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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의 과거와 장래 - 金東華(뇌허 김동화)

•- 목 차 -
1.한국문화
2.외국사상의 전래
3.과거의 불교문화
4.장래의 불교문화

 

1. 한국문화

근대 서양 학술 연구상 문화과학의 一科로서의 역사학 연구는 비상한 발전을 하여왔다. 이 풍조의 영향을 받아 우리 동양각국의 역사학연구도 너나 할 것 없이 장족의 발달은 몰라도 일반학자들의 이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의 특징은 동서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문화적사관임에 있다. 서양문화사, 동양문화사 서양으로서는 東洋某國의 문화 동양은 東洋何國의 문화하듯이 다 각각 자기나라 특유의 문화를 찾기에 노력하고 또 그것을 자랑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근래에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한국문화라는 제목을 학술전문잡지, 일반잡지 신문지상 할 것 없이 가끔 가끔 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해방이후 우리나라와 구미각국과의 왕래 교접이 빈번함에 따라서 이 문제의 논의가 적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구미 각국 학자들은 특히 우리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열심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인은 이에 대한 취미에서 이를 연구한다는 것보다도 저들의 물음에 응대하기 위해서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목하의 실정에 놓여있는 것이 그 사실이 아닌가 싶다.

1). 문화의 의의

필자는 우리나라 문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논하기 전에 문화라는 그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 먼저 일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날에는 문화라는 어구가 없고 문명이라는 어구로써 통용이 되어왔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문명이란 말은 거의 없어지고 문화라는 말이 그 대신으로 등장한 것 같다. 그러면 그것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문명이란 말이 통용되던 때에는 구미각각의 물질적 利器가 많이 새로 발명되었던 것인 바 그 후 점차 인류가 생각해낸 것은 오직 물질적인 것뿐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있으므로 이 정신적은 생산까지도 이에 포함시키는데는 문명이라는 어구로서는 부족을 느꼈으므로 문화라는 어구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 문화라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서구학자간에도 여러 가지의 異說이 있다. 혹자는 문화란 것은 인류의 정신적생산과 물질적생산과를 합한 것이다. 혹자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과의 두가지 중에서 정신적인 것을 主質로 한 것이 문화다. 또 혹자는 정신적인 것이고 또 물질적인 것임을 막론하고 가치를 가진 것이 문화다 라고 하는 등의 諸說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제설을 종합하여본다면 요켠대 문화의 내용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가 생산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것이라 함을 알 수 있다.

