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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상의 진로 - 金東華(뇌허 김동화)

•- 목 차 -
서론
1.回顧的인 불교
 1) 불교의 근본사상 
 2) 불교의 實力誇時의 시대(고구려조) 
 3) 불교문화의 海外宣揚시대(백제조) 
 4) 眞俗一如의 불교시대(신라통일기) 
 5) 護國安民의 불교(고려조) 
 6) 隱忍自重시대의 불교(이조)
2.불교사상의 混沌시대(현대)
3.희망적인 불교시대(미래의 전망)
 1). 신앙의 본존
 2). 소의의 경전
 3). 교학적조직
4.결론
 

서론

불교의 진로라 하면 이에는 대체로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볼수 있으니 그 하나는 교단으로서의 진로요, 다른 하나는 사상으로서의 진로다.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상을 토대로 하고서 성립되는 단체인만큼 사상을 분리하고서는 그 존립을 생각할 수 없는 단체이다.

종교의 발생적 과정을 보아서는 그러한 것이지만은 그러나 일단 종교가 한 단체로 이미 성립이 되고보면 그 종교의 근본이념과 遊離해 가면서도 그 교단을 유지해 가기에 급급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불교가 교단적으로 어떻게 걸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그 장래성을 전망하고자 하는 것이 본론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사상의 진로가 일반사회인사들로 부터 문제가 된다는 것은 각 종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념과 일반사회인사들의 이상 현실과의 거리가 너무나 먼데 있는 것이다. 즉 인간계의 현실은 너무나 실리적이요 생생하고도 명백한 것임에 비하여 종교는 초현실적이요 환상적이며 애매하다. 인류지식의 발달에 의하여 나날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출현해서 현실생활의 모든 편리를 제공하고 있어 천당과 극락이 먼 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此方이 곧 그곳이라는 실증을 해가고 있는듯 하니 현대일반상식인들이야 어찌 종교의 교설을 의심치 않을 수 있으리요. 더욱이 불교의 현실로서 본다면 승려의 생활양태는 초현실적이요, 그 所說의 理想은 來生主意이러한 불교가 과연 석가모니불교 교설의 眞意이며, 또 모든 중생을 廣度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불교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불타의 사상은 일체중생을 제도할 사상이므로 절대적이여야 할 것이다.불교의 사상이 과연 현대인류의 사상, 또는 미래에도 발달할 미지수의 모든 인류의 사상에 附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불교의 사상이 그 미지수의 인류사상을 능히 支配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불교인들에게 이 세가지 문제를 설문하다면 모두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한다면 그 답이 모두 용이한 문제들이 아니다. 첫째 불교의 사상이 절대적이라 한다면 그 어떠한 점이 절대적인가, 그 구체적인 점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아직 들어본 일이 없다. 둘째로 현대의 과학문명과 또 아직도 무한하게 발달하여가고 있는 미래의 인류사상에 附和하여 갈 수 있다는 자신있는 답이란 좀처럼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의 그 미지수의 인류사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답은 더욱이 難答중의 難答일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 세가지의 문제에 대응하여 나아가지 못한다면 불교사상의 장래의 진로는 매우 암담한 것이라 보여진다.

불교사상의 진로라 하면 현재에서 미래만을 전망하는 것이 그 고찰의 범위라고 일반에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사상적 문제라는 것은 현재에 비로소 발생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발생한 현재요, 현재가 있으므로 또 그 미래를 상상할 수 있고 전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를 질머지고 미래를 안고 있는 중심적인 현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사상의 진로를 생각함에 당하여서는 자연적으로 過 現 未 三世를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현재의 상태를 알기 위하여 과거의 진로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고 또 미래의 진로를 판단하기 위하여 그 바탕인 현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상은 그 실제에 있어서 過 現 未 三世의 자연적인 과정을 밟으면서 발달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진로 즉 그 발전과정을 回顧的인 불교(과거), 混沌의 불교(현재), 희망의 불교(미래)등 三段으로 나누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본론

1. 회고적인 불교

1). 불교의 근본사상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지내온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문제는 불교의 근본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상술에서도 "불타의 사상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라는 것을 제창하였었다. 불타가 일체중생을 廣濟하는 것이 그의 근본사상이요 또 이 사상을 實踐躬行하는 것이 그의 교설이라 한다면 설사 인류의 문화가 아무리 발전하다 할지라도 불타의 사상이 동요될 리가 없을 것이다. 인류가 어떠한 문화를 창작한다 할지라도 그 究竟目的은 결국 인류의 생을 위한 것일 것이다. 불타의 광제중생의 의의도 결국 전인류뿐이 아니라 기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眞生을 얻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불타의 究竟目的이나 인류문화의 그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타의 사상이 절대적이어야 할 그 근본사상이 과연 무엇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같이 불교라고는 하나 이른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간의 교설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은 불타의 교설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佛陀悟道의 내용에 대한 제자들의 관점에 상이한 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타의 오도의 내용이 무엇인다. 悟道라 함은 道를 깨달았다, 또는 成道, 도를 이루었다하니 여태 없던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새삼스리 얻어진 것처럼 일반에게 알려지고 있으나 그것은 오해다. 석존께서 오도를 하셨다는 것은 자기자신 즉 眞我를 체득하였다는 것이요 眞我란 自己 自心의 眞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신이나 자심의 진심이란 잭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중 내재적인 존재 즉 진정한 자아인 것이므로 이것을 일러서 道라 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眞我를 그 전에는 어째서 발견하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자기의 心中에 있는 장애물로 인하여 자기의 자심을 바로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煩惱障과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이라 함은 자기의 一心中에 起滅하는 煩惱妄想心의 작용으로서 이것은 즉 감정적인 번뇌인 것이다. 석존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심한 결과로 이

감정적 번뇌가 소멸하였으니 이 心境을 일러서 涅槃을 證得하였다고 한다. 즉 석존이 오도한 것을 일명 열반하셨다함은 이 의미를 가르쳐 말하는 것이다. 열반이란 滅度, 寂滅, 圓寂, 吹消등 여러 가지의 소극적인 譯語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인바 要는 "있던 것이 없어졌다. 그것은 마치 타던 燈火가 꺼진 것 같다." 라는 의미이다. 그 무엇이 있다가 없어졌단 말인가? 그것은 "심중에서 타고 있던 煩惱妄想心火가 꺼져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즉 열반의 의의이다.

