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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 운동 - 이 장 직

태양 아래에서
           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벨로소와 힐의 「빵과 서커스」 중에서


1.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상황

제3세계의 음악이 음악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아들러(Guido Adler), 크리잔더(Karl F. Chrysander), 리만(Hugo Riemann)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음악학 전통이 주로 음악이론, 서양음악사, 음악미학으로 대표되고 예술음악 또는 ‘악보로 남아 있는 음악’을 다루어 왔다면, 종족 음악학이라는 이름 아래 포함될 수 있는 작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중심의 음악연구에서 탈피하고 ‘악보로 남아 있는 음악’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음악’으로 그 연구대상을 넓힌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음악이란, ‘인간’ 에 의해 만들어지고 향유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음악은 음악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의 생산과 수용의 주체인 인간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Palisca 1982, 15~18면)
따라서 음악학의 연구대상에는 서양음악뿐만 아니라 비서구음악도 예술음악뿐만 아니라 민속음악, 대중음악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상황에 접근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그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에 대한 검토가 앞서야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음악학 연구대상의 확대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자체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다. 서구 음악에서는 민속■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끊임없는 상호접촉을 통해 문화적 동질성이 보존되어 왔다고 본다면-물론 현대에 와서는 심각한 양극화로 치닫고 있지만-라틴 아메리카에서 예술음악이 유럽의 미적 기준에서 독립한 것은 20세기에 와서의 일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상류층 출신이었으며 파리, 런던, 마드리드 등지에서 교육을 받아와서 민중적 삶의 문화적 리얼리티와는 상관없이 자국의 지식층을 대상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문화를 대변하는 진정한 예술가는 오히려 민중 자신들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이 높은 예술음악가들까지도 민속음악이나 대중음악에서 그 민족음악의  소재를 많이 찾았다. 이들도 대중예술 속에 포함된 가능성을 실현했을 뿐이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음악은 예술음악에 앞서서 고려되어야 하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노래라는 장르가 전에 없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노래(Cancion)는 처음에 스페인 상선을 통해 신대륙에 건너왔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기타를 가지고 있던 안달루시아인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배가 출발했을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요소들이 함께 용해되어 남미 고유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를 형성한 중요한 세요인이 있다면 ① 스페인■포르투칼에서 온 유럽의 민족음악 ② 스페인 침략에 반항했던 인디오의 음악 ③ 아프리카로부터 들어온 흑인들의 음악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미국 유럽의 대중음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다.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고유의 아프리카 악기-특히 타악기-를 금지하고 서로 간의 결혼을 금기로 삼았던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음악, 인디오 음악, 흑인음악이 하나로 용해되어 새로운 트기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인디오들이 그들의 순수한 혈통과 고유한 음악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안데스 고원의 몇 지역밖에 없다. 이들은 거의가 ‘생존’을 위하여 도회지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회지에서 노동자계층을 형성하고 슬럼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라틴 아메리카 음악이 만들어지게 된다.

2.‘새로운 노래’

‘새로운 노래’(Nueva Cancion)라는 말은 1960년대 말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생겼으며 원래는 칠레에서 열린 제1회 ‘누에바 칸씨온’(Nueva Cancion)이라는 행사의 이름으로 붙여졌던 것이 이제는 점점 그 범위가 넓어져 남미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1970년대의 민족운동을 가리키게 된다.
‘새로운 노래’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그들의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갖는다. 아르헨티나의 ‘누에보 칸씨오네로 아르헨티노’(Nuevo Cancionero Argentino),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 쿠바나’(Nueva Trova Cubana), 브라질의 ‘노바 뮤지카 포퓰라 브라질레이라’(Nova Musica Popular Brasileira, NMPB)가 그것이다. 그러나 보통 ‘누에바 칸씨온’이라는 말로 이 경향들의 통합이 가능하다. 칠레 외에도 멕시코,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푸에르토 리코, 베네주엘라,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에서도 이표현을 사용하며 1960년대에는 이것 대신 ‘저항의 노래’ ‘참여의 노래’라는 말도 있었다. 점차 이 표현이 없어진 것은 현상에 대해 지나치게 단면적 모습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노래운동에서의 특정 경향을 서술하는 데에는 계속 사용된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이 ‘새로운 노래’운동은 대중음악 내에서의 한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이 대중음악 일반의 전개과정의 일부를 형성하였고 때로는 라디오, TV, 극장과 같은 일반적 보급경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종전의 대중음악의 흐름과는 완전히 근본적으로 다른 음악형태를 띠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보급경로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경우에 특히 그렇다. 평범한 대중음악이 시장법칙에 의한 교환가치 또는 예술적 상품의 위치로 전략해 버림에 따라, 노래가 점점 민중과는 무관한 소비재 상품이 되었고 미국 유럽에서 들어온 외국의 유행음악이 방송매체를 등에 업고 민중음악을 질식시켜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음악, 새로운 노래를 만들려는 운동을 점점 가속화시켰으며, 흔해 빠진 대중음악과 ‘새로운 노래’와의 경계선을 더욱 뚜렷이 해 주었다.(Pirard 1982, 601~602면)이러한 상황이 주는 위협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 이 '새로운 노래'에 담겨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민속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가 흐린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의 탱고(Tango), 쿠바의 쏜(Son), 멕시코의 라체라(Rachera), 브라질의 삼바(Samba)를 기초로 한 대중음악이 크게 유행하였다. ‘새로운 노래’운동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미 전역에 대륙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1950년대 이후의 ‘새로운 노래’운동은 1900~1930년대에 있었던 대중음악 운동과 비교할 때, 모두가 자기 고유의 것을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부터 지키려 하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초기의 대중음악이 지방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비교적 과거에 충실했던 노동자, 농민계층을 지향했다면‘새로운 노래’운동은 도회지의 중산층과 젊은 대학생집단-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당시만 해도 유럽■미국음악에 가장 많이 젖어 있던-에서 강력한 지지세력을 얻어 사회저항운동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다르다.
‘새로운 노래’운동은 그것이 민속음악이든 대중음악이든 전통과의 연결선상에 자리잡으려 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운동이 민족의 연구■수집작업에서 출발하여 민속회복운동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동질성에 연관이 있는 한 국가■민족의 장벽을 과감히  제거하면서 이웃나라들의 음악운동의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발성을 해치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일종의 경향 또는 지향점이라는 사실,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영향도 자체 내에서의 기존의 지지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능동적인 수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지적해 두고 넘어가야할 문제이다.

3.아르헨티나의 노래운동

1950년대에 들어와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슬럼가에서 나온 대중음악으로부터 ‘새로운 노래’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상황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격동기였다.

