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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도 민중가요일까요?
[노래여 나오너라①] 이영미선생님이 들려주는 민중가요이야기


  안녕하세요? 이영미입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가 상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민중가요가 도대체 뭐길래?" 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어디서부터 시작할 건지도 가닥이 잡히겠지요.
  
   김민기노래가 나올 때 즈음, 70년대 초반으로 보는 분들도 계시구요. 그런데 그보다 더 일찍 4.19혁명때도 데모를 했는데 데모를 했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겠나 까지에 생각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즘처럼 그렇게 많이 노래를 부르면서 데모를 하지는 않았다고 그래요. 그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예요.
  
   항상 공동체의식이 필요한 인간집단에는 노래가 따라다닙니다. 데모의 현장만은 아니죠. 예컨대 교회에 가면 찬송가를 부르고 군대에서는 군가를 부르고 또 학교서는 교가를, 응원할때는 응원가를 부르듯이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뭔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죠. 갑자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같은 느낌말입니다. 노래는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도모하거나 마음을 맞추려고 할 때 늘 있게 되는 거니까 일제시대에도 사회운동이 있었으니 노래가 불려졌겠죠.
  
   그럼 데모할때 부르는 노래가 민중가요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민중가요의 상당수는 오히려 데모자리에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즉, 혼자 있을 때 불러야 혹은 들어야 더 좋은 감상용 노래들도 있죠. 예컨대 노찾사의 '사계' 는 민중가요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데모할 때 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운동권이 부르는 노래가 민중가요일까요?
   그럼 운동권이 아닌 사람은 부르지 말라는 말이 될수있죠.
   또 어떤분들은 사회의식이 있는 노래가 민중가요라고도 하죠.

  90년대 이후부터는 사회비판의식이 있는 대중가요들이 나옵니다. 예컨대 서태지와아이들의 '교실이데아'를 민중가요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칩니다.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나왔을 때 즉 인터넷이 아닌 나우누리 등의 컴퓨터통신상에서 '교실이데아' 와 '발해를 꿈꾸며'를 민중가요로 봐야 하느냐라는 엄청난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생각하면 90년대는 사회비판적인 대중가요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럼 도대체 대중가요와는 뭐가 다른걸까요?
  
   물론 규정을 하는 분들마다 다 다를거예요. 저 나름대로 고민한 결과는 이런겁니다.
  
   대중가요는 애초에 만들어지는 제작의 방식이 상업적인 대중가요 시장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죠. 상업적 음반 혹은 상업적 공연을 위해서 제작되고 발표되는 것들이죠. 반면에 민중가요는 상업적인 대중가요시장 바깥에서 존재합니다. 팔아먹기위해 만든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 노래가 필요한 사람들끼리 그냥 만든 거죠.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민중가요가 훨씬 태반으로 맞다는 얘기입니다. 뭔가 다른 노래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기존의 노래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표현욕구를 채워주는 그런 노래가 필요했던 거죠. 그 노래들을 필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주워모아서 자기들끼리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뭐가 있냐면 기존의 대중가요나 가곡등의 노래가 별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성적 의식이 전제되어 있죠. 민중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의식은 뭔가 다르다고 보는데요. 민중가요를 일단 좋아하기 시작하면 대중가요를 부르지말아야할것같다는 생각을 하고있고 실제 그런 금지의식을 갖고있어요. 뭔가 획일적이고 건강하지않고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경계의식 혹은 반성의식을 갖고있다는 거죠.
  
   즉 기존의 노래문화에 대한 반성의식을 갖고있으면서 기존의 음반시장을 벗어나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노래문화를 저는 민중가요라고 봅니다.
  

독특하게 생겨나는 시기가 있었어요. 70년대 후반이라고 할수있는데요. 그 이전까지는 데모노래가 있었어도 데모노래부르는 학생들이 그냥 대중가요도 불렀거든요.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는 특히 대학의 운동권들이 민중가요만 부르고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했죠. 내가 이런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도 되나 하는...
   이게바로 반성적 의식을 갖고있다는 얘긴데요. 그런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게 7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 이전은 아닙니다.
  
