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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천오백년 - 金東華(뇌허 김동화)

•- 목 차 -
1.인도문화상의 불교(인간발견).
2.중국문화상의 불교(신불교의 수립).
3.한국문화상의 불교(철학, 종교의 受人).
   1)고구려시대의 불교(수에서 역수출).
   2)백제시대의 불교(불교문화의 외국전달).
   3)신라시대의 불교(眞俗一如의 불교).
   4)고려시대의 불교(國家鎭護의 祈願불교).
   5)이조시대의 불교(靜中 動의 불교).
   6)현시점에서 불교의 할 일.
한국불교는 오랜 세월동안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 그리고 오늘 어려운 현실에서 어떠한 구실을 담당하여야 할 것인가. 백제의 謙益은 中印度에 가서 律宗을 가지고 돌아왔다. 入竺한 수다한 신라승 중 慧超를 제외하고는 모두 不歸의 客이 되고 말았다. 문화와 신앙을 위하여 불탔던 한 국불교가 남긴 足跡과 또한 課題를 여기 더듬어 보자.

 

1. 인도문화상의 불교(인간발견)

1) 재래의 사상

인도의 문화는 서기전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하여 온 아리안종족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그들은 인도의 자연 현상인 風 雨 雷霆 太陽 등의 위대한 힘에 위압되어 이러한 현상들이 곧 신의 顯現이라 보고 이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그것을 찬미하며 기원의 대상으로 하는 원시종교를 산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후 또 抽象神도 생각해 내어 많은 수의 신을 그들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다신들은 서로 연락관계와 계통과 질서가 없이 다 각각 절대적인 신이었다. 그러나 오랜 후에는 모든 신을 다 같은 一神으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그 후 서기전 1000년경에 이른 인도인들은 사상이 점점 발전하여,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까지 되었다.

신의 실재를 의심하게 된 그들의 사상은 자연 철학적 사색으로 진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에 대신하는 철학적인 우주인생의 원리를 생각해 냈다. 즉 신이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여 지배하는 것이라 보던 사상이 우주와 인생의 통일적인 유일한 원리가 있어 그로부터 전개되었고 또 그에 의하여 지배 조화되어 가는 것이라 보게 되었다. 즉 자연종교사상에서 철학적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종교시대를 吠陀, 梵書 시대라 하고 철학시대를 奧義書시대라고 한다.

2) 재래사상의 否定

철학시대의 다음에 出世한 것이 즉 석가세존이었다. 그의 출세년대는 대략 서기전 565년으로 추산되니 서기 1965년까지면 2530년전이 된다. 석가는 29에 출가, 6년수도의 결과 35년에 성도하여 불타 즉 覺者가 되었다 하니 종교인 불교는 이때부터 시작이 되는 셈이다. 석가는 먼저 재래종교의 중심사상인 神에 대하여 그 實在性을 否定하였다. 그러니 재래의 종교를 부정한 것이다. 그 다음 재래의 철학사상의 근본원리인 어떠한 존재도 이것을 부정하였으니 이것은 또 과거 철학설의 부정이었던 것이다. 종래의 종교 철학사상은 외부에서 침입하여 온 아리안종족들의 문화로서 그들은 자기 종족을 중심으로 한 四姓계급제도를 생각해 내어 이것으로써 사회제도화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가혹한 대우를 받은 것이 즉 인도본토족인 首陀羅 종족이었다. 석가는 이 사성계급의 무근거를 들어 이 제도의 타파에 솔선 앞장을 서서 불교 교단내에서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등으로 미루어보아 석가의 인도문화사상에 있어서의 특이한 위치는 그는 종교의 혁명, 철학의 혁명 사회의 혁명 등 三대혁명을 감행한 혁명가이었던 것이다.

3) 인간의 발견

그러면 석가의 사상적 특색은 무엇인가. 그는 종교적 신과 철학적 원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에 대신하는 인간의 존재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대체 인간이 생겨나기 전에는 신도 없었고 철학적인 원리설도 없었다. 인간이 먼저 있은 후 인간의 사색의 결과로 신도 만들어 내었고 또 원리도 사색해 내었던 것이니 참으로 위대한 것은 신이나 원리가 아니라 인간 자체라는 것이다. 석가가 6년 수도의 결과로 도를 깨달았다는 그 道는 人間道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참말, 인간이라 할 것은 생사를 되풀이하는 육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마음(心)이요 마음 중에서도 千變萬化하는 吾人의 煩惱妄想心이 아니라 金剛寶珠와 같이 변함이 없는 本質心(佛性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이것을 如來藏心이라고도 하고 本來佛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만약 신이라는 말이 필요하고 또 진리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인간자체가 곧 신이요, 또 인간의 一心이 즉 진리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석가의 사상은 인도문화사상 일대전환이었던 것으로 이것은 실로 인도 신문화의 장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석가의 인간위주의 세계관은 또한 인간의 현실을 주로하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과거가 어떠하다든가 또 미래가 어떻다는 문제보다는 인간은, 다 각각 제  자신의 현실을 알지 못하여 정신적으로 고민하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이 현실문제인 것이다. 석가 성도의 내용이 인간발견이라는 의미도 곧 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교화상에 있어서도 결코 모든 인간의 현실문제를 무시하지 안항ㅆ던 것이니 예를 든다면 가정인으로써, 사회인으로써, 국민으로써 등등의 인간문제를 충실히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 즉 悟道를 한다는 것 같은 것도 父母所生의 현생의 육신으로써 현생에서 이것을 성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같은 석가 후 半生의 교화생활은 45년간 계속되고 80에 입멸하고 말았다.

4) 교단은 上座 大乘 二部로 分裂

교주 석가의 생존기간에는 그 위대한 인격에 의하여 그 방대한 교단이 순조롭게 지속되어 나갔다. 교주가 입멸한 후에도 백여년 가량은 약간의 불화는 없지 않았지만은 표면상으로는 무사하였다. 그렇던 것이 백여년 후에 이르러서는 교단은 드디어 上座 大衆 二部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교단원들의 생활제도 문제와 교리상의 의견차이에 있었던 것으로 상좌부는 長老들을 주로 한 보수적이요 전통적이며 형식위주요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중부는 小壯들이 중심이 된 다수로서 자유적이요 발전적이며 실질위주요 주관적인 것이 그 특색이다.

