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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불교의 自救노력과 그 결과
The self-efforts to survive the presecution and its positive effects in Chosun Buddhism

•- 목 차 -
머릿말
 1.山中佛敎化와 현실과제
 2.교단유지의 諸노력과 활동
   1) 대내적 自救 노력
     (1) 法統수호와 法脈계승
     (2) 자립경제의 기반구축
     (3) 性理學에의 사상적 대응
   2) 대사회·국가적 현실참여
     (1) 大衆敎化와 신앙형태
     (2) 對民福祉 실천과 民衆行
     (3) 義僧軍의 救國활동
 3.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그 의미
 4.맺는말
 

머릿말

한국불교의 역사과정에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매우 독특한 성격과 위치를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선불교가 前代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시대여건과 상황 속에서 존속해왔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불교에 대한 정책적 억압과 사상적 배척은 불교로서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더구나 이같은 排佛 상황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고 개국 직후부터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5세기동안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이런 시대환경에 적응해 온 조선불교가 교단의 형태나 사상 및 종교활동 면에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것임은 어렵지 않다. 신라·고려의 불교와 크게 대비되는 조선불교의 독특한 성격과 위치가 곧 여기서 드러난다.

조선 전기에 崇佛主나 왕실의 信佛세력에 의해 일시나마 흥불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儒敎立國을 표방하는 조선의 배불정책은 불교의 존속자체를 위협할 정도였다. 경제·사회적으로 또는 제도를 통해 그 억압과 배척은 그만큼 유례가 없었다. 한마디로 성리학적 이념이 주도하는 새 시대에 있어서 불교는 한낱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이념과 가치로서 공존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대환경 속에서도 조선불교는 끝까지 존속하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조선 불교의 교단 유지를 위한 諸노력과 활동, 그리고 그 결과는 충분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신라·고려불교와는 달리 배불의 수난 속에서 다만 침체·쇠퇴되어간 무기력한 불교로만 인상지워지고 있는 조선불교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보려는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불교의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 특히 교단의 유지·존속을 위한 대 내외적인 自救 노력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그런 다음 이같은 노력과 활동들이 결과적으로 조선불교 자체에 어떤 변화와 의미를 가져왔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이 시대 불교의 새로운 측면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1. 山中佛敎化와 현실과제

조선시대 불교의 특징적인 상황은 한마디로 '山中佛敎化' 또는 '山中僧團의 불교'로 압축해 말할 수 있다. 국가의 배불정책에 의해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온 國都에서 밀려나 산중 승단 형태의 불교로서 자활의 길을 걸어왔다는 뜻에서이다. 이같은 조선불교가 직면해있고 또 해결해 나가야 했던 현실적 과제는 역시 산중불교화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먼저 태종∼명종대에 이르는 조선전기 배불정책을 통해 산중승단 불교의 형성과정부터 살펴본다.

불교억압에 대한 논의와 그 정책적 건의는 개국 벽두부터 있어 왔지만 태조 개인의 信佛 및 개국 초의 사정 등으로 인해 태조 당시에는 불교교단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태종대로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배불정책은 처음부터 의외로 강경하게 진행되었다. 태종대 배불정책의 내용은 크게 ①종파·사원수의 감축 및 그 토지와 노비의 革去 ②왕사·국자제도의 폐지 ③度牒法의 엄격한 실시 ④創寺·造佛·設會 등 경비소모가 큰 佛事의 일체금지 ⑤陵寺제도의 폐지 등으로 요약되는데, 이같은 첫 단계 배불조치에서부터 불교교단은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불의 광범한 대상이나 그 파급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가의 경제적 현실 타개책으로서의 성격이 더 짙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대대적인 사원토지의 감축 및 노비의 屬公 등 주요 배불의 내용이 불교에 대한 경제적 제재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종대의 배불정책은 국가의 종교적 이념 문제로서 보다는 오히려 태종 초에 특히 증대된 軍國的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11宗에 달하던 종파가 7宗으로 폐합되었다는 점이다. 종파의 폐합·축소와 같은 일은 이후 산중불교의 출현문제와도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불교 각 종파의 특성이 무시되고 그 활동 또한 제약 봉쇄당함으로써, 결국 불교교단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이다.

7宗으로 폐합된 종파를 다시 禪·敎 양종으로 대폭 축소시켜버린 세종대의 배불정책 또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사원·승려·토지 및 노비의 대폭적인 감축으로부터 시작된 세종대의 배불정책 역시 이와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종파의 파격적인 축소로 이어져 간 것이다. 이로 인해 불교의 경제적·인적 기반 상당부분이 해체되고 교학사상 및 그 활동의 다양성도 거의 사라지게 된다. 국가의 현실적 요구와 행정편의에 따라 강행된 이같은 종파폐합의 정책은 이후 불교교단의 향방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그 연장선에서 이미 산중불교의 출현이 예견되는 것이다.

한편 이 시기의 배불정책 가운데 승려의 入城禁令 또한 산중승단 형성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조치는 원래 無度牒僧의 단속을 위해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이 금령이 점차 확대실시되면서 산중불교화의 경향이 더욱 가속화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태종·세조대의 배불정책에서부터 어느 정도 엿보이는 산중불교화의 추세는 성종대의 배불정책을 거치는 동안 거듭 확인된다. 유학 진흥과 유교의 이상정치 구현에 진력했던 성종은 본래 숭유배불적 성향이 강한 군주였다. 여기에 과격한 배불론자들이었던 당시의 新進士類들까지 가세하여, 이 시기의 배불정책은 더욱 강도높게 추진되어 갔다. 그것은 특히 성종 7년(1476) 왕의 親政 이후, 여러 방면에 걸쳐 불교에 대한 핍박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지속적으로 수행된 대규모의 僧尼축출과 『經國大典』에 명시되어 度僧法의 정지는 성종대 억불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이 두 가지 조치는 기존 승려에 대한 강제 축출과 병행하여 새로 승려가 되는 길까지 법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불교의 自滅을 유도하고 있는 그런 정책들은 新進士類들의 강경한 요구와 정책 立案에 따라 결행된 것으로, 이 점은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士林세력의 성장이 불교계의 수난으로 직결되고, 또 그것이 산중승단의 출현에도 무시할 수 없는 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불정책으로 피폐해진 불교교단이 다시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그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다. 연산군 10여년간에 걸친 폭정하에서의 불교박해는 가히 '破佛'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선종 都會所(本寺)인 興天寺와 교종 도회소인 興德寺를 폐하여 公 로 삼은 일은 불교교단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교단의 근거지인 양종의 본사가 없어진 상태에서 僧科 또한 실시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연산군대에는 이 외에도 祖宗의 願刹이던 大圓覺寺를 폐하여 掌樂院으로 삼고, 승니를 환속시켜 宮妃나 宮房의 女婢로 삼는 등 철저한 파불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박해가 일정한 대불교정책의 틀 안에서 수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연산군의 무도와 횡포로 인한 불교의 수난이라 해야겠지만, 어쨋든 그 결과는 마침내 불교를 산중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서 근거지를 잃고 공적 활동의 여건을 봉쇄 당한 선교 양종은 廣州 淸溪寺로 물러나, 다만 이름뿐인 양종을 扶持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산중승단의 시대는 사실상 연산군 말경부터 개막되고 그것은 다시 중종대의 배불정책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고정되어 갔다. 사림세력의 정계 진출과 그 영향력이 막대했던 중종대에는 연산군대의 배불에 비해 진일보한 경향을 보여준다. 연산군대의 배불이 원칙없는 배불의 형태였다면, 중종대의 그것은 철저한 廢佛정책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미 폐사된 흥천·흥덕 양사의 大鐘과 경주의 銅佛로 銃筒을 주조케하고 있는 일이나, 『경국대전』에서 아예 度僧條를 삭제하고 있는 데서도 그런 의지가 드러나 보인다. 이보다 앞서 중종 2년(1507) 기묘 式年에 승과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연산군대 이후 승과의 폐지를 공식화하고 있음은 이를 더욱 뒷받침 해준다.