1955년-부에노스 아리레스 마요광장(Plaza de Mayo)에서의 대학살. 페론 정부 실각.
1959년-바티스타정부의 전복. 쿠바혁명.
1964년-굴라(Joao Goulart)정부의 전복(브라질). 강경노선의 지속(15년간).  
         칠레 기독교민주당 집권.
1967년-체 게바라, 볼리비아 산중에서 전사.  
1968년-베네주엘라, 중앙아메리카에서 게릴라전 고조. 멕시코 트라테로코(Tlateloco)대           학살.
1970년-칠레 대통령에서 선거 통일 인민당(Unidad Popular)집권. 살바도르, 아옌데 내           각 3년 지속.
1971년-볼리비아에서 반저(Banzer)정권 시작.
1973년-우루과이 군정 시작, 칠레의 통일 인민당 실각(쿠데타). 제3차 페론정권.
1974년-페론 사망.
                   (Pirard, 앞의 글, 604면;後藤政子 1983, 294~295면)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아르헨티나는 당시 집권한 페론정부에 의해 전에 누리지 못했던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되어 남미 전역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낙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인구의 도시 집중화현상이 나타났다. 지방에 살던 인디오 원주민들도 이 틈에 끼여 그들의 전통적 악기와 노래를 가지고 들어와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점차 무르익아가던 ‘새로운 노래’운동은 페론정부가 실시한 민속■대중문화 보호정책에 힘을 입어 급속도로 파급되었다.
페론이, 라디오 방송에서 의무적으로 2분의 1은  민속■대중음악을 방송해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1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의 경향은 주로 전통적인 것이어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의 대표적 가수로는 산 후안(San Juan)출신의 토르모(Antonio Tormo)가 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나타난 많은 가수와 그룹들은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오랫동안 이 운동을 주도했던  로스찬찰레로스(Los Chanchaleros), 로스 프론테리소스(Los Fronterizos)그룹, 구아라니(Horacio Guarani)드의 작곡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이 운동의 선구자로 중요한 유판키(Atahualpa Yupanqui)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화려한 연주기술을 바탕으로 작곡과 연주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의 기반을 닦아놓았을 닦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남미대륙의 고유한 노래를 발전시키는데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진보된 기타의 연주기술과, 인디안 음악의 서정성과 표현력을 결합시키는데 힘썼다. 그가 바이올린과 기타를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의 노래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고급문화, 대중문화, 민속문화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Pirard, 앞의 글, 605면)
유판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누에보 칸씨오네로 아르헨티노’는 시인 고메스(Armando Tejada Gomez)의 「선언문」(Manifesto)이 발표된 1958년부터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에는 작곡가 마타스(Oscar Matas), 가수 소사(Mercedes Sosa), 프란씨아(Tito Francia)등이 가담했다. 기악연주자로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차랑고(Charango)에 토레스(Iaime Torres), 인디오 피리에 라모스(Una Ramos)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노래’는 기본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음악형식이나 주제에서도 변혁을 가져왔다. 초기의 운동에서 나타난 시골풍의 노래는, 이제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상황과 경험으로부터 내용을 가져온 섬세한 시로 바꾸어진다. 수많은 그룹과 가수들이 나와서 새로운 화성■연주■편곡방식을 도입했다. 이들 노래가 다루는 주제는 점점 일반적인, 즉 사회상황에 관한 것으로 물들여지고 그 가사는 점점 세련되어져 도회지의 시와 가깝게 되고 농민이나 인디오의 표현방식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이것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던 시인들과 민요작곡가들이 손을 잡고 이 운동에 대거 참여한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제 2차 페론 내각이 1976년에 실각되고 또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설 때부터 아르헨티나의 노래운동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라디오■TV 프로그램에서의 선별정책 때문에 방송시간을 얻어 내기가 매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연주회를 방해하려고 극장 안에 폭발물을 장치하여 청중들에게  겁을 주는, 한 비공식단체의 공세 때문에 개인적인 신변의 위협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음악가들은 해외로 떠나거나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 활동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의 지원이 없는 데다가 아르헨티나 국가 전체의 경제문제가 심각한 형편에 도달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상당한 가능성과 새로운 방향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4. 칠레의 노래운동

칠레의 노래운동(Nueva Cancion Chilera)의 초기단계(1960년대 초)에서는 민속에 대한 연구■보급이 주요활동이었다. 로욜라(Margot Loyola)와 파라(Violeta Parra) 파바스(Hector Pavaz)부부, 피사로(Gabriela Pizzaro)는 상당한 양의 노래, 시, 전설, 춤을 칠레의 변방과 인디안 거주지에서 채집하였다. 어떤 민속연구소에서는 이들의 작업의 목적, 즉 민요의 채집과 그 대중화를 오해하여 고유문화의 왜곡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고유성의 파괴나 손상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뿌리를 생각하게 해 주었으며 고유문화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다.
파라는 칠레의 평원과 산악 지역을 횡단하면서 거기서 흡수한 지식과 대중예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남미 전역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가장 많은 숫자의 추종자를 낳았고 칠레의 노래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그녀가 처음 노래를 만들었던 것은 1950년대부터이지만 그에 앞서 오랜동안의 민속연구와 더불어 민중의 음악적 자원과의 직접적 접촉이 있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칠레의 노래운동은 민중봉기사건과 그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극장과 노래들은 처음부터 칠레의 노동자투쟁과 관련되었다. 따라서 노래가 1960년대의 정치■사회운동과 가장 밀착된 문화적 요인, 궁극에 가서는 이 나라의 삶에 대한 참된 표현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노래’는 점점 넓은 폭의 청중에게 그 영향을 뻗쳐갔다. 이 노래운동은 그 발생 초기부터 격렬한 사회저항과 관련되어 매우 정치성을 띠었기 때문에 통일인민당정부 때에 가장 활발했다. 이때에 최고의 성숙기를 맞이한 칠레의 노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조직 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운동은 종전의 대중음악의 보급경로-TV■라디오-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표시했기 때문에 노동자■농민■학생(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민중조직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들 조직을 통하여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침내 인민연합 민중정부의 보호로 대중매체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앞서 말한 파라가 가장 신임하던, 그의 추종자인 하라(Victor Jara)는 아깝게도 칠레의 노래운동에 있어 첫 순교자가 된다. 그는 혁명성, 참여성이 짙은 노래를 발표하여 끝내는 1973년 9월 15일 암살당한다. 훌륭한 기타 연주자, 시인, 작곡가, 연극배우였던 그는 그의 음악에서 보여준 주제나 다양한 음악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풍부한 교감을 통한 리얼리티를 전달하고 있다. 칠레에서 나타난 음악창작운동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경향 중 하나는, 대중지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보다 세련된 표현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래나 그룹의 연주의 성격을 띠던 것이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의 고전적 형식을 따르게 되어 대중음악 전영역에 걸친 곡목이 도입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대중형식과 고급형식의 중간선상에 위치한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칠레의 노래는 이전형태에 대한 변형을 시도하여'새로운 민요'(Neo-Folklore)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기독교민주당의 정치적 승리와 결합되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칠레의 ‘새로운 노래’는 상당히 예술적 가치가 담긴 작품을 만들어내었고, 그 주도세력들이 노동조합, 이웃 모임과 부인회, 스포츠 클럽들이 조직한 수천회의 연주회를 통해 인기를 끌었다. 칠레가 겪어 온 역사적 상황을 솔직하게 반영한 이들 노래는 당시 정권을 잡으려 했던 집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이러한 사회적 대립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군사정권 초기에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노래운동에 있어서 약간의 후퇴가 있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정권교체 당시 외국으로 건너갔던 예술가들이 그들을 받아들인 나라에서 작업을 계속하였고 국내에서 계속 활동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곧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여 1975년 누에바 칸씨온(지금은 칸토 누에보, Canto Nuevo)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노래운동은 계속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직접적인 수단을 통한 압박보다는 정부나 기관에서 지원을 중지함으로써 매스컴을 등에 업은 외국의 유행음악과 공평하지 못한 경쟁을 벌려야 했음을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외에서의 칠레노래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새로운 노래’ 운동은, 고유의 것을 지킴에 있어서 만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중예술의 상업화라는 점에서 볼 때 한 치의 후퇴도 보이지 않고 대중전달능력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로를 개발해 왔다. 옛것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도 고유의 보급경로를 만들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라는 새로운 예술가-청중 관계를 만들어 내었다. 따라서, ‘새로운 노래’ 운동은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의 매개적 위치에 서 있다.

