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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獨立運動史에서의 佛敎界의 位相 - 김창수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目   次
 
Ⅰ. 序 論
Ⅱ.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動向
1.  反寺刹令運動과 佛敎界의 革新運動
2.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活動
Ⅲ. 3•1獨立運動 이후 佛敎界의 獨立運動
Ⅳ. 結 論

Ⅰ. 序 論
 
  우리 겨레가 日帝의 植民地統治에 항거하여  獨立을 쟁취함으로서 國權을 회복하려고 투
쟁한 독립운동은 庚戌國恥 이후의 1910년대와  1919년 3•1독립운동까지, 3•1獨立運動으로
부터 1945년의 민족해방 때까지의 크게 두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독립운동사에 하나의 큰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것은 3•1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3•1獨立運動은 일제의 武斷統治 아래 유린된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봉기하여 독립을  쟁
취함으로서 이 땅에 새로운 民主•共和•人道主義에 의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독립운
동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오직 불교계의 운동만을 별개의 주제로  설정
하여 다룬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독립운동의 전체상을  혼란으로 몰아 넣을 우려
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한편 유독 불교계가 주목되는 것은 다른 종교와 다른 특수성, 특히
세속세계와 유리된 환경 속에서 항일독립운동전선에 동참하고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불교계의 역할에 대하여는 그 연구가 별
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1)   다만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
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데2)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불
교계에 대한 일본 식민지 불교의 침투라는  타율적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우리  불교의
자주적 측면이 매몰되기 쉽다.
 
  다른 하나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의 과정 속에서 한국 불교계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함으로서 사실 이상의 역할 강조와 더불어 과대평가 내지 예찬론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
이다.
  이와 같은 두 시각과는 별개로 이때까지  이 분야의 연구사는 과대평가되어 왔다는  점과
또한 資料 정리가 아직 미흡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佛敎라는 종교적 성격이
지니는 出世間的 은둔적인 경향 때문에 그 특수성 아래서의 역사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사실 외에도 식민지 시대 불교계의 움직임을 한국 근현대
불교사라는 좁은 틀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 한국  근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맥락 지우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글에서는 주로 3•1獨立運動과 그 이후에 전개된 독립운동을 불교계의  동향에
초점을 맞추어 그 중요한 것만 살펴보려고 한다.
   
Ⅱ.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動向
 
  3•1獨立運動에서의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3•1獨立運動의 준비 및  전
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불교계를 대표한 민족지도자 韓龍雲과 白龍城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다루어졌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더욱이 3•1獨立運動에 있어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이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회고록3)과 함께  이를 다룬 계몽적
인 글들이 주로 발표되어 있다.4) 그러나 이  밖에도 불교계의 많은 인물들이 3•1獨立運動
에 참여하였고, 따라서 현재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으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편 3•1獨立運動을 전후하여 佛敎界의 움직임 중 주목되는 것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전
통을 수호하기 위한 혁신운동이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며, 또한 직접적인 항일독
립운동이라는 두 흐름을 집결시키면서 전개되었다는  점이 불교계 독립운동의 특수성을 말
해 준다.
 