승과의 폐지는 국가와 불교와의 공적인 관계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선교 양종이 국가로부터 인정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이후 불교교단은 무종파의 산중승단으로써 존재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중종대에 산중승단이 현실로 고정됨으로써, 조선 전기의 억불정책은 일단의 결론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이는 향후 산중불교로서의 조선 불교의 존재 방식을 결정짓는 일이었다. 물론 중종대 승과의 폐지 이후 40여년이 지난 명종 5년(1550)에 文定大妃의 흥불지원에 힘입어 선교양종이 복구되고 이듬 해에는 승과가 부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존속 기간은 15년에 불과했다. 명종 20년(1656) 대비의 死去와 함께 불교는 다시 산중승단의 형태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이는 중종대에 이미 내려진 결론에로의 복귀인 셈이다.

이상에서 살펴온 바와 같이 산중승단은 태종·세종대의 배불정책에서부터 그 출현이 예견되고, 이후 그것은 성종대의 배불과 연산군대의 파불을 거쳐, 중종대의 폐불정책에 이르러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난다. 국가 정책에 의한 타율적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조선불교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의 변화였다. 따라서 이제 보다 중요한 일은 이런 현실을 전제로한 교단의 유지와 불교존속이 문제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불교의 과제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불교의 현실과제는 산중불교화의 과정 즉 전기의 억불정책 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하면 억압과 배척의 대상으로서 제한·봉쇄당하고 조치되어온 내용들이 그대로 불교가 직면해 있고 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전기의 배불을 거쳐 온 조선불교의 立地를 고려할 때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①종파 혼합 및 無宗 상황에서의 법통수호와 법맥계승 ②국가와의 관련과 종속에서 벗어난 불교의 경제적 자립 ③당시의 지배이념에 대한 사상적 대응 ④불교 본래의 기능과 역할로서의 교화활동 ⑤국가·사회적 현실참여를 통한 불교존재의 인정획득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불교의 자구적 노력과 활동은 바로 이같은 과제들의 해결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불교는 스스로 그 정체성을 확인하고 존재의미를 확보해 간 것이다.

 

2. 교단유지의 諸노력과 활동

조선불교의 自救的 노력과 활동이 산중승단 출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태종 때에서부터 나름대로 대응노력이 있었으며, 산중불교화 이후 그것은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경주되고 있다. 교단의 유지 및 불교의 존속을 위한 이같은 노력들이 반드시 선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편의상 대내적인 자구 노력과 대사회 국가적인 현실 참여 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1). 대내적 자구 노력

(1) 法統의 수호와 法脈계승

연산군 말경부터 시작된 산중승단의 불교는 명종대 한 차례의 짧은 흥불기간에 도성을 중심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문정대비의 死去로 이내 다시 산간으로 돌아와 자활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런 시대의 산승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던 것은 법통수호와 법맥계승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억불정책으로 敎의 맥과 禪家의 법통은 희미해진 지 이미 오래이다. 더구나 無宗의 산중승단이라고 하지만 敎보다는 禪家가 주류를 이루던 현실에서, 법통의 상실은 이들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즈음에, 임진란을 전후하여 불교계를 영도해 간 淸虛休靜에 의해 새롭게 山僧家統이 수립된다. 이후 그 법통이 문하와 法孫들에게 이어짐으로써 조선 중·후기 산중승단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산중승단의 正體性 확보 노력이라 할 이같은 법통수립 및 법맥계승에는 다소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우선 휴정이 세운 선대의 법통이 그 문하들에 의해 재조직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법통의 흐름이 휴정이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法祖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改變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휴정 이후 그 문파에서 새롭게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太古法統說이 그것이다. 이런 사정을 좀 더 깊게 파악하기 위해 휴정이 밝혀놓은 선대의 법통부터 검토해본다. 휴정은 『三老行蹟』 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선대의 법맥을 명시해 놓고 있다.
 법으로 系派(법통)를 논한다면 , 碧松은 할아버지요, 芙蓉은 아버지이며, 敬聖은 숙부이다.
짧지만 이는 휴정 스스로 밝힌 自家의 계보로서는 유일한 文證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벽송 이상의 先代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행히 이 문제는 휴정이 지은 法祖 碧松行蹟을 통해 보완해 볼 수 있다. 행적은 먼저, 벽송이 祖證大師에게서 삭발하고 衍熙敎師를 찾아가 圓頓敎義를 問學한 다음, 正心禪師를 만나서는 "祖師西來의 密旨를 擊發하여 玄妙를 俱振하고 깨달음에 이익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 뿐이라면 벽송은 正心의 법을 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기록은 또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正德 무진(중종 3년:1508) 가을에 금강산 妙吉祥禪庵으로 들어가 大慧語錄을 보다가 狗子無佛性話에 疑着하여 오래지 않아 漆桶을 깨뜨렸으며, 또 高峰語錄을 보다가  在地方이라는 말에 이르러 前解을 頓落시켰다. 그러므로, 스승이 평생 발휘한 바는 高峰과 大慧의 宗風이었다. 대혜화상은 六祖의 17대 嫡孫이며, 고봉화상은 臨濟의 18대 적손이다. 스승께서는 海外의 사람이면서도 5백년 전의 종파를 은밀히 이었다. 마치 程子와 朱子가 孔子·孟子의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그 학통을 遠承한 것과 같으니, 儒學이나 釋道가 도을 이어 전함에는 곧 한가지이다.

이와 같이 휴정은 그의 法祖가 '평생을 발휘한 것이 고봉과 대혜의 종풍이었으며, 그 5백년 전의 종파(법통)를 密嗣'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대로라면, 벽송이 정심의 법맥을 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멀리 6조 혜능의 17대 적손이며 동시에 임제12대손인 大慧宗 (1089-1163)와, 임제18대 적손인 高峰原妙(1238-1295)의 법을 계승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언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극심한 불법의 沙汰 속에서 선·교를 막론하고 승가는 어느새 그 가통과 종맥을 잃고 있었다. 벽송의 선대가 모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휴정은 이미 법통이 사라져버린 산중승단에, 대혜와 고봉을 遠祖로 삼아 벽송을 법조로 하는 임제가풍의 새 법통을 수립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법통은 휴정이 入寂한 뒤 그 문하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太古法統說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즉, 휴정이 ①石屋淸珙 → ②太古普愚 → ③幻庵混修 → ④龜谷覺雲 → ⑤碧溪正心 → ⑥碧松智嚴 → ⑦芙蓉靈觀으로 전승된 법맥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요컨데 벽송은 정심으로부터 법을 이은 것이며, 그 법통은 임제 18대인 석옥청공의 법을 받고 귀국한 태고로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동일한 임제의 법맥임에는 틀림없지만, 휴정이 세운 법통에 이처럼 개변이 가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모호한 선대를 확정 짓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해 온 懶翁系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옹계란,  ①平山處林(임제 18대) → ②懶翁慧勤 → ③無學自超 → ④涵虛己和로 이어져 온 법맥으로 조선 전기에는 이들 법맥이 주축이 되어왔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특히 의승군 활동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부상시킨 '휴정-유정문파'들은 이제 조선 전기 나옹계의 '무학-함허문파'에 못지 않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태고법통설은 휴정문파의 이같은 성장과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이런 태고법통설은 휴정의 스승 부용영관의 또 다른 문하인 浮休와 그로부터 이어지며 병자호란 때 크게 활약했던 碧巖문파까지도 함께 포섭하면서, 조선 중기 이후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아 갔다. 조선 중기에는 이 밖에도 멀리 法眼宗系와 연결된 휴정의 법계나 知訥 → 나옹으로 이어지는 법계 까지도 눈에 띤다. 전혀 신빙성이 없지만, 이런 법통설이 제기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산중승단의 법통·법맥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증한다. 어쨋든 큰 흐름으로서는 휴정이 임제의 종풍을 세우고 이후 그 문하들이 법통의 상승계보를 확립해가는 가운데, 조선 중·후기의 산중승단은 새로운 자활의 힘을 응집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2) 자립경제의 기반구축

