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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가요, 그 흐름과 과제 - 오창규 (월간 예향, 1988. 5)


'노래운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 5년 전의 일이다. 이 사실은 노래라는 문화적 기제가 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해 나가는데 있어 현실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공식적인 합의 사항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실제로,「흔들리지 않게」「훌라송」「농민가」「해방가」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70년대 운동가요들이 80년대를 넘어서면서 폭발적인 양적 팽창을 이룬 것도 대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운동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의 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래운동은 그것이 '노래'라는 영역에 치중해 있든 '운동'이라는 성향에 비중을 두던 간에 일반적으로는 하나의 지배문화 (Dominant Culture)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를 설정하고 대항문화 쪽에 힘을 기울이는 하나의 문화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노래운동의 출발점은 대중의 일상 속에 깊이 밀착돼 있는 기존의 노래문화가 민중들의 진실된 삶의 과정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채 허구적인 현실의 껍데기만을 폭력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결국, 노래운동은 노래의 매체적 보편성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악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부터 이 땅의 민중들이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건강한 삶의 일부로서의 노래를 소유하게 하고자 하는 보다 실천적인 노력으로 방향 지워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대중문화 또는 지배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노래운동이 지닌 힘을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의 강한 침투력과 대량전달매체, 그 결과로서의 정서적 지배와 상업적 매카니즘의 기반을 생각하면 노래운동은 분명히 적극적인 대항문화로서의 의미를 얻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회운동단계에서든 노래운동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 그대로의 유지가 아니라 지배문화의 획일적이고도 폭압적인 영향권에 대중들을 방치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우리 나라 80년대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난 다음 80년 이후 현저하게 달라진 노래운동의 몇 가지 양상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대항문화로 노래운동 싹터

71년 위수령이 선포되어 많은 학생이 학교를 떠나기까지 데모란 대학생의 교양과목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74년에는 긴급조치 4호를 적용하여 민청학련사건 관계자를 최고 사형까지 선고하는 등 엄청난 회오리 바람이 일었고 (지금 그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잘 살고 있으며 현직 국회의원인 사람도 있다) 종래에 학내 시위가 있을 때에도 교문 바깥에만 앉아 있던 경찰이 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즉각 학내로 투입되었다.
  이처럼 강도 높은 탄압이 계속되자 학생운동은 양적으로 축소되고 대규모 시위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운동은 질적으로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학생들은 이른바 이념 서클을 만들어 사회 과외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들을 만들어 나갔다.
  이때를 전후해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 불리어졌던 노래들은 「흔들리지 않게」「홀라송」「농민가」외에도 주로 김민기-양희은을 중심으로 한 포크송류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대학내 노래모임 (구체적으로는 서울대의 「메아리」, 이대의 「한소리」)이 발행한 노래책을 중심으로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포함된 노래들이 주로 김민기의 초기작품 「친구」「아침이슬」「꽃피우는 아이」「가뭄」등과 한대수의 「바람과 나」「하룻밤」그리고 양병집의 「서울 하늘」「역」등등이었다.

1.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위로 나뭇잎사이 불어가 는 아, 자유의 바람 / 저 언덕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무실 무감한님 /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2. 물결 건너편에 /황혼에 젖은 산끝보다도 아름다운아, 나의 님 바람 / 뭇 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 위로 구름따라 / 무목여행하는 그대. 인생은 나. 인생은 나.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들 대부분의 노래는 미국포크송운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우디 거스리 (Woody Guthrie)나 밥 딜련 (Bob Dylon), 피트 시거 (Pete Seger)나 존 바에즈 (Joan Baez)등의 노래를 번안하거나 흉내낸 곡들로 이루어 졌다.
  험한 세상에 발붙일 곳 없는 자유주의적 방랑벽이나 허무, 허무를 탈적하기 위해 그려놓은 막연한 노스탤지아 또는 깊이없는 현실고발이나 만평적 사회 풍자 등에 한정된 흐름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현실고발·사회풍자‥‥70년대