  1. 反寺刹令運動과 佛敎界의 革新運動
 
  그 첫 번째 흐름은 일제가 한국에 대한 植民地政策의 추진과정에서 한국불교를 통제할 목
적으로 日帝의 總督支配에의 예속화를 뜻하는 이른바 ‘寺刹令’ 7개조를 반포하기에  이르
렀다.  1911년 6월 3일 朝鮮總督府制令 제7호에 따라 반포된 寺刹令과 7월에 반포된 ‘制令
제84호’의 ‘施行規則’5)은 9월 1일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로부터 한국의 모든 사찰은 직
접 조선총독에 완전히 장악되고 통제되기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6)   따라서 사찰령
과 이어서 1911년 7월 8일에 반포된 ‘사찰령 시행규칙’ 제8조에 의하여 한국 불교는 30本
山과 本末寺 관계를 지니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사찰 재산권과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서  정
치적 지배관계와 궤를 같이 하여 한국불교에 대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
리하여 禪敎 양종의 단일종으로 통일되어 오랜 전통을 지니고 내려오던 한국불교는 일제 식
민지 체제 내에 완전히 종속화 내지 흡수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국 사찰령의 시행은 한국사찰과 승려의 전통 및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기 때
문에 당연히 불교계의 저항이 예상되었다.  특히 총독에 의하여 임명된 本山 住持들은 세속
화에 따라 타락하는 경우가 많아 불교 교단 내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고 末寺에
편입된 사찰의 승려들의 불만과 함께 사찰령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리하여
타락의 길을 걷던 일부 친일승을 제외하고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운동이  곳곳에
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사찰 내부의 혁신과  사찰령의 폐지를
통해 식민지 통치에 대 항한  민족지도자로서는 韓龍雲, 朴漢永, 白龍城,  白初月 등이 있었
다.7)  특히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겪으면서 불교교단 내에서는 사찰령에  따른 일제의
불교탄압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폐지운동과 함께 불교계의 혁신운동
이 싹트기 시작하였다.8)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에 들어서 韓龍雲 등을 중심으로 政敎分
離와 사찰령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佛敎靑年會 운동이 일어났다.  이 단체는 1920년 6월 20
일 서울 수송동의 覺皇寺에서 韓龍雲의 지도로 金尙昊•都鎭浩  등이 조직한 것인데,9)  이
로부터 본격적인 불교혁신운동이 항일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게 된다.  이 운동은  그
연속선상에서 이듬해인 1921년 12월 20일 韓龍雲의 지도 아래 김법린•김상호 등이  중심이
되어 朝鮮佛敎維新會를 조직하고 본사 주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대상으로
한 정교분리, 사찰자치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의 청원운동을 펴 나갔다.  1922년
1월에는 2백여명의 대표가 모여 정교분리를 결의하고 2,700명 연서의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
출하였다.10)  이 건의서에는 하루 속히 사찰령을 폐지하여 불교교단의 자치에 일임할 것과
이의 실시 이후의 혼란과 폐단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반응은 처음부터 냉담하
였고 더욱이 일부 본산 주지들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11)  여기에 일부 친일적 본사
주지들에 대한 청년승들의 불평은 날로 높아졌다.  드디어 1922년  3월 19일 서울 각황사에
서 열린 불교유신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김상호 등 청년승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친
일주지의 대표적인 인물인 姜大蓮을 성토하고, 다시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종로거리를 행
진한 이른바 嗚鼓事件을 일으켰다.12)  이에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단순히 친일 주지 강대
련에 대한 모욕과 규탄으로 보지 않고 항일운동으로 여겨 이 사건의 주동자 김상호 등을 체
포하여 투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여 일제 당국은 전통적인 山中公議會의
부활을 인정하고 본산주지의 전권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찰령 반대운동은 이로부터 항일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어  1930년
에는 한용운을 당수로 하는 항일비밀결사인 卍黨을 결성하고 김법린•김상호•이용조  등이
중심이 되어 정교분리•사찰령폐지 등을 내걸고 투쟁을 벌여나갔다.  또한 같은 해, 불교계
지도자의 한 분인 方漢岩 등이 중심이 되어 사찰령 이전의 전통불교의 결속을 목표로 하는
사찰령 반대운동을 벌여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뛰어 넘어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된다.  한편 사찰령 반대운동은 불교 청년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계의 선각자 가운데
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본산 주지 가운데는 친일승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민족의식에 투
철했던 宋滿空 같은 뛰어난 걸승도 마곡사 주지로 있었다.  그는 本山住持會議 석상에서 총
독에게 직언하여 불교정책을 공격하고13)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애쓴 불교계 지도
자의 한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白龍城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는 것이 민족운동의 일
환이라고 이해하여 1926년에는 당시의 조선총독 齋藤實에게 建白書를 보내어 승려의 肉食娶
妻는 불교멸망의 張本임을  지적하여 일본  불교에서 허용된  帶妻肉食을 맹렬히  공격하였
다.14)   이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불교화에 대한 그의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3•1獨立運動과 佛敎界의 活動
 
