 인과관계이다. 즉 集諦는 일체 중생의 현실을 가져올 원인적인 원리요, 苦諦는 그러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는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苦諦와 集諦는 인간현실의 인과관계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실상을 실상 그대로 道破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이 현실을 현실 그대로 아는 데 그칠수 있는 것이냐 하면 인간의 욕구심은 이것을로써 만족하지 않는다. 고통의 현실을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이에 필연적으로 종교가 생기게 되는 것이며, 이 욕심에 충족감을 가져다주는 교훈이 즉 滅諦와 道諦인 것이다. 멸제의 滅이라 함은 滅度·滅無의 뜻인 바, 무엇을 滅無할 것이냐 하면 현실고를 초래할 주관적인 번뇌망상심을 滅無케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理想이 無苦安穩의 境地요, 또 번뇌망상심이 현실적 인간苦를 초래하는 것이라 하면, 이 주관적인 번뇌망상심을 滅無하는 것이 또한 곧 無苦의 理想境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망상이 滅無된 경지를 또한 涅槃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이것은 즉 불타의 「悟道」의 경지요 자기를 발견한 경지로서, 불교의 이상경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이 以上의 진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滅諦라 하는 것이다. 이상경은 이러한 것이지만, 이 경지는 말이나 생각만으로써는 이룰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곧 道諦라는 것이다. 이 道諦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하나만을 소개하기로 한다면, 八正道라는 것이 있다. 正見·正思惟·正會·正定·正精進·正命·正業·正語 등이 그것이다. 이제 이 八正을 관련시켜서 본다면, 첫째, 正見(正思想 즉 불교)에 입각하여 正念하면서 正精進의 생활을 하되 그 일상적인 생활방법으로서 正命(정당한 직업)의 생활을 하는 데는 身으로는 正業(正行), 口로는 正語, 意로는 正思惟하여야 하며, 그 특수 생활법으로는 正定, 즉 정신통일을 하는 수양방법으로 선정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八種의 올바른 길을 밟아가면 자연히 滅諦의 이상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滅諦와 道諦와 관계도 역시 因果關係로서, 道諦는 因이요 滅諦는 果다.

이상 四諦의 전체적인 관계를 본다면, 우리 인생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입각하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진실상을 파악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苦諦와 集諦와의 관계로서, 이것은 바로 철학적인 현상계의 인생관이다. 이에 대하여 滅·道 二諦의 관계는 인생의 이상계와 그에 이르는 道程과의 관계로서, 이것은 인생 당위의 세계, 즉 종교적 인생관인 것이다.

석가모니불이 이상과 같이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自受法樂에 그치지 않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演說·敎導하였다는 것은, 종교로서는 救濟의 실천행인 바, 이것은 의로써 일체중생을 사랑한 결과이며, 현대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愛隣共濟」의 사상이요 실천행인 것이다.

그 다음 僧이라 함은, 범어의 「僧伽」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서, 단체라는 뜻이다. 무슨 단체냐 하면 불타를 교주로 崇仰하고 불타가 說하신 교법을 신조로 하여 석가와 같이 각자의 본성인 진리의 체득을 그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본심을 발휘하여 진정한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眞生의 단체이다. 이 승가는 五人의 제자와 석가의 六人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六人의 師資가 처음 생겼을 때에, 석가는 이 세상에 六人의 阿羅漢(聖子)이 나서 비로소 승가가 탄생하였다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이 세상에는 이익을 위한 단체, 便宜를 위한 단체 등 여러 가지 條件附의 단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각자의 인격을 절대 존중하고 眞生을 찾은, 또는 찾기 위한 단체란 아마도 인류 역사상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師인 석가도 제자인 五人의 首位를 차지한다는 특권적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증거로는 五人의 阿羅漢이 났을 때에 자기자신도 그 五人의 同列에 넣어서 六阿羅漢이라 하였고, 또 그 후 제자가 많아질 때마다 자기도 그 수 가운데에 넣어서 그 교단이 증대·성장하여감을 기뻐하여 찬탄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다만 교단이 증대되어 가는 것만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眞生을 찾는 진정한 사람이 늘어가는 것을 기뻐하였던 것이며, 그것이 즉, 그들이 모두 아라한이었다는 증거이다. 이 교단은 공간적으로 얼마든지 퍼져갈 수 있다. 종족의 色別도 국경도 없이 불타의 법륜은 얼마든지 굴러갈 수가 있는 것이었으니, 인도의 일각에서 일어난 불교가 세계적 불교로 전파되게 된 것이다. 불타의 교훈도 하나요 敎團員의 목적도 동일하지만 모든 교단원이 다 같이 아라한, 즉 성자가 되기 전에는 역시 부족한 사람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불타께서는, 항상 年老한 부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서로 다투지 말고 의좋게 화합적으로 살아가라」고 懇懇說諭하듯이, 水乳一味가 되어서 화합적으로 살아가라고 누누히 부탁하였다. 인도에, 서로 곳을 달리하는 네 개의 큰 강이 다 각각 따로 흐르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同一大海인 것과 같이, 인도의 四姓階級도 佛門에만 들어오면 同一釋種이라고 訓誡하여 항상 화합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므로 승가란 화합단결이 그 본의인 것이다.