(가) 상좌부의 사상경향

먼저 이 부파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현상계와 본체계로 나누어 보고 있는 바 먼저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세밀히 분류하는 것이 그 學的 특색으로서 그 모든 존재는 모두 실체가 있어 이것은 시간적으로 멸하지 않는 것이라 하며, 본체계도 물론 불멸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 학설의 특징을 간단히 말하자면 실재론의 철학이다.

그 다음에 이 파의 修道의 목적관을 본다면 사람의 번뇌심을 끊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아라한이란 사람으로 更生할 원인인 모든 번뇌가 없어짐으로 사람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과는 아주 絶緣하는 것이 아라한으로서 이것이 이 부파의 목적하는 바이다.

(나) 대중부의 사상경향

먼저 이 파의 우주관을 본다면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도리(因, 緣, 果 또는 因緣生起의 理)에 의하여 현상되는 것으로서 거기는 아무런 실체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현상계와 본체계로 나누는 것은 상좌부와 같다. 그러나 저에서 본체계의 내용을 空無의 상태, 따라서 아무런 활동이 없는 것이며, 현상계와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대중부의 본체계관은 理法으로서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법칙이라고 보며 그러므로 무한한 내용과 활동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람의 心性論에 있어 상좌부는 사람의 마음은 망상심이 그 본질인 것으로 보았음에 대하여 이 부에서는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라 보고 있다.

그 다음에 수도의 목적을 본다면, 상좌부는 阿羅漢이 되는 것이 목적이나 이 파는 불타가 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불타를 목적으로 修行途中에 있는 수도자를 菩薩이라 한다. 이 보살은 자신의 수도의 한 방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 그런데 그 상좌부에는 이 구제설이 없다.

5) 小乘과 大乘

상술한 두 부파는 그 후 다 각각 또 末派를 파생하였으니 상좌부가 10派, 대중부가 8派로 분열되여 본래 20부파를 이루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세력있는 파만이 남고 세력이 약한 파는 자연 우세한 파에 합류되고 말았는 바 상좌부 계통으로서 남은 파는 소승불교로서 후세까지 전하여왔고 대중부 계통은 대승불교로 발전적인 解消를 하였다. 兩派의 사상적 차이점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하나는 보수적임에 대하여 하나는 자유 진보적이므로 이 兩派의 발전성의 여부는 이미 이에 자명한 것이다. 소승은 小人의 법이요 대승은 대인의 법이라는 의미이니 이에 양자의 우열은 나타난 것이어니와 소승불교는 상좌부의 學的태도를 고수하여 불타의 교설에 대한 주석 해석과 또 교리적인 문제의 분석 체계적인 조직 등을 농사로 하는 철학적 연구의 태도를 취하여 종교로서의 사회적 활동이 끊어지게 되었다. 소승불교의 장점을 요약해 말하자면 학적으로는 연구의 상아탑속에 들어앉은 냉정한 철학 불교이었고 또 종교적으로 본다면 승려 각자가 世緣을 頓斷하고 오직 자기 일신의 수도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교는 널리 보급은 되지 않으나 특수층인에 의하여 후세까지 계속돌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대승불교는 대중부의 자유진보주의자들에 의하면 발전된 것으로서 형식보다도 실질, 전통보다도 진취적인 태도로써 불설의 앞을 내다보고, 밑을 파해쳐서 드디어 세계적인 종교, 현실적인 종교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대승 불교사상의 요지를 간단히 지적한다면 一切重生은 悉皆成佛한다는 것과 이 세계 타세게를 막론하고 우리 인생의 현신으로써 불국정토를 건설하라는 것과의 이대 교리다. 즉 모든 인류는 물론이요 심지어 모든 하등 동물까지도 모두 自性淸淨의 본질심을 本具하고 있으므로 이 마음을 닦기만 하면 불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타가 되면 따라서 그 그 불타에 상응한 국가가 건설된다는 것이다.

 

2. 중국문화상의 불교(신불교의 수립)

1) 재래의 사상

중국은 세계 三大文明國의 하나인 만큼 중국 고유의 사상이 있었으나 그것은 孔子 孟子를 주로 하는 유교사상과 老子와 莊子를 주로 하는 老莊思想이 있다. 이 두 사상은 모두 인간 현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적인 사상이다.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서는 노장사상은 유교와 매우 다른 것처럼 보고 있지만은 기실 양 사상의 구경적인 목적은 동일한 것이다.

먼저 유교의 사상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이 현실생활을 잘 하자면 그것은 국각가 정치를 잘 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데는 인륜 도덕에 근거한 덕정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유교는 일종의 政治敎인 것이다.

그 다음에 老莊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이 국가를 세운다든가 또 정치를 하고 인륜의 교육을 한다는 등, 모든 인위적인 시책은 도리어 우리 인간에게 巧知 허위를 가르치고 우리 인간을 괴롭힐 뿐이므로 無爲自然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無爲而自化 無治而自治한다는 것이 노장의 학설이다. 즉 유교는 有爲로써 인간의 현실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요 노장은 無爲의 방법으로써 이것을 해결하자는 방법의 차이 뿐이요 그 목적은 동일한 것이다. 중국 재래의, 이 兩大 사상의 근본취지는 이와 같은데 있을 뿐 기타 철학적인 사상은 빈약하고 종교사상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공자에 仁의 사상이 있고, 후세에는 中庸을 말하고 있으며 또 노자는 도를 말하고 있기는 하나 그러나 철학이라 하자면 이론적 체계가 서야 한다. 그러나 중국사상에는 그런 것이 없다. 중국의 자연종교적인 天의 사상이 있기도 하나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민족들의 종교사상에 비하면 아직 종교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2) 불교의 전래