조선불교의 경제적 기반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사원의 막대한 토지와 노동력으로서의 노비가 그 중심이었다. 이 밖에도 신도들의 풍부한 施物과 생산·매매·교역 등 유통경제 및 植利에까지 관여했던 고려불교의 광범한 경제활동 수준에는 못 미쳤지만, 조선 전기에는 신불 왕실 및 귀족들의 비호로 貢納請負 또는 농장 경영과 상품 판매 등으로 여전히 富를 축적해간 사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억불정책의 단행은 사원토지 및 노비의 감축에서부터 착수되고 있는만큼, 조선불교의 경제적 기반은 억불의 첫단계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태종대의 사원토지 및 노비의 감축과 같은 억불정책이 증대된 軍國的 수요를 불교에서 충당하려는 현실적 요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곧 불교의 경제기반 해체라는 의미를 띠고 있음에는 마찬가지였다. 배불군주와 儒臣 관료들은 이같은 불교에 대한 경제적 억압과 제재를 가장 명분있고 또 효과적인 억불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제도의 철폐 및 경제적 기반의 해체와 같은 국가의 억불정책은 근본적으로는 불교교단이 국가에 종속되어 있는데서 야기된 사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국사·왕사제도를 비롯하여 僧科·僧職·僧錄司 등 각종 불교제도의 설치와 사원에 대한 토지 및 노비의 급여 등을 통해 불교는 특히 고려 때부터 국가에의 종속이 심화되어왔고, 그것이 이제 조선시대에 와서는 지배이념의 교체에 따라 제도적·경제적 해체라는 逆과정을 밟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쨋든 분명한 현실은 이같은 과정으로서 전기의 억불정책이 일단의 결론에 도달하는 종종대 무렵에는 불교의 경제적 기반 거의 대부분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원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임진란 이후이다. 전쟁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피폐가 그대로 사원경제로 이어져 간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원은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는데, 여기에 더하여 사원들은 지방 官衛 및 胥吏들의 가렴주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궁핍의 도는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각 사원의 승려들이 스스로 사원의 극심한 곤궁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자립적인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어려워진 사원경제의 타개방안으로 강구된 승려들의 활동이라 하지만, 그러나 제약받는 신분조건 등으로 그 범위가 그리 넓지는 못하였다. 예측 되는대로 상품의 생산과 판매가 고작이지만 그마저 발견되는 구체적인 사례는 매우 드문 편이다. 그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한 예로서 平康 浮石寺의 미투리 산업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이 자체수급을 위해 삼아오던 미투리를 대량 상품생산으로까지 발전시켜 사원경제에 기여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 밖에는 進上品 및 公納官物을 생산하던 전국의 적지 않은 사원들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기적으로 각종 산채와·과일·淸蜜 등 주로 사원의 특산품을 진상해 온 사원에서는 이을 사원의 부업으로서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특히 국가 諸 기관에 공납하기 위한 승려들의 製紙작업은 고갈된 사원경제를 일으키는데 작게나마 一助하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들이 사원의 궁핍해결에 약간의 도움은 되었겠지만, 사원경제의 개선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기반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사원 및 승려들의 경제적 활동 노력을 다시 살펴볼 때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사원의 다양한 契 조직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승려들의 甲契가 주목된다.

조선후기에 사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契는 甲契를 비롯하여 魚山契·彌陀契·念佛契·地藏契·七星契·都宗契 등 20여종이나 되었으며, 큰 사원에는 10여종 이상의 사원契가 조직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사원계는 그 명칭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해당 신앙활동 및 불사경비 등 관련업무 수행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私設 金融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 고대적인 형태는 신라·고려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功德寶·占察寶나 고려시대의 佛寶·廣學寶 등 각종 寶가 그것이다.

승려 혹은 신도들을 구성원으로하여 각기 조금씩 모은 契金을 本으로 삼아 그 利息으로 신앙·불사경비 충당 등 補寺 활동을 전개하려는 이같은 각종 계가 조선 후기에 성행하게 된 배경은 극도로 궁핍해진 사원의 경제사정과 관련이 큰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신도중심 또는 승려중심의 다양한 계의 조직과 운영을 통해 사원경제를 회복시키고자 한 구체적인 경제활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여러 사원계 중에서도 이같은 의도와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것이 승려의 甲契인 것이다.

동갑 나이의 승려들을 契員으로하여 조직된 甲契의 운영 및 補寺 활동에 관해서는 사명당 유정의 '甲會文'을 비롯하여 영조 8년(1732)의 玄風 瑜伽寺 기록, 정조 8년(1874)의 雙溪寺 기록, 그리고 梵魚寺·通度寺의 補寺(甲契)碑 등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甲契의 활동은 18세기 후반에는 사원의 보수가 위주였으며, 19세기 후반 무렵에는 승려의 사유재산 증가와 관련하여 금전을 納寺하거나 토지를 매입하여 寺中에 헌납하는 補寺활동이 중심이 되고 있다. 甲契의 제문제에 관해서는 상세한 先行연구를 참조할 수도 있거니와, 조선후기의 다양했던 사원계 가운데 특히 甲契의 조직과 활동은 사원경제의 자립기반 구축을 위한 승려들의 노력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사례로서 손꼽을 수 있겠다.

억불정책의 근본문제가 국가경제에 기생하는 불교교단의 세속적 경제 활동을 봉쇄하고 그 기반을 해체코자 한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조선후기 불교의 이같은 경제적 자립 노력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당시 사원의 경제적 궁핍문제의 해결책으로써만이 아니라 불교교단이 국가제도 및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자립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시작한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性理學에의 사상적 대응