5.쿠바의 민요운동

'새로운 민요'(Nueva Trova)는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30년대에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기까지 고유성을 발전시켜온 쿠바 대중음악이 오늘날 보여준 결과이다. 지난 1백년 동안 스페인으로부터의 영향을 여러 개 결합시킨 노래가 방랑음유시인가수(Trovadores Banditas)에 의해 불려졌다.
20세기 초기의 민요운동의 선구자들로는 가라이(Suido Garay), 코로나(Manuel Corona), 비야론(Alberto Villalon), 루이스(Rosendo Ruiz)가 있다. 제 2기의 활동은 ‘트로바 소노라’(Trova Sonora)로 알려졌으며 피네이로(Ignacio Pineiro), 마타모로스(Migunel Matamoros)가 이끄는 3인조 그룹이 대표격이다.
‘트로바’는 처음에는 콘트라푼토(Contrapunto)나 푼토 등의 민요에 매우 가까운 형태다. 독창자와 기악 앙상블로 구성된 그룹으로 독창자가 노래할 때 나머지는 반주를 하거나 각자 특징적인 악기, 가령 작은 키타의 일종인 트레스(Tres) 기타, 마라카(Maraca)를 연주하면서 함께 노래한다. 이 시기의 대중가요에 큰 변혁을 일으킨 것은 19세기 문학의 낭만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은 시의 우수성이다.(Pirard 1982, 613면)
앞서 말한 쏜(Son)이 1930년대 초에 도입된 라디오 덕택으로 많은 청중을 얻게 된 것은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제2기부터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쏜의 구조와 형식을 만든 마타모로스(Matamoros)3인조이다. 이제 쏜은 쿠바음악의 민족적 성향을 결정짓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쿠바음악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경향은, 낭만주의의 전통에 기초하고,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휠링’(Feeling)이라는 것으로 멘데스(Jose Antonio Mendez), 포르티요(Cesar Portillo de la Luz), 카스테야노스(Tania Castellanos) 등을 통해 ‘누에바 트로바’ 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음악, 즉 휠링과 ‘누에바 트로바’ 운동은 바로 1959년의 쿠바혁명으로 근본적으로 갈라선다.
라틴 아메리카에 있어서 쿠바혁명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남미대륙 전역에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사회적 격변-게릴라전쟁의 발발, 극단적인 좌경화, 학생■노동자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미국의 대 라틴 아메리카 강경정책의 시작-을 몰고왔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파급효과도 대단했다. 이 사건은 라틴 아메리카에 전례 없는 결속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민족주의 정신의 물결은 남미 전역을 휩쓸어 지식인■예술가 집단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어 새로운 문화적 공간의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가령 문학사상 최초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민족주의와 크레올(Creole)문화를 지향하는 운동이 민족문화라는 좁은 개념을 내포하였지만 대륙 전체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역주의(Regionalism)의 형태를 띠면서 세련화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문학적 성공을 스페인어권에 보급하려는 창구로서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Casa de las Americas)가 설립되었다.
‘누에바 트로바’ 가 쿠바혁명으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또 어느 정도까지는 1960년대 중반에 이 섬에 상륙한 남미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트로바 소노라’(Trova Sonora)의 영향으로 자라난, 쿠바혁명의 음악적 대표자로 꼽히는 푸에블라(Carlos Puebla)가 두각을 나타낸다. 이 민증시인은 그가 이끄는 그룹 로스 트라디씨오날레스(Los Tradicionales)와 함께 쿠바혁명을 포함한 남미대륙의 최근의 역사■정치적 사건에 대한 사실상의 연대기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쿠바의 노래뿐만 아니라 ‘누에바 칸씨온’ 내에서 정치적 참여성이 가장 강한 경향,
즉 ‘시사적 노래’ (Cancion Contingente)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길을 터놓았다. 그의 작품은 정치성을 띨 뿐만 아니라 민중적 매체로서의 시의 순수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조국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비할 데 없는 신비성과 관련시키면서 민중적 삶을 이야기해 준다. 푸에블라는 쏜, 구아라차(Guaracha)구아히라(Guajira)등 쿠바의 전통적 음악형식을 따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노래가 쉬우면서 직접 피부에 와닿을 만큼 대중적 수용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누에바 트로바’는 트로바 원형의 주제에 계속 충실해 왔는데 그것은 그 주요 내용이 조국과 사랑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혁명과 혁명영웅의 찬양, 저항의 노래가 첨가되고 그것이 태어난 극적인 상황과 뚜렷한 시적 음악적 서정성이 잘 결합되어 매우 다양한 음향과 정서를 빚어내고 있다. 가사는 과도한 이미저리 때문에 다소 화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련되어진 이후로 상당한 시적 가치를 부여받았다.
이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2년대부터이다. 물론 그 전에도 앞서 말했듯이 많은 작품이 나왔다. 당시에 중요한 가수겸 작곡가로는 노엘 니촐라(Noel Nichola)와 빈센테 펠리우(Vincente Feliu)가 있다. 이 운동에 마지막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대중음악-그 중에서도 밥 딜런(Bob Dylan), 바바라 데인(Barbara Dane),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이지만 계속 쿠바의 고유성을 지켜 나갔다.
쿠바의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연구소」(Insitituto Cubano de Arte e Industrias Cinematograficas:ICAIC)에 속해 있는 음향실험 그룹에서 만든 작품을 통해 ‘누에바 트로바’는 기악의 면에서의 발전의 출구가 마련되었다. 이 연구소에 설치된 음향실험실에서 대중음악가와 예술음악인의 밀접한 유대관계 속에서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누에바 트로바’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운동 중 가장 조직이 잘 되어 있는 운동으로 오늘날에는 쿠바 전역에 대표부를 둔 대중적인 청년조직이 되었다. 1972년의 공식적인 출범이후로 각 회원들은 1년 1회 또는 2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대표자를 뽑는다. 이 운동의 현재 회원은 2천명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원의 자격은 개인적인 예술적 업적에 근거하며 우선 작품을 제출하면 지방에 있는 열성 회원들 간의 토의를 거쳐 결정된다. 이 조직의 기본 단위는 ‘트로바의 분대’라고 해서 몇몇 그룹 또는 가수들로 구성된다. 때로는 이들 ‘분대’ 가 함께 모여 작품에 관해서나 조직■예술■정치에 관한 문제를 놓고 토론한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누에바 트로바’는 자체적인 능력과 조직구조, 활동기관을 가지고 있다.
트로바 노래운동의 보급경로는 그 발전과정에서의 상황변화에 따라 바꿔졌기 때문에 오늘날 트로바는 쿠바의 젊은이들 중 가장 많은 청중을 확보한 노래가 되었다. 민요가수들이 문화센터, 민중공원, 아바나(Havana), 국립극자의 카페 칸타테(Cafe Cantate), 성당광장(Cathedral Square), 후벤투드 공원(Parque de la Juventud), 산티아고(Santiago)의 에레디아거리(Heredia Street)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이 모든 센터들은 젊은이들의 여가활동을 위해 할애된다. 트로바는 TV■라디오에 특별 프로그램을 확보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레코드계를 주름잡고 있다.
최근에 이 노래운동에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는데, 이들은 음악양식이나 시의 형식을 새로이 고치는 작업을 보여주고 서사시적 성격을 다소 배제하며 보다 독특한 방법으로 현재의 쿠바사회의 상황을 반영 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주제를 탐구한다. 이들 새로운 경향의 대표자들은 펠리우(Santiago Feliu), 도나토(Donato), 로페스(Nabel Lopez), 캄포스(Campos)이다.
남미대륙의 거의 모든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발전은 대중음악의 일반적 통합의 필수적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트로바는, 문화적 이웃과 비교하여 쿠바음악이 항상 받아온 영향에 대한 계승자이며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문화 혁신운동의  가장 화려한 업적 중의 하나를 이루어 놓았다고 본다.