2). 한국문화의 원형

한국문화, 이는 일반 문화인으로서 아니 한군민족으로서는 매우 동경되는 아니 필사적으로 찾고 싶은 것, 만약 이것이 없다면 민족적 체면이 서지 않는 중대한 그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무엇일가 특히 그 원시적이요 또 그 특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내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를 알자면 이에 관한 고대문헌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이 모두 없다. 만약 역사는 실증적이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 고대 문화의 탐구방법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아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이웃나라인 중국의 사적에 의하여 그 片鱗이라도 이를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불행중에서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최고의 史籍인 司馬遷의 「史記朝鮮傳」에는 衛滿朝鮮 멸망에 관한 기사도 있으나 우리 고대문화의 餘滴에 관하여서는 한말도 언급된 것이 없다. 그 다음에 後漢詩, 班固의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우리 고문화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箕子가 朝鮮에 가서 그 民을 가르치되 예의와 團蠶과 織作으로써 하였으며 樂浪朝鮮民의 犯禁에 八條가 있으니 相殺은 당시로써 償殺하고(1), 相傷은 穀으로써 償하며 相盜者는 男은 沒하여 그 家奴를 삼고 여자는 婢로 삼으며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는 人(當)五十萬을 내어야 한다. 비록 면하여 民이 될지라도 俗은 오히려 이를 부끄러워하여 嫁取에 所?(匹)가 없다. 이로써 그 民은 마침내 서로 盜하지 않고 문호를 닫음이 없으며 부인은 貞信하여 淫抗치 않고 그 田民은 음식에 ?豆(以竹曰?, 以木曰豆)로써 하며 도읍은 자못 吏와 內郡賈人을 본따서 往往히 杯器로 써 먹었다. 郡初에 吏를 遼東에 취하였더니 吏가 民에 閉藏함이 없음을 보고 및 賈人의 往者가 밤이면 盜를 하니 俗이 점점 더욱 薄해져서 이제의 犯禁에서 60餘條의 多에 이르렀으니 가히 귀히 여길 것이로다. 그러나 東夷는 천성이 유순하기 三方(南西北)의 外에 달으다. 그로 孔子는 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浮를 해에 說하여 九夷(朝鮮)에 居하고자 하였으니(그 所)以가 있는 것이니라」 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중에 中國殷末의 箕子가 조선에 온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右記事와 같은 정도의 문명을 전하였을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箕子가 조선에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이 문제는 잠시 이에서는 제외하고 樂浪朝鮮이하의 기사는 그대로 믿어도 무방할 사실로서 이는 우리 민족 고대의 정치, 도덕, 사회생활, 인정풍속등을 엿볼 수 있는 실로 귀중한 자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八條禁法이라는 것이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相殺, 相傷, 相盜의 三條뿐이요 또 60여조가 있었다 하나 이것이 傳치 않는 것도 일대유감이다. 그러나 그 삼조만이라도 전하여 고대인들의 不成文法 및 도덕적 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상은 어느나라 고대인 사회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당시의 생활상황의 일단으로서 시골 사람들이 ?豆, 즉 竹, 木器로써 음식을 먹고 도시 사람들은 漢官吏와 상인들의 생활법을 모방하여 杯器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漢의 물질적 문명의 좋은 영향을 입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요 또 이와 반대로 漢官吏와 상인들의 盜行으로 인하여 인심이 야박해졌다는 것은 악영향을 준 것으로서 당시의 漢文化는 功과 罪가 相半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문헌만으로써 본다면 漢문화가 우리 上代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다만 물질문명 뿐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정신문화에 관하여서는 도로혀 악영향을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에,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우리 上代의 제부족국가들이 다 각각 그 독특한 생활을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에 그 상세한 것을 다 소개할 수 없으므로 그 요점만을 말한다면 그 부족국가들은 두가지의 공통된 점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모두 農本國이었다는 것은 현재의 국토실태로 보아서도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그 각국민들의 신앙에 관한 사실을 본다면 1. 夫餘는 殷, 正月로서 祭天하되 國中이 大會하여 連日飮食하고 歌舞하니 名하여 迎鼓라 했고. 2. 고구려는 十月에 祭天하되 國中이 大會하니 명하여 東盟이라 했다 하고. 3. 濊는 十月節에 제천하는 바 주야로 음주·가무하나니 이를 명하여 舞天이라 했다 하며. 4. 韓은 五月에 下種해 마치고 귀신을 祭하되 群衆하여 가무·음주하기를 주야로 쉼이 없다. 그 舞는 수십인이 함께 일어서 서로 따라가며 踏地를 低仰하고 수족이 상응하여 節奏함이 鐸舞와 같음에 있고, 十月에 農功이 마치고서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信하는데는 國邑에 각각 一人을 세워서 天神을 主祭하니 이를 명하여 天君이라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상대민족들이 원시적인 단순한 생각으로 오직 농사나 지어서 배불리 먹는 것만으로써 인간의 能率로 알았다면 결코 이와 같은 제천의 행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힘만으로서는 농사를 짓는데도 또 생활을 해나아가는데도 자신을 얻지 못하였었으므로 그들의 자력이상의 天의 위대한 힘을 빌었던 것으로 종교학상으로 보아서는 물론 원시적인 종교행사지만 하여간 이에 의하여 그들의 종교심 내지 철학적 욕구심의 싹을 찾아볼 충분한 근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분트(Wundt)는 문화 즉 돌일어의 Kultur의 어원을 라틴어의 Kultra에 찾아서, 또 이 말의 前語로서 Kultus라는 말이 있어 이 말의 본의는 「양육한다」「돌봐준다」등으로서 이에는 또 cultus derum과 cultus agri와의 양면의 의미가 있는 것인바 前語는 「신에 대한 양육」後語는 「토지에 대한 양육」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전자는 종교적 의미요. 후자는 농업적 의미라는 것이다. 종교적이라 함은 종교적 예배, 즉 종교적 예식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농업적이라 함은 토지의 경작 파종 수확등 농작의 일체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문화라는 것은 정신을 주도하는 종교와 경제를 주로 하는 농사면과의 二者를 합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와 같은 문화의 정의에 우리는 그 타당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이에 또한 우리 上代민족들의 소유하였던 문화의 기저,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을 기뻐하는 바이다. 즉 그들은 모두 農本國이었으므로 원시경제형태인 농업을 경영하여 물질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또 농업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도 天神에 의뢰하는 정신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농업과 祭天, 물질과 정신과의 양면의 생활을 영위한 것이 우리 고대민족문화의 원형이 었다는 사실을 이상의 고찰에 의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사상의 전래