고려말에 성리학자들에 의해 고조되어온 배불여론이 조선에 들어와 정치적 배불로 구체화하고 있음은 麗末鮮初의 사상적·정치적 경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억압과 배척의 대상이 된 불교교단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대불교 정책 또는 그 이념 배경으로서의 성리학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대응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전 시대를 통틀어 보더라도 이같은 활동은 거의 미미한 정도였다. 조선불교의 立地를 고려할 때 이는 어느 정도 수긍될 수도 있다. 당시 불교의 처지로서는 국가정책이나 성리학에 대해 강경하고 적극적인 대응이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비록 불교의 위치나 시대적 상황이 열악하기는 했지만 불교교단이 오직 침묵만으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온건하나마 護法의 의지로서 성리학에 대해 일련의 사상적 노력을 경주해간 것이다. 이같은 사상적 대응 활동은 맨 먼저 세종대의 名僧이었던 涵虛의 저술 『顯正論』에서부터 나타난다. 『현정론』은 그 題名이 시사하는 바 破邪顯正, 즉 배불의 성리학적 邪論을 논파하고 불교의 眞義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유교 혹은 배불론을 전제로 13개항에 걸쳐 논변하는 가운데 불교의 眞義 설명에 더 주력하고 있는 『현정론』의 논조는 제명과는 달리 매우 온건하게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이런 논조의 전체적인 취지는 마침내 불교와 유교의 相通性 및 融會로 모아지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선 초기의 저술로서 저자 未詳인 『儒釋質疑論』또한 거의 동일한 경향을 보여준다. 19개 항의 질의응답 형식을 통해 배불론에 대응하여 불교의 眞面目을 밝히고 있는 『유석질의론』 역시 유·불·도 3교의 독자성과 귀일성, 특히 유·불 상통성의 논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유석질의론』은 『현정론』에 비해 記述이 훨씬 풍부하고 자세한 편이지만 비슷한 내용과 체제로 미루어 이 또한 함허의 저술로 추정되고 있거니와, 어쨋든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兩書는 그 저술의도와 목적면에서 완전히 서로 일치한다. 즉 불교와 유교가 그 형식과 논리에는 서로 다름이 있지만 궁극적 원리는 상통함을 강조함으로써 儒佛融會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함허 저술의 '논리들이 유교의 성리학적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지는 못하였으며 불교와 유교의 和解와 절충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법적 노력이라는 관점에서는, 함허의 그러한 논리전개에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즉 당시 불교의 존재의미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연관 속에서만 그나마 겨우 인정될 수 있었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함허의 저술의도와 목적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상통성과 융회의 가능성 모색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유·불의 상통과 융회의 논리는 명종대 普愚의 「一正說」에서도 발견되며, 休靜의 저술에서도 엿보인다. 조선 전기 마지막 흥불 시도의 주역이었고 그런만큼 유교측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보우는 불교와 유교의 상통과 융회의 요소를 '一正'의 개념으로서 정리해 놓고 있다. 즉 우주의 근본으로서의 '一'(理)과 인간의 근본인 '心'(正)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이 一正說의 논지이다.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 보우의 일정설은 체계화된 이론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리학의 天人合一사상과 理氣論을 불교의 입장에서 一正의 논리로 전개하여 그 종합과 융회를 모색하고 있음은 분명 성리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 사상 대응이라 할 만하다. 이런 보우에 비해 의승군 활동을 총지도 했던 휴정의 경우, 유교에 대한 직접적인 사상대응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다만 그의 저술 가운데 유·불·도의 要諦를 기술해 모은 『三家龜鑑』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불교와 유교의 일치 및 회통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려는 저술의도를 추측해 볼 뿐이다.

한편 국가의 배불정책 및 성리학에 대해 불교측에서 강경한 抗疏로 대응논리를 편 사례도 있어 크게 눈길을 끈다. 현종 2년(1661), 尼僧들의 거처인 仁壽·慈悲 兩院의 철폐 등 조정의 불교 沙汰결정을 계기로 白谷이 올린 '諫廢釋敎疏'가 그것이다. 이 長文의 疏는 국가의 배불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함은 물론, 성리학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당당한 태도를 보여준다.

백곡은 불교와 유교 두 사상이 진리성에 있어서는 서로 회통될 수 있음은 굳이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깊고 얕음과 유열에 있어서 유교는 불교에 비해 淺劣하다는 것을 직설하고 있다. 5백년 간에 걸친 조선시대 排佛史에서 정당하게 불교의 입장과 견해를 밝힌 유일의 抗疏로 평가되는 이런 諫廢釋敎疏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뒷날 八道禪敎都總攝에 임명될 정도인 백곡 자신의 인품 외에도 兩亂이후 불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승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상승된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즉 불교교단의 국가 사회적 기여를 통한 힘의 성장을 배경으로 백곡이 그런 강력한 항소를 제기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의 상통·융회를 시도하는 온건한 입장이든 '諫疏'와 같이 강경한 논리이든 그것이 당시 국가나 성리학자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는지는 논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리학적 이념하의 유교국가에서 이같은 사상적 대응들은 그것이 어느 쪽이든 조선시대 불교인들의 호법의지의 발로였음은 분명한 일이다.

2). 대사회·국가적 현실참여

 (1)대중화와 신앙형태

국가의 불교에 대한 제도적 보호와 경제적 지원은 왕권의 神聖化나 국가 基業의 연장을 佛力에 기대함과 동시에 불교를 통해 민중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로부터 절대적인 보호와 지원을 받으면서 국가의 願望에 크게 부응해 간 고려불교의 예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兩者의 상호의존과 보완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국가가 佛力에 기대하거나 불교를 통한 민중의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의 배불정책은 불교에 대한 기왕의 보호와 지원장치의 철폐는 물론 아예 불교의 모든 활동 자체를 차단 봉쇄하려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婦女上寺의 금령이나 法會·設齋등 각종 불사의 금지도 이에 해당한다. 개인의 신앙적 욕구와 불교의 자연스러운 교화활동에 까지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통제와 억압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교의 교화활동 노력이 결코 약화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좋은 一例로서 조선시대 佛書 간행과 그 유포를 통한 신앙 경향을 들 수 있다. 刊經都監을 설치한 세조의 대대적인 불서간행과 인수대비 등이 추진해간 그 후속사업은 조선전기의 숭불주와 왕실이 주도한 불사였으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불서간행 불사는 조선중·후기에도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각 지방사찰을 중심으로 신도들의 財施에 의해 민중의 신앙을 반영하는 각종 불서들이 끊임없이 간행·유포되어온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 및 생활화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임에 분명한 이같은 불서간행은 불교의 인간구제적 기능이 민중을 대상으로 여전히 발휘되고 있음을 말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가 갖는 종교적 한계성을 반증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불서간행을 포함하여 불교의 교화활동 내용은 조선시대 민중의 신앙 경향에서 보다 잘 드러나거니와, 대체로 다음의 몇가지 형태를 통해 그것을 살필 수 있다.

①정토신앙

阿彌陀 염불을 통해 사후의 왕생을 기대하는 정토신앙은 그 他力性과 단순함에 의해 민중과의 친화력이 다른 어떤 신앙보다 크다. 신라시대에 순수 왕생정토사상으로 유지되던 이 신앙은 고려 전기에 自性彌陀와 唯心淨土라는 禪旨를 겸한 禪淨一致 사상이 대두된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이 더욱 현저해 진다. 세종대 함허가 念佛香社를 조직한 것은 선사의 염불권장이라는 점에서 일단 주목되지만, 그것은 자성미타 유심정토를 지향한 것인 만큼 불교대중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산중 승단에서도 수행방편의 일환으로 염불이 권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선승들에 의한 염불수용의 단계에 그쳤을 뿐 대중적 확대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祖師禪을 정통으로 하는 禪家중심의 염불권장과 이를 통한 불교대중화에는 그 만큼 거리가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휴정의 염불 행적과 그의 저술 『禪家龜鑑』등에 나타나는 정토사상은 의외로 순수 정토신앙에 근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선승들에 의한 몇몇 정토관계 저술들은 역시 불교 대중화보다는 禪旨를 여의지 않는 염불에 관심을 두고 있다. 普雨(?-1565)의『觀念要錄』,性聰(1631-1700)의『淨土 書』편집, 快善(1693-1764)의「請擇法報恩門」과「佛還鄕曲」등은 주로 정토신앙의 禪的 수용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기의 정토신앙은 대중과의 친화력에도 불교하고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으며, 본격적인 정토신앙의 대중화는 念佛萬日會등이 성행하는 조선 말 무렵에서야 이루어지고 있다.