  3•1독립운동에서 불교계의 전면에 서서 활동하고 이를 주도해 나간 이는 널리 알려져 있
는 바와 같이 한용운과 백용성이었다.  특히 한용운은 독립운동의 계획과 준비과정, 그리고
전개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33인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백용성과 함께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15)  이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항상  선두
에 서서 투쟁한 비타협적 민족운동의 전형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이와 같이 한국독립운동에
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
미를 지닌다.   그것은 일반인과는 구별되는 出世間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世俗과 단절하면
서 修道에만 정진하는 禪僧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3•1獨立運動의 전개과정에서 한용운,
백용성 등이 불교계를 지도하여 전국의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軌跡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고 필자도 다른 곳에서 자세히 다룬바 있으므로16)   여기서는 생략하기로한
다.  따라서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은 불교계의 동향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3•1독립운동 때 사찰의 승려들이 지도하여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은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일제 재판기록
에 전해지는 楊州 광천시장의 시위운동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매
우 인상적이고 유니크(unigue)한 항일민족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奉先寺의 승려 李淳載•金星淑(일명  星岩)•姜完洙 등은 3•1독립
운동의 만세의 함성과 함께 승려의 몸으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3월 29일에는 ‘조선독
립임시사무소’ 이름의 전단 2백매를 만들어 인근 마을에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
다.17)  위의 3인 가운데 김성숙은 4월 2일, 경기도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군중을  이끌고 앞
장서서 시위운동을 벌여 일경에게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 검거되었다.18)  그는 재판에 회
부되어 같은 해 5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개월의 판결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9
월에는 복심법원에서 8개월의 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석방되면서 그는 생애를 항일민족운동
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오직 우리나라의 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보낸 파란만장
의 드라마틱한 역정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끌고 있다.19)  그는 뒤에 중국에 망
명하면서 환속했지만 이 무렵 승려의 몸으로 승복을 입고 3•1獨立運動에 투신하였다는  것
이 중요하다.
  베스트셀러의 실록 다큐멘터리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님 웨일즈•김산  공저의 『아
리랑의 노래』20)에 나오는 한국인 혁명가인 주인공 金山(본명 張志樂)이 가장 많은 감화를
받았다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인  金忠昌의 본명은 金星淑(1898∼1969)으
로 알려져 있어서 그가  광천시장의 3•1독립운동 시위를  주도한 승려였다고 보여진다.21)  
그것은 위의 책에 나오는 김충창의 경력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김성숙의 그것과  대부분
일치하고 그의 회고록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1898년 3월 10일 平北 鐵山郡 西林面 江岩洞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업
에 종사하면서 한문을 배웠으며 19세 때인 1918년 만주 신흥학교로 가기 위하여 가출한 것
이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님 웨일즈는 그가 출가  입산한 사찰이 金剛山 楡岾寺라고
하였으나 그의 회고록에는 楊平 龍門寺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후자의 경우가 옳을 듯하
다.22)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봉선사로 옮겨 불경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손병
희•韓龍雲 등을 알게 되고 이를 인연으로 3•1獨立運動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봉선사를 거점으로 당시 3백명의 회원을 가지고 조선독립선언을 공표한 바 있는 ‘佛敎獨立
黨’에 입당함으로서 승복을  입고 양주에서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것은 앞서  본 바와 같
다.23)  그는 이를 계기로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하여  1922년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하
여 금강산에서 온 다른 5명의 청년 승려와 더불어 중국 북경행을 결행하게 된다.24)  5인의
승려중 일부는 東北地方으로 가서 주로 혁명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던 그는 이
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중국에서의 항일민족운동이 시작되며 혁명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되
었다.  그는 항일민족운동의 방법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과격한 투쟁노선을 걸어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가하면서 주로 민족주의 좌파 내지  혁신파의 노선에 따른 항일운동을 벌여  나갔
다.
 