6.브라질의 새로운 대중음악

쿠바의 음악처럼 브라질의 음악도 당시에 매우 성공적인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브라질에서 유럽의 축제음악의 리듬이 처음으로 건너갔을 때부터 그 영향력은 계속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보사 노바’(Bossa Nova)의 탄생과 더불어 국제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대중음악이 되었다. 다른 나라의 노래운동처럼 브라질의 새로운 대중음악 운동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사이에 시작되었다.
1964년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직전과 그 후의 몇 년 동안, 브라질은 격렬한 투쟁과 저항으로 격동기를 겪고 있던 나머지 남미국가들에 대해 점차 고립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브라질이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노래운동의 과정에서 다른 점은, 지식인이나 예술가집단들이 항상 결속성을 조장해 왔지만 특별한 연계성이나 정보의 교환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브라질의 음악은 남미의 여러 국가에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 1950년대 남미 전역을 휩쓴 삼바열풍은 베네주엘라와 같은 국가에서 대단한 열기를 나타내어 카라카스(Caracas)에서는 리오축제를 본 따서 만든 카리오카(Carioca)를 브라질인 교사를 통하여 가르치는 삼바학교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은, 어떠한 형태의 문화교류도 거의 금지시킨 브라질의 군사정권 동안에 중단되었다.
확실히 브라질은 항상 자급자족하는 사회를 형성해온 터여서 폐쇄성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천연자원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와, 다양한 문화생활로 나머지 남미국가들로부터는 자연히 고립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이 정말로 남미의 스페인어권 국가들이 형성해 놓은 문화적 공동체에 속하는가 하는 물음이 있어 왔지만 적어도 노래운동에 있어서는 문화적 결속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브라질의 노래운동은,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고유의 보급경로를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에 상업적 대중음악의 파생물이었으며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상업적 음악시장에서 그 길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겪었던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보급경로에 들어가서 그것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와 반면에 상업적 음악의 형태를 띠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대항함으로써 대중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대중음악의 수준을 높여간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노래운동의 목적에 맞는 외국음악의 특성들을 흡수하였지만 그 고유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전세계로 뻗어나간다. 브라질의 대중음악이 ‘정치성’을 띤 것은 사실이나 선동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파성을 띠지 않고 민중의 투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민속음악보다는 브라질의 대중음악에 뿌리를 두면서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다. 주로 청년■지식인■중산계급의 지지를 계속해서 받았던 이 음악운동은 문화적 가치를 내세우는 운동이 얼마만큼 뻗어 나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경우에 문화적 가치란 민족적 뿌리와, 음악과 가사에서의 미적 가치이다.
브라질의 대중음악 역사는 18세기에서 시작된다. 가사를 지어서 곡을 붙여 만든 최초의 노래는 '모딘아'(modinha) 로 브라질 ‘순수’ 시인들의 활동 덕분에 세련된 대중음악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노래는 흑인과 뮬라토(흑백 혼혈아)의 상황에서 나온 리듬과, 룬두(Lundu)와 같은 춤곡과 함께 공존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바투쿠(Batuque)와 스페인의 판당고(Fandango)를 결합시킨 막시스(Maxixe)가 나타난다. 이것은 초로(Choro)그룹으로 편성된 일종의 브라질 폴카로, 전적으로 민중으로부터 나온 브라질 최초의 음악이다. 이 음악은 브라질의 카니발에서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곡목이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파리의 댄스홀 무대에 올려질 정도였다.
1950년대 말 브라질 대중음악에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는데 삼바와 같은 축제음악에 대항하는 표현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경제발전 단계에서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공업의 발달과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으로 리오데자네이로나 상파울로 같은 도시가 어마어마한 성장을 보였다. 전보다 더 많은 정보흡수가 가능했던 젊은 세대는 특정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확실히 표현하기를 추구했으며 학생집단이 거대한 성장을 보였고 중산계급이 사회적 정치적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유행음악에 젖어 있던 젊은 음악가들에게 재즈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지식인그룹에서는 쿠바혁명으로 야기된 ‘라틴 아메리카주의’(Latin Americanism)라는 새로운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그때까지 독점화되었던 춤추기 위한 음악과는 전혀 딴판으로, 가사붙인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학생집단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혁신적인 표현형식을 추구하는 첫 시도를 감행했다. 이렇게 하여 ‘보사 노바’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보사 노바’는 가사 없는 타악기적 음악, 탱고와 볼레로에서 볼 수 있는 낭만적 전통, 그리고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가사내용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보사 노바’는 브르조아 부유층이 사는 동네인 리오데자네이로에 있는 코파카바나(Copacabana)에서 태어났다. ‘보사’(Bossa)라는 말은 원래 리오데자네이로의 속어로 ‘특수한 능력’ ‘기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박자가 빠르고 경쾌한’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춤운동보다 새로운 음악운동을 대표하는 악기인 기타반주에서의 특징적인 당김법(Syncopation)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사 노바와 삼바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음악과 가사의 양면에서 나타난다. 우선 삼바가 타악기의 리듬을 중심으로 하는 춤곡이었다면, 보사 노바는 목소리를 가끔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하고 비교적 작은 그룹이 연주하는 음악이다. 중심을 이루는 악기는 타악기가 아니라 기타이며 여기서 기타의 기능은 화성적 반주 외에도 타악기가 담당했던 리듬효과를 내는 데에 있다. 리듬의 반복성 대신 화성■선율■리듬의 조화가 중요시되며 가사와 음악이 완전히 일치를 보이는 점도 그 특징이다. 가사도 축제음악의 무분별성을 배제하고 차분하고 섬세한 수준높은 시를 사용한다.(Behague 1973, 212~214면).
  ‘보사 노바’는 1956년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등장한 인물로는 이 새로운 리듬의 창시자로 알려진 레앙오(Nara Leao), 힐베르토(Joao Gilberto), 호빔(Antonio Carlos Jobim)이다.  ‘보사 노바’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호빔의 노래「음치」(Desafinado, 1959)에서이다.