중국에 불교가 公傳한 것은 後漢 明帝永平 10년(서기 67)이라 한다. 그러나 그 이전 즉 서기전부터 이미 私傳이 있어 宮中과 민간에서 신앙되고 있었던 모양같다. 그 후 인도로부터 많은 고승들이 接踵하여 중국에 와서 많은 대소승의 三藏(經, 律, 論)을 번역하였다. 즉 漢代로부터 東晋시대까지(67-400)에 중요한 典籍들이 번역되었다. 이 번역사업은 이것으로써 그친 것이 아니고 그 이후 唐代까지도 가끔 큰 번역이 나왔으나 그 초기의 번역기간이 東晋까지라는 것이다. 그런체 이 인도문화재를 번역하는데 있어 중국인들의 태도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도의 문화라 하면 불교 이전의 婆羅門敎의 四吠陀와 梵書 등이 있고 또 철학서인 奧義書와 기타의 모든 문화의 典籍이 허다하게 있으되 그런 것들은 전연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불교의 三藏만을 수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마 자기네에게 필요가 없는 것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필요조차 없는 자주적인 견해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 중국인들이, 즉 자주적 관념이 강한 그들이 불교문화를 수입하는 데만은 自我를 망각하고 열중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고승을 청하기도 하고 중국승이 인도에 구법을 가기도 하며 또 원본에 미비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補塡하기 위하여 다시 사람을 파견하는 등, 갖은 성의를 다해가면서 노력하였으니 이것은 그만치 중국민족에게 새로운 문화요 또 필요한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秦王 符堅이 서역승 羅什을 초청하기 위하여 符堅, 姚 , 姚興 三代에 걸쳐 二次의 전쟁 끝에 16년만에 長安에 오게 된 것이나 또 符堅王이 一乞食道僧인 道安이 襄陽에 있는 것을, 長安에 초치하기 위하여 십만대군을 풀어서  陽을 공격한 것 등이 모두 이 불교문화에 얼마나 심취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羅什은 서기 401년 長安에 들어온 후 여러 가지의 般若經, 維摩, 法華등 經과 中論 百論 十二門등, 소위 三論을 번역하여 중국불교계에 연구재료를 제공하였다. 道安법사의 감화로 불교에 들어온 盧山의 慧遠같은 이는 불교에서 老莊에 또 노장에서 불법에 들어온 사상의 巡歷자로서 羅什三藏의 번역인 「十誦律」에 의하여 그 엄격한 戒行을 지키게 되고 또 「禪徑」에 의하여 선정을 행하게 되었으며 또 「阿彌陀經」에 의하여 白蓮社라는 念佛結社를 하여 그 당시의 명사 謝靈運 雷次宗 宗炳 劉遺民 周道祖 등 123인이 모여들어 心交를 맺게 한 것도 羅什 靈역의 힘이 적지 않다 할 수 있다.

3) 신불교의 수립(13宗)

번역으로써 많은 불교의 원전을 얻은 중국교계는 이의 연구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그 연구의 재료는 실로 풍부하였다. 昆曇, 成實, 三論, 法華, 華嚴, 律, 禪 등 교계의 학자들은 이 각 부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 사상의 내용은 자기네에게 여태까지 익어오던 유교와는 전연 달랐던 것이요, 노장사상과는 얼마간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아닌 말하자면 전연 새로운 사고방식이요 또 이상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연구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연구의 기간은 대개 東晋시대로부터, 남북조말기(400-580)까지라 할 수 있다. 이후는 隋대가 되는 바 이때부터는 중국인으로서 불교에 대한  비판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고 건설적인 비판, 즉, 자기의 독자적인 불교관을 토론하는 것을로써, 말하자면 중국불교의 新樹立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인들의 이와같은 식견과 자신 태도, 등에 본받을 바가 있는 것이다.

이 신불교 수립기는 隋初로부터 唐玄宗시대까지(580-741)라 할 수 있다. 종래의 학자들은 雜緣한 불교 典籍 가운데서 어느 經, 어느 論의 교설에 쫓아 자기의 신앙의 중심을 세우고 수행해 갈 것인가, 참으로 多岐亡羊의 탄식을 금치 못하였던 바 오랫동안 연구의 결과 그 많은 典籍을 정리해 보는 식견이 생겼다. 그 많은 典籍중에 나타난 교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허다하므로 그 중에 어느 一經이나 一論을 선택해서 자기의 신앙 또는 사상의 근거로 하는 데는 그것을 선택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이론체계를 세우는 것이 이른바 敎相判釋이라, 하는 것이다. 隋代의 그러한 학자로 유명한 사람이 北地의 慧遠이요 南地의 智者와 吉藏등이다. 智者는 「法華經」을 자기의 신앙, 학설의 소의경으로 하고 五時八敎의 교판을 세웠고 唐代의 法藏은 華嚴經을 소의경으로 하여 五敎十宗의 교판설을 세운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불교로서 수립된 수는 毘曇 成實 律 三論 涅槃 地論 淨土 禪 攝論 天台 華嚴 法相 眞言등 13종이다. 이 종파불교는 인도에는 없었던 중국불교의 새 사실로서 그 원전은 물론 인도에서 왔지마는, 그 원전에 내포되어 있는 원리와 실천방법을 발견한 것은 중국인들의 공이다. 이 13종은 다 각각 독특한 철학적 이론과 실천방법설과의 두 부문이 갖추어져 있다.