 
Ⅲ.  3•1獨立運動 이후 佛敎界의 獨立運動
 
  한편 3•1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불교계의 움직임은 이때까지의 출세간적 은둔적 전통을 지
양하고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세속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어갔다.
  그리하여 3•1독립운동 직후 중국 上海에서 수립된 大韓民國 臨時政府에서는 1919년  4월
11일 孫貞道 등의 제의에 따라  각 지방 대표회 를  개최하고 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25) 
4월 13일 지방선거회에서 의원을 투표로서 선출하였는데,26)  여기서 3•1獨立運動 때 불교
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月精寺 住持 宋世浩가 李필珪, 그리고 뒤에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에 관여한 金聲根 등과 함께 강원도 대표로 선출된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김법린•白性郁•申尙
玩•金大容 등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불교계의 민족운동지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와 이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및 불교비밀결사조직 등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
다.27)  또한 같은 해 4월 국내에서 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었을 때 朴漢永•李鍾郁 등이 불
교계를 대표하여 13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28)  같은 해 5월경에는  김상호•이종욱 등이
28인 독립선언서 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29)  1919년 9월에는 大同團 사건
에 李鍾郁•송세호•鄭南用 등의 승려가 연루되어 있는데, 이 거사의 관계자 20명 가운데 3
명의 승려 중 정남용은 全協과 함께 체포되어 옥사하였다.30)     이러한 불교 승려들의 항
일민족운동은 3•1독립운동  직후만 하더라도 끊임없이 이어져 이후에 항일독립운동에 새로
운 활기를 불어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불교계의 항일민족운동
은 1919년 11월  15일 上海에서 梵魚寺 住持 吳卍光(惺月)을 비롯한 12인의 불교계 대표 이
름으로 발표된 ‘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31)이다.  이 선언서는 불교계가 淨財를 모아 독립
운동자금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할 목적으로 상해로 갔을 때 그곳에서 발표된 것으로
19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그 원본이 발견되었는데, 韓•漢•英 3개 국어로 인쇄되어  있다. 
표지에 홍재하 및 인찬환의 서명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리講和會
議에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펴고 있던 金奎植의 수행원이 인찬환이라는 점으로 보아32) 상해
주재 외교사절에게도 전해졌겠지만, 파리의 외교무대에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선언서의 내용은 첫머리에 “韓土의 수천 승려는 2천만 동포 및 세계에 대하여 절대로
韓土에서의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을 이에 선언한다”고
전제한 다음, “평등과 자비는 佛法의 宗旨이며 따라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佛法의 敵”이
라고 하면서, 3•1독립운동 때는 전민족의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자 우리 佛徒 중
에서 한용운•백용성 등  두 승려가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佛徒 중에서  身命과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자가 많은 것은 佛道의 자비에 어긋나는 일제의 침략과 폭정을 규
탄하면서 임진왜란 등 위기의 시대마다 분연히 궐기하여 나라와 겨레를 지킨 護國佛敎의 전
통을 이어받아 血戰을 결의한다는 비장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
리고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이로써 我等은 起하노니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
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大韓佛敎를 日本化와 滅溶에서
구하기 위해, 我 7천의 大韓 僧尼는 결속하고 起하였노니 죽음으로써 報國한다는 發願과 義
를 중히 여기고 生을 輕하는 義氣  뉘가 이를 막겠는가.  한 번 결속하여  분기하는 我等은
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과 혈전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
배에 항거하는 불교 승려들의 피맺힌  각오와 절규가 담겨져 있다.  이  선언서는 불교인의
적극적이고 과격한 직접투쟁의 독립의지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독립선언서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이로써 보아 오직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불교교단 전체가 투쟁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는 점