1). 중국문화의 유입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원형이 무엇이란 것은 상술한 바와 같거니와 그러면 그 이후의 발전은 어떠하였던가. 인류는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거주하는 환경의 조건에 따라서 그 독특한 문화를 창작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서구지역은 그 지역이 그리 광활하지 못한데다가 인구는 많고 하니 자연 대도시를 형성하고 따라서 고층건물의 기술이 발달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양각국은 地廣한 데다가 인구의 밀도가 희소하므로 도시가 그리 발달되지 못할뿐아니라 따라서 고층건물의 필요도 그리 느끼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대저 우리나라의 지형은 남북으로 길고 그 위치가 북으로는 중국대륙과 남으로는 일본도국과의 사이에 놓여있어 어디로든지 상통할 수 있는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문화보다 나은 문화라면 그 영향을 받기 쉬운 처지에 서 있어서 우리 고유문화를 발달시키기 곤난한 조건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상대민족들은 어떠한 문화를 발달시킬 선천적 소질을 충분히 갖추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天稟을 발휘하기도 전에 북부대륙 중국으로부터 漢민족의 문화가 노도와 같이 흘러 들어 왔다.

그 유입된 문화의 내용은 중국특유의 문화인 유교와 고교가 전래하였다. 그 전래한 시기는 어느때쯤인가. 만약 金富軾의 「三國史記」에 의한다면 「玄 , 樂浪은 本朝鮮元地로서 箕子의 所封요 箕子는 敎其民하되 以禮儀와 田蠶과 織作으로 하고 設禁八條하니 是以로 其民이 不相盜하고 無門戶之閉하며 부인은 貞信不淫하고 음식에 以 豆하니, 此는 仁賢之化也니라」云云하였다. 만약 이 설을 그대로 신용한다면 중국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적어도 서기전 1120여년경이 될 것이다.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 紂를 타도한 후 기자를 조선에 대하였다 하니). 그러나 이 기사는 「漢書地理志」에 의한 것으로 이미 상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저히 그대로 믿지 못할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자의 權現인 김부식은 무비판하게도 도로혀 無上의 好資料로 여겨 영광스럽다는 듯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만약 이 기사를 제쳐놓고 본다면 「史記」高句麗本記에 제17대 소수림왕 2년(서기 372)에 「玄大學 敎育子弟」라고 있는 것이 유교와 고구려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 바 그러나 이것은 이미 그 전에 들어와 있던 유교의 사상으로써 군민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일 것이요, 유교가 이때 비로소 전래하였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그 수입의 시기는 과연 언제인가. 그것은 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의 세력지역에다가 소위 玄 等 4郡을 설치한 이래가 아닐가 싶다. 그 설치연대는 元封 3, 4년 즉 서기 전 107-8년이다. 중국의 이 세력은 고구려 제 15대 美川王 14년(서기 313)까지 약 421년간을 계속하였는 바 이 기간중 고구려인이 직접 간접으로 이 한민족문화에 영향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상에 유교수입의 年時가 명기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 이 장기간의 접촉이 있으므로 어느 때라고 특히 기록할 수 없었던 관계인 것 같다.
도교가 들어온 것은 그후 제 27대 營留王, 7년(서기 624)이었다.
그리고 이 2敎가 유입한 지역의 순서는 지리의 자연적 순서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로 점차 파급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러면 유교와 도교의 사상내용은 어떠하였는가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중국의 사상들이 우리 고대민족에게 소화될 가능성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하는 것이다. 그 때의 유교사상은 순수한 유교로서 그것은 간단히 요약해 말하자면 인륜도덕을 중심으로한 정치사상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하게 잘 살아갈 수가 있을까. 우리 인생은 원래 天帝 즉 하늘이 만든 것으로 사람의 본성은 仁이라는 것이며 이 仁心으로써 사람 사람이 서로 서로 대하는 것이 원칙으로서 그렇게 하면 父는 慈하고 子는 孝하며 兄은 友하고 第는 恭하고 君臣간에는 有義. 朋友간에는 有信하게 되는 것이니 爲政者는 이와 같은 인륜관계가 행해지도록 정치를 잘하는 것이 天帝의 의사를 대행하는 것인 동시에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원시유교에는 철학적 요소가 희박하며 종교적 의미는 전연 없다. 다만 이 현실계에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인생 각자가 자기가 할 임무를 다하는 것이 인도라는 것이며 이 인도를 걸어나가는 단계가 소위 「大學」의 명덕을 밝히고 民을 新하며 至善에 그친다는 등의 三綱이요 또 이 三綱중 明明德을 실천하는 구체적 단계가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이요, 新民하는 단계가 즉 齊家, 治國, 平天下로서 이것을 「大學」의 요지, 三綱 8條라 한다. 이와같이 유교는 철저한 인생의 현실주의다. 이와 같은 人道를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의 일면성은 아무리 이상주의가 강한 민족에게라도 인생으로서의 현실생활을 영위하는 이상 이것을 요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上代民族에 있어서도 유교에 대한 큰 반향의 사실이 없이 삼국을 통하여 오래동안 이용되어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큰 성과를 나타내재 못하였다. 도교는 유교와는 정반대로 현실계를 무시하는 理想敎이었다. 그 理想은 아무 근거없는 허무맹랑한 人身으로서 神仙이 되어간다는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이 오래 계속되어 갈 리가 만무하다. 고구려에 들어와서는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백제에는 정식으로 수입된 일도 없었고 또 신라에도 제 34대 孝聖王 2년에(서기 738)전한 일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리 유행하지 않았었다. 즉 도교가 이 강토에 전해오기는 하였으나 上代人들에게 맞지 않는 비현실주의이었으므로 드디어 그 발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에 의하여 우리 上代人들이 사상의 취사선택에 자주적 주견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2). 인도사상의 전래