  내가 “음치”라고 당신이 말하신다면/사랑하십시오.
  이 점이 내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특권이 있는 사람들만/여러분과 같은 귀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신이 준 것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을 반(反)음악적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누워서라도 이것이  ‘보사 노바’이고/매우 자연스럽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은/‘음치’도 심장이 있다는 사실
  내가 롤리플렉스로 찍어준 심장이/당신은 무척이나 배은망덕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은 말할 수 없지요.
  당신이 알 수 있다면 그보다 위대한 건 없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중요한 사실을 잊었지요/음치의 가슴속, 깊숙이
  심장이 조용히 뛰고 있다는 사실을*(이 노래 중의 강조표시는 필자의 것임)

위에서 소개한 음악가들은 모두가 당시의 재즈-주로 비밥재즈와 블루스-의 경향을 매우 따랐다. 때문에 미국이 이 보사 노바를 최초로 받아들인 국가가 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이 음악을 학생들이 맨 처음으로 박아들였다. 처음엔  ‘보사 노바’가, 젊은이들 중에서 세련되고 지적인 계층을 위한 사교 캬바레에서만 연주되었다.  ‘보사 노바’가 브라질과 세계 전역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이후 미국에서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s)가 성공을 거둔 다음의 일이다.
  ‘보사 노바’가 시작된 바로 그 이듬해인 1964년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노동조합의 대투쟁, 대학 캠퍼스에서의 소요가 일어났다. 이것은 곧 이 새로운 음악의 가사에 반영되었다. 처음의 심오한 분위기에서, 대도시 변두리 출신의 노동자들의 이상화된 희망을 표현하는 사회적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 몇 곡의 노래에서는 참여성이 점점 짙어가서 부아르퀘(Chico Buarque)가 작곡한 「농장 노동자의 장례식」같은 노래가 나왔지만 그것을 절대로 ‘정치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Pirard, 1982, 619면)
1964년까지만 해도 이 혁신운동은 레앙오(Nara Leao)와 레히나(Elis Legina)를 제외하면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운동이 스스로 지탱해 나갈 만큼 그리 힘이 없었으므로 많은 음악가들은 당시에 매우 흔했던 도회지의 음악극장에서 사회적 주제를 담은 연극을 위해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씩 가사와 시인에 대한 검열이 시작되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많은 전략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55~1956년에 브라질의 주요 TV회사인 투피(Tupi)와 레코드(Record)사에서 보다 많은 젊은층의 시청자 확보를 위해 대규모의 음악제를 열었다. 여기에 부아르크, 벨로소(Caetano Veloso) 로보(Edu Lobo) 힐베르토 힐(Gilberto Gil), 베타니아(Maria Betania), 코스타(Gal Coster)등의 매우 뛰어난 가수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 축제를 통하여 모든 브라질의 젊은이들이 이 노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축제가 열리기 전 6개월 동안 라디오 방송시간이 참가자 전원에게 할당되고 나서 경연대회가 시작되었다. 때문에 축구나 다른 대중오락행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사람의 주목을 쉽게 끌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감정을 전달할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노래가 금방 불안과 동요를 터뜨리는 배출구가 되었다. 상파울로에 있는 파라마운트영화관에는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에게 박수치기에 바빴다. 이제 이 경연대회는 대규모 스타디움에서 열릴 만큼 커졌다.
1960년대 중반 ‘보사 노바’는 주로 고등학생■대학생으로 구성되는 학생집단에 의해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전된다. 일반적으로 남미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폭발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이 학생집단이었다. 한낱 오락의 대상물이었던 대중음악이 전혀 다른 기능을 나타냈다. 이것은 군부쿠데타와 때를 같이한다. 한편 1964~1966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팝음악, 특히 록음악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고 ‘예, 예, 예(ie, ie, ie)’스타일의 팝송이 대중매체를 통해 6개월 동안 브라질 전역을 강타했다. 카를로스(Roberto Carlos)를 중심으로 한 ‘청년근위대’(Jovem Guarda)그룹은 이 록음악을 받아들였지만 원래의 ‘보사 노바’보다 세련미는 덜했다. 삼바전통을 지켰던 ‘보사 노바’ 음악가들에게는 이 ‘예, 예, 예’ 스타일의 음악이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브라질의 록뮤지션들은 오히려 이를 흡수시켜 브라질 대중음악의 미래에 건강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1960년대 중반의 대중음악은 사회참여의 수단으로서 두 가지 양상을 띤다. 하나는 토지개혁, 종교적 중립 등 저개발의 문제점들을 매우 공격적인 어조로 고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회지의 슬럼가나 북동부 지방에서의 인간 이하의 생활상을 애조띤 어조로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힐베르토힐의 「행렬」(Procession)이 이러한 경향에 속한다.