②밀교신앙

密敎 또한 대중성에 있어서는 정토에 못지 않다. 한국에서의 밀교신앙은 그 상징적 수행체계를 통해 卽身成佛을 목표로 하는 敎義보다는 眞言·陀羅尼와 같은 주문을 욈으로써 消災·治病 등을 희구하는 현세이익적 성향을 강하게 보여왔다. 조선시대에 선·교사상이 퇴조를 보일 때에도 유독 밀교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 같은 신앙적 특성 때문이라 하겠는데, 그 신앙은 시대나 계층의 구별 없이 유행하였다. 성종 때 인수대비가 왕의 消盡怨魔를 위해 『五大眞言集』을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중기 이후로 갈수록 僧俗이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 무수한 眞言集·陀羅尼·儀式集이 開板 간행되고 있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배불군주들인 태종·세종·중종과 명종·선조·현종 등이 齋·消災道場·祈兩 등 법회를 실행했던 것도 밀교신앙 유행의 일면으로 볼 수 있다.  이들 법회는 으레 밀교의식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밀교신앙은 특히 민중과의 결합 속에서 더욱 확고해져 갔다. 조선 중·후기에는 불교의례등을 통해 민중이 불교신앙의 주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밀교신앙이 민중에 가장 폭넓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③미륵신앙

미래 求援佛로서의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上生과 下生 두 가지 형태로 구분 된다. 彌勒淨土에 가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상생신앙이며 미륵불의 출현을 고대하는 것이 하생신앙이다. 조선 중기 이후 크게 성행한 것은 하생신앙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불안정하고 기존의 신념체계가 흔들릴 때 주로 메시아를 기대하는 미륵하생신앙이 유행하고 있음에 비추어, 당쟁과 전란 등으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이 심화되고 있던 이 시기에 미륵신앙이 고조되고 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신앙은 간혹 종교적 차원을 벗어나 기존 질서 및 체제의 변혁을 시도하는 정치, 사회적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시대 말에 궁예의 사례가 말해 주듯이, 미륵불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고 이에 동조하는 민중이 세력화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 때 呂還이라는 승려가 미륵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며 황해·강원·경기도 일대의 여러 촌락에서 무당·아전 등 하층민을 상대로 민중봉기를 선동했던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미륵신앙은 이 밖에도 得男·治病·求福·守護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주술적 성격을 띠면서 조선 중·후기 사회에 민간신앙의 형태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현재에도 전국에 산재하는 미륵불상과 그 여러 가지 형태가 이를 사실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④기타 신앙 및 도교·민속과의 습합

觀音과 地藏신앙 또는 十王·七星·山神신앙 내지는 도교 및 민속과의 습합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불교신앙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대승불교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보편성을 지니는 관음 신앙의 경우, 그것은 정토와 밀교신앙 속에서 드러나는가 하면 華嚴이나 法華사상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관음 신앙은 밀교의 다라니나 功德·靈驗談등을 통해 거의 전 시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그러나 관음 관계 전적의 간행으로 보는 한 그것이 중기에 집중되어 있음은 매우 이채롭다. 역시 이 시기의 정치적 불안 및 사회혼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지장·시왕신앙 등은 49齋나 水陸齋·豫修齋 등을 포함하는 亡者薦度 의례와 깊이 연관된다. 조선시대에는 불교 遺風의 인위적인 제거 강행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망자천도에 관한한 불교와 민중은 그 의례를 중심으로 여전히 밀착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지장·시왕신앙의 유형 또한 조선 중기 이후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밖에 도교 및 민속과 습합된 불교신앙의 형태도 어느 시기나 예외 없이 나타난다. 위의 시왕신앙도 도교적인 사상과 결부되어 있지만 칠성신앙은 더욱 그 색채가 짙은 민간신앙에 속한다. 수명과 생산 또는 복덕을 바라는 민간의 칠성신앙이나 산악숭배에서 출발하는 애니미즘적인 산신 신앙은 불교와 습합되어 현재까지도 불교 안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安宅·百中·冬至 등 민간 전승의 세시풍습들도 불교신앙 속에 흡수되거나 밀착된 형태로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다.

이상과 같은 불교신앙의 여러 형태들은 그대로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불교적 현실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유교적 가치규범과 사회불안 속에서 민중은 종교적 욕구에 관한한 불교안에서 그것을 해소코자 하였고, 불교 또한 그런 민중의 다분히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요구까지도 함께 수용하면서 교화활동을 통한 불교유지를 도모해간 것이다.

(2)對民福祉 활동과 民衆行

종교가 민중을 떠나서는 그 존재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뜻에서, 조선불교의 대민복지활동과 다양한 민중행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중과의 결속 및 연대의 강화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대민복지의 실천과 민중구제의 행은 대략, ①無名僧의 遊行과 교화 ②선구적인 대민복지활동 ③의료활동과 빈민구제 ④불교의 민중화 등으로 묶을 수 있다.  조선조 전 시대에 걸쳐 의외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그 실제 사례를 유형별로 확인해 보기로 한다.

① 無名僧의 遊行과 교화

민중과 함께한 승려들은 배불정책 초기에서부터 발견된다. 태종·세종대의 승려로서 長遠心과 慈悲 두사람이 그들이다. 成俔의 『 齋叢話』(권6)은 장원심의 사심·사욕이 없는 인품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태종때 흥천사에서 베풀어진 기우재와 관련하여 實錄기사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일부러 미친척하고, 굶주린 자를 위해 빌어 먹이고 헐벗은 자에게 제 옷을 입히며 병든 이를 힘써 구완하였다. 장사 지낼 사람이 없는 시체를 장사지내며,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등 가지 않는 곳이 없이 두루 다니면서 사람 돕는 일만 하므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慈悲 역시 장원심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용재총화』(권7)에 전해진다. 금강산·오대산에서 10년을 수행하고 법화경을 1백번이나 독송했다는 그는 부서진 갓과 헤진 옷을 입고 날마다 서울 거리로 돌아 다니면서 밥을 얻어 먹었다는데, 이들은 修行僧然하는 위선을 벗어 던지고 민중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豊歌에 맞추어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불법을 전하고 돌아다닌 '닭중(鷄僧)'으로 불리던 승려도 모습이 보이며, 경기도 파주의 승려 信修는 익살과 흉내로 대중과 어울리며 탐욕을 꾸짖고 孝行을 훈계하기도 하였다.

무명 유행승으로만 보기에는 그 행적이 너무 뚜렷한 성종·연산군대 몇몇 승려들도 민중교화의 실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여기에 함께 포함시킬 수 있다. 성종 때 전라도 임실 지방의 승려 性喜는 불상을 조성하고 대중과 함께 성대한 慶讚會를 베풀었다. 이로 인해 그는 絞殺刑의 위기에 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죽임을 면했지만 그 불사에 시주한 사람은 杖 80대, 그리고 참여자는 笞 40대에 각각 처해지고 있다. 승려의 設會가 교살형의 대상이 되고 불사의 시주·동참자가 장과 태로 科罪되는 그런 시대에 성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중 교화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중교화에 진력하는 승려는 불교박해가 최악에 이른 연산군 때에도 존재하였다. 민중의 존경이 커서 따르는 이들이 1천여명을 헤아릴 정도였다는 陸行이 그런 승려였다. 화 입을 것을 염려하여 교화행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육행은 '먼저 깨들은 사람이 뒷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안 사람이 뒷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뿐이다. 화와 복이야 하늘에 달린 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소?'라고 응답하고 있다. 역시 연산군 때 뛰어난 醫僧이기도 했던 충청도의 虛雄도 사람들의 온갖 병을 고쳐주는 한편 그들에게 설법하여 마음의 아픔까지도 함께 치료해주던 遊行교화승이었다. 이 허웅도 관찰사의 啓聞에서 극형에 처할 것이 건의되고 있다.

② 선구적 대민복지 활동

불교의 자선사업이나 사회복지 차원의 활동이 매우 빈약했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태종·세종대에 전개된 불교의 대민복지 활동은 매우 이채롭다. 민가의 초가지붕 개량사업을 조직적으로 추진해 간 海宣의 선구적인 대민복지활동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태종 6년(1406), 해선은 당시 대부분이 초가인 新都 한양의 민가 지붕을 모두 기와로 개량한 뜻을 세우고 조정에 이를 정식 건의 하였다. 그 요지는 '도성의 초가가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으며 일이 수고로울 뿐만 아니라 항상 화재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別窯를 설치하여 기와 굽는 일을 자신에게 밑긴다면 기와를 구워 팔아서 10년이내에 성안의 민가를 모두 瓦家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선의 건의와 함께 그에 대한 조치 내용이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해선의 건의를 받아들인 조정에서는 그 해 정월에 別窯를 설치하여 관원을 배치하고 해선으로 하여금 匠人을 뽑아 그 일을 돕도록 초치했던 것이다.