세계의 三大문화라면 서양으로는 希臘문화요, 그 다음의 二大문화는 동양에 산출된 것으로서 그 하나는 상술한 중국의 문화요 그 또 하나는 인도에서 발생한 「알으냐」문화다. 이 문화가 중국에 公傳한 것은 後漢明帝 永平 10년 즉 서기 67년이라 한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제17대왕 소수림왕 2년 夏 6월에 秦王符 으로부터 使者와 및 浮屠 順道로 하여금 불상 및 경문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해는 바로 대학을 세우던 해로서 고구려 문화의 一大興隆의 해이었다.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한 305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同王 4년에는 또 僧 阿度가 來邦하였다고 한다. 同王 春2월에는 肖門寺를 초창하여 순도가 있게하고 또 伊佛蘭寺를 創하여서는 阿度가 住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海東 佛法과 사원이 시초다. 故國壤王 9년 3월에는 군내에 령을 내려서 불법을 숭신해서 복을 국하게 하였으며 또 제 19대 廣開土王 3년에는 平壤에다가 9개의사찰을 창건케 하였다. 이상이 불교수입 초기 20여년간의 일이었다.

그 다음에 백제에 불교가 전한 것은 11년후 즉 백제 제 15대 枕流王 원년(서기 384) 9월에 胡僧 摩羅難陀가 晋으로부터 왔으므로 왕은 그를 맞이하여 궁내에 모시고 예경하였다 한다. 그리고 同王 2년 春2월에는 漢山에 佛寺를 초창하고 10인을 度僧하였다 한다.

그 다음에 신라는 지리상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화를 받아들이는데는 제일 늦어졌다. 「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 19대 訥祗王(서기 417-457)시에 사문 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一善郡(現善山)에 와서 毛禮에게 맞이되어 毛禮의 家內에 窟室을 만들어 놓고 은거케하였다 하는 바 이는 불교가 공공연하게 전파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로부터 이미 私傳된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신라에서는 이상 2국과 달리 그 전래한 초기에는 불법의 전파가 매우 다난하였던 것은 법흥왕時의 異次頓의 爲法亡驅의 희생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제 23대 法興王때에 왕은 국가적으로 불법을 펴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한 결과 드디어 異次頓의 희생적 협력을 얻어서 公傳을 하게 되었다.

 

3. 과거의 불교문화

우리 상대민족으 천품적으로 고도의 문화를 창조할 소질을 갖추어 가지고 있으므로 아직 유치한 문화이기는 하였지만 그 뚜렷한 원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형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전에 외국문화가 유입되어 그 자유로운 독립적 발전이 저해되고 혼합적인 문화가 산출되게 되었다. 그러되 취사선택의 자주성은 잃지 않았었다. 외래문화중에서도 삼국시대와 신라시대까지는 유교와 도교는 우린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유교가 국민교육의 주최가 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교육의 목적은 관리양성에 있었다. 그런고로 그 교육의 전에도 그 교육의 후에도 문화상으로는 이렇다할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였다. 李朝 유학자 徐居正은 고구려 小獸林王 2년 대학을 개설한데 대하여 「고구려가 國을 세운지 이제 400여년 이에 으르러서 대학을 세워 子弟를 敎하니 어찌 學을 建하고 師를 立함이 晩한가」라 탄식하고 麗末, 麗生 權近은 신라 神文王 2년에 신라가 國學을 시창한데 대해 「신라가 國을 有한지 30대 이에 이르러서 국학을 置하니 鳴呼 其晩이며…」라고 한탄하였으나 그러나 관리양성과 예의 도덕을 세운외에는 두드러진 업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같은 외국문화였지만 유교와 도교에 비하여 불교는 각방면으로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 다른 민족에 대하여 우리 문화로서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거의가 불교적인 것뿐이다. 불교가 우리나라 문화상에 들어난 공헌을 한 사실을 이하에 몇가지 찾아보기로 하자.