에서 이로부터 비롯되는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노선을 걷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3•1獨立運動을 분수령으로 하면서 이로부터 佛敎界의 항일독립운동은 보다 적극성을  띠
게 된다.  1920년 5월 일경에게 검거된 승려들의 활동상황을 일제관헌문서는 자세히 전해주
고 있어서 이를 통해 이때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일단을 살펴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가장 주목되는 것이 ‘義勇僧軍’의 조직과33)  ‘東亞佛敎會’의 설
립을34) 통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의용승군은 승려로서 조
직된 비밀결사로서 독립군의 조직으로 편제를 갖추고 전통적인 의승군의 정신을 계승한  것
이었다.  이 의용승군은 ‘臨時義勇僧軍憲制’를  정하여 임시정부의 작전계획에  부응하여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서로 연락을 갖도록 조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조직은 총령
부에 대한 승려연합회장을 총장으로 하는  승군의  최고본부를 두고, 그 아래 비서국, 참모
국, 군무국, 군수국, 사령국 등이  있어서 각각 군정을 관장케 하는  등 상당히 짜임새 있는
편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의승군제는 그의 실행 여부를 막론하고 불교계의 항
일민족운동이  전선상의 조직화를 통해 적극 투쟁의 노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 3•1독립운동을 겪고 난 불교계는 직접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불교계의  지
도자는 물론, 개별적인 항일투쟁을 벌여 나가기도 했으나 교단적 차원에서 불교단체를 결성
하고 이를 통해 국내 항일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0년 5월
일경에 탐지되어 관계자가 검거된 ‘동아불교회’ 사건도 그 중의 하나였다.35)  이 사건을
일경이 단순한 불교의 포교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항일단체로 보아 탄압을 가한 것은 이 단
체의 설립에 관여한 승려들의 대부분이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불교계의 지도자였기  때
문이다.  ‘동아불교회’의 설립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 鄭在華•金九河•曺奉承을 비
롯하여 40여명의 불교계 지도급 승려들이 발기인이 되어 계획한  것이다.  1920년 4월 28일
서울 시내 諫洞 능인 포교당 내에서 앞의 정재화 등 9명이 모여 발기인회를 열고  ‘眞理敎
化’, ‘人志向上發展’, ‘慈善普及’, ‘衆生感化 遷道’를 설립목적으로 한 취지 아래 출
범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단체는 결국 일경의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불교
인의 대동단결을 통해 한국 불교의 자주적인 정통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지배,
그리고 식민지 종교정책에 반발하여 불교단체의 결성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차원
에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밖에도 3•1독립운동 이후 전개된 불교계의 항일독립운동은 주로  한용운•이종욱•김
상호•백초월•백용성•백성욱•김법린•박한영•김대용•신상완•오성월 등의 불교계 지도
급 승려들이 주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1930년대에는 한용운을 당수로 하는 불교계의 항일비밀결사 卍黨을 결성하
여36)  항일민족운동을 벌여 나갔으며, 또한 3•1독립운동 33인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백용
성은 1921년 3월 출옥한 후 대각교운동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기도 하였다.37)  그
는 三藏譯會를 조직하여 譯經과 著述에 힘쓰는 한편 한국불교가 일제의 사찰령에 의하여 그
독자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제의 감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쓰고 포
교와 함께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새로운 근거지로서
중국 동북지방의 龍井에  농장을 마련하고 아울러 大覺敎의 敎堂을 세우기도 하였다.38)
  그리고 이 밖에도 이종욱은 임시정부의 의정원의원으로서 1921년 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
탄의거에 관계되는 항일민족운동비밀결사에 참여하고 있고,39)백초월은 3•1독립운동으로부
터 민족해방 직전인 1944년 6월까지 승려의 신분으로 생애를 일관되게 일제에의 저항의 자
세를 굽히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을 벌여 나간 유니크한 존재였다.40)  그는일제가 멸망을 앞
두고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1년에도 임시정부와의 연락과 독립자금조달혐의로 체포되어  3
년형을선고받고 옥중투쟁을 전개하다가 민족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청주감옥에서 옥사
하였다.41)   그는 승려라는 특수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와의 투쟁을 끈
질기게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42)  그의 파란 많은 생애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Ⅳ. 結 論
 