그 다음에 所知障이라 함은 알바의 대상을 알지 못하게 하는 역시 一心中에 起滅을 하는 지적인 번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 인생, 일심의 본연의 상태대로 둔다면 그것은 마치 안경속과 같아서 胡來 胡現, 漢來 漢現 모든 대상을 물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또 모든 이치를 생각할 때도 그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함이 전자를 事惑이라 하고 또 후자는 이것을 理惑이라 한다. 이와같이 모든 事理에 대하여 만약 吾人의 본심대로만 있다면 당연히 미혹하지 않고 알것이로되 이것을 그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소지장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일심중의 번뇌장을 끊고서는 열반을 증득하고, 소지장을 제거하고서는 苦提 즉 覺을 증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열반을 증득하므로 인하여 일심의 감정이 원만하여지고 菩提를 증득하므로서 일심의 지혜가 원만하여지는 것이다. 또 이와같이 情과 智가 원만하여지는 것을 일명 解脫이라고도 한다. 해탈이라는 의미는 一心이 감정적으로 균형을 잃을때는 우리의 身心을 속박한다. 또 知的으로 일심이 어두어지면 더욱 그것이 심해진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러한 知情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자기의 오도의 경지를 心解脫하고 慧解脫하였다고 하셨다. 즉 심해탈이란 다름아닌 번뇌장을 해탈하셨다는 말이요, 또 혜해탈이란 소지장을 해탈하였다는 의미 인 것이다. 이상 고찰하여 온 바와 같이 釋尊悟道의 道의 내용이란 결코 우리 인간자체를 떠난 어떤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자체, 인간自心이 곧 진정한 자아라는 것으로 이 眞我의 체득을 일러서 열반이다, 菩提다 解脫등이라 하는 것으로 이것이 다름아닌 도의 내용인 것이다. 석존의 이와 같은 道說眞理觀은 동서고금 어느 종교 어느 철학설에서도 아직 일찍 보지 못한 독특한 사상일 것이다. 다시 이것을 요약해 말한다면 석존의 종교 및 철학사상의 특징은 인간본위의 종교요 일심위주의 철학인 것이다. 불교에는 대소승의 많은 經과 律과 論등의 三藏이라는 것이 있어 그 중에는 반드시 모두가 앞뒤가 맞는 말 뿐만은 아니다. 즉 전후가 상치되고 모순되는 말이 없지도 않으나 모두 불타의 교설인가 아닌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맹자의 말에도 "盡信書면 不如無書"라는 말이 있거니와 삼장에 나오는 것이라 하여 그것이 모두 불설이라 본다면 그것은 큰 착오다. 그 大小乘 諸經中에서도 어떤 것이 교주석존의 근본사상이요 중심사상인가를 把握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중심사상을 주조류로 하고서 기타의 제교설을 종합비판해 보는 비판의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은 불타의 근본사상에 대한 관찰여하에 따러서 대승과 소승의 불교는 자연적으로 갈라졌다. 대체로 上座部系統의 사상이 소승불교로 발전하였고 大衆部系統의 사상이 대승불교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大衆部係에서는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은 불타의 근본사상을 계승발전시켰고 上座部係에서는 석존의 인간본위의 사상을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인간의 究竟목적은 인간의 생활무대인 삼계를 超出하여 인간의 육신을 再受하지 않는데 두었다. 그러므로 도의 내용을 소극적인 열반으로만 주시하고 菩提나 心解脫慧解脫등에는 관심을 기우리지 않았다. 불타는 자기 所說의 열반의 의의도 現證涅槃 즉 現在世에서 열반을 증득하여 心自在 慧自在 한 것임을 극력 주장하였지만은 상좌계에서는 이 교설이 그다지 관심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자재 혜자재한 菩提의 증득자는 교주석가세존뿐이요, 자기네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포자기하였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대중부의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즉 대승불교인 것이다.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교주석존의 인간본위 일심위주의 사상을 보다 더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인간본위의 사상을 一切唯心主義 사상으로 각각발전시켰던 것이다.

어찌 인간만이 오도할 수 있으리오, 凡有心者는 皆有佛性이라 하여 十界衆生은 다같이 일심을  生하였고,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의 본성이 있으며 이 본성이 즉 다름아닌 己悟者 불타의 본성과 똑같은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 佛性이라 한 것이다. 이것을 일러서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한다. 그리고 일심위주의 사상은 드디어 三界唯心 一切唯心造의 사상으로 발달하였다. 일심의 본성이 즉 불법이요, 중생심이 현실심, 즉 망심이 허망한 삼계와 범부로서의 중생을 조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서 "三界虛妄 但是一心作"이라 한다. 대승경전상에서는 이와같은 사상을 불교의 목적적 견지에서 "衆生成就"라 한다. 모든 대승경전에 공통하는 二代目的觀이 있으니 그 하나가 이에 말한 「衆生成就」요 또 다른 하나는 "淨佛國土"설이다. 般若 華嚴 涅槃 法華 維摩등 諸대승경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두가지 목적설이다. 즉 중생성취라 함은 能敎化者인 불타로서는 凡有心者는 십계중생이 悉皆平等하니 모두 다 己成佛者인 자기와 같이 불타가 되게 하자는 서원이요 또 교화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정불국토라 함은, 우리 중생들이 살고 있는 그 국토를 불국토 즉 극락국토로 정화하자는 서원인 동시에 또 교화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前條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다같은 인격자로 향상시키자는 것이요 그 後條는 중생의 생활무대인 이 나라를 그대로 극락국토화하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불교 2대 목적이니 이것은 徹底한 인간 아니 넓은 의미에서 범부인 중생본위이요,

이 국토를 떠난 저편에 천당 극락을 찾는 타방주의가 아니라 婆裟卽寂光土의 此方主義인 것이니 이러한 주의를 옳게만 살려 나아간다면 앞으로 발전하는 인류의 문화는 그것이 딴 문화가 아니라 바로 불교의 문화인 것이다. 인류로서의 석가가 이러한 二大理想을 인류에게 제시하여, 이와같이 나아가라는 이정표대로 나아가는 것이 곧 다름아닌 현대문화의 발전상인 것이다.