1). 불교의 호국사상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수입되었는 바 이때의 불교가 과연 어떠한 불교였는가 이것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상 미상의 문제로 남아있다. 이 때의 중국불교의 실정으로 보아서는 아마 고구려에서도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한 불교는 아니었을 것같다. 왜냐하면 불교의 전수국인 중국에서도 아직 불교의 교리를 일반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중국에서 불교가 다만 異國의 대성 석가모니불이 설하신 존귀한 교법이라하여 무조건 숭앙하는 신앙에서 또는 그 교법의 이치를 잘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여튼 중국에는 아직 없었던 새로운 교설이라는 奇異心 호기심에서 이를 신봉하는 정도이었다. 전수자인 秦나라의 불교관이 이미 이러한 상태였으니 이를 전해 받은 고구려도 이러한 정도의 불교관이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고구려인들의 아니 백제나 훨씬 그후에 수입한 신라까지라도 그들의 불교관중에 신비의 불교 위대한 불교 인간 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자비의 불교라는 절대의뢰의 종교로 무조건 신봉하는 절대적인 신앙의 일면이 었었던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불교 수입당초의 불교관은 주로 신앙의 불교였다. 그 신앙의 중심은 공리적이지만 穰災招福에 있었다. 이 穰災招福의 요점은 적게는 개인적으로 크게는 국가적으로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자는데 있는 것이다. 즉 신자의 각개인으로서는 자기의 복을 받기 위하여, 국가적으로는 국태민안을 위해서 불교를 믿었을 것이다.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국가요 정치인이었다. 정치인은 자기네의 힘만으로서는 善治의 능력이 부족하므로 불법의 힘을 빌고자 한 것이 불법을 수입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정치의 소원과 요구대로 불교 중에는 호국사상이 있었다. 불법을 믿어서 개인이 복을 받는 것만도 좋은 일인데다가 불법이 유포되는 국가는 佛, 보살과 善神이 다같이 수호해 주겠다 했으니 얼마나 반가운 종교였겠는가 이러한 태도로써 처음에 불교를 수입한 것은 중국도 일반이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어떤 이유로 국가를 수호하겠다 하였는가.

여러 가지의 불교경전중에 仁王般若波羅密多經 金剛明光經등의 경이 있는 바 이에 의하면 일국을 통치한 국왕은 「정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을 교화하라」고 한다. 즉 국왕의 임무는 치국과 화민의 二條에 있는 것인 바 예로부터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가가 잘 다스려가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국가를 선치하는 요술은 정법을 정치의 원리 원칙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佛法이라는 것이다. 만약 불타가 교시한 원리에 의하여 治國, 化民하면 그 정치는 뜻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법이 유포되는 국가는 諸天과 善神들이 나타나서 항상 수호해주겠다고 불타전에 서원을 세웠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든지 불법을 신봉하기만하면 그 나라는 국내 국외적으로 모든 곤란에 없이 國泰民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國泰와 민안을 기원하는 방법으로서 소위 百高座講會를 열고 「仁王經」을 강설하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신라 이래로 史記上에 빈번하게 보이는 백고좌회의 설법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시대에는 여러 가지의 기도회가 국가적으로 행하여졌나니 이것은 모두 鎭護國家의 기원이었다.

2). 국민도덕사상

우리나라 국민도덕사상은 유교의 사상도 물론 있었지만 유교가 말하는 삼강오륜의 사상은 불교에서도 덕목화되어있지는 않지만 역시 가르치는 바로서 이 점은 유불이 공통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는 유불간에 아무런 충돌도 없이 국민의 문화생활을 도와왔던 것이니 그 증거로는 「삼국사기」에 화랑도 교행의 기본사상에 관하여 「실로 이에 三敎를 포함하여 群生을 接化하니 잠시 들어가서는 집에 孝하고 나아가서는 국에 忠하는 것 같은 것은 魯司寇의 지(유)요, 無爲의 事에 처하여 不言의 敎를 행함은 周柱史의 宗이며(道) 諸惡을 莫作하고 諸善을 봉행함은 竺乾太子의 化다.(佛)」라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 불교사상이 화랑도정신을 배양한 실례로서 貴山  項에게 교시하였다고 하는 圓光法師의 소위 世俗五戒(一은 事君以忠, 二는 事親以孝, 三은 交友以信, 四는 臨戰無退, 五는 殺生有擇)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 아닌가.