4)사상과 실천의 葛藤(菩薩僧制의 실패)

大衆思想은 중국에 와서 극도로 발달하였다. 천태종의 諸法實相說 華嚴宗의 事事無 說등은 이론철학의 극치요, 作法을 통한 行의 律宗, 歸依를 통한 信의 淨土宗, 加持를 통한 密의 眞言宗 등은 실천으로써 生佛一如의 理를 구현하는 종교의 극치다. 제법실상은 또 「一色一香이 無渺中道」라고도 하는 사상으로서 實相이나 中道는 眞如 眞理를 의미한다. 그리고 제법이라 하나 일색일향이라 하나 이것은 다 같은 의미다. 즉 현상계의 산천초목 인류 금수 할 것 없이 모든 존재는 있는 현상 그대로 모두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 事事無 의 事事도 현상계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서 이 事事物物은 이것이 모두 진리로부터 나타난 것이므로 진리상에 피차가 없는 것과 같이, 나타난 事事物物도 相卽相入하여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生佛이 一如라 함은 중생과 불타는 원래 동일한 불성의 本具者이므로 己成과 當成의 차는 있을지언정 원리상으로는 一如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종교적 실천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원리로써 본다면 우리 인생이 현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특히 불도 수행을 위하여 출가하여 비구 비구니의 형태를 갖출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사실 대승불교의 교설에 의하면 불도수행자를 보살이라 하여 하등 僧俗의 구별이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 隋의 전기인 周代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周와 제3대 主인 武帝(在位 561-578間)는, 「帝王은 즉 이것이 여래요 王公은 보살이며 耆年은 上座며 仁惠가 참된 布施다」하는 등의 설을 주장하였다. 諸法實相 事事無 의 이론상으로는 이러한 결론도 당연하다. 그러나 武帝는 폐불을 하기 위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3대후인 靜帝때에는, 불교를 부흥하고 고승 중 120인을 선발하여 菩薩僧制를 세웠다. 보살승이란 蓄髮 俗服하고 사원에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24년간밖에 계속되지 못하였다. 즉 위정자는 불교의 원리에 의해 僧俗의 別이 없는 생활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이었으나 승려들로서는 출가 산림 은순을 좋아하여 드디어 이 제도가 폐해졌으니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충돌이었다. 위정자는 이론에 치유쳤고 승려는 자기 반성에 너무 기울어졌던 까닭이다. 이론상으로는 제법이 실상인 것에 틀림이 없지만은 수양을 쌓지 않은 垢縛凡夫 그대로의 원정자들이 과연 그 실상의 眞味를 체득할 수 있었던가. 이 점에 있어 승려들은 실지 수도자라 자기 반성을 할 때 아직 그 묘미는 현실로 체험치 못하엿으므로 수도를 위하여 운둔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에 또 반성해야 할 문제는 그렇다면 보살의 六度萬行은 何暇에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3. 한국문화상의 불교(철학, 종교의 受人)

1)고구려시대의 불교(수에서 역수출)

우리나라 고문헌에 의하는 한 우리 민족들의 고대 사상 문화등은 이것을 알 수 없고, 중국의 옛문헌들에 의하여겨우 단편적인 우리 선조들의 생각과 생활양태의 편모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그 생활양태에 관한 기록을 본다면, 범해서는 안될 八禁條라는 것이 있었는 바 이것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남아있는 條目에 ① 사람을 죽이는 자는 당장에 죽이고 ② 남에게 상해를 가하는 자는 곡식으로써 갚을 것이며 ③ 도적질하는 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잡아다가 家奴를 삼고 여자일 경우에는 婢를 삼을지며, 만약 그것을 면하고자 하면 1인당 50만을 내야 한다. 설사 그렇게 해서 면한다 할지라도 그 남녀에게는 시집가고 장가가려고 하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천시하는 풍습이었는지라 민간에는 마침내 도적질하는 자가 없었다. 그 다음에 일반 민간의 풍습을 본다면 서로 門戶를 닫는 일이 없고 부녀는 貞身하였으며 시골 사람도 竹器와 木器로써 음식을 먹었고 도시의 사람들은 杯器로써 음식을 먹었다 한다. (漢書地理志 권8 하). 이것이 우리 上代 민족들의 생활양태다. 그 다음에 사상 신앙에 관한 것을 본다면 扶餘민족은 정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國風이 있었으니 이때는 온 나라가 대회를 열고 연일 음식을 잘 장만하여 놓고 먹어가며 노래하고 춤을 추고 하였으니 이것을 迎鼓라 하였다. 그 다음 고구려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풍이 있었으니 이것은 東盟이라 하였으며 또 이밖에 온 나라가 대회를 열어 隧神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濊에서도 역시 10월에 祭天하되 이때는 온 國中이 주야로 음주가무하면서 즐겼으니 이것을 舞天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밖에 다른곳에서 호랑이를 신으로 모시고 제사재냈다. 그 다음 三韓중 馬韓에서는 5월에 파종하여 마치고서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되 백성들이 모여서 주야로 음주가무하며 또 10월에 농공을 마친 후 다시 이와같이 하였다. 귀신을 섬기는 데는 國邑에 각 일명씩을 세워 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이 나라에서는 이것을 天君이라 하였다. 또 이외에 각 國邑에는 蘇塗를 세우고 이에 鈴鼓를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 한다(三國志魏書東夷傳 권30).