  위에서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를 중심으로 불교계가 일제의 식민지적 지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식민지하 일제당국의 가혹한 한국전통불교에 대한 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굴절과 훼절됨이 없이 전통불교의 수호에 온갖  희
생을 감수하면서도 일제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의 한국불교탄압에도 한국불
교계는 민족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가혹한 종교탄압정책
으로 말미암아 일부 승려 가운데서 훼절하던지 혹은 스스로 친일의 길을 택한 승려도 더러
있기는 하였지만 이 경우는 불교계의 대세는 아니었고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불교계의 항일독립운동을 지도한 승려들은 超世俗的이고  出世間적인
특수한 여건과 출가한 修道者라는 특수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호국불교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항일투쟁을 이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일제의 종교(불교)침략에 대
한 護法의 정신도 있었지만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항거하여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더욱이 암울했던 일제하의 식민지시대를 살면서
그것도 망명의 길을 택하지 않고 민족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불
교계 선각자들의 애국애족정신은 한국근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
하며 또한 오늘날 불교계에도 많은 각성과 더불어 교훈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때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불교계의 독립운동은  위에서
본 여러 측면에서 그 의의는 주목받기에는 넉넉하며, 앞으로 그  位相에 대한  학계의 관심
사와 함께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각주
 
1)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學界 최초의  논문은 金昌洙, 좪日帝下 佛敎의 抗
日獨立 運動좫(좬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좭 下, 1992년 11월)이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韓晳曦, 좪日本の朝鮮支配と宗敎政策좫(좬韓國近代史硏究叢書좭 6, 미래사, 1988.)  ; 鄭珖
鎬, 좪日帝의 宗敎政策과 植民地佛敎좫(좬韓國史學좭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좪日帝
침략시기 佛敎界 의  民族意識좫(좬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硏究論叢좭,  지식산업사,
1990.)
 
3) 그 대표적인 글로는 金法麟, 「3•1運動과 佛敎」(『新天地』 1의 2, 1946年 3月號)가 주
목된다.
 
4) 安啓賢, 「3•1運動과 佛敎界」(『3•1運動50周年紀念論叢』,  東亞日報社, 1969.) ;  李鉉
淙, 「3•1운동 당시의
불교계」(『月刊法輪』, 1978年 3月號.) ; 金昌洙, 「한국불교 3•1운동의 意義」(위와 같음):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역사와 민족』, 도서출판 삼문, 1996), pp.90∼99.
 
5) 『朝鮮總督府官報』, 1911年 6月 3日자에 보이는 ‘寺刹令’과 그 ‘施行規則’
 
6) 『朝鮮總督府官報』, 1911年 7月 8日.
 
7)   韓晳曦, 앞의 책, pp.69∼70.  ; 金昌洙, 「日帝下 佛敎界의 抗日民族運動」(『증보개정
한국민족운동사연구』, 교문사, 1998), p.71.
 
8)    위의 글, p.71.
 
9)   『東亞日報』, 1920年 6월 22일.
 
10)  『佛靑運動』, 1933年 9.10月 합병호, p.3.
 
11)  高橋 亨, 『李朝佛敎』, p.889.
 
12)  『東亞日報』, 1922年 3月 27日. ; 韓晳曦, 앞의 책, p.70.
 
13)  宋滿空, 『滿空語錄』, p.67.  ; 崔錦峯, 「三十一本山住持會見聞記」(『佛敎(新)』,  제2
집)
 
14)  『東亞日報』, 1926年 5月 19日.
 