고려시대에 이르면 八關齋會와 燃燈會와의 二大法會를 爭中行事로 국가가 이를 개설하여 국경일로 정하고 국민의 도덕심과 종교심을 고취하였는 바 이는 모두 불교의 행사들이었다. 燃燈會라 함은 釋迦大聖의 탄일을 경축하는 행사요, 팔관재회라 함은 불교 도덕의 일반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팔관재회에 관하여서는 국사학자간에 이론이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고려태조의 소위 「十訓要」제 6조에 「其六日, 朕所至願은 在於燃燈·八關이니 연등은 所以事佛이요 팔관은 所以事天靈及五獄名山大川龍神也니라」라고 있음에 의하여 연등은 불교의 행사요 팔관은 天靈, 五獄名山 大川의 龍神 등을 事하는 것이다라고 있음에 의하여 팔관회는 불교와는 무관한 행사라고 아마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팔관재회의 유래를 잘 모르는 까닭인 듯하다. 그리고 십훈요에도 불교와 무관한 것이라고 명기하여 있지도 않다. 팔관의 關은 禁의 義요, 齋는 齋法 즉 식사를 斷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신자가 六齋日(매월 8, 14, 15, 23, 29, 30일)에 一日一夜간 지키는 八種戒 즉 1. 離殺生, 2. 離不興取, 3. 離虛 語, 4.離非梵行, 5. 離飮諸酒. 6. 懲眼坐高廣嚴麗牀座, 7. 懲塗飾香髮, 8. 離食非時食을 말하는 것이다. 이 八關齋의 유래에 관하여 용수의 著 「大智度論」권 13에 「이날은 악귀가 사람을 쫓아 인명을 빼앗고 질병이 凶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길하게 하고자 한다. 그런고로 劫初이 성인이 있어서 사람에게 가르치되 齋를 持해서 善을 修하고 福을 作하여서 凶衰를 피하게 하였다. 이 때의 齋法은 八戒를 받지 않고 다만 一日을 不食함으로써 齋로 하였다. 후에 佛이 출세하자 이에 교어하여 曰 너는 마땅히 一日一夜 諸佛과 같이 八戒를 持하고 中(正午)을 과하여 먹지 말지니라 이 공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있다. 즉 인도에서 불교이전에 六齋日에는 귀신이 사람을 惱害하는 惡日이라하여 이날에는  목욕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렇던 것을 후세에 불교에서 이날에 일반 불교신자들로 하여금  八戒를 受持시켜 악귀침입을 피하고 복을 닦에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에 의하여 보면 「십훈요」에 天靈 등 諸鬼를 섬긴다는 것이 결코 불교의 팔관재의 의미를 떠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여튼 연등회를 열어서 三界大聖을 숭앙하는 종교심을 배양하는 동시에 또 제귀의 침해를 막아 국민의 복리를 도모하는 팔관회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 외에 불법의 인과설을 중심으로하여 생긴 무수한 勸善, 懲惡의 설화는 국민도덕상 중요한 지도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3). 철학사상.

유교가 그 실은 불교보다도 먼저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적으로 일반문화상으로 이렇다 할 공헌이 없음에 비하여 불교는 각방변으로 다대한 창작성을 발휘한 것은 불교에 철학적 이론과 이상이 있는 까닭이다. 철학이 없던 이 민족에게 비로서 철학사상을 준 것이 즉 불교다. 고구려에 초전하여온 불교도 불교철학중에서도 가장 이해키 어려운 三論宗이었다. 불교의 各宗 치고 철학적 이론이 없는 宗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초기에는 불교의 교리가 그다지 이해되지 못하였겠지만 오래지 않아서 이해되기 시작하여 당시에 삼국 고승들의 학설이 중국 일본등국에 높이 드날렸었다. 고구려 삼론학승 僧朗의 學解는 드디어 중국의 三論宗祖 吉藏을 계발시켜 중국삼론종을 개발케 하였고 또 고구려의 고승 慧灌은 일본삼론종의 개종조가 되었으며 신라의 元曉는 중국이나 국내학자들의 학풍과는 매우 달라 불교각종에 通曉하여 구금 각국에도 희휴한 위대한 불교철학자이였다. 그러므로 그의 학설은 중국 대학자에게 珍重視되고 일본 僧들에게 존숭되었다. 또 신라의 圓測은 당대 중국에 있어 新譯大家 玄 의 문하에서 唯識의 一派를 이루어 중국, 慈恩基의 유식학파에 대립하여 오래동안 學諍을 하였다. 역시 신라의 대현도 원효와 동일한 학풍으로서 다수의 三藏에 註疏를 남기고 있다. 이나라 불교철학사상의 선은 신라말까지로서 그 이후 고구려 李朝는 그 계승에 지나지 못하나 하여튼 철학이 없던 이 강토에 철학사상을 풍부히 해주었다.