  뱀처럼 구불구불 움직이는/ 저 행렬을 보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온 것의 존재를 믿는다.
  여자가 시를 읊으면 남자는 모자를 벗고 듣는다.
  이들은 모두 여기 지구상에서/ 예수의 약속을 기다리며 투쟁한다
  예수는 이 오지에서 죽고 난 후에/ 이 사랑 없는 세계에서
  이들 생명들에게 보다 나은 것을 약속했다.
  나는 예수의 곁에 서 있지만
  그가 민중이 이 지구상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되길 원한다/......그러나 예수가 천국에 계시다면
  여기 지구상에는 끝장이 나야 한다.
(Behague, 1973, 226면)

브라질이 가톨릭국가임을 감안할 때 이 노래는 이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적 전통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노래의 선율이나 리듬을 볼 때는 오히려 순응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앞의 글, 215면)

1965년~1966년 경에 들어와서 정치상황에 대한 대중음악의 참여가 보다 첨예화되었다. 여기서부터 브라질의 대중음악은 가능한 모든 소재, 즉 보사 노바, 삼바의 원형, 록음악(‘청년근위대’와 비틀즈의 영향), 민요, 심지어는 실험음악의 요소를 동원하여 사용한다. ‘바이아의 그룹’, 또는 ‘트로피칼리아’(Tropicalia)라고 부르는 그룹이 벨로소, 힐, 카피남(Jose Carlos Capinam), 네토(Torquato Neto)로 구성된다. 이 그룹의 높은 지적 수준은 브라질 대중음악사상 매우 특기할 만하다. 이 운동은 카스텔로 브랑코, 코스타 이 실바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행한 억압과 테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멀리 떨어진 농촌을 그리기보다는 도시 중산층의 전통적 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벨로소와 힐은 제3회 브라질 대중음악제 때 ‘청년근위대’운동을 대표할 만한 두 곡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 「기쁨, 기쁨」(Alegria, Alegria), 「공원에서의 일요일」(Domingo no Parque).

     11월의 태양 아래 / 손수건도 서류도 없이 / 바람을 맞고 걸으면서 / 나는 간다 /       태양이 범죄로 / 게릴라 우주선이 마릴린 몬로로 갈라진다 / 나는 간다 / 대통령들       의 얼굴로 / 커다란 러브 키스로 /이빨, 다리, 깃발 / 폭탄 또는 브리지드 바르도 /       신문 속에 떠있는 태양이 / 그토록 많은 뉴스를 읽은 나에게 / 기쁨과 게으름을 채       워준다 / 나는 간다 / 사진과 이름들 중에서 / 색깔로 가득찬 / 내 두눈 / 사랑으       로 가득찬 내 가슴 / 헛수고 / 나는 간다 / 좋아 좋아 / 그녀는 결혼에 대해 생각       했고 / 손수건과 서류도 없이 / 나는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 나는 간다 / 코       카 콜라를 마시고 / 그녀는 결혼에 대해 생각한다 / 노래를 들으니 기운이 난다 /       나는 간다 / 수많은 사진과 이름들 중에 / 책도 총도 없이 / 굶주림도 전화도 없이       / 브라질의 한가운데서 / 그녀는 내가 TV에 나오는 노래를 생각했다는 것도 몰라       / 태양은 매우 아름다워 / 나는 간다 / 손수건도 서류도 없이 / 호주머니와 손에는       아무 것도 없이 / 나는 계속 살고 싶다 / 사랑 / 나는 간다 / 좋아, 좋아(Why          not?)
「기쁨, 기쁨」

벨로소는 「기쁨」에서 게릴라, 독재, 우주선, 섹스로 가득 찬 혼란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보여준다. 음악이나 가사의 면에서는 1956년에 발표된 「음치」와 마찬가지로, 1967년의 운동에 대해 선언문의 성격을 띤다. 관계대명사로 이어지는 단편적인 언어를 통해- 범죄, 대통령, 러브, 깃발, 폭탄, 브리지드 바르도, 코카 콜라, 결혼 등-산산조각이 나서 복잡한 현대의 도시생활의 리얼리티에서 볼 수 있는 예측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특정대상을 클로즈업시켜 여러 이미지들을 혼합시키는 영화기법처럼 우리의 앞을 스쳐가도록 한다.
이 새로운 경향은, 종전의 '보사노바'에 대해 너무 순응적이고 불만이 없으며 비생산적인 민족주의 부르조아와 관련이 있다고 비관한다. 이것을 '트로피칼리스모'(Tropicalismo)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그룹 이름인 ‘트로피 칼리아’에서 따온 것이다. ‘트로피칼리스모’는 1968년에 있었던 억압에도 불구하고 붐을 형성하였다.당시 반드레(Geraldo Vandre)등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정지되거나 국외로 추방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카에타노 벨로소는 1968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운동을 '트로피칼리스모‘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트로피칼리스모’는 과연 무엇인가? 하나의 음악운동인가, 아니면 삶과 직결되는 행동인가?벨로소의 마음속에는 이 두 가지 모두, 아니 그 이상의 것이 있었을 것이다. 즉 신문학적 식인주의(食人主義, Neocultural Cannibalism)가 그것이다. 이들은 당시 문학에서 나타난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세련된 문장을 통해 중산층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 미신적인 선입견을 파괴하려고 했다. 1920년대의 프랑스의 다다이스트 피카비아(Francis Picabia)의 영향을 받아 「식인문화(食人文化)선언문」(Anthropofagico Manifesto)를 썼던 브라질의 시인■철학가 앙드라드(Oswald de Andrade)는, '트로피칼리스모‘에 참여한 젊은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그가 쓴 선언문에 나오는 문구이다. “투피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로다”(앞의 글, 217면). 즉 투피(Tupi)인디오의 고유문화로 되돌아 가는가, 아니면 다른 문화에서 수단과 기술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후자의 경우가 바람직하지만, 그 수용과정에 있어서 자연히 질에 의해 선택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지방 특유의 상황과 필요성에 따라 외국의 문화적 요소들을 모방■재창조■변형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저개발국가들에 있어서 매우 보편적인 것이지만 ‘트로피 칼리아’그룹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적용되는, 외국으로부터의 음악경험의 흡수에 대한 정당화가 된다. 따라서 '트로피칼리스모‘는 실제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앞의 글, 217면)  벨로소와 힐의 신조는 브라질의 중산층에게 빈곤, 착취, 문화적 테러리즘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벨로소와 힐이 만든 노래「빵과 서커스」(Panis et Circenis)의 제목은 옛 로마의 시인 유베날(Juvenal)이 로마광장에서 한 유명한 말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빵과 값싼 오락만 바라던 로마인들의 타락상에 대한 신랄한 경멸을 나타낸다. 베아그(Behague)는 이러한 의도가 ‘부르조아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라고 본다.(앞의 글)음악적으로 보면 ‘노래 부르고 싶었다’라는 가사에 붙여진 첫 동기는 상행 9도 음정으로, 부르기에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음악도 곡 전체를 흐르는 단조로움과 더불어 이 의도에 부합된다.