신도의 미관을 고려하고 사람들의 수고를 덜며 화재의 예방을 위해서도 민가의 지붕을 전부 기와로 개량하겠다는 해선의 사회복지적 결심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태종 6년부터 시작된 이 대대적인 사업은 몇 년 안에 성내 민가의 과반수를 기와로 덮을 만큼 활발하게 진행되어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비마련이 어려워 일시 사업을 중단하였고, 그것은 다시 태종 16년에 속개되지만 역시 부진하였다.

이에 해선은 세종 6년(1425)에 이르러 다시 효과적인 사업 추진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綿布 3천필을 대여 받아 이를 기금으로 삼고 자신이 승려들을 통솔하여 別窯를 계속 운영토록 하자는 것과, 그렇게 하면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사업이 계속되어 머지 않아 성안의 모든 민가를 개량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같은 제언에 이어 해선은 자신의 모은 곡식 1천석을 내놓아 '三色之 '의 자본으로 삼고 있다. 기와 굽는 일에는 火木·供給·工役의 세가지 비용이 요소가 되므로 기름의 명칭을 三色之 라 한 것이다. 戶曹를 통해 올려진 이 제안은 세종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 짐으로써 해선은 계속해서 민가의 지붕개량사업을 추진할 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이후 활동 성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대민복지활동에 일생을 바친 해선의 행적은, 국가의 미온적이고 지속성이 결여된 사회복지정책의 태도에 대해 오히려 불교인이 그것을 촉구하고 관철시켜간 보기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승려로서 민가지붕개량의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추진시켜간 대민복지활동의 선구자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승려들의 노력으로 인해 적어도 세종 중기 이후의 불교 대민복지사업은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었던 것이로 보인다. 세종 17년(1437) 전국의 선·교양종 소속 각 사원전 8095결 가운데 무려 810결을 따로 떼내어 이를 別窯·活人院·歸厚所등 승려들이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복지기관에 이전시켜 그곳 幹事僧들의 생활비에 충당케 했다는 기록이 그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불교가 탄압받던 시기에 대민복지를 위한 불교의 기여가 두드러지고 있음은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해선이 필생의 서원으로 추진해간 민가의 지붕개량 사업이나 이후 승려들의 사회복지적 기여는 불교의 대사회·국가적 현실 참여의 일환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③ 의료활동과 빈민구제

의료활동과 빈민구제 역시 대민복지에 속하지만, 이 유형에 있어서는 특히 세종 때 화엄종 승려 坦宣의 활동이 가장 크게 눈에 띤다. 이미 개국 초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 헌신적인 의료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던 탄선은 세종때에는 국가적 차원의 민중의료사업에 진력하고 있다. 즉 도성의 성곽수축공사가 진행되던 세종 4년, 그는 도성의 동·서에 설치된 救療所에서 승려 3백명을 거느리고 공사에 동원된 축성군의 질병 및 부상을 치료해주는 등 대대적인 의료활동을 펼친 것이다. 탄선이 승려 3백명과 함께 의료활동에 나서고 있음은 이들이 국가 공역에 동원되어 일단의 임무를 수행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自願이든 동원에 의해서이든 승려가 국가의 공역에 투입되어야 했던 현실과는 별도로 탄선과 승려들의 의료활동을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종교적 실천행으로 간주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이 힘든 노역을 감당해가는 민중과 함께 하면서, 전염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음은 바로 민중에 대한 그들의 자비심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탄선은 의료사업 외에 빈민구제활동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세종 4년 9월 京中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이 발생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흥복사에 求療所를 별도로 설치하고 역시 탄선에게 그 일을 맡겨 빈민들을 돌보게한 것이다.

탄선이 주로 국가 공역에 동원된 민중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펼친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평소 京中에 汗蒸所를 설치해 놓고 빈민들의치료에 나섰던 승려들도 있었다. 승려들이 한증소에서 빈민을 치료한 예는 세종대에 특히 많이 나타나 보인다. 그 가운데 天祐·乙乳 등은 가장 대표적인 汗蒸僧들이었다. 大禪師로 호칭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선종의 승려로서 상당히 이름이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 대선사들이 당시의 대중요법이라 할 한증과 목욕으로써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역시 민중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천우·을유 등의 한증치료 활동 또한 일정한 기금( )을 바탕으로 국가와의 연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전개해 간 민중의료사업이었다. 즉 천우 등은 세종 9년(1427) 국가에 청원하여 미곡 50석과 면포 50필을 대부받아 그것으로 汗蒸 를 설치하고 그 이자로써 빈민의 질병치료를 위한 한증소를 운영해간 것이다. 이와 같이 승려들이 앞장서서 민중의 의료복지에 관심과 열성을 기울임에 따라 조정에서도 의원을 파견하여 이들의 빈민을 위한 의료사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④불교의 민중화 노력

서민과 하나가 된 불교, 대중 속에 생동하는 불교를 불교의 민중화라고 한다면, 그런 노력은 주로 조선 중·후기의 이름 있는 고승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映虛海日(1541-1609)은 산중불교 시대의 전형적인 수행승이지만, 『映虛集』에 수록된 「浮雪居士傳」은 놀랍게도 그의 창작 불교소설이다. 호남지방의 민간설화로서도 오랫동안 전해져오는 부설거사의 일화들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그는 한마디로 在俗성자의 모델이다. 승려로서 파계하고 처자를 거느린 몸이 되기는 했지만 세속에 있으면서도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 成道하여 예 도반들을 일깨우는 속세의 善知識인 것이다. 해일은 부설거사를 통해 '중생을 위한 길이라면 그것이 속세의 在家생활인들 어떠하랴'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민중에 대한 자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在家成道를 통해 불교의 민중화를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속에 생동하는 불교라는 점에서 震默一玉(1563-1633)의 행적과 일화들은 더욱 적극적이다. 그의 행적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東師列傳』에 실린 그의 행장과, 隱士 金箕鍾이 구전되어오던 진묵대사의 일화와 기적 등 약 20話를 모아 草衣禪師로 하여금 찬술케한 『震默大士遺蹟攷』(1850刊)가 있어서 그 행적의 대강을 엿볼 수 있다. 儒·佛에 함께 노닌 사상가이기도 했던 그는 기성불교의 神聖과 권위 계율주의를 타파해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서민의 벗으로서 파격적인 숱한 화재를 남기며 민중속에 불교를 심어간 것이다.