4). 문학사상

불교의 典籍은 다른 종교에 그 유례를 보지 못할 방대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즉 경장, 율장, 논장 등의 三藏이라는 것으로 이는 모두 그대로 一大文學총서다. 그 중에는 詩가 있고 산문이 있으며 譬喩 因緣談 수많은 석존의 본생담등 주옥같은 문학편들이다. 이에는 모두 심오한 교리가 포함되어 있고 술어가 난해하여 일반문학자들에게 보편화되지 못한 관계상 우리말로써  化된 작품이 그리 많이 생기지 못한 것은 유감이나 그러나 그래도 우리의 고대문학이라 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일 망정 불교적인 것밖에는 없다. 즉 「삼국유사」에 보이는 鄕歌와 「均如大師傳」에 전하는 鄕歌등이 그것이다.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조 이조에 걸쳐 수많은 불교삼장에 관한 註疏 論著등 이는 모두 비록 한문으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의 사고 창안력에 의하여 생겨난 작품들이다. 또 그 선현들에 의하여 불러진 다수의 漢詩도 있어 다만  風弄月에 그치는 세속시와는 달이 초탈적이요 이상에 풍부한 別趣의 詩가 있어 우리나라 문학상 찬연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불교의 이상 권선징악의 교훈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수한 설화문학을 모두 수집한다면 우리나라 문학사상 방대한 문학집이 새로 생길 것으로 이는 이로부터의 신진문학가들의 노력에 촉망되는 바이다.

5). 공예와 미술

물질지주 유물주의자들은 정신현상은 물질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 하지만 靑山埋玉이나 鑛脈中의 황금은 천만년을 경과할지라도 그릇도 이룰 수 없고 寶冠이나 장신구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공예품이나 미술품은 인류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만약 물질이 곧 공예품, 또 미술품이라 한다면 현대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또 소유할 수 있는 그것은 신라나 고려시대 사람들 보다는 훨씬 풍부하다. 그러나 현세대의 우리는 신라시대의 金冠이나 고려시대의 도자기를 만들지 못한다. 이는 어떠한 민족적 이상이나 또 일정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가) 건축

우리나라 上古의 건축이 어떠하였던가 하는 것은 오늘날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最古의 미려웅대한 건축물이라면 그것은 거의 모두가 伽藍 堂塔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山紫水明한 곳마다 大小의 伽藍殿堂이 솟아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니 이는 세속적인 일반고궁이나 민간의 고루 大厦와는 아주 다른 불교건축의 특수한 美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 조각

極東 三大美術品중의 하나인 경주 석굴암, 석가상과 보살, 신장 등의 석조각품을 위시한 국내 도처에 산재한 石刻의 佛 보살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으로 합장을 하게 하는 윤환의 미를 갖추고 있다. 가람이 있는 곳에는 석탑과 石燈寵이 있다. 불국사의 다보탑을 위시한 무수한 석탑들은 과거 이 나라 민족들의 이상신념의 표현이다. 이것은 과거의 遺聞만이지만 신라 景德王시의 「萬佛山」의 공예품은 唐代宗으로 하여금 「신라의 巧는 天造요 人巧가 아니다」라고까지 찬탄하게 하였다 한다.

(다) 회화

고대의 불교적 회화품으로 국내에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과거사상에 남은 遺聞으로서는 신라시대 率居의 皇龍寺 壁間의 老松畵 같은 것이 유명하고 또 日本法隆寺 金堂 壁畵의 四大佛菩薩상도 極東 三大美術品의 하나로서 이는 고구려僧 曇懲의 작품, 고구려人 黃書本?(黃連文)의 진품이라고 하는 삼대미술의 二點까지가 우리 민족의 작품이다.
그 다음에 海印寺의 고려 大藏經板은 세계 어느나라 경판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雄建 견실한 것다.
또 李朝 500년간 유생 압정하에도 불구하고 현서울 「파고다공원」에 높이 솟아있는 13층의 정교한 석탑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상과 같은 모든 불교적 문화재는 단순히 인도나 중국의 그것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아니다. 만약 단순한 이식이라면 그것은 인도의 문화요 중국의 문화이지 한국의 문화는 되지 못한다. 우리 고대민족들은 외국의 문화인 불교를 받아들여 이것을 완전히 소화해서 혈육이 되고 우리의 정신이 되어 그 풍부한 정신으로써 그려낸 이상의 片片이 이상과 같은 제종의 문화재다. 이상이 없이 그려놓은 회화는 단순한 재색을 분포 光塡하여 놓은 物形에 불과한 것이요 신념이 없이 깎아 놓은 석탑은 木刀로써 빚어놓은 돌덩이를 모아놓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李朝에 제작된 불상이나 석탑등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으로 理想信念이 없이 다만 모방적인 작품이라고는 절대로 제작되지 못하는 것이다.