2). 불교의 實力誇示의 시대(高句麗朝)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불교가 수입된 것은 지리적 順次에 의하여 고구려이었던 것으로 그것은 제17대 소수림왕 2년 서기로는 372년의 일이었다. 그 후 제28대주 寶藏王 27년(서기 668)에 국가가 멸망함과 동시에 불교도 따라서 멸망하고 말았으니 불교의 유포 신봉기간은 296년간이었다. 이 기간에 어떤 불교가 신봉되었던가 하는 것은 국내 기록으로서는 명확한 것을 알 수 없다. 즉 대소승중 어느 불교가 신봉되었던가, 그 초기에는 人天因果설의 소승불교가 신봉되었던 것은 覺訓의 "海東高僧傳"에 의해서 짐작할 수 있다. 佛敎輸入204년후 비로소 그때 불교연구의 일면을 전하는 기사가 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大承相 王高德이 僧 義淵을 중국  에 있던 地論宗學者 法上에게 派送하여 불교사에 관한 문제와 十地, 智度, 持地 金剛般若등 諸論에 대한 의문점을 물어 오도록 한 사실이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 이 시대의 불교인들의 관심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때까지의 불교연구는 불교의 역사성을 전연 무시하였던 것이 불교사에 관한 관심의 도가 높아졌음을 추측할 수 있는 동시에 十地論등 諸論은 불교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論들이므로 이 때의 연구대상이 철학적인 論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諸論들이 어느정도로 연구되었던가 하는 것을 전하여 주는 국내의 문헌은 없다. 그러나 이 외에 중국문헌에 의하면 龍樹著의 中觀十二門과 提婆著의 百論등 이른바, 三論學이 매우 왕성하게 연구되어 유수한 고구려, 삼론학자들이 중국에 까지 그 명성을 떨칠뿐 아니라 실제로, 중국불교계를 敎導 支配하였었다. 중국은 원래 고구려에 불교를 전달하여준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수혜국인 고구려로부터 삼론교학을 逆輸入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斯學의 深度를 誇示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국에 삼론이 번역된 것은 서기 401년이후의 일이다. 이것이 언제 고구려에 전래하였던 가는 알 수 없으나 서기 500년 이후에는 벌써 斯學의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되었었다. 중국에서 삼론학이 일종으로 성립된 것은 隋代吉藏(549-623)에 의해서다. 이 三論宗祖인 길장이 삼론교학을 수립함에 당하여 항상 그 說의 권위로 내세우는 것이 高麗朗大師 攝山 大師의 학설이었는바, 그 朗大師가 누구냐 하면 高句麗遼東僧朗大師를 말하는 것이다. 길장으로서는 직접 僧朗大師에 수학은 하지 않았다.

羅什-僧嵩-法度-僧朗-僧詮-法朗-吉藏등 이것이 즉 三論七代相承의 계보라는 것인바 이로서 본다면 승랑은 길장의 鼻祖에 해당한다. 그렇지만은 학설상으로는 누구보다도 가장 직접적이었고 유력한 권위의 학설이었던 모양으로 그 여러 가지 저서상에 빈번하게 승랑의 학설을 내세워 그것으로써 權輿를 삼고 있다. 승랑은 대개 서기 502-556년간의 생존으로 추정되는 고승으로서 梁武帝가 그 學名의 높음을 듣고 특히 僧詮等 10인의 학승을 선발하여 승랑에게 삼론학을 전공시킬, 정도이었으니 그 學譽와 學力은 가히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구려의 삼론학승은 다만 승랑일인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續高僧14 惠勇傳에 의하면 惠持라는 僧이 高麗實法師에게 삼론을 듣고서, 幽極을 鉤探해서 門學이 높아졌다고 하여있고, 또 중국승 靈睿가 고려 印公이 入蜀하여하여 삼론을 講하며 印師의 제자가 되어 대승을 常業으로 하였다고 한다.(續高僧傳15, 靈睿傳). 이상 實法師와 印法師는 吉藏과 同時人들이다. 그러니 그들도 원래 본국에서부터 상당히 권위있는 삼론학자들이었던 것 같다. 중국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달해준 지도국이었다. 그렇던 것이 이제는 역으로 고구려학자들에게 도리어 배우지 않으면 안도리 반대의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은 고구려 불교학의 誇示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삼론학력의 伸長은 다만 북으로 중국에 뿐이 아니라 남으로 일본에 까지도 파급하였다. 이러한 사실도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일본문헌상에만 나타난 것으로 "釋慧灌 이라는 고승은 고구려인으로서 入隋하여 從嘉祥吉藏大師라하여  三論旨하고 推古13년(서기605)정월 元日에 貢來하였던지라 勅住元興寺하니 盛說空宗이러라- 弘通本宗하다가 九旬에 멸도하니 爲本朝三論宗始祖焉"이라고 (傳通緣起)하여 있는 바와 같이 일본 삼론종시조가 되었다. 그 다음에 慧灌보다는 약간 후에 역시 고구려승으로서 隋吉藏에게 삼론을 수학한 道登이 있었는 바 그도 推古36년(서기 628)에 일본의 唐遣使를 따라 일본에 가서 元興寺에 住하면서 空宗을 專說하였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로만 보아도 고구려의 삼론학이 얼마나, 그 권위가 있었던가를 推知키에 넉넉하다.

원래 삼론종의 근본학설은 이 우주만물과 인생만사를 空假中 三諦로 나누어 보는 순수한 철학종이다. 고구려 그 때에 이러한 철학사상이 그만치 인식되었다는 그 사실만도 놀라운 일이지만은 이 사상을 중국에 역수출하여 중국에 삼론종을 수립시켰고 또 일본에 전수하여 이 종이 서게 하였다는 이 二大事實은 고구려 불교의 해외 一大宣揚이요 誇示며 승리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3). 불교문화의 해외선양시대(백제조)

백제에 불교가 전래한 것은 제15대주 침류왕원년 9월, 서기로는 384년으로, 胡僧 摩羅難陀가 晋으로부터 齎來 하였다 한다. 불교수입후 100여년간의 불교발전상은 알 도리가 없다. 제 26대주 聖王4년(서기 526)에 謙益법사가 律을 求하여 인도에 처음으로 갔다. 5년간을 滯印하면서 범어부터를 학습하기 시작하여 율을 연구해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 후 국내 28학승으로 더불어 律部 72권을 번역하였으니 이것은 彊上의 初有之事일뿐 아니라 그 후 麗, 濟 新羅統一期를 통해서 전무한 유일의 盛擧이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백제 율종의 권위를 欽慕하여 서기 590년 善信 阿尼등 2尼僧이 3년을 수학하고 나아가서 일본 율종의 始가 되었다 하니 이는 백제불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서기 602년에 백제승 觀勒이 歷本, 天文, 地理書, 遁甲方術書를 가지고 갔다 하는 바 그는 삼론학자일뿐 아니라 旁通外書했다 한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그를 원흥사에 전하게 한 후 後才들을 선택해서 그에게 취학케 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는 일본불교계 최초의 僧正직에 취임하였다 한다. 상술한 고구려의 慧灌은 제 2대 승정으로 임명되었다. 즉 관륵은 內로는 삼론학에 뛰어나고 外書에도 旁通하였던 學德겸비하였던 고승으로서 일본 朝野에 그 德化가 자못 컸던 것 같다.

서기 684년에 백제 고승 道藏이라는 成實學者가 관광차로 일본에 渡去하였는바 그는 博學이요 靈通僧이었다한다. 그가 일본에 건너간 후 "成實論疏" 16권을 저작하니 그 후 東大寺의 학승들로서 성실론을 講하는 者 道藏의 疏에 의하지 않는 者 없었다 하니 그 권위는 가히 짐작할 만 하다. 그는 사실상 일본 成實宗의 시조이었던 셈으로 奈良 6宗中 삼론종의 고구려 慧灌과 더불어 2종의 宗祖가 되었었다. 당시 일본불교로 하여금 道藏은 "法門의 袖領" "釋道의 棟樑"이라고 까지 찬탄하게 된 것은 실로 그러하 實績이 있었다. 그 다음 백제로서 위대한 擧事를 한 것은 일본에 대하여 불교를 公傳한 일이다.