이 밖에 불교의 민중화는, 평양성 산골마을에서 머슴이 되어 羊을 치며 修心에 전력하고 성 밖에 나가 숯과 물을 팔아 걸인들을 보살폈던 便羊彦機(1518-1644)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끝없이 구제하고 걸인과도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기도 했던 晶岩卽圓(1738-1794)에게서도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3)의승군의 救國활동

임진왜란 중 의승군 구국활동은 조선불교의 대사회국가적 현실참여로서뿐 만 아니라 가장 비중이 큰 한국불교의 호국적 史實로 특기되고 있다. 불교의 호국사실은 특히 오늘에 와서 큰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조선불교에 있어서 의승군 활동은 거의 선택여부를 논란할 여지가 없는 구국적 현실참여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같은 현실참여를 통해 불교교단의 존립과 유지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의승군 활동을 사실 그대로 파악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의승군 활동은 임진왜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묘·병자호란 때에도 그 활약상이 보이며, 남한산성(1624년 축성)과 북한산성(1711년 축성)의 축조 및 그 계속된 수비 또한 승군이 주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호국의 정신성은 물론 조직규모나 활동내용 나아가 실제 성과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당시의 의승군 활동은 분명 한국불교의 여타 호국사례와는 크게 대비되고 있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왜군의 東萊城 침략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과 접전을 벌인 최초의 의승군은 公州 甲寺에 있던 靈圭와 그가 거느린 8백 명의 의승군들이었다. 이 8백의승군은 趙憲의 7백의병과 합세하여 그 해 8월 왜적에게 함락당한 淸州城을 수복함으로써, 왜란 발발 이후 첫 승전을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개전 초기부터 큰 활동상을 보이고 있는 이런 의승군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선조 25년(1592) 5월경 부터인 것 같다. 몽진 길에 올라 평양에 머물고 있던 왕에게 당시의 병력현황을 밝히는 비변사의 啓書 가운데 6백 명 가까운 승군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s

그러나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같은 해 7월 선조가 義州行在所에 머물 때 승병모집을 위해 妙香山에 있던 휴정을 초치한 이후부터이다. 世亂을 구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왕에게 휴정은 忠赤을 맹세하고 있으며, 이에 감탄한 선조는 그에게 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을 내려 전 승군을 관장케 하였다. 이로부터 의승군의 전국적인 확대가 시작된 것이다.

왕을 進謁하고 돌아온 휴정은 전국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그 자신 73세의 노령으로 문도들을 포함하여 自募한 승군 1,500명을 거느리고 順安 法興寺에 주둔하였다. 법흥사 주둔 의승군은 휴정의 위촉을 받은 義嚴에 의해 잠시 통솔되었는데, 의엄은 황해도에서 봉기한 義僧將이었다. 이어 관동을 중심으로 8백 명의 의승군을 모아 평양성 인근에 주둔해 있던 휴정의 제자 惟政이 합류하고부터는 법흥사 의승군의 지휘는 유정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의승군의 본거지가 된 법흥사 鎭營에 집결된 의승군의 수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 밖에 호남 지리산에서 處英이 의승군을 모아 봉기한 것을 비롯하여 각 도에서 의승군이 일어나고 있지만, 왜란 기간중의 정확한 의승군 수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법흥사에 집결했다는 그 인원을 통해 의승군 활동 초기의 규모를 유추해 볼 뿐이다.

이런 의승군이 전국적인 조직을 이루었을 것임은, 이미 선조가 휴정에게 내린 팔도십육종도총섭의 직함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중앙에 도총섭을 두고 그 아래로는 전국 8도에 각각 선·교 양종 2명씩 16명의 총섭을 둔 조직체계인 것이다. 조정으로부터 임명되어 집첩을 받았던 도총섭과 총섭은 '領軍討賊之僧'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그것이 전국에 걸쳐 시행된 것은 선조 26년 8월부터였다. 그러나 마치 선·교양종의 복구를 방불케하는 이 일원체계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조정 유신들의 논란 대상이 되기도 하여 각 도에 반드시 2명씩의 총섭이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도총섭·총섭의 지휘를 받은 의승군은 都元帥의 節制下에 관군과 협력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량운송과 산성 축성 등 후방지원을 담당하며 準官軍의 형태로 활동하였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한 의승군의 주요 전적을, 선조 26년 서울이 수복되어 왕이 還都하는 그 해 7월까지로 한정하여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靈圭軍·趙憲軍 청주성 수복 (선조 25년 8월) ② 영규군·조헌군 錦山 전투, 전멸 (선조 25년 8월) ③ 信悅軍·진주성 방어전 때 丹城에서 전투 (선조 25년 10월) ④ 휴정·惟政軍 평양성 탈환 전투 참전 (선조 26년 1월) ⑤ 處英軍 행주산성 전투 참전 (선조 26년 1월) ⑥ 義能·三惠水軍 薺浦 공격에 참전 (선조 26년 7월) ⑦ 유정군 진주성 방어전 참전 (선조 26년 6월) ⑧ 도총섭 휴정 1백 명의 승군과 還都하는 大駕수행 (선조 26년 7월)
이 밖에도 의승군의 전투활동은 육·해전을 막론하고 전국 일원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큰 전적을 올렸다. 그러나 선조 26년 4월 서울이 수복되고 왜적이 남하하여 전황이 소강사태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의승군 활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량운송에 의승군이 투입되거나 대부분 의승군이 각지의 산성 축성의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또 일부 의승군들은 주둔 지역 내에서 군량 조달을 위해 屯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거나 땔감을 모으는 등 전쟁물자 비축의 임무를 수행하고도 있다. 이같은 후방지원 및 전쟁대비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의승군의 산성축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 갔다. 유정이 西生浦에 주둔해 있던 적장 加藤淸正의 진영을 출입하면서 일본의 강화조건이 불가함을 역설하고 罷兵을 종용하는 등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 또한 의승군 활동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승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한편 7년간에 걸친 지루한 왜란이 끝나고 그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승군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성격상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활동에 비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 때의 의승군 규모나 활약 또한 간과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묘호란 때에 활동한 의승장은 明照였다. 휴정-유정계의 법맥을 잇고 있는 그는 인조 5년(1627) 後金이 來侵했을 때 조정으로부터 팔도의승도대장에 임명되어 4천여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안주에서 항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다시 인조 14년에 청군이 침입했을 때에는 의승각 각성으 lghkf동이 돋보인다. 임진왜란 때 명장 이종성과 함께 해전을 지원하기도 했던 그는 인조 2년(1624) 승군의 남한산성 축성시에는 8도 도총섭으로서 役事를 감독하여 3년만에 축성을 완성한 바 있다. 역시 휴정의 동문 浮休의 제자인 각성은 축성을 완료한 뒤 화엄사에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남방각지에서 모여든 3천여 명의 의승군을 '降魔軍'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었다. 각성은 이 의승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중 淸과의 굴욕적인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이상에서 대강 살펴온 바와 같이, 조선시대 의승군의 구국활동은 전 불교교단이 관심과 능력을 총집결시켰을 만큼 가장 비중이 컸던 대사회·국가적 현실참여활동이었다. 그 결과로서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국가 사회의 인식이 새로워지고 불교의 위상 또한 어느정도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후기 불교교단의 존속과 유지에는 이 임진왜란 중의 구국활동과 그 기여의 결과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 현실참여의 일환이었던 의승군 활동은 어디까지나 불교외적인 활동이었다. 그것 자체가 불교교단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불교활동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에도 국가의 성리학적 이념의 기본 배불방향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며, 불교 또한 다시 산중승단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3. 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그 의미

혹독하게 진행된 배불정책 아래서 조선불교가 경주해 온 대내외적인 자구노력과 활동은 그대로가 자활의 방도인 동시에 역경의 시대상황 극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조선불교는 이같은 노력과 활동으로 끝까지 교단을 유지하며 불교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 시대 불교교단의 존재방식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 결과는 새로운 의미로 읽혀질 수 있다. 이제 조선불교가 걸어온 특징적인 몇가지 존재방식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조선불교의 존재방식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산중불교의 모습이다.