 

4. 장래의 불교문화

불교의 과거문화는 실로 찬란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으로서는 역사를 가지지 못한 민족에게 비하여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현재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 조상에 대하여 부끄러울만큼 우리가 창작하는 문화란 빈약하다.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서 굶주린 우리의 배를 불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찬란하였던 과거의 불교문화를 거울로 삼아 이로부터 새로운 불교문화를 창작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일뿐 아니라 이것이 또 불교 교훈의 본지일 것이다. 그러면 불교의 본지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불교가 우리인류생활상 없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1). 불교의 이상

우리 인류는 무엇을 생활의 목표로 하고 어떻게 생활하여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철학이요 종교다. 그러면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 나아가라는 것인가 이에 불교의 이상을 간단히 논할 필요가 있다. 세간에서는 흔히 불교를 초세간적인 염세교요 來生敎인 것처럼 알고 있는 듯 하다. 불교 교설중에는 그러한 교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한 어떤 단계적인 교설이요 결코 목적 그 자체는 아니다. 만약 초세간적인 것이 목적이라면 교주 석가모니불이 어찌하여 성도후 산으로부터 도로혀 세속으로 내려와서 후반생을 紅塵속에서 세속 사람을 상대로 하여 보냈을 것인가.

불교의 理想은 이를 간단히 요약해 말한다면 인생각자의 개인완성과 국가완성의 二條다. 이것을 전문술어로 말한다면 「一切衆生 悉皆成佛」과 「佛國土 顯現」과이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만인이 희구하는 바이요 천고에 미해결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중심은 인생으로서 인생은 그 본성을 찾아 그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 완성된 자를 佛陀 즉 覺者라고 한다. 만약 한사람이 불타가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것만으로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 아니 모든 동물까지라도 다같이 자기와 동등한 지위에 끌어 올림으로써 만족하고자 한다. 이것이 즉 「衆生無邊 誓願度」의 서원이 있게 되는 所以다. 그리고 그 다음의 목적으로는 그 불타가 거주할 국가를 훌륭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그 훌륭한 국가를 극락이니, 정토니  불국이니 한다. 불법에 아무리 많은 교설이 있다 할지라도 그 요지는 다만 이 두가지로서 불교의 二大목적이다.

돌이켜 고금과 미래를 통한 전인류의 공통적이요 일관불변적인 목적은 무엇이라야 하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불교가 가르치는 이 二大목적 이외에는 별다른 인류의 목적이 따로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은 생활의 목적이 명확히 서서 생활한다면 그 사람의 생활은 자신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힘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우리 선조는 불교수입이래 불교의 이상을 그들의 이상으로 하였었으므로 힘찬 과거의 불교문화가 창작되었던 것이다. 새 문화를 희구하는 우리 현대인이라면 어찌 이 과거의 역사를 거울 삼지 않을 수 있으리요.

2). 시대적불교

종교의 진수는 정신에 있는 것이요, 형식에 있는 것은 아니라야 할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의 종교적 의식 형식 전통등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한 과정이라 방편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그 목적은 아닐 것이다.

현대의 이 나라 불교의 현상은 과연 어떠한가 이에도 물론 적지않은 변화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구태의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000년전 熱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 와서 다소의 중국색채를 더한데다가 한국에와 또 1600년이래 한국의 古色을 첨가한 舊態의 불교가 과연 현대인들의 생활양식과 호흡에 맞을 것인가. 그것은 알맞는 것인 정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처럼 인류의 金寶로서의 불교를 가지고서도 이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원통한 일이 아닌가. 불교의 이상은 인류의 사상이 발전할수록 일신하여갈 약동의 사상, 生의 원천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새 사상을 현포대속에 넣어서 만인이 돌아보지도 않고 또 돌아보지도 않으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불교를 펴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법으로써 해야할 것이겠고 또 일반대중으로서는 과거의 그 찬란한 문화를 생산한 그 불교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검토하여볼 우리 조상에 대한 의무가 있지 않는가. 과거의 문화를 생산한 불교가 미래의 신문화를 또 생산 못할 이치는 없다. 불교는 약진하는 원리를 가진 종교다. 발견자만 나오면 얼마든지 발견할 여지를 소유하고 있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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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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