其實은 이일이 먼저 있었던 일이지만은 이에서 최후로 論하는 바이다. 백제 제 26대왕 聖王은 북으로 남으로 불교를 主로한 국제적 교류를 하기에 많은 노력을 하였던 것 같다. 즉 서기 514년에는 양에 사자를 보내어 毛詩博士와 열반경등의 義疏와 工匠畵師등의 派送을 요청해서 성공하였고, 또 서기 545년에는 丈六佛像을 조성하여 일본 欽明天皇에게 보냈다 하고, 또  同552년에는 同 天皇에게 불법을 公傳하였다고 한다. 이 불법공전시에의 國書의 文章, 즉, "是法은 於諸法中에 最爲殊勝하여 難解難入이라 周公 孔子 常不能知" 云云은 일본학자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은 그러나 성왕으로 불교를 공식으로 전달하였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는 일인 것 같다. 어떤 一國이 이러한 위대한 문화를 타국에 전달해 준다는 것은 문화적 지위의 우열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의 이와 같은 문화적 국교로 인하여 일본은 오늘날까지 불교국이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 대하여 단순한 불법만을 전수한 것이 아니라 유교도 전수하였던 것이며 기타 建築工 畵工 製紙空等 諸般技術者까지도 모두 백제에서 派送하여 일본의 문화를 開拓하였던 것이다.

近者에 傳聞한바에 의하면 일본불교계에서는 일본이 과거 백제로부터 입은 은혜를 보답키 위하여 백제 古都 扶餘의 地에 謝恩碑 건립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다.

4). 진속일여의 불교시대(신라통일기)

신라불교는 三國 時代와 통일 이후와의 二期로 나누어 보는 것이 편리할 것으로  立時代에 있어서는 지리적 관계로 제일늦게 수입되었을 뿐 아니라 그 두드러진  특색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통일이후(서기 650)에는 교학상으로나 文物 鎭護國家, 花郞道의 출현등 현저한 신라적인 불교의 특색이 나타났었다. 먼저 교학적 불교를 본다면 서기 650-同800년간에는 이론철학적인 說一切有部(實有思想), 成實(空思想), 三論(中道思想), 攝論(原始唯識思想), 涅槃(人格主義思想), 法華(實相思想), 法相(唯識思想), 華嚴(法界緣起思想)등 諸宗의 불교가 성행하였고, 또 서기 800년으로부터 國末인 동935년 까지에는 실천적인 彌勒의 兜率往生思想, 律宗, 彌陀의 淨土往生思想 眞言宗(卽身成佛思想) 禪宗(現身成道思想)등의 諸宗들이 흥행하여 실로 蘭菊의 美를 다투었다. 이때에 교학이 興隆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인들이 단순히 종교적으로 믿기만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은 諸宗에 관한 신라고승들의 견해를 발표한 저서들이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일이란 삼국 및 통일이전에는 없었던 통일기이후의 特有事實이다. 그 다음 불교사상의 세간적인 표현으로 여러 가지의 문화가 발생하였으니 伽藍殿堂, 幢塔石燈, 佛像, 佛畵 梵鐘등 諸種의 불교미술품이 그것이다. 오늘날까지 한국고대의 미술품이라면 불교의 유물을 제외하고서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바 그것은 주로 통일기이후의 제작품들이다. 

그 다음에 승려들이 국가정치에 직접 참여한 일도 없지 않지만은 당시 고승은 모두 국가 안위의 실천정치에 관심이 깊었던 것이니 입당유학생들인 慈藏 義湘등이 모두 그러하였던 것이다. 당나라의 政情을 살펴서는 본국에 先通하여 그 患難을 미연에 방지하고 당나라 고승들에게 國家安泰의 방법을 물어와서 政府에 보고하여 그 방법을 실시하며(皇龍寺 구층탑건립) 또 唐朝의 정치 및 관복의 제도까지도 調査獻義하여 制定實施케 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이때의 고승들은 정치의 顧問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신라 고승들이 국가의 安泰를 직접 생각하여 그 만일의 危難이라도 없게 하기 위한 것이 즉 鎭護國家의 諸種行事이었으니 仁王百高講座會, 八關齋會, 四天王寺건립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 국토를 태평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전의 祈禱나 신명의 수호만을 기원하는 소극적인 수단이외에 적극적으로 국토를 방위해야 할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干城인 군인을 길러야 한다. 이때의 군인이 다름아닌 花郞道다. 화랑도의 교육은 어떠한 사상에 입각하였는가? 崔致遠의 說에 의하면 儒道佛 三敎混融精神 (實內包三敎, 接化群生)에 의하여 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볼 때 실지로 화랑교육을 담당하고 나섰던 것은 圓光法師 眞慈등 고승 뿐이었다.

이상 제사실중 불교학의 대성과를 올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타 불교사상에 의한 세속적 문화조작, 승려의 정치에의 관심, 진호국가, 화랑도교육등과 같은 것을 불교의 眞諦的 (出家本位의 思想)견지에서 본다면 무슨 관계가 있는 일이란 말인가? 즉 이것들은 俗諦的인 일이다. 과거, 麗濟 兩國의 불교는 眞諦的 입장에 주로 處해있었다 할 수 있다면 이제 신라의 불교는 진제를 속제상으로 보고 또 속제에 처해 있으되 항상 진제를 잊지 않는 眞俗一如의 불교라 할수 있는 것으로 대승불교사상의 갈데까지를 간 것이라 할수 있다.