三國 立 이전의 우리 고대민족들의 생활, 신앙 사상등은 이 이상의 것을 찾아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 다음에는 훨씬 후대에 된 것이지만은 우리의 문헌에 의해서 우리 삼국시대의 문화를 찾아보게 되었는 바 이에도 사실은 문화에 관한 기사는 퍽 희귀하다. 먼저 『三國史記』에 의하여 본다면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왕 2년(석 372) 6월에 秦王符堅이 사자로 하여금 浮屠 順道와 佛像 및 經文을 보내 왔고 또 同年에 太學을 세워서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있는 바 이것이 외국문화의 수입에 관한 최초의 기사인 것이다. 浮道 즉 僧 順道와 불상 및 經文이라 한 것은 이것이 불교인 것은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없으나, 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는 그 태학의 교육내용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것은 명확치 않다. 국민교육기관인 태학이라면 그것은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육의 내용이어야 할 것인데 유교에 관한 기사라고는 그 이전에는 물론이요, 그 이후에도 없으니 이것을 유교정신에 의한 교육기관이라고 단언키도 곤란하다. 학자에 따라서는 불교가 수입된 조항에 연달아 태학을 세웠다고 있는 관계상 이것을 佛敎太學이라 보는 이도 있으나 아마 그것은 그렇지 않고 유교적인 태학이었을 것이다. 유교의 수입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불교수입의 훨씬 이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림왕 대에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교등 二大사상이 이나라에 수입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 교사상은 수입의 연대도 불분명하지만은 그 이후에도 유교가 어떠한 일을 하였다는 기사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에 이것을 무엇이라 논평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은 서기 전 37년으로서 그 망국은 서기 668년, 국명존속 705년간에 불교가 유포된 기간은 206년간인바 이 기간에 불교가 고구려문화상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던가 그 줄거리만을 이에 추려보기로 하겠다.  한 말로 불교라 하던가 그 줄거리만을 이에 추려보기로 하겠다. 한 말로 불교라 하면 간단한 것 같지만은 그 교리의 갈래를 찾아보면 대단히 복잡하다. 종교적인 불교, 철학적인 불교, 실천적인 불교, 이상적인 불교 등 여러 갈래의 불교가 있는 바 이 고구려 200여년간에 유포된 불교는 과연 여하한 내용의 불교이었던가. 그것은 三論學(中論 十二門論 百論) 說一切有部學 涅槃學 天台學 등으로서, 전 2종은 순수한 철학적 불교요 후 2종은 이상적 철학설의 불교들이다. 이러한 불교사상중에는 신앙적인 종교사상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러한 고도의 철학사상을 받아들일 정신적 소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고구려인들로서 과연 이 사상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무용의 근심이다. 고구려에서 가장 유행된 불교는 三論學으로서 이 학문의 학자는 상당히 많이 배출되었던 사실이 중국문헌과 일본문헌에 나타나 있다. 중국에 삼론종을 개종케 한 僧朗(서기 502-556)이 있고, 그 후의 實法師와 邱法師 등이 있어 모두 당시 중국학승들의 학문적 지도자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慧灌은 일본에 가서(서기 605) 삼론종을 세워 日本三論宗의 종조가 되었다. 그리고 道登도 삼론의 학자로서 일본에 가서 이 학문을 전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받아들인 삼론학이 고구려인들에게 완전이라할만큼 이해가 되어 중국에 역수출을 해서 길장(549-623)에 의해 삼론종이 비로서 一宗派로 立宗하게 되고 또 일본에 가서는 신불교로서 立宗하게 되었으니 이 강토에서 비록 고구려라는 국토는 멸망하였을지언정 중국 일본에 영원히 고구려의 명예는 빛나고 있는 것이다.

2). 백제시대의 불교(불교문화의 외국전달)

백재의 건국은 서기전 18년, 멸망은 서기 663년, 국명의 존속기간은 681년간으로서 불교가 전래한 것은 서기 384년이고 그 유포기간은 279년 간이다. 이 사이에 유포된 불교는 三論學과 成實學 律宗 등이다. 전 2종은 철학적 불교요 후자는 실천불교다. 먼저 삼론학자로서 일본 불교사상에 고명한 사람은 일본 僧正의 嚆矢인 觀勒(서기 602년, 渡日)은 삼론학자였다. 또 서기 595년에 渡日하여 聖德太子의 師가 되었던 惠聰도 역시 삼론학자이었다. 그 다음에, 成實學에 관해서는 道藏이 있었는 바 그는 서기 672년에 渡日하여 일본의 성실종을 개종할 기초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법문의 袖領이요 釋道의 棟梁」이라고까지 朝野의 존경을 받은 학덕 겸비의 고승이었다.

그 다음에 律宗에 관해서는 우리 문화사상 특기할만 한 사실이 있다. 麗 濟 羅 삼국 불교를 통하여 대소승 여러 가지의 불교가 전파되었으나 그것은 거의 모두가 중국을 거쳐온 불교들이 었다. 그러나 백제의 율종만은 그렇지 않고 인도의 律사상을 직수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백제 聖王4년(서기526)에 沙門 謙益이 律의 원본을 구하기 위하여 중인도에 가서 5년간 수학한 후 그 원본을 구해 가지고 귀국해서 이것을 번역하여 율종을 세웠던 것이다. 이때에 인도를 간다는 것은 생명을 내걸고 가는 일이다. 그 뒤에 신라승으로서는 入竺한 사람도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은 慧超를 제외하고는 모두 不歸의 客이 되고들 말았던 것을 상기할 때 겸익의 이 壯擧는 아직까지는 前無後無한 일이었다. 그 후 백제의 律宗은 해외에까지 권위가 있었는지라 일본에서 善信尼와 阿尼 등이 來濟하여 3년간 계율을 수학연구해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율종의 始를 이루었다.

그 다음에 백제가 국제문화교류사상 일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마치 秦王 符堅이 국가의 명의로써 우리 고구려에 불법을 전하듯이 백제의 聖明王이, 그 30년(서기 352)10월에 일본 침명천황에게 친서와 釋迦像 幡蓋 및 經論 등을 보내어 勸信하되 「이 법은 諸法中에서도 가장 수승하여 難解難入한지라 周公과 孔子도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요, 이 法은 능히 無量無邊한 福德의 果報를 生하고 내지 無上菩提를 成辨하나니 譬하면 사람이 如意寶를 품고 順用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 것과 같으니 이 妙法寶도 또한 그러하니 기원키를 마음껏 하여 핍박한 바가 없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 친서를 받은 일본왕은 歎喜踊躍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아직 일찍이 이런 묘법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노라 라고 하였다 한다. (日本書紀 권19). 불법의 受不受에 관하여 朝臣 간에 是是非非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파문이었고 결국은 일본 津津浦浦에 불법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어 드디어 불교 일본국이 되고 말게 하였으니 이것은 백제의 감화력이었던 것이다. 그 후 백제는 불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佛僧이 주가 되어 건축 공예 서화 심지어 製紙 製墨 등 모든 일상생활에 관한 기술까지도 백제가 이것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던 것이니 오늘날 일본의 학자들이 백제의 古문화가 일본에는 현재에도 지상에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고 있다.