     태양 아래에서 / 내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 바람에 돛을 달고 / 항해를 했다 / 호      랑이와 사자를 /  뜰에다 풀어 주었다 / 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 태어나고       죽기에 바쁘다 / 반짝이는 강철로만 된 / 단도를 시켜 / 큰 거리에서 5시에 / 내 애      인을 죽였다

     꿈-낙엽들(Dream-leaves)을 / 영지(領地)의 뜰에 심었다 / 잎들은 햇빛과 뿌리를       찾을 줄 안다 / 하지만 이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 태아나서 죽기에 바쁘다

     식당에 있는 이 사람들 (몇번 반복)
     (나레이션: 샐러드 좀 건네 주세요 / 제발 사랑해 줘요 / 다른 작은 조각과 같           이......)
「빵과 서커스」

1950년대 초반부터 브라질 국민들은 산업육성이 그들의 생활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배웠으며 그것을 국가의 긍지로 생각해 왔다. ‘트로피칼리아’ 그룹에 속해 있던 톰 세(Tom Ze)는 「산업공원」(Parque Industrial)이라는 노래에서 공해문제, (“하늘을 쪽빛으로 다시 칠하자”) 대중신문의 센세이셔널한 범죄기사 등 산업화 상업화가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고발한다.
(후렴......)
  하늘을 쪽빛으로 다시 칠하자 / 깃발이 흩날리고 / 나라 전체는 축제로 온통 법석이다 / 산업 성장에게 /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달라고 기도한다

  포스터에는 / 나긋나긋한 스튜디어스와 선전용 아가씨 / 벽을 쳐다보면 / 일순간에 행복을 되찾는다 / 포장이 되어 딱지가 붙은 웃음 때문에 / 데워서 사용하십시오 / 데워서 사용하십시오

  메이드, 메이드, 메이드 인 브라질(......)

  신진 여배우의 죄목이 잔뜩 실려있는 모랄리스트의 신문 / 절대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대중신문 / 그것은 딱지 붙여 내다놓은 혈액은행 / 책장을 넘겨 쓰십시오 / 책장을 넘겨 쓰십시오

  메이드 인 브라질이니까요 / 메이드 인 브라질(반복)

  한번 더! / 메이드 인 브라질

요약하면 위에서 살펴본 ‘보사 노바’가 전통적인 삼바의 전통성, 선입견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트로피칼리스모’는 비생산적인 민족주의 부르조아의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었다.

1968년 「공공결사법」(Institutional Act)제 5호가 통과되자 대중문화에 대한 심각한 결과를 낳게 한 검열이 합법화되었다. 사실 이 검열은 그것을 수행하는 엄격한 지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극장이나 영화관에서는, 금지된 음악이 통과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한 국가의 대중문화발전이 종종 서투른 관리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사정없이 파괴를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내부의 위기와 폭행의 상황은 많은 브라질 예술가들의 개인적 신상에서도 나타난다. 벨로소와 힐은 각각 투옥되거나 런던으로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보냈다. 로보(Edu Lobo)는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으며 반드레는 칠레와 프랑스에서 몇 년을 보내야만 했다. 1969년~1972년 사이를 통틀어 사실상의 문화적 진공상태가 존재했다. 레코드회사와 방송국은 이러한 기회를 노려 브라질 전역을 미국음악으로 몰아댔다.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이전의 축제를 대신하기 위해 큰 축제를 열어 국제성을 띤 노래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1971년에 가서야 브라질 예술가들이 귀국하기 시작하여 민족대중음악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부아르케는 그가 만든 레코드「콘스트루까오」(Construcao)를 가지고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는 또 다시 3년 동안이나 침묵을 지켜온 브라질의 젊은 세대에게 노래를 다시 부르게 해주었다. 얼마 안 가서 벨로소와 힐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축제가 열렸을 당시의 상황이 재개되었다. 물론 이 때 노래는- 주로 부아르케의 가사에서-공공연한 비판적 성격을 띠었다.
몇 년 동안의 문화적 진공상태가 가져다 준 가장 긍정적인 결과는, 사실상 건전한 음악■가사운동에 뿌리박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옛 가수들이 복권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는 바이아(Bahia)의 위대한 대중시인 카이미(Dorival Caymmi)로 그는 민속소재에 기초를 둔 그의 어부와 농부노래 때문에 새로운 브라질 음악의 개척자 중 한사람이 되었다.
민족성을 표방했던 축제기간 중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던 음악가들의 복권은, 브라질국민이 아직도 그들의 음악을 원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 때문에 민속부흥의 노력이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가령 브라질 음악사상 큰 이정표가 되는, 북동부음악을 책으로 묶어낸 페레이라(Marcus Pereira)가 이런 경우이다. 계속하여 레시페(Recife)출신의 비올라도 5인조(Quinteto Violado)도 이와 같은 소재들을 모았다.
1972년부터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1960년대 영어권의 음악, 특히 비틀즈같은 그룹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또한 북동부 지역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 세대는 검열의 상황에서 커왔기 때문에 더 이상 가사 자체만 가지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에서는 목소리란 가사전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소리 그 자체를 내기 위해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는 나스맨토(Milton Nasmento) 히스몬티(Gismonti)와 파스쿠알(Hermeto Pesqual)이 있다. 이들은 선배 음악가들보다 더 깊이 민속적 뿌리를 캐내어 그것을 전자악기로 재창조해 내었다. 재즈는 흑인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브라질 음악을 형성하는데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1974년 연극과 관련해서 저항의 노래가 몇 곡 나와서, 연극과 대중음악간의 관계성을 회복했다. 중요한 작품으로는 모라에스(Vinicius de Moraes)의 「Un Grito Parado No Ar」, 부아르케의 「Calabar」가 있다. 이 「Calabar」는 검열에는 통과되었지만 초연 당일에 공연이 금지되었다. 부아르케는 비판적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한 젊은 음악가들에게 작품경향을 제시해 주었다.
검열이 주는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음악은 전례없는 성공을 거두었고 라디오나 TV도 어느 때고 그것을 막지 못했다. 검열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1976, 1977, 1978년에 걸쳐 대학과 다른 여러 곳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모인 음악애호가들의 대중집회가 계속되었다. 이런 식으로 ‘Pixinquinha Project' 는 탄생되었다. 이 계획은 7개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열리는 ’저녁 연주회‘로 구성되는데 이는 중앙집중주의에 대항하는 부수적 효과도 노린 것이다.
이제 브라질의 노래는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음악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인 경우로 꼽히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통합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으며 나머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경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다. 뿐만 아니라 남미대륙 전체의 대중음악 운동의 결속에 그 일역을 맡고 있다. 국제적 대중음악 시장에 대한 파급력은 아직 약해지지 않았으며 미국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미국음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오늘날 보사 노바를 기초해서 만든 재즈의 경향을 볼 수 이Tdmaub 브라질 음악을 연주하는 가수와 그룹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다.