5). 호국안민의 불교(고려조)

신라말기에 이론불교에 대신하여 禪, 眞言密敎등의 실천불교가 수입되어 이론불교는 다시 再興하지 못하고 신라가 멸망하는 동시에 高麗朝로 바뀌었다. 이 나라 이론불교는 신라통일 그 전반기에 終幕을 告한 후, 그 후반기에 수입된 실천불교의 二宗이 고려조에 계승되어 470여년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나라 불교사를 만약 대표적인 형식상으로만 본다면 가장 화려하고 훌륭한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승려중에서 수많은 國師와 王師가 배출하여 국가와 사회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사상 내용으로 본다면 가장 빈궁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王氏가 이어받아 고려조를 세우기는 하였지만은 政見上으로나 일반적인 識見, 정치적 迫力등 어느모로 보아도 그다지 自信을 소유한 정치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불보살의 가호에 依賴하여 타력주의에 기울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불교는 신라조부터 국교이었으니 이를 국교로 삼았던 것이요, 國敎를 삼은 이상 승려들을 우대하여 호국안민을 기원해 주도록 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 아닌가. 一言而蔽之하면 고려 470여년의 불교는 호국안민의 祈禱佛敎이었다 할 수 있다. 그 기도는 眞言密宗의 本職이다. 禪宗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은 국가의 요청에 의하여 역시 기도를 본업으로 하게되었다. 그 방법으로서는 仁王般若百高座會 金光明經會, 法華會, 華嚴會, 기타 多種의 법회 심지어 談禪法會등 까지도 열어서 호국의 기도를 행하였으며, 수백 수천 수만승려에게 공양을 베푸는 공덕력에 의하여 기도의 목적을 達하자는 飯僧會까지도 자주 자주 열었던 것이다. 高麗史, 歲歲年年 可謂 每月條에 불교의 무슨 법회인가를 반드시 개최하였던 기록을 볼 수가 있으나 이것은 반드시 왕씨조의 열렬한 불심의 발로라기 보다는 호국안민의 성의가 얼마나 놀라웠던가 하고보면 可할 것이다.高麗 大藏經彫板의 대사업도 역시 그것이었음은 그 彫板願文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6). 隱忍自重시대의 佛敎(李朝)

고려조 佛敎偏重의 정책은 드디어 李朝의 排佛정책을 초래하게 되었다. 고려말기유생들의 文集上에 가끔 불교의 五敎兩宗이라는 文句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조에 五敎와 兩宗이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무엇이 五敎요 兩宗이었던지는 명시되어있지 않다. 李朝의 문헌에 의하면 12종이 있었다 하나 그 宗名조차 불분명하거던 하물며 그 각종의 宗指이랴. 그렇던 것이 太宗의 배불정책에 의하여 七宗으로 合宗되고 다시 禪, 敎 兩宗으로 縮宗되어 衰微의 일로를 걸었으나 어느 한 선사의 抗拒도 어느 한 법사의 扶敎樹宗의 陳情도 없이 기울어지고 없어져만 갔다. 불교라는 것 보다도 나머지 무기력한 승려들은 그 殘命을 보존하기 위하여 산중으로 隱遁하게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산중에 은둔하게 됨으로 자연 자기반성을 거듭하여 가는中 진정한 修道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결과로 오히려 高僧碩德도 나게 되어 꺼져가던 法燈이 再燃하게도 되었다. 그러나 교학상으로는 그다지 지목할만한 학자가 없었던 것 같고 선사로서는 명실상부한 분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항상 국태안민의 기원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라는 一大國難을 당하였을 때, 法服을 벗어부치고 武器로써 적군을 상대로 전투의 실전도 하고 山城을 築造하여 적병의 침공을 방어하기도 하며, 또 전후에는 和平條約의 사절로 친히 일본에 가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니, 이것을 일러 승병이라 한다. 만약 소승불교 사상에서 본다면 승려가 전투에 참여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설사 대승사상에 입각한 불교라 할지라도 인도, 중국, 일본 어느 나라에서도 아직 승병이라는 역사가 있었던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사상을 이상으로 하고 眞俗二諦의 意義를 올바르게 체득한 우리나라 승려들은 累卵의 위기에 처해있는 이 時機에 敢然히 뛰어들어 報國의 誠을 다하였다. 殺人劍 活人劍의 妙는 실로 이에 있는 것이다.

 

2. 불교사상의 混沌時代(現代)

이조말기의 佛敎壓迫은 승려 입성까지도 금지되고 있었으니 그 악랄한 수단방법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이 惡政에 義憤을 금치 못한 일본 日蓮宗僧侶 佐野前勵는 서기 1895년 한국정부에 승려 입성금지의 解禁願을 내어 이것이 허락되었다. 이조 500년이래의 佛敎壓迫은 이로써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후 승려들의 身命은 保障되고 신교육의 惠澤도 받으며 도시 진출의 자유를 얻어 포교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려들의 오랜동안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도리어 그것이 자유방종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태까지 山中에만 蟄居하고 있던 불교가 도시에 진출함에 따라 자유화되고 대중화되어 불교의 발전상을 보인 점은 좋았다. 그러나 그 자유는 대부분 방종에 흘러 승려들의 본분인 불교학의 硏讚, 자기수양, 승려로서의 품위행동등에 너무나 소홀한 점이 많았었다. 이때에 이것을 규제할 僧規가 없는것도 아니고 憂敎之師가 없었던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潮流의 대세는 것잡을수가 없었다.

高僧碩學 凡庸役僧 자유의 心醉者 憂敎者할것없이 모두 다 그 조류에 휩쓸리고 말아 불교라는 것은 사원이 남아있고 사원이란 몇천석의 財産이 서 있는 것이었으며 승려란 이것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불교는 이미 不在이었다. 이 滅亡相을 直視하고 扶敎立宗의 운동으로 蜂起한 것이 아마도 독신승들을 중심으로한 불교정화운동이었을 것이다. 이 정화운동의 동기와 시기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 수단과 방법이 拙劣하였다.

정화라는 의미는 부정한 것을 청정화하는 것일 것이다. 不淨하다 하여 그것을 亂麻에 快刀式으로 물밀어 싹 잘라버린다는 것은 정화가 아니라 이것은 살인행위였다. 佛法門中에 不捨一法이라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다. 전연 생소한 사람도 그를 교화하자는 것이 포교의 정신 이어늘 이미 수십년 아니 일평생 불교정신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일시에 착오로 옳은 길을 못 걷는다 해서 그들을 草芥取扱했다는 것은 교화의 정신에도 어긋날뿐 아니라 人情體面上으로도 차마 하지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정화인들은 그 자체가 어떠한 사람이며 또 장차 자기네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 것을 자각할 이성의 작용이 부족했다. 다시 말하자면 피차가 다 같은 범부라는 것을. 정화 10여년후 오늘날 한국불교는 과연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고구려와 같은 학문의 불교로 되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며 해외에 우리 불교문화를 전수하던 백제불교, 眞俗一如의 신라불교 호국애민의 고려불교 그 어떤 것을 가져왔단 말인가? 필자가 최근에 들은바에 의하면 현대 우리 나라에 불교의 17종파가 탄생하여 연합회까지 성립되었다 한다. 참으로 놀랐다. 중국불교가 그 旺成의 극에 달했을 때가 13종이었고 일본불교가 13종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들 국가에는 上廻하고 있는 현황이니 이 어찌 성사가 아니리요. 나는 현재의 불교를 混沌불교라 보는 바이다.