조선불교가 산중승단으로 축소된 것은 국가정책에 의한 타율적 결과였다. 國初에 11종이던 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대폭 통폐합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양종의 本社마저 잃게되자 불교교단은 부득히 산중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산중불교의 현실은 國都를 중심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고 활동을 전개해온 그 동안의 불교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를 수 밖에 없다.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단절로 그 행정적 관리 및 보호권 밖에서 존재해야 함은 물론 대사회적 불교활동이 불가능하게 되고 자유로운 포교의 길마저 봉쇄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은 오직 山間叢林의 운영뿐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산간 총림의 불교에도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로써 조선불교는 비로소 순수한 수행승단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려중기에 지눌이 침체된 선법의 중흥과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名利를 버리고 山林에 은둔하여 함께 禮佛·轉經하고 運力하며 習定均慧에 힘쓸 것'을 역설했던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이 무렵의 고려불교계는 귀족 문벌세력과 밀착된 승려들이 종파적 이익을 도모하거나 심지어는 反武臣 항쟁에까지 나서는 등 수행의 기풍이 흐려지고 俗化현상이 만연되고 있었다. 지눌은 그런 불교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수행을 본분으로 하는 산간총림의 불교를 제창하였고, 그것이 곧 고려 중기 이후 선법을 크게 진작시킨 定慧結社 운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산중승단을 지눌의 이같은 정혜결사에 그대로 대입시킬 수는 없다. 우선 산중승단의 형성은 조선불교의 자발적 의지의 결집으로써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은 다르지만, 이는 조선불교로 하여금 순수한 수행승단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지니게 하는 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無宗의 산중승단에서 법통과 법맥계승을 통해 선불교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한편 그 전통을 강화해가고 있음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 산중승단, 즉 산간 총림의 존재방식은 그 형성과정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만하다. 반면에 이로 인해 교학이 쇠퇴하고 불교의 운둔화 경향이 심화되어간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이는 조선불교가 안게된 또 다른 과제였던 셈이다.

산중승단에 이어 조선불교의 존재방식으로서 교단의 자립경제 활동 또한 당연히 검토되어야 할 대상이다.

조선조 배불정책의 가장 현실적이고 표면화된 이유와 목적은 국가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구시대의 가치집단인 불교가 국가경제에 기생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배불정책은 사원토지 및 노비의 革罷와 같은 경제적 제재 조치로부터 시작되고, 마침내 중종대 무렵의 불교교단은 그 경제적 기반 대부분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열악해진 불교교단의 경제사정은 임진란으로 인한 국가 사회 전반의 피폐한 현실과 함께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의 기록들을 통해 생계의 유지마저 어렵게 된 사찰들의 궁핍한 사정을 엿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자구책 마련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따라서 임진란 이후 각 사찰마다 그 나름의 경제적 자구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불교교단의 자립적 경제기반 구축활동은 바로 이같은 생계유지를 위한 각 사찰의 자구노력의 연장선에서 파악된다. 각 사찰에서 일어났을 僧衆의 생계를 위한 자구노력은 산채, 과일 등 사찰의 특산품 판매 정도였고, 드물게는 미투리를 대량 상품생산으로 발전시킨 경우와 製紙작업으로 궁핍한 사원경제를 개선시키고자 했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립경제 활동이라는 점에서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각 사찰의 다양한 契조직들이다. 이는 신앙활동 및 불사의 경비 조달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사설금융과도 같은 것으로서, 동갑의 승려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승려 甲契는 특히 주목할만한 경제활동이었다. 쌍계사·범어서·통도사 등의 예가 말해주듯이 주로 규모가 큰 사찰에서 유행했던 승려 갑계는 본격적인 의미의 자립경제 기반구축활동으로 평가할만 하다. 그것은 사찰의 보수를 위한 경비조달에서부터 토지의 매입과 이의 寺中 헌납등으로 사찰의 실질적인 경제자립을 뒷받침해 온  대표적인 성공 사례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제적 자립이 어느정도 가능하게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지만, 그러나 이같은 경제적 자립이 배불정책 이전에 불교교단이 누리던 경제 여건에는 비교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갖추는 정도의 자립 경제 기반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교단의 자립경제활동은 어렵게 이룩해 온 경제적 성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배불정책이 국가경제에 기생하는 불교를 그 길로부터 차단하는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임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불충분하나마 최소한의 자립경제 기반이 갖추어짐으로써 불교교단이 비로소 국가경제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분명 경제적 소득 이외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불교의 자립경제활동에 대해서는 경제적 측면의 평가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은 불교교단의 자치·자율적 존재 방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욱 새로운 의미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경제문제와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국가의 각종 보호제도와 지원체계의 철폐 또한 조선불교의 존재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국가와의 공식적인 관게가 모두 단절된 이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중과의 유대와 결속 또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할 조선불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불교가 국가의 절대적인 보호와 지원을 받던 시대에는 불교의 발전과 번영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민중의 관계가 진정 가까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국가에 대한 보은으로서 불교가 왕권의 신성화나 基業의 연장과 같은 국가적 願望에 부응하는 동안 민중은 그 만큼 불교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되어 온 것이다. 그런 불교와 민중과의 관계는 역설적이게도 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활력을 잃고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새삼 밀접해지고 있다. 이는 배불정책 이후 불교의 민중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결과로서 보다는 불교 본래의 인간구제적 기능에 대한 민중의 변함없는 신뢰와 기대가 가져온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적 윤리규범의 준수를 종용하는 사회에서 충족시킬수 없는 종교적 욕구를 민중은 여전히 불교안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와 민중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불교의 각종 신앙 및 의례를 통해 더욱 밀착되어 갔다. 신앙의례 특히 밀교적인 성격을 띤 의식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것은 주로 追薦·消災·기복, 治病등 민중의 소망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미륵신앙이나 민속과 습합된 十王·七星·山神신앙 등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불교적 전통이나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같은 신앙 및 의례들이 높은 종교적 경지나 수준으로 평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민중의 요구로서 불교 안에 폭넓게 수용되었던 것인데,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에는 민중이 불교신앙의 주체를 형성한 시대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불교와 민중과의 이런 같은 관계는 이 시대 승려들의 대민복지 활동이나 다양한 민중행을 통해서도 더욱 긴밀해져 갔다. 無名의 유행승이나 이름있는 고승을 막론하고 조선시대의 승려들에게서 민중행이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배불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민중과의 깊은 유대와 결속을 이루고 있는 조선불교의 이같은 존재방식은 앞 시대의 불교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국가의 배불이 그 계기가 된 것이기는 하지만, 민중과 함께한 불교로서의 그 의미는 조선불교의 새로운 일면임에 틀림없다. 조선불교는 민중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진정 민중이 신앙의 주체가 되는 새 장을 열어간 불교였다.

이상에서 검토해온 모습들 외에도, 조선불교는 의승군의 적극적인 구국활동이나 선·교사상 및 신앙의 종합화 등을 통해서도 그 독특한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전자는 불교정신과 이념상의 문제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불교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윤리적 의미로, 후자는 불교의 시대 현실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사상 및 신앙활동의 의미로 각각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맺는말

조선시대의 배불은 역사적 業因의 果報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 상황등 불교외적 조건의 환경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그 원인의 상당부분은 이미 고대불교에서부터 잉태되어 왔고 그것이 조선불교의 배불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역사의 인과관계 속에서 조선불교가 시대현실의 극복을 위해 경주해온 자구노력과 활동에 관해서는 좀 더 충분하게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배불의 수난을 겪으며 침체·쇠퇴해 온 불교라는 조선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이 시대 불교의 전체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책적 억압과 배척 아래서 펼쳐온 대내외적인 다양한 자구노력과 활동은 그 자체로서 조선불교가 선택한 최선의 자활방도였고, 불교교단을 끝까지 유지시킬수 있었던 저력 또한 바로 그로부터 나오고 있다. 자구노력과 활동의 결과가 조선불교의 유지·존속으로 나타난 셈이지만, 그러나 이같은 결과에 대해서는 이 시대 불교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①산간총림불교가 보여주는 순수 수행승단으로서의 면모 ②피폐한 경제환경 속에서 자립경제기반 구축활동을 통해 얻게된 불교 교단의 자율성 ③민중과의 유대와 결속이 가져온 진정한 민중불교시대의 개막 등은 크게 주목해야 할 내용들이다.

이같은 존재방식과 그 의미는 조선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조선불교는 역사적 과보의 무거운 현실조건들과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불교의 전개를 위해 의지와 역량을 총집결 시켜 나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불교로서 재평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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