3). 신라시대의 불교(眞俗一如의 불교)

신라의 개국은 서기전 57년, 멸망은 서기 935년, 국명은 992년간으로 몇차례의 불교의 사전은 있었던 모양이나 국교로 공인된 것은 法興王 15(528)년이니 그 유포기간은 407년간이 되는 셈이다. 이 사이에 우리 문화상에 공헌한 불교업적의 중요한 것만을 추려보기로 하자. 먼저 불교사상, 내용의 대체의 경향을 본다면 서기 676년에는 麗 濟 兩國을 완전히 병합하여 통일국가가 되었으므로 그 이후의 신라의  불교사상이란 麗 濟 兩國의 그것이 그대로 신라의 것이 되었고, 그 후에 또 당나라로부터 신불교사상들이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유식불교 사상이 수입되었으니 이 사상은 국내학자들에 의해서도 많이 연구되었었지만은 이에 특기해야 할 일은 당나라에서 당나라 唯識學派에 대항하여 신라唯識學派가 대립되어 서로 이 학문의 蘭菊의 미를 다투었던 사실이다. 그것은 신라의 왕손이라고 전하는 圓測법사(613-696)가 唐의 玄 법사의 학설에 의하여 유식학을 강설하자 역시 玄 의 직제자인 慈恩基대사가 이에 대항하는 논조를 보이자 兩門下는 보다 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니, 測의 문하에 道證, 勝莊등이 있었고, 基의 문하에 慧沼, 智周 등이 있어 피차에 사소한 문제까지도 이것을 들어 갑론을박 하였으니 그것은 학설을 위한 것보다도 兩派의 우열을 다툰 것이 아닌가 의심할 만큼 말초적인 논쟁이기는 하였으니 하옇든 당나라 학파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異域他國에서 신라유식학파의 학설이 빛났다는 것은 장쾌한 일이 안리 수 없다. 그 다음에는 華嚴의 法界緣起 철학사상이 義湘대사(625-702)에 의하여 전해진 후 많은 연구열을 일으켰다. 唯識이나 華嚴은 이론철학적인 불교이었다. 그런데 신라말기가 되면 실천적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니 律宗 念佛思想 眞言密宗 禪宗 등 제 불교사상이다. 이런 실천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론불교의 발달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과 동시에 그 불교도 통합하여 이론불교가 가장 발달한 것은 실천불교가 아직 성행하기 이전의 일이다. 그리고 불교가 사회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不離의 관계를 가지고 활동한 것도 이론불교가 가장 발달하던 때의 일이다. 이론불교의 대표자로는 元曉(617-686)를 들어야 한다. 중국불교학자나 국내학자를 막론하고 중국불교 13종중 대개는 그 어느 1, 2宗學을 전공할 뿐이요 여러 종학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학문의 범위는 華嚴 涅槃 法華 念佛 戒律 唯識 攝論 三論 成實 毘曇 등 10종에 손을 뻗치고 있는 가장 폭넓은 博學者다. 이러한 이론가들의 사상적 특징은 眞俗一如의 사상이다. 眞은 眞諦 즉 진리라는 의미요, 俗은 俗諦 즉 현상이라는 의미로서 진리는 현상을 떠나서 알 수 없는 것이요, 또 현상은 진리를 떠나서는 현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는 결국 둘이면서도 일이라는 것이 진속일여의 사상인 바, 이것을 환언하자면 진제는 불교요 속제는 인간 세속사인 바 인간세속을 떠나서 불교가 따로 없다는 것이 즉 진속일여의 사상이다. 이 진속일여의 사상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 즉 다름아닌 鎭護國家의 사상으로서, 그 구체적인 행사가 百高講座개설이요, 四天王寺의 건립이며 八關齎會 虔修등이다. 그리고 또 花郞道정신으로서 그 구체적인 행동이 즉 고승들이 직접 화랑도의 敎導선상에 나섰던 사실이다. 眞俗一如란 사상적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지의 행동에 나아간 것이니 즉 그 시대의 욕구에 따라 국가적 불교로 되고 生의 불교, 약동의 불교로 되었던 것이다. 義湘이나 慈藏같은 고승들은 신라정치에도 많은 공헌이 있었지만은, 또 唐나라에서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원효같은 이는 국외에 한발 내대대지 않고서도 그 명철한 學解로써 당나라 일본 등 제국가 학자들에게 국경을 초월한 존경의 的이 되었었다. 우리나라 장래 일은 예언할 수 없으나 유사이래 외국으로부터 불교문화를 수입해서 이것으로써 그 외국을 도리어 제압한 역사는 삼국시대의 고승들밖에 없다.

4). 고려시대의 불교(國家鎭護의 祈願불교)

고려의 개국은 신라의 뒤를 받은 것이 서기 918년 멸망한 것이 1392년, 국명의 존속기간이 474년간, 시종 불교를 국교로 하여 보호 장려하여 왔었지만은 불교가 문화발달상에 크게 기여한   없다. 원래 고려 474년의 국사 그 전체가 우리 문화발전상 특기할 만한 사실이 없는 것도 자명한 일이기는 하지만은 고려태조 왕건을 위시하여 역대의 왕들은, 신라의 전통적인 신앙을 그대로 받아서 불법의 발전책이라는 것보다도 그 보호에 있는 힘을 다 기울였다. 그 실례로서는 첫째 王師와 國師制度를 창설하였다. 제 3대 定宗은 그 19년에 惠居를 國師로 하고 또 坦文을 王師로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둘째로는 출가의 장려다. 제 10대 靖宗王 2년에는 한 사람이 四人의 자식을 둔 사람에게는 一子의 출가를 권하였고, 또 제 11대 文宗王 13년에도 一家에 三子가 있는 사람에게는 一子의 출가를 권할 뿐 아니라 솔선해서 그 모범으로 제 사왕자인 煦를 출가시키니 그가 즉 유명한 大覺義天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민간인의 자제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출가를 원하였으나 도리어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국가에서 이와같이 장려하고 우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道譽가 인국에까지 떨칠만한 高僧碩德을 배출되지 않았다.