 

3. 희망적인 불교시대(미래의 전망)

필자는 현재 우리나라 불교가 혼돈상태를 이루었다 해서 一向히 落望만은 하지 않는다. 찬란한 삼국시대의 불교를 이룬것도 우리의 조상이요 현대의 혼돈불교를 이룬것도 그 조상의 후손인 우리들인 것이다. 인간계의 興亡盛衰는 자연히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들이 연출하는 것이다. 一願하였으니 一起할 순서다. 땅에 거꾸러진 자는 땅을 집고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사실인만큼 混沌渾濁을 이룬 우리 불교도는 또 우리의 손으로 그 渾濁을 갈아앉혀서 정상적 불교로 재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舊佛敎에로 환원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주가 가신 2500여년전후인 現世代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불교교리를 보는바도 다르고 신행하는 생활양태도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불교가 일체중생을 廣濟하게 되는 포용성있는 광활한 사상인 점이다. 사람은 희망에 살아야 하고 희망이 있는 인생에게 창조와 발전 건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나라에 불교의 17종파가 이미 분립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一向히 이것을 불쾌한 마음만으로 보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고로 불교가 한 종파로서 분립한다는 것은 한 거창한 일이다. 정통불교 교단에 분규가 있은 이후 각 종파를 분립 시킨다는 것을 마치 한 商社에서 그 분점을 벌인다거나 또 각은행이 그 지점을 벌이는 것처럼 용이하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는 듯 하나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정통불교 교단의 투쟁상을 본다면 기성종단인들의 학식 품위 도덕행위을 본다면 또 그 투쟁의 수단방법 내지 그 지속상을 본다면 그들에게 무슨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는가. 실로 배울것도 본뜰 아무것도 없지 안느냐, 그러한 사람들도 현불교를 이끌어 나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일반 신자인들 어찌 종단을 독립할 수 없으랴, 하는데서 불과 몇 년간에 雨後竹筍과 같은 새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한다면 무리도 아닐법 하기는 하다. 그러나 상점의 분점을 벌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상업이 번성하여지리라고 믿을 수 없는바와 같이 신종파로 분립한다고 해서 그것의 발전과 영구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妄計다. 왜냐하면 불교라는 종교는 철통같은 교리의 조직과 근거전통등이 있는 것이라 이것을 무시하고 세워진 종파라면 그것을 만약 他日, 具眼者가 본다면 자연 이에 대한 반대가 있을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 종파의 존립성도 없게될 것이 아닌가. 또 불교라는 看板을 질머지면서도 불교의 전문적 학식이 없으므로 불교 교설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딴 組織的을 가지고 불교행세를 할려고 하는 종파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도 떳떳치 못한 일이다. 불교의 간판을 필요로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부터 신종교의 하나로 출발하는 것이 可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한국불교 사상의 발전적 희망적인 견지에서 어떻게 했으면 이미 일어난 諸派의 불교를 합리화시키고 장차 일어날 새 불교를 유발 발전시킬것인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여 오는 바이다.

왜냐하면 불교가 소유하고 있는 經 律 論 三藏中에는 아직도 新宗이 일어날 근거 또한 얼마든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연구발견하여 불교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교사상 원래의 진로인 것이다. 인도 중국 일본 할것없이 그나라 교단내의 투쟁이라 하면 그것은 교리사상의 優劣을 다투는 것이 主였다. 어느나라 불교에 종권쟁탈 사원쟁취의 추태가 있었단 말인가. 우리나라 현 정통교단의 투쟁이 교리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얼마나 靑史에 빛날일이었을까 한다. 하여튼 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제종에 대한 참고를 또 새로일어난 제종의 각오를 위하여 기왕의 諸宗分立의 기준이 되었던 諸條件을 밝혀 보기로 하자. 이러한 것은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왕에 분립되었던 諸國의 諸宗이 모두 그러한 대체적인 기준이 동일하였던 것이 사실이므로 이것을 소개키로 하는 바이다.

1). 신앙의 본존

불교가 종교인 이상 그 신앙의 대상인 本尊이 있어야 한다. 불교의 신앙 대상이 佛陀인 것은 多言을 不要하고 明瞭한 일이라 하겠지만은 그러나 불교의 불타란 개념은 실로 복잡다단하여 극히 애매하다. 시간적으로도 三世의 諸佛이 있다하고 또 공간적으로도 이 세계밖인 타방세계에도 무한한 제불이 있다하니 말이다. 일반상식으로서는 불타라면 다 같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은 其實은 제불마다 그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그 제불들이 불타가 되기 이전 因行時인 菩薩時의 서원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불타의 다른 문제는 且置하고 이 사바세계에서 신앙의 본존으로 신앙되고 있는 三大佛이 있으니 그것은 大日如來와 阿彌陀佛과 釋迦牟尼佛이다.

대일여래는 法身佛이라 하는 불타로서 眞言密敎의 본존불이다. 그다음 아미타불은 報身佛이라 하는 불타로서 淨土諸宗의 본존불이며 석가모니불은 應身佛로서 기타 제종의 본존불이시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신앙계에서 이 삼대불이 가장 널리 신앙되고 있다. 이 三佛의 특징을 본다면 대일여래는 법신 즉 진리 그 자체를 佛格化한 불타로서 우리 범부의 현신으로서는 촉감하지 못하는 秘密佛인 것이다. 그 다음에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교주로서 이 사바세계에 직접 有緣한 불타는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간접적으로 믿고 唱佛하는 緣을 맺어두면 사후에 극락세계에 인도되어 제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 석가모니불이야말로 직접 사바세계 중생의 제도의 목적을 가지고 오신 가장 緣이 깊은 불타이시다. 그러므로 사바의 우리는 어느 부처님보다도 이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해야한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중국 우리나라 일본 할것없이 모두 이 삼불이 가장 널리 신앙되어 온다. 그 삼불의 신앙사이에 아무 衝突이 없는 이유는 이 삼불이 표면상으로는 相異한 他佛 같지만은 其實內面에 있어 동일한 一佛이라는데 있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불이 수행을 해서 오도하였을 때의 몸을 報身, 즉 酬因(修行時의 因行에)感果(깨닫는 果를 感得)之身이라고 한다. 이 오도하였을 때의 道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자신이 곧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진리로서의 몸은 法身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삼불은 名異體一이라는 것이 三佛의 관계이므로 신앙상 아무런 모순없이 신앙되어 오는 바이다. 그러나 일단 정토종이라면 아미타를 진언종이면 대일여래를 기타제종이라면 석가모니불을 각각 신앙의 본존으로 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신앙의 대상은 이 삼불에만 限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에 있어 법상종에서는 미륵보살, 약사여래를 신앙하는 사람은 약사여래, 관세음을 신앙하는 이는 관세음을 각각 신앙의 대상으로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관계가 없는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의 宗指에 따라서 신앙의 대상은 다 각각 다를지라도 석가모니불은 어떠한 종파에서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대일 미타 어느 보살임을 막론하고 그 모든 대상의 존재는 모두 석가모니불의 교설에 의하여 비로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일 미타는 석가의 본신이다. 제대보살은 석가의 化現身이다 하는 想念下에서 모든 대상을 각각 신앙한다면 이에 신앙대상의 원리에 融通無 性이 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2), 소의의 경전