7. 노래와 정치, 또는 노래와 역사

우리는 예술을 그것이 태어난 리얼리티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리얼리티가 다른 사회집단들끼리의 대립과 투쟁으로 흔들릴 경우에는 예술, 특히 대중예술이 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절대 옳지 못한 것은, 이 사회적 정치적 관련성을 자발적이고도 필연적인 발전과정이 아니라 이 투쟁 속에서의 기회주의적인 집단이나 정당의 주도권으로 보는 행위이다.(Pirard 1982 : 612면)
‘누에바 칸씨온’은 그것이 태어난 세계에 대한 살아 있는 반영이며 희망, 의심, 승리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입은 상처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줄 필요가 전혀 없다. 그 참여란 자발적인 것이어서 민중이 역할을 부여한 것이라면 그것은 민중의 역사에 있어서 그 일부가 된다. 때로는 그것이 정치적 선전문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유일한 가치란 그것이 태어난 시점에 대한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노래를 그대로 따서 쓰는가 하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라틴 아메리카 정신에 대한 보편적 표현으로서 민중의식의 일부를 형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누에바 칸씨온’을 정치적 상황에만 묶어 놓거나 그것이 드러내 보이는 문제들을 마치 열성당원이나 파벌주의자들의 대상인 것처럼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도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는 처음부터 이러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민중이 지난 100년 동안과 현재의 자유투쟁과 혁명을 위한 투쟁과정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모든 힘과 수단을 모았을 때가 그렇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가 노래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누에바 칸씨온’은 역사와의 연관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 임무에 맞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항상 표제적 슬로건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경험에서 그 표현방법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누에바 칸씨온’의 가치란 원인이 되는 한 현상에 대한 참여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가령 문화적 질서가 필요한 국가에서는 대중문화의 가치를 회복하는 보편적인 작업에 기초하여 민속의 연구와 보급, 잊혀진 전통의 회복, 민족적 뿌리의 추구 등을 힘쓰는 경우도 있으며, 또 다른 나라에서는 역사적 상황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주장, 즉 자유■독립■민주■민중의 생활조건 개선■사회정의 등을 지지하는 실제의 투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노래가 ‘정치성’을 띤다는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함을 느낀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즉각적인 투쟁, 정치경제적 권력 구조에 의한 정당 또는 계급간의 투쟁, 이 투쟁에 대한 일상적 경험, 역사에 대한 그때그때의 해석을 뜻한다. 좀더 넓게 본다면 민중의 관점에서 본 긴 역사의 시각, 현재의 사건의 배경과는 반대되는 그 무엇,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즉 진행되고 있는 순수한 시사적 해석을 초월해 있는 실재, 숱한 세월을 통해 희생과 발견에 의해 형성해 온 문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의 역사를 뜻한다. 따라서 ‘누에바 칸씨온’은 위의 두 가지의 의미에서 정치성을 띠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과거의 상황을 다루기도 하고, 문화전파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현재 발생되고 있는 것,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사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사건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 노래운동을 보는 시각이 균형성을 잃지 않으려면 필요에 따라 이 둘을 분리하기도 하고 결합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앞의 글, 610~613면)

8. 맺 음 말
위에서 살펴본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운동에 대한 일반적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앞의 글, 622면)
⑴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운동은 그 역사가 닫혀 있는 기록적 사실이 아니라 살아 있고 지금도 전개되는, 열려진 현상이다.
⑵ 이 노래운동은 매우 드물게도 범대륙적인 규모로 멀리 뻗어 나간 예술형태이다. 여기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각자 똑같은 역할을 해내었으며 서로 다른 규모의 접촉과 교환뿐만 아니라 공동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⑶ ‘누에바 칸씨온’은 대중음악과 민속음악 사이에 위치한다.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이 연결선성에서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대중에게 호소한다는 점과 가능하다면 대중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그 실제의 존재방식의 면에서는 대중음악쪽으로 가까이 가지만, 그 민족주의적 의도로 민속과의 연관성을 가진다. 바로 이 점이 때로는 대중에게 접근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⑷ ‘누에바 칸씨온’은 그것이 비전문가나 국제적인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업음악의 경향에 반대하고, 항상 그 뿌리와의 동질성을 추구하며 민족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이 운동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문화침식과정에 대한 반발이다. 이러한 반발은, 물론 절대로 조직화 된 운동은 아니고 음악창작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통해 나타난다. 대개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영어권 국가의 음악으로부터의 끈질긴 도전이다.
⑸ ‘누에바 칸씨온’은 대중음악의 여러 측면을 매우 다양하게 망라하고 있어서 그 형식적인 면을 가지고 단순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춤곡이나 서정시 가사에 대한 표현수단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고전적 음악형식에 가까이 가기도 한다. 활기찬 행진곡일 수도 있고 침착한 분위기의 기악곡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재즈의 어법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전통의 모든 맥락을 한꺼번에 가질 뿐 아니라 새로운 발전으로 향하는 길목도 제시한다.
⑹‘새로운 노래’ 운동이 민속에 가깝게 나타나는 나라에서는 민속에 대한 상당한 연구업적을 남기고 있어 남미의 대중문화의 뿌리를 되찾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문화적 동질성의 발견이나 민족의식의 고취의 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용요인이 된다. 이 운동이야말로 외세문화로부터 라틴 아메리카문화를 지켜 나가는 최전방의 방어선이며, 과거로부터 되찾은 문화적 유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창조력으로 미래를 향한 발전도 모색한다.




         참 고 문 헌


Aretz, I. "Music in Lat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rdition,"
      Cultures, 1:3, 1974, 117~131면.
Behague, G. "Bossa & Bossas: Recent Changes in Brazilian Urban
      Popular Music, "Ethnomusicology, 17:2, 1973, 209~233면.
"Brazil,"in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ed.
      S. Sadie, London, Vol.3, 1980, 221~244면.
"Modinha" "Bossa-nova,""Choro“”Samba" in The New Grove, 1980.
Palisca, C. "Reflections on Musical Scholarship in the 1960s,"in
      Holoman, D. and Palisca, C.V.(eds). Musicology in the 1980s:
      Methods, Goals, Opportunities, New York, 1982.
Pirard, E. C. "The Nueva Cancion in Latin America," International
      Social Sciences Journal, 34:4, 1982, 599~623면.
後藤政子, 『라틴 아메리카 현대사: 격동기의 정치■경제사』, 진경희 옮김,
      도서출판 한울, 1983.


♧참고 문헌: 도서 출판 이후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칠레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일대기
             가격:10,000(샘플CD포함)
♧참고 영화: 브에나 비스타 쇼셜 클럽
            -쿠바의 음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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