대각의천의 입송구법의 목적이 천태학을 배우기 위함에 있었다 하나 제 3대 定宗王 11년(690)에 고려 천태학승인 諦觀이 천태의 敎籍을 가지고 入宋하였다 하니, 천태종의 명맥만이라도 이미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천태의 三觀은 最上眞善인데 此土에 宗門이 未立하니 甚可惜也」라고 탄식하였다 하니 아마 의천의 때에는(1085년) 천태종이 전멸하였던 모양같다. 그가 송에 가서는 天台도 배우고 華嚴學도 전수하였으며 禪도 배우고 기타 불교계의 명사 50여인을 歷問하고 환국하였다 하니 그의 학구심이 이와같이 왕성하였다는 것은 즉 고려내의 교학선종 할 것 없이 몹시 피폐하여 배울 곳이 없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가 송에서 귀국할 때 釋典 및 經書 등 1000권을 가져왔고 그 후 또 宋 遼 日本 등 제국으로부터 서적을 사들여서 1010부 4740여군을 간행하였다 하니 이것은 의천 당시 국내문화사정이 매우 피폐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제 21대 熙宗 때(1205년)에 曹溪山에 敎禪相資, 定慧 修의 종지를 제창한 知訥 普照 국사가 있었다. 그의 주장하는 宗旨로 보아 교종과 선종이 불타 施敎의 근본적인 교지를 모르고 서로 헐뜯던 그 시대의 교계상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종지는 매우 유력하며 그 후 曹溪山에 16국사를 배출하였으니 국가조야의 신망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상은 교단내의 중요한 사건이다. 그 다음 일반문화상으로 보아 중요한 일로서는 高麗藏經板 조각을 들어야 한다. 그 처음은 顯宗 2년(1011)에 契丹兵 내침을 물리치기 위하여 조각하였으나 兵火에 없어졌고, 그 후 高宗 22년(1235)에 蒙古병을 물리치기 위해서 15년 걸려서 완성한 것이 현존하는 海印寺의 장경판으로서, 이것은 어떠한 불교국에 대해서도 자랑꺼리로 되어있다. 그 다음 또 한가지는 釋一然(1289년寂)著의 『三國遺事』다.

고려 불교를 한말로써 총평을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를 鎭護하고자 하는 祈禱 불교이었다. 그것은 고려사 歲歲年年條에 무슨 法會 무슨 降魔會하고 나오는 것이 모두 그것이다. 이러한 祈禱會를 한 후에는 그 감사의 의미에선가 또는 그 공덕으로써 국가를 진호하자는 의미이었는가 僧 몇 천 몇 만을 공양하였다는 소위 飯僧대회를 베푸는 것이 고려조 470여년간의 주된 國事이었다.

5). 이조시대의 불교(靜中 動의 불교)

서기 1392년 고려조에 代立한 이씨 조선은 隆熙 4년(1910)까지 519년간 계속되었다. 이 동안의 불교는 과연 어떠하였던가. 불교 자체로서는 너무나 비참한 일이라 기실 아무것도 기록할 것이 없다. 불교가 이 나라에 수입된지 고려 멸망까지 1020년, 그 동안 삼국 麗朝를 통하여 쭉 계속적으로 이 나라의 민심을 지배하고 새 문화의 창작, 민족의 영예와 國威의 선양에 언제든지 사회의 펴면에 나서서 활동하였다. 勝己者厭厭之는 범인의 상정이기도 하겠지만은 과거에 일찍이 이러한 일이 없었던 유생들로서는 미약하고도 무리한 이씨왕조가 대립하는 기회를 하늘이 부여한 좋은 기회라 하여 불교 박멸에 철퇴의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탄압을 가한다 해서 그것을 忍受한 불교인들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지만은 治國 平天下의 인의 사상을 부르짖는 유생들로서의 이 나라 문화 창작과 민심 지도에 천여년의 공헌이 있는 불교를 권리를 잡았다 해서 그와같이 잔인무도한 탄압을 가한다는 것은 이 나라 유생이기에 능히 감행할 수 있는 특징이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는 못하였을 일일는지도 모른다. 이 500여년간의 불교의 교세란 그냥 둔다 할지라도 여조의 惰性으로 발전할 수 없을 터인데 설상가상겨의 탄압이니 교단자체로서 무슨 발전이 있을 것이며 또 민족문화상 누가 공헌을 했겠단 말인가. 산중으로 몰려간 승려들은 찾아오는 신자를 상대로 하는 외에는 은인자중 각자의 수도를 하여 불도의 慧命을 이어가는 것으로써 그 임무로 삼았다. 불교의 교단은 참으로 靜中의 정이었다. 그러면서도, 朝夕禮佛 시에는 하루도 빼지 않고 「今上階下壽萬歲 王后階下 壽齊年 諸宮宗室各安寧 文武百官盡忠良 雨順風調民安樂 干戈息停國泰平」을 佛前에 기원했다면 슬려는 모두 無骨人이란 평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인을 선인으로 대하고 원수를 운혜로써 갚는 것이 종교인의 심정인 것을 안다면 이해치 못할 것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은 평화와 靜中에 있다가도 국가의 일단 有事之秋에는 대격동속에 뛰어드는 것이 또한 불교인이었던 모양이다. 壬辰亂時에 宣朝大王이 平北龍灣에 이르러 淸虛休靜을 불러 국난을 건져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명을 받은 그는 즉시 격문을 전국 사찰에 띄워 늙고 별들어 丘伍에 참예치 못할 僧徒는 있는 그 곳에서 戰勝을 기원케 하고 그 나머지 靑壯年의 승려들이 모두 승병을 동원케 하였으니 이것은 불교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서 참으로 승병의 효시이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 松雲은 700여승을 이끌고 關東에서 일어났으며, 處英은 1000여승을 이끌고 湘南에 일어나고 休靜 자신은 그 門徒와 및 募僧을 합한 5000명을 얻어서 平安道 順安 法興寺에 모여서 明軍과 합세하여 平壤戰에서 大勝을 거두어 그 때의 國亂을 타개하였었다. 쫓으면 숨고 부르면 나와서 이와같은 큰 활동을 하되, 그들은 그 대가를 찾지 않았다. 靜中에서 動을 또 動中에서 靜中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의 본색이었던 모양이다.