불교의 一宗派가 되고자 할진댄 반드시 三藏中 어느 一經 一論 一律이나 또는 全三藏을 所衣로 해야한다. 經이라 해도 經中에는 대소승의 兩經藏이 있고 양경장中에도 또 여러 가지의 經이 있어 그 所說의 취지가 모두 다르다. 그리고 論部도 역시 마찬가지며 律은 소승률 대승률의 別이 있어, 소승에는 중국에서 와서 宗이 別立하였으나, 대승은 따로 宗이 별립하지를 않았다. 중국의 예로 본다면 대개, 經을 소의로 하는 經宗, 論을 소의로 하는 論宗, 律을 소의로 하는 律宗등 三類로 大別할 수가 있다. 먼저 經宗으로서는 法華經을 소의로 하는 天台宗, 華嚴經을 소의로 하는 華嚴宗, 涅槃經을 소의로 하는 涅槃宗, 淨土三部經을 소의로 하는 淨土宗, 大日經을 소의로 하는 眞言宗등 7종이 있고 論宗으로서는 中觀 十二門 百三論 위주의 三論宗, 十地經論의 地論宗, 成實論위주의 成實宗, 攝大乘論위주의 攝論宗, 唯識論위주의 法相宗, 俱舍論위주의 俱舍宗등 6宗이 있고, 이밖에 특수한 宗으로서 佛陀所制의 소승률을 주로 하는 南山律,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하는 禪宗등 이것이 중국의 13宗이었다.

이와같이 한 宗도 소의의 典籍이 없이 섰던 宗이라고는 없었다. 소의의 경전이 뚜렷이 指摘되어 있지 않던 信行의 三階敎 같은 것은 一時는 매우 그 교단이 왕성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서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우리에게 주목되는 사실은 一經에 의하여 一宗이상 분립해서 안된다는 제약도 없다. 가령 다같이 한 법화경을 소의로 하지만은 중국에서는 천태종이 열렸고 일본에서는 日蓮宗이 別立하였으며 다같은 彌陀의 교설을 소의로 하지만은 중국의 一淨土宗이 일본에 가서는 源空의 淨土宗, 親鸞의 眞宗, 其他 時宗, 融通念佛宗등 4종으로 분립되었고 達磨所傳의 單一宗이던 禪宗도 臨濟 雲門  仰 曹洞 法眼의 5家에 黃龍 楊 의 2派를 가한 7宗으로 분립하였다. 이와같이 불교의 三藏중에 사상적으로 발전할 여지가 무궁무진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로서

존립하고자 하면 그 많은 전적중 어느 한가지엔가 반드시 의거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교로서 공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교학적 조직

한 宗이 성립하는데는 소의의 經이나 論이 있어야 하는 것인바 그 宗이라는 것은 그 所衣經論의 근본취지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구현하는데는 二種의 방법이 있으니 그 하나는 그 근본취지를 원리적으로 구체화하여 이론적 체계를 조직하는 것이요 그 다른 하나는 그 이론적인 원리는 단순히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천 구현시키는 實踐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전문적 術語로 前者는 敎相門이라 하고 後者는 觀心門이라 한다. 중국의 13宗, 일본의 13宗 어느 종을 막론하고 종이라 하는 이상 이 두가지의 門에 具略의 差는 있을망정 모두 다 반드시 갖추어져 있다. 교상문이란 그 宗 宗旨의 철학적 이론이요 관심문이란 종교로서의 그 종 특유의 실천방법이다. 대개 一宗이 성립한다는데 원리적인 이론이 없이 실천이 있을 수 없고 또 실천이 없는 이론은 空理 空論의 철학적 遊戱가 되고 만다. 즉 교상이란 그 종의 철학적 理論部分이요 관심이란 그 종의 종교적 實踐部門으로서 이 양부문이 갖추어져야 비로서 一宗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성종파의 이 敎相 觀心 二門의 실례를 간단히 들어보기로 한다면 법화경을 소의로한 천태종의 교상문은 법화경 방편품제2에 諸法實相의 妙法妙理說이 나타나고 있는바, 천태종은 이 諸法實相說로써 지극히 교리로 하고 있다. 제법이라 함은 삼라만상의 현상적 제법 또는 모든 迷悟染淨 十界三千의 제법을 말하는 것이요, 실상이라 함은 原理 眞如 法性을 말한다. 어째서 眞如 法性을 實相이라는 말로 표현하는가 하면 眞如는 諸法의 事法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事法의 內低에 있는 것도 아니요 現象界 모든 事法이 있는 그대로가 眞實, 如常의 眞理相으로서 花紅柳綠 그대로가 眞如다.

이러한 현상 즉 眞如의 의의를 나타내느라고 제법실상의 말을 取한 것이다. 이 제법실상의 意趣를 표현함에 당하여 本宗에서는 十界互具 三千三諦 三諦圓融의 학설을 조직하여 있으니 이것이 敎相門의 要旨다. 그 다음에 觀心門의 要旨를 본다면 心·佛·衆生의 三法은 다 같이 三千의 妙法을 圓具하고 있다. 그런 고로 觀心, 觀佛, 觀衆生 어느 관법을 써도 제법실상의 묘법을 체득할수 있다. 그러나 佛은 太高하여 觀하기에 容易치 않고 衆生은 太廣해서 역시 觀하기 어렵다. 이에 비하여 心法은 가장 가깝고 또 협소하여 觀의 대상으로서 최적하다. 그런고로 실천문으로서는 觀心이 最要라는 것이다. 이 관심의 방법에 25방편 十乘觀法說 등이 있는바 먼저 豫備的 훈련으로서 25방편, 관심의 실천방법으로서 十乘觀法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修心하여 가는中 수행자 一心中에 있는 見思 塵沙 無明의 三惑을 단절하고서 자기의 本有心性을 증득한다는 것이 관심문의 요지다. 천태종의 敎相學說은 諸宗中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例이지만은 이밖에 가장 간단한 예의 하나를 들어 본다면, 禪宗은 敎外別傳 不立文字라 하지만은 기실은 소의의 경전도 있고 또 교상학도 갖추어 있다. 먼저 그 소의경전에 관한 사실을 본다면 初祖達磨는 "楞伽經"을 소의로 하여 제6대 神秀에 까지 이르렀고, 慧能은 "金剛經"을 소의로 하는 동시에 "華嚴經" "法華經" "般若經"등 까지도 소의로 하였다. 그리고 그 교상학의 요지는 "直指人心 見性成佛"로서 吾人一心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 것으로 모두가 평등한 것이니 이것이 佛性이다. 이 불성을 徹見하여 佛이 된다는 것이다. "不悟하면 卽 佛이 이 衆生이요, 一念을 若悟하면 衆生이 이 佛이니라. 고로 알지어다. 일체만법은 다 自身中에 있는 것임을, 어찌 自心으로 조차 眞如本性이 頓現하지 않으리요"(法寶壇經)라고 한 것이 그 요지다.