이상으로써 불교의 근본 개념이요 三大綱領이라고 할 수 있는 佛法僧 三寶의 요의를 약술해 보았다. 그런데 이제 그 논술하여온 대의를 다시 한본 요약해 본다면,

                               +- 佛 - 以理愛生 - 人格陶冶 - 善

佛敎敎理 三大綱領 --+- 法 - 以義愛民 - 愛隣共濟 - 眞

                               +- 僧 - 以和愛國 - 和合團結 - 美

이와 같은 것이 즉 불교의 주의·주장이요 그 실천의 목표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의 이와 같은 교설을 떠나서라도 우리 인생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개 인생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부모를 위한다. 家統을 위한다. 또는 사회·국가·인류 등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은 모두 제 2차적인 문제요, 우선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해 낼 각 개인의 實力充實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각 개인의 실력은 어떻게 충실을 기하게 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 인생은 아무리 자기를 충실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素因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석가의 實證에 의하면,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래 선천적으로 佛性의 원리를 本具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석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비로소 인생으로서 참되게 살지 않으면 안될 이유도 알았고, 또 무엇을 먼저 해야할 것인지도 알게 된 동시에, 남을 위해 일을 할 素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즉 以理(佛性)愛生의 이유다. 이와같이 인생 각자의 본성을 발휘하여 원만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 인간의 최선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의 인격이 완성되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기와 동일한 원리를 本具한 사람들로서, 다만 현재 그 원리를 발견하지 못하여서 고통에 쌓여 있으므로 선각자로서는 그것을 선도하여 주는 것이 그의 의무일 것이니, 이것이 즉 以義愛民의 이유일 것이며, 또 인간의 善이란 결국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의 진리란 자타가 피차에 동일한 원리임을 체득해서, 그것을 현실화 하는 것일 것이니 이 이상의 진리가 또 어디에 따로 있으리오. 이상과 같이 원만한 인격자와 인격자가 서로 모이는 곳에, 아니 우너만한 인격자 까지는 아직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원리만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서로 모인다면 거기에 무슨 猜忌와 嫉妬·不和·暗鬪가 있으리오. 이러한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 국가를 형성하되 그것은 화합단결될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美라는 것도 결국 화합조화체 이상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음악도 그러하고 미술 등 기타 모든 예술이 그러한 것과 같이 우리 인류의 국가도 調和·和合된 데서 인류문화의 총체적인 美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돌이켜 우리 고대민족들이 살아온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 본다면, 麗·濟·羅 삼국은 분립하여 서로 적대시하였고, 마침내는 신라에 통일되어 그 통일국가가 고려·이조에로 계승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近 1,300년의 통일국가적 전통이 깨뜨려지고 국제세력 균형의 폐해로 인하여 남북으로 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동안 우리 민족에는 어떤 일정한 민족적 이념이 있어서 그것이 일관되어온 자취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만약 고래로부터 확고부동한 민족적인 어떤 이념이 서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남북 양단의 비극은 現出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오늘날과 같은 政界의 혼란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믿으며, 이와 같은 敗族亡國의 요인은 오로지 우리 민족에게 自古로 일정한 민족적 이념이 없었고 이것이 없었으므로 인해서 민족의 생활지표가 서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 않으니 무한한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민족적 이념을 확립하여, 우리의 자자손손에게 「우리 민족은 이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민족적 교육을 해야 할 것임을 提言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此際에 불교의 주의·주장을 그대로 우리 민족의 이념으로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도 온 세계의 인류를 위하여, 아니 일체중생의 生의 목표와 그 生의 방법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민족이념을 세우는 데도 이 주의·주장이 다대한 참고가 되리라 생각되어 필자의 微衷을 피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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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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