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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5 00:08

전 모례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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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구미 신라불교초전지마을( http://silla.invil.org/)에 있는 "전 모례가 정" 입니다.
다만 주변 벽화의 노후됨이 마음에 걸렸던(동국대 생들이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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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모례가 정
#. 모례 (毛禮)(네이버 백과사전).
눌지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를 숨겨주었다. 이후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가 되었다.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구미시) 출생.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신라에 들어갔으나 탄압이 심하였으므로 집 안에 굴을 파고 그를 숨겨주었다. 그후 소지왕 때 승려 아도(阿道:我道)와 시자(侍者) 3인을 집에 머물게 하고 불교 신자가 되었다. 누이 사씨(史氏)도 아도의 전교로 승려가 되어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 선산 땅의 아도와 모례(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
선산의 옛 이름은 일선(一善)이다. 이 일선군은 우리 역사에 일찌감치 그 존재를 드러냈으니, 바로 아도 화상과의 인연 때문이다.
아도 화상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나타나는데, 이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아버지는 위나라의 아굴마(我 摩)이고, 어머니는 고구려의 고도령(高道寧)이다. 5세에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에 갔다가, 19세에 돌아왔다. 모친의 명에 따라 미추왕 2(서기 263)년에 서라벌에 불교를 전파하러 갔는데,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다. 심지어는 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3년 간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공주의 병을 고쳐준 보답으로 왕의 허락을 얻어 천경림에 흥륜사를 짓고 머물며 불교의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미추왕이 죽자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다시 모례의 집에 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죽었다.

·묵호자(墨胡子)는 눌지왕(417∼457 재위) 때에 고구려를 거쳐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와 움집을 짓고 지냈다. 양나라에서 신라 왕실에 보내준 향의 용도를 알려준 뒤 왕실과 가까워졌다. 왕녀의 병을 고쳐주고 많은 선물을 받아와 모례에게 주고는 종적을 감추었다.

·소지왕(479∼499 재위) 때 아도 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와 수년간 머물다 죽었는데, 그 용모가 묵호자와 똑 같았다.

·양나라 대통 원년(527)에 아도 스님이 일선군에 왔다. 모례는 그 보다 앞서 신라에 왔던 고구려의 정방이나 멸구자 같은 승려들이 왕과 신하들의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일을 알려주고는, 자기 집에 은거토록 하였다. 이 때 마침 오나라 사신이 신라에 향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아도가 그 용도를 알려주어 왕실에 초청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오나라 사신이 불교와 아도 화상에게 깊은 예모와 존경을 표시하자, 이를 본 왕은 불교를 널리 전파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부분을 지니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보아 우선 아도는 한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수 차례 내려왔던 고구려 계통의 승려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신라는 지방의 호족세력들의 힘이 강성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불교를 통해 불법과 국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힘과 왕권을 동일시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뒷날 불교를 공인했던 법흥왕이 왕실의 사람들 이름을 석가모니 집안 사람들의 이름으로 대치했던 사실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아무튼 왕실과는 정치적으로 반대 위치에 선 지방의 호족들은 당연히 불교의 수입을 완강하게 거부했으며, 나아가 불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승려들까지도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온 많은 승려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민중 세력은 모례로 대표된다.
그런데 지금도 도리사 반대 자락에는 모례가 길어먹던 우물이라고 구전되는 ‘모례샘’이 전해진다고 한다. 도개면 도개동에 자리잡은 이 샘은 깊이가 3m 정도인데, 지금까지도 맑은 물이 솟아 나온다고 한다. 물맛 또한 무척 좋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복숭아꽃[桃]이 피는 도개(桃開)면의 새로운 도(道)가 열리는 도개(道開)동에 살았던 모례와 도리사에 관한 전설 두 개를 들어보기로 한다. 둘 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인데, 하나는 풍수설까지 끼어 든 이야기이다.

아도 화상이 모례의 집에 왔을 때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아도는 이 때부터 모례의 집에서 5년 간 머슴을 살았는데, 소 천 마리와 양 천 마리를 길러내서 모례를 크게 놀라게 하였다.
5년 후, 아도는 새경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모례의 집을 나왔다. 모례는 미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서 아도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모례는 다만, 얼마 후 당신 집으로 칡넝쿨이 뻗어올 것이니 그 때 그 칡넝쿨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모호한 대답을 하고 떠나버렸다.
한겨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내려온 칡넝쿨 한 줄기가 모례의 집 문턱을 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모례가 아도의 말을 상기하고는 칡넝쿨을 따라가 보니, 냉산 자락 한 켠에 과연 아도가 서 있었다.
반가워하는 모례에게 아도는 두 말 들이 정도의 작은 망태기 하나를 내밀었다. 절을 지으려고 하니 그간의 새경 대신에 시주 삼아 망태기에 곡식을 가득 채우라는 주문이었다. 평소 인색하기 그지없던 모례는 얼른 승낙을 하였다. 그 작은 망태기에 곡식이 들어가면 얼마나 들어갈까 하면서, 5년 간의 새경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기쁜 마음에 선뜻 승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웬 걸, 그 망태기는 곡식을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모례는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천 섬의 곡식으로 겨우 망태기 반쯤을 채울 수가 있었다. 아도는 모례의 이 시주로 한 겨울 추위에도 복숭아와 오얏꽃이 만발했다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도리사라고 하였다.

도리사가 창건되고 나서이다. 절은 나날이 번창해서 수행하는 승려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자 절에서는 이따금 마을로 내려와 시주를 얻어가곤 하였다.
그런데 아도의 망태기에 혼이 난 바 있는 모례는 한번도 시주를 하지 않았다. 다만 법력을 빌어 어떡하면 더 부자가 될까 궁리만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모례는 탁발을 나온 스님을 잡고 제발 더욱 부자가 될 방도를 알려달라고 했다.
모례의 간청을 듣고 난 스님은, 모례의 집이 배 모양이니 돛을 달으면 더욱 부자가 되리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모례는 아주 튼튼한 돛을 세운답시고, 곧장 비석돌 세 개를 가져다가 돛으로 세웠다. 그 후 모례의 집은 점차 기울어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비석들 무게에 배가 가라앉은 때문이었다.

도개면의 도개동에는 지금도 ‘모례샘’ 외에, 아도가 천 마리의 소와 양을 먹였다는 ‘소천골’과 ‘양천골’이 마을의 맞은편 냉산의 북쪽 자락에 남아 건너다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입석은 그 때 세운 세 개의 비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도개면과 도개동이란 이름도 필시 위 전설에서 기인하였으리라.
일설에는, 절이란 말도 모례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례(毛禮)를 향찰식으로 읽으면 ‘털례’인데, ‘털례’가 ‘덜례’와 ‘절례’의 과정을 거쳤고, 여기에서 ‘례’가 떨어져 나가 절이란 단어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일본어에서 절을 뜻하는 단어인 ‘테라(てら)’ 또한 모례의 이름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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