그리고 그 관심문이란 그 실천방법이 또한 坐禪이다. 이것이 즉 見性悟道하는 가장 간단한 실천방법인 것이다. "이 법문중 어떤 것을 坐禪이라 名하는가. 이 법문중 一切에 걸림이없는것이니 밖으로 一切境界에 心念이 不起하는 것을 坐라하고, 本性이 亂하지 않음을 보는 것을 禪이라 한다"(同上)라고 한바와 같이 밖으로 外境에 一心이 동요되지 않고 안으로 不亂한 一心의 본성을 보고자 노력하는 것이 즉 좌선의 의의인 것이다. 이와같이 具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諸宗이 모두 다 그 이론실천의 兩門을 갖추어 있는 것이다.

 

3. 결론

이상과 같이 보아오면 新宗을 새로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임을 알수있을 것이다. 옛날 各宗祖들이 宗을 樹立한 과정을 살펴본다면 그들이 그 일생 그 일대에 그 宗을 開宗한 예가 거의 없다. 천태종의 예를 보아도 智者 이전에 慧文 慧恩 二大師가 있었고 또 智者 자신이 自宗의 別立을 주장한 일은 없다. 그 제자들이 그의 불교관을 闡明함으로부터 외부에서 一宗으로 공인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요, 화엄종도 法藏이전에 杜順 智儼의 二代가 있었으며, 정토종도 인도에 馬鳴 龍樹 天親의 相承이 있었고 중국에 와서도 曇鸞 道綽 善導의 相承에 依하여 중국의 淨土宗, 또 이것을 이어받아서 일본 源空의 淨土宗이 別立하게 된것으로서 한 사람도 자기 당대에 自宗을 自薦하고 나선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先代의 이러한 芳燭을 보아서라도 末世鈍根인 후대의 우리들은 삼갈줄 알고 謙讓 自重 誠實해야 할 것이다. 正信이었던 迷信妄言이었던 간에 자기 홀로만이 믿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은 한 宗이라면 벌써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그 宗旨가 옳은 것이라면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미신이라면 그것은 惑世 誣民 民族을 속이고 국가적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니 이 어찌 戰慄할 일이 아니겠는가. 또 一宗이라면 종교인 만큼 세계성을 띠어야 한다. 즉 그 종지가 一國家 一民族에만 국한되는 협소한 사상이 아니고 어떠한 나라 어느 민족 어떠한 시대에도 적응할수 있는 보편적 교리라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일시적인 時運을 높여 짧은 기지로써 일시적인 성황을 이루는 종파라면 앞으로 밝아만 가는 새 시대에 있어서는 作舍道房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같이 論해오면 新宗도 벌이지 말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이 나라 불교의 앞길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처음부터 교계에서 불교의 진로가 문제가 된 이유는 한국불교의 현상태로서는 도저히 그냥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새로운 진로를 찾자는 데서 필자에게 이와같은 문제가 課해진 것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나라 불교의 현황을 혼돈혼탁의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면 이와같은 현황으로 몰아넣은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성교단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성교단의 不信으로 인하여 신종파들이 많이 新興하였다는 것은 자기네의 安身立命을 위하여 또는 扶敎樹宗의 의미에서 좋은 일이라 일단 시인하자. 그러나 상술한 바와같이 신종의 분립이란 10년 20년의 수학이나 수행만으로 그리 쉽사리 될일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하에서 필자는 提言한다. 기성교단이나 신종수립자가 모두 함께 교주석가모니불전에 이 혼돈상태를 초래한 잘못을 일단 참회하자. 그리하여 명경지수의 새로운 마음으로 再起의 길을 세우도록 하자고.그러면 再起의 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불교라는 간판하에 나아가는 이상 나아가는 길이 약간씩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에(衆生成就, 淨佛國土) 다름이 있을 수 없고 또 그 기본적인 방법에 다름이 있을 수 없다. 그 기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信과 解와 行이다. 그 신에 있어 종지에 따라서 다를수도 있다. 釋尊 大日 彌陀 菩薩등으로 그러나 불타 所說의 經이나 論師所述의 論에 나오는 신앙의 대상이요 취지인 이상 그것은 다같이 불교의 정신인 것이다. 불교의 간판을 걸고 딴 대상을 信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 다음에는 佛陀所說의 취지를 알아야 하고 아는데는 올바르게 아는 正解라야 한다. 그 소의가 經律論 무엇이던 그것을 正解해야 한다. 사실은 이 正解가 없이는 正信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正解야말로 불교를 사상적으로 얼마든지 발전시킬수가 있는 것이요, 이 사상의 발전이 또 신종파의 파생을 誘수발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正解에 의하여 正行이 있을수 있다. 종교의 생명은 이 行에 있는 것으로 이 行이 그릇되면 미신이 되어 그 종교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正信과 正解 正行에 의하여 불교의 목적인 衆生成就 즉 證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태까지의 기성교단에서나 신생종파에서도 信이없고 解가 없으며 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正信 正解 正行이었다면 결코 종단에 분규가 있을 리도 없고 또 이 틈을 타서 그리 쉽사리 신종이 난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교의 발전상이란 교단의 분열이다. 인도에서 불멸후 上座 大衆二部 이 二部로부터 다시 十八末派 都合二十部派가 분열발전하였고 중국에서 13宗 우리나라도 12宗 일본도 13宗등으로 분열되어 발전하였다. 이것이 사상발전의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우리나라 정통종단이 在來禪敎兩宗이던 것을 禪單一宗으로 축소화함에 따라 그 반발로 도리어 현재와 같은 혼돈상태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새로운 종단의 흥기를 막는다는 것은 사상의 발전을 막는다는 것이요 또 막는다 해서 성공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해서 일반사회 단체나 정당 모양으로 소정의 법규에만 맞추어 등록만 하면 존립할수 있는 그러한 형식적 종단이 되어서도 안된다. 적어도 한 종파가 탄생한다는 것은 한사람이나 몇몇 사람들의 명리를 위하는데 그 의의를 두어서도 안되고 또 그 종 창시자 일생간의 일로 아는 근시안적 생각을 가져서도 안된다. 공간적으로 적게는 자기민족과 국가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크게는 세계의 인류의 共榮을 위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古今을 막론하고 전인류의 공통적인 이념이요 희망이므로 시간적으로도 영원성을 지닌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이와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시간의 여유를 두고 正信하고 正解하며 正行하도록 刻苦 精進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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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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