  김민기의 「친구」「아하 누가 그렇게」r길」등이 그러한 한계를 반영하고 있었고, 「아침이슬」의 경우에는 그 탁월한 음악적 수준과 가사· 멜로디 리듬에 대한 거의 완벽한 형식상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내용상으로는 다만 막연한 시련과 막연한 인생 여정의 암시로서만 작용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민기는 대중가요 가수가 아닌 운동가요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의 험난한 미래와 고뇌에 찬 결단을 하면서「아침이슬」을 가슴 벅차도록 불렀고, 데모를 주동해 끌려간 선배나 동료를 생각하면서 「친구」를 불렀다.
  말하자면, 작품 속에서는 매우 추상적으로 나타나 있던 의미들이 수용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들은 거의 모든 김민기의 노래를 사회적으로 운동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기독교운동권의 노래들이 이 시기 운동가요의 중요한 또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70년대 전반적으로 한국기독학생회 (KSCF)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운동권은 학생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바 이들이 즐겨 불렀던 흑인영가, 복음성가, 반전운동가 등이 대학 내에 유포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 자유」「가라, 모세」「우리 승리하리라」「미칠 것같은 이 세 」등이다.
  이 밖에 「타박네」 「사노라면」 「진주 난봉가」등의 구전가요나 「진달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 소수의 창작가요들이 불리어졌다. 물론 이와 함께 「해방가」「정의가」「선구자」따위의 노래를 비롯 「우리의 소원」등의 동요, 심지어는 「아다다」와 같은 대중가요도 운동권 학생들은 즐겨 불렀다.
  이렇게 해서 70년대 후반까지 운동권 노래는 대충 1 백여 곡에 달하게 된다. 음악적으로나 가사의 면에 있어서 이들 노래는 대중가요에 비해 월등히 다양하고 폭이 깊어 80년대 조직적인 노래운동을 가능케 하는 좋은 토양을 만들었다.

80년 봄 1백여곡 넓고 깊게 퍼져

  80년 봄의 경험이란 한국 역사 속에서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몇 십 년을 갈 것 같았던 유신체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난 다음 5월 광주에서의 충격은 노래운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선명한 전환기를 만들었다.  70년대까지 운동권에서만 소리 죽여 부르던 1백여곡의 노래들은 이제 대규모 집회에서 일반 학생과 부를 수 있게 했다. 70년대까지 축적돼 온 노래문화가 일시에 확산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건 확실히 노래운동은 정치적 격동기를 전후해서 양적 질적으로 급격히 발전하게 되는 것이 일반이다.  
  소위 매카시즘으로 불리우던 극우 반공주의 아래 베트남전쟁을 강행하던 정부에 반발하여 60년대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학생운동,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에 연결되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는 미국의 포크송운동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정치적 격동기에 일어났던 '새로운 노래'(Nueva cancion)운동이 70년대 남미 전역에 걸쳐 제 3세계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던 사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60년대 칠레의 노동자투쟁과 관련하여 부흥했던 노래운동이나 59년 쿠바혁명 직후 민중시인 푸에블란(Caries Pueblo)가 주도한 민요운동, 그리고 페론 내각 하에서 유판키 (k Yupanqui)가 이끈 노래운동 등이 이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코라손 아키노 정부가 들어서는 필리핀 2월혁명 전후의 시기에 가톨릭 세력이 주도하던 노래운동의 열기를 상기해 볼 때 사회 정치적 변혁기에 있어 노래운동이 지니는 중요한 전위적 역할을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아무튼 80년의 충격적 경험은 이전의 노래집단에게 노래운동 전반에 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게 했다. 80년 이전까지만해도 "전투적 운동가요를 진정한 노래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문화주의 적인 논리에 의해 지배당해 왔던 노래집단들이 80년 봄의 정치적 충격으로 말미암아 과감하고도 자연스러운 자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이들이 만들어낸 노래 책의 목록 속에는 전투적 운동가요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81년 가을, 광주의 일부 문화패들이 고 윤상원 (80년 광주사건 당시 시민군 대변인)의 넋풀이를 위한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면서 주제곡으로 끼워 넣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어 80년 이후의 대표적인 운동가요로 자리를 굳히게 된 일을 비롯하여 많은 전투적 운동가요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광주출정가」「오월가」「선봉에 서서」「 전진하는 오월」등은 모두 단조의 행진곡 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투적 운동가요의 좋은 예이다.
   5·17이후 민주화를 부르짖는 세력에 대한 탄압에서 비롯된 패배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결단과 용기를 북돋기 위해 익명의 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들은 상기한 전투적 운동가요 외에도 많은 경향을 띠고 나타났다. 비장감을 더욱 심화시키는 서정 가요류와 추모가 등이 있는가 하면, 민족운동의 5월을 잇는다는 뜻에서 일제 시대의 독립군가들이 다시 불리어지기도 하고, 전통민요·구전가요의 발굴과 함께 새로운 창작민요가 만들어 지기도 하고,  또 대중가요의 가사를 약간 역전시켜 재미를 누리는 '개사곡'이나, 대중가요의 익숙한 악곡만을 차용한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노동현장에의 관심도가 집중함에 따라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노래들도 많이 만들어 졌다.
  비장한 사정 가요는 주로 유명 시인들의 시에 곡조를 붙인 것들로, 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 김남주의 「죽창의 노래」, 양성우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신경림의 「민주」등이 있고, 「이 산하에」「친구II」「찢어진 깃폭」「사월 그 가슴으로」「의연한 산하」등의 노래들도 이런 류에 속한다.

