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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 불교60 기획<통계>

사찰 신도 80년대 들어 비약적 증가
70~80년대 고도성장으로 배고픔 벗자 종교관심
90년대 들어 엘리트 출가 늘어 스님 위상 높아져

광복이후 지금까지 사찰.신도.교직자 숫자는 어느 정도 증감했을까. 증가했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남조선과도정부가 1946년 편찬한 〈조선통계연감(1943년 자료참조)〉, 문교부가 1962년 펴낸 〈종교요람〉, 문교부가 1966년 발간한 〈종교통계요람〉,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및 주택센서스〉(1985.1995), 문화관광부가 최근 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 등을 참조해 지난 60년동안 불교계에 생긴 변화를 개괄적으로 정리했다.

<1945-2005 불교계 주요 지표 변화>

광복 2년 전인 1943년 1466곳이던 사찰은 1962년 2306곳, 1966년 2717곳으로 20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정치변동이 심하던 시절임에도 사찰 수가 증가한 것에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욕구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종교적 욕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당시 일반인들의 생각은 ‘기복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한국전쟁이 이 기간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불교 세(勢) 성장은 높지 않았고, 그나마 사찰 수가 증가한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전쟁 당시 많은 사찰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 교회의 숫자 증가가 확연히 두드러진다. 1943년 4797곳에 불과하던 교회가 1962년에는 6785곳, 1966년에는 7467곳으로 증가했다. 기독교계의 활발한 사회참여, 친(親)기독교적인 이승만 정권의 비호 등이 요인이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세계적 종교권력으로 등장한 미국교회가 한국진출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미국은 2차대전 후 주변부 지역에서 종종 반(反)기독교적인 운동의 색채를 띠었던 민족주의의 고양에 대응하고자 기독교 세력의 성장을 암암리에 지원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정부 수립 이후 다년간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 내 지위는 단순히 종교영역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선교사 집단은 국내에서 사실상 치외법권을 누렸다”(한신대 강인철 교수)는 점에서 50년대 교회의 증가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다. 물론 전쟁 직후의 불안한 사회 환경이 사람들에게 종교를 강요했고, 정권의 비호를 받는 기독교 쪽으로 세인들의 관심이 돌아선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찌됐던 1950년대 1960년대 다져진 토대를 발판삼아 한국 기독교는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장 세(勢)를 보인다.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 따르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당시 기독교 세력은 이데올로기 부분(문교부 등)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통해 교과서 등에 서구중심의 가치관.교육관을 심었고, 이런 교육관이 담긴 교과서를 보고 배운 아이들은 자연스레 서구적.기독교 가치관을 추종하게 됐다. 이데올로기 부분을 장악하고 선교한 기독교 세력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독교 세력은 이데올로기 부분에서의 작업이 끝나자 점차 공권력(법무무 군대) 집행과 관련 있는 곳에 신자를 집행자로 앉히기 시작했다. 구축한 토대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입김이 특히 강했던 1950∼1970년대, 불교가 서구종교 중심의 흐름을 극복하기는 사실상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찰 수는 증가했다. 1970년대 80년대 들어서면서 사찰 수는 본격적으로 증가한다. 1966년 2717곳이던 사찰은 1985년 8892곳으로 확장된다. 15년 만에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경제발전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보릿 고개’를 벗어나고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풍요로워지자, 급격한 사회발전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을 돌렸고, 이들의 후원과 국가의 지원으로 사찰건축 등 불사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1995년 1만1561곳으로 사찰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에서 건축불사(佛事)가 1980년대 1990년대 특히 많이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사찰 창건은 1990년대 2000년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계속됐다. 2005년 2만2072곳으로 1995년에 비해 2배나 증가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990년대~2000년대 사찰 증가는 정부지원과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이후 거액을 사찰에 기부하는 신도가 줄어들고 그 자리에 정부지원금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불사문화가 바뀐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찰의 증가는 신도 증가에 영향을 미쳤고, 역으로 신도 증가는 사찰 숫자 증가에 도움을 줬다. 1943년 1466곳이던 사찰이 2005년 2만2072곳으로 늘어나듯, 1943년 58만8210명에 불과하던 신도 수는 2005년 1190만6631명으로 확장됐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신도가 증가했다. 연도별로 보면 1943년 58만8210명, 1962년 68만7345명, 1966년 93만8093명, 1985년 805만9624명, 1995년 1032만1012명, 2005년 1190만6631명이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특히 급격하게 신도가 증가했다. “압축성장에 따른 심리적 이완이 종교에 마음을 돌리게 했고, 더불어 신도가 증가한 것”(서재영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분석된다. 무엇보다 80년대 이후 불자들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데, 이는 교단의 안정과 적극적인 포교 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간헐적인 종단분쟁에 신도들은 불교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 것도 사실이다.

상기할 것은 개신교 신자의 증가세는 불교를 훨씬 뛰어 넘는다는 점.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한 기독교 신자 수는 불교도 수를 상회하는데, 이는 불교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교직자 수의 변화도 불교 세(勢) 흥망과 궤를 같이했다. 신도가 늘어난 시기에 교직자 수도 증가했고, 사찰 수가 성장한 기간에 교직자 수 또한 비례해 늘어났다. 사찰.신도.교직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1943년 1217(비구 비구니 포함)명이던 교직자는 1962년 9185명, 1966년 1만1462명, 1985년 2만3976명, 1995년 2만6037명, 2005년 4만1362명으로 집계됐다. 60년대부터 서서히 증가하다 1980년대 1990년대 들어 급격하게 늘어났다. 1950년대 1960년대 일반인들의 출가에 대한 인식은 극히 저조했다. ‘사회생활에 적응 못해 사찰로 가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 대다수였다.

그러다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들어 고학력 출가자가 늘어나고, 교직자들의 사회적 위상이 제고(提高)되면서 출가에 대한 이미지는 변하기 시작했다(김응철 중앙승가대 교수).” 다시 말해 ‘사회를 등지는 것이 아닌, 인생의 깊은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출가한다’는 쪽으로 이미지가 서서히 돌아간 것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교직자 수가 4만1362명으로 증가한 것에서 출가에 대한 사회인들의 인식이 새롭게 정착됐음 알 수 있다. 동시에 불교에 대한 사회인의 인식 수준도 높아졌다. 물론 불교나 교직자에 대한 이미지.인식과 교직자 수 증가, 사찰 수 증가는 상호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불교는 지난 60년 동안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사찰 수, 신도 수, 교직자 수 모두가 증가한 데서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거대한 물적 기반을 토대로 다가올 60년을 준비해야 한다. 향후 60년 준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재양성과 적확한 포교전략 수립이다. 포교도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양성된 인재(人才)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 큰 힘이 된다. 동시에 불교에 대한 정체성 정립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자기 종교에 대한 확신은 모든 발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조병활, 배재수 기자 [불교신문 2157호/ 2005년 8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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