15) 白龍城의 생애를 통한 독립운동과 그의 독특한 불교사상인 大覺敎思想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韓普光의 『龍城禪師硏究』(甘露堂,1981)가 최초로 생각되는데, 이 연구는 주로 백
용성의    대각사상 및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된 것으로 白龍城 연구의 길잡이의 구실
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다루어 지지 않은 그의 민족독립운
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기대 된다.
 
16) 金昌洙, 앞의 책.
 
17) 『獨立運動史資料集』 5(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p.302.
 
18) 위와 같음.
 
19) 水野直樹, 「民族獨立運動史の人物, 金星淑」(『朝鮮民族運動史硏究』  4, 1987),  pp.12
1∼123.
; 金星淑回顧錄(李庭植 對談,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 『新東亞』 1988年 8
월호.) ; 金在明, 「金星淑 先生의 墓碑銘」 「『政經文化』 1985年  10月號.) ; 金光載, 「在
中抗日民族協同戰線運動과 金星淑」(『한국민족운동사연구』 13, 1996.)
 
20) Nym Wales(Helen Foster Snow) and Kim San, Song of Arian-A Korea Communist
in the Chinese Revloution(San Francisco: Ramparts Press, 1973.) ; 松平いを子 譯, 「アリ
ランの歌 - ある朝鮮人革命家の生涯」(岩波書店, 1988.)
21) 앞의 金星淑回顧錄의 본인 진술과 水野直樹, 金在明은 앞의 글에서 金忠昌의 경력이 金
星淑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同一人으로 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同一人으로  보아
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이견을 주장하는 일부 견해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
고 있다.
 
22) 님 웨일즈•김산, 앞의 책,   p.153. ; 위의 金星淑回顧錄에는  금강산  유점사가 아니라
경기도양평 龍門寺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지금 당장 밝힐 길이 없어 앞으
로의 검 토를 요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용문사를
거쳐 봉선사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3) 위의 책, p.154.
 
24) 님 웨일즈는 위의 책 p.154에서 김성숙이 북경에 망명한 것을  1922년으로 적고 있으나,
金星淑回顧錄의 술회와 水野直樹는 1923년으로, 또 다른  기록에는 1924년으로 되어 있어서
확실한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5)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1932), p.6.
 
26) 위의 책, pp.7∼8.
 
27) 金正明, 앞의 책, p.397.
 
28) 『獨立運動史』 4(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pp.134∼135.
 
29) 『韓國獨立運動史』 3(國史編纂委員會,  1968), p.7. ;  明濟世, 「三一運動失敗後 政客의
動向」(『新天地』, 1946年 3月號)
 
30)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p.446.
 
31) ‘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는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입수하여 林英正  교수에 의하
여 같은  해 3월 17일자 『東亞日報』에 소개되어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다
시 『大韓佛敎』 (1989년 3월 1일자)에는 3•1절  특집기사로 다루었으며, 金正明, 『朝鮮獨
立運動』 1分冊 民族主 義運動篇(東京 : 原書房,  1967, pp.400∼401.)에는 國文의 것을 日譯
하여 싣고 있다.
 
32) 申載洪,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外交活動」(『史學硏究』 22, 1973.)
 
33) 金正明, 앞의 책, pp.401∼402.
 
34) 위의 책, pp.403∼404의 ‘東亞佛敎會 設立에 關한 件’
 
35) 위의 책.
 
36) 李龍祚, 「抗日鬪爭回顧錄」(『大韓佛敎』, 1964年 8月 30日.)
 
37) 韓普光, 앞의 책, p.89.
 
38) 위의 책, p.90.
 
39) 金昌洙, 「民族運動으로서의 義烈團의 活動」(『3•1運動50周年紀念論叢』,  東亞日報社,
1969.)
 
40) 金昌洙, 앞의 책.
 
41) 金正明, 앞의 책 및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앞의 책과  『白初月行蹟錄』 및 『白初月獄
死殉國錄』
 
42) 특히 白初月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하여는 잎으로 필자의 他稿에서 독립된 논문으로 자세
히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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