1.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속/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2.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 되살아나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떨리는 노여움이 / 신새벽에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추모가류로는, 70년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일대기를 다룬 노래극 「불꽃」속에 나오는 「그 날이 오면」이나 「전태일 추모가」가 대표적이다. 「동트는 그날까지」는 분신 택시기사 박종만의 추도식을 위해 만들어졌고, 86년 4월 서울에서 분신한 이재호, 김세진의 추모가로 「벗이여 해방이 온다」가 있는가 하면 물고문의 희생자 박종철을 위해서는 「꽃상여 타고」가 만들어졌다. 4·19묘지에서 묵념을 올릴 때는 「진달래」가 불리 운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 정의의 물결 넘치는 곳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85년 봄, 광주민중문화연구회가 창립되고, 첫 사업으로 제작한 광주항쟁 노래극 테이프 「광주여, 오월이여!」는 이것이 전국각지로 보급되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타지역민들의 편향적 시각을 부분적으로 일소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수행함은 물론, 그 안에 수록된「죽창가」(일명「노래」)의 대중적 확산의 성공은 카세트테이프 매체를 통한 노래운동의 가능성을 낙관하게 하는 또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85년 봄 「광주」노래극 테이프 첫 보급

  이를 바탕으로 86년에 동 단체가 만든 「의연한 산하」 87년의 「십자가」 「어머니의 손」등의 보급, 그리고 노래패 「친구」(대표 정세현)의 결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광주지역 노래운동에 있어 적잖은 소득이라 할 수 있다.
  광주민문연 산하의 노래패 「친구」는 87년 10월 첫번째 민중의 노래 발표회를 광주 YWCA대강당에서  공개리에 가져 대중들의 호반응을 얻어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88년 4월초에도 같은 장소에서 두번째 발표회「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개최해 피리·아쟁·해금 등 국악기와 올갠·피아노·기타등 양악기와의 합주를 통해 다양한 류의 창작운동가요를 무대예술로 선보임으로써 '운동권 노래문화의 대중성 확보'라는 현실적 과제를 풀어 나가는데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80년 이후 꽤 생긴 각 대학의 노래집단(고대의「노래얼」, 성대의 「소리사랑」, 연대의 「울림터」. 부산대의「소리터」,숙대의 「한가람」등)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85년 전남대학교에도 「첫소리」 (대표 이철연, 회원 28명)가 창립돼 87년 6월 제 1차 노래극 공연 「밥·자유·평등·평화」에 이어 88년 3월 2차로 농촌현장 대상의 노래극 「엄마, 우린 왜」를 공연해내는 의욕을 보였고, 조선대학교내에도 의대 치대를 중심으로 소수 집단이 꾸준히 노래패 결성을 위해 움직여 오고 있다 한다. 순천대에서는 지난 4월「한소리」(대표 김결수, 회원 20명)가 창립돼 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고 목포대, 광주 호남대 등지에서도 머잖아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전남대안에 「민요연구회」 (대표 신두항,회원 30명)가 이제 막 결성돼 앞으로 전래 민요 채보 및 창작민요를 통한 운동성 획득을 위해 활발히 움직여 나갈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제 80던대 후반을 치닫는 성숙된 노래운동의 현단계에서는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라는 원론적 논의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

'예술, 수단-목적론'의 70년대적 논의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할 때는 이미 지난지 오래다. 오직 '노래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노래, 민중의 생활기반과 유리되지 않은 노래, 그들의 패배의식을 극복시켜 주고 삶의 극복의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건강한 대안문화(Alternative Culture)로서의 노래를 어떻게 일상공간에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 끊이지 않고 오가야 한다.
  80년대 이후 문화 운동의 구조 속에서 막중한 매체적 보편성을 갖고 있는 노래운동은 지금 이 순간도 대학  캠퍼스 안에서는 물론 어느 골목에서, 어느 사업장 구석에서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숨은 노력이 쉬임 없이 발전을 거듭하는 한 노래운동을 통한 건강한 민중적 정서의 회복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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