6). 현시점에서 불교의 할 일

이상으로써 우린나라에 와서의 불교 1600년사의 대체를 훑어 보았다. 삼국시대는 그때의 요구이었던 철학 종교적 사상으로써 시대인심에 만족을 주었고 신라시대에는 그 시대에 필요하였던 민족단결 애국 국방, 불교의 현실생활화 등에 이바지 하여 찬란한 우리 민족 특유의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역시 그 시대적인 욕구에 따라 국가 鎭護에 이바지 하였다. 이조시대에도 적극적은 아니었으나 국가의 요청에 따라 적응한 進退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이와같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볼 적에 불교의 그 무엇이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문화를 움직이게 하였던가. 다시 말하자면 불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 불가결한 물질로써 우리를 지배해 왔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력으로써 지도하여 왔단 말인가. 종교는 불교뿐이 아니라 어느 종교이든 원래 無一物主義어늘 어찌 물질로써 지배를 했다 할 수 있으니요. 우리 인류 정신계의 등명이 즉 다름아닌 종교인 것이다. 우리 인류의 정신은 지도의 여하에 따라서는 야만화할 수도 있고 문명화할 수도 있는 것이며 무에서 유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있어서의 이 강토의 불교는 그 시대 그 시대의 불교지도자들의 지혜에 의하여 다 각각 적응한 공헌을 하여왔다. 그러나 이제 필자의 管見으로써 본다면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불교는 시대와 국경 및 민족을 전 세계 전인류에 공통되는 불변의 원리를 가지고 있으니 만약 이 원리를 불교가 수입되던 그 당시부터 명확시 제시하여 주었던들 지나온 역사보다는 보다 훌륭한 결과가 맺어졌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후회심이 간절하여지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황이 과연 어떠한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무슨 생활의 이념이 있으며 국가의 통치에는 어떠한 이념 신조가 서 있고 또 풍속 습관 기타 모든 것에 정통이 있는가. 漢문화가 오면  漢化가 되고 인도문화가 들어오면 인도화, 서구문화가 밀려오면 서구화해 버리는 말하자면 無色 無骨한 것이 우리 민족성이라 한다면 누구나 섭섭하게 여길지는 모르나 아마 피할 수 없는 비난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이와같은 결점을 가지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가. 그것은 개인적으로 생에 대한 신조가 서 있지 않고 또 민족적 紐 에 관한 이해가 없으며, 국가의 식이 명확히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단언하는 바이다. 만약 우리에게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동하는 신념신조가 서 있다면 우리는 동서 어떠한 문화가 들어오던 그것을 이용은 할지언정, 결코 거기에 동화되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에게 대하여 불교가 바야흐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가. 상술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불타 즉 覺者가 되고 또 그 모든 覺者에게는 다 각각 불국토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것이 불교의 二大 목적인 것이다. 또 불교의 요지를 佛 法 僧 三寶라고도 한다. 佛이란 모든 개인이 覺者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法이란 모든 사람이 覺者가 될 원리를 말하며 僧이란 화합의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올바른 수양만 하면 覺者가 될 본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覺者 즉 인격완성자가 되기 위하여,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본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불교 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법이란 인간 본성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즉 원리로는 만인에 공통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동물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僧이란 단체의 의미로서 단체는 화합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단체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화합의 힘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다. 단체의 큰 규모의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다. 이 三寶의 의미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 인생 각자가 이 세상살이를 한다는 生의 의의는 자기의 본성(佛性)을 완전히 발휘하여 覺者가 되는데 있다는 것이요(佛寶의 意義) 사람이 제 혼자만이 覺者가 되면 그것으로써 그의 할 일이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기타 모든 未覺者도 자기와 동일한 覺位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法寶의 意義). 이와 같이 自와 他가 모두 훌륭한 인격자가 되면 거기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불국토(국가)인 것이다.(僧寶의 의의).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은 훌륭한 원리적 본성을 本具하고 있으니 자기라는 개체의 生을 애지중지하는데(以理愛生) 생의 의의가 있는 것이요, 내가 훌륭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남도 또한 그러하니 先覺者로서는 未覺者를 반드시 자기와 동일수준에 올려 세우는 것이 先覺者의 의무로 알고(以義愛族) 그 실천행을 해야 하며, 우리가 이와같은 실천적 원리의 生을 영위하자면 거기는 반드시 그 활동무대인 국가가 필요한 바 그 不壤國家의 형성의 원리는 화합인 것이다(以和愛國). 이것을 본따서 간단히 표현한다면
1. 우리는 각자의 本性 발휘를 위해서 살자. 이것은 즉 진리를 위해서 살자는 것이다. 2. 同族을 건지자. 이것은 즉 義로운 행으로서 善은 이보다 더 큰 善行이 없기 때문이다. 3.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자. 이것은 즉 최대규모의 美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이상 세가지 즉 眞, 善, 美 스로간이 佛 法 僧의 의의로서 우리 인생은 이와 같이 자신의 진리를 찾는데 생의 의의가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활동하는데 그 활동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이와같은 교리는 물론 우리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공통된 철칙적인 인생 교훈이요 인류애요 國家訓이지만은 특히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더 간절한 교훈이다. 과거의 모든 불교지도자들이 우리 선조들에게 이 점을 좀 더 일찍이 지적 제시해 주지 못하였던 것이 크게 유감된 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우리의 장래를 내다볼 때 아직도 결코 늦지 않았다. 현대의 불교인들은 과거인들의 不明을 자각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기여하도록 교단의 총력을 경주해서 모든 시책을 하는 것이 현시점에서의 佛敎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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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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