   지금은 옛날처럼 대중가요들이 그렇게 획일적이지만은 않다고 봐요. 물론 대중가요는 팔아먹어야되는 노래이고 적어도 1만부, 2만부 팔려야되는 노래이기때문에 어느 정도는 다수대중들을 상대로 하고있고 상업적인 공간에서 먹힐만한 노래를 만들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96년 이후부터 음반에 대한 검열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인디앨범이라고하는 것이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죠. 소량을 만들어서 파는 대중가요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소수고 못살며 유명하지는 않은 사람들이긴 합니다만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민중가요를 하는 사람들과 비슷해지는 양상이 있죠.
  
   그리고 민중가요를 하는 사람들은 예전에는 집단으로 몰려다녔는데 요즘에는 거의 각개 가수로 다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그 양쪽에서 겹쳐지는 공간이 생기는거죠.
  
   옛날만큼 그 선을 그을 수 있는건 아닙니다만 중요한 본질은 기존의 대중가요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있을것, 그리고 상업주의에 대한 경계, 검열때문에 만들어진 금기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을 함께 갖고 있는 노래였다는 겁니다.
  
   70년대 후반부터 우리가 민중가요라고 부르기 시작한 노래들중에서 그 기원이 훨씬 옛날부터 있었던 노래들을 오늘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해방가' 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인데요. 이 노래는 4.19때도 불려졌대요. 그리고 이노래에 대한 악보를 찾아보면 1945년 해방직후에 만들어진것으로 돼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독립행진곡' 입니다. 이 노래는 3절까지 있는데 개인 작사.작곡자가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더군요. 민중가요 중에는 개인 작사작곡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누군가가 만들었고 또 덧붙이고 덧붙여서 지금까지 온 것 같은 노래가 많아요. 민요처럼 말이죠.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이 노래를 지은 작곡자가 김성태 선생님이었습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구만리..." 로 시작하는 가곡 '이별의 노래' 와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로 시작하는 가곡 '동심초' 등을 지으신 분요. 서울음대 학장을 지내셨던 분입니다. 일제말기에 상당히 많은 친일을 하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사가는 박태원님인데요. 월북한 소설가죠. 일제시대까지는 좌파활동을 많이 하신 분은 아니구요. '천변풍경' 이 가장 대표적인 일제시대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라는 작품도 있구요. 북으로 가서도 역작을 남기셨는데 '갑오농민전쟁' 이라는 대하소설이 있는데 완성을 못하시고 돌아가셨죠. 좌파우파 막론하고 이 노래는 많이 불렀습니다.

오히려 좌파가 즐겨부른 노래는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이구요. 이 노래는 김순남이 월북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해방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살아남아서 60년대 70년대까지 학생들이 데모할 때 불러졌죠.
  
   1945년에 노래 '해방가' 가 실린 음반을 취입하진 않았겠죠. 가사도 그 당시 발표됐던 것과 조금 바뀌었구요. 70년대 80년대 불렀던 가사와 방식으로 녹음돼있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민문연' 이라고 하는 '민중문화운동연합' 이 서울에 있었던 대표적인 문화운동단체였는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운동팀이라고 할수있는 노래모임 '새벽' 이 84년에 만들어졌고 '새벽'은 이 '민문연' 에 소속돼있었죠. '새벽' 이 부른 노래로 오늘 들려드릴까 합니다. '해방의 노래' 라고 하는 카세트테잎에 실려있죠.
  
   평소에는 이렇게 안 부르는데 이 음반에서는 앞부분에 특히 아주 느리게 불렀습니다. 성악가스러운 목소리로 말이죠. 가수가 또 성악가 출신이었습니다. 폼나는 목소리로 앞부분을 유장하게 부르고 뒷부분은 행진풍으로 갈수있도록 편곡을 한 건데요. 들어보시면 아주 흥미로우실 겁니다.


'바람이 분다'와 '탄아탄아'를 아세요?
[노래여 나오너라②] 이영미선생님이 들려주는 민중가요이야기


  오늘은 60년대중반정도에 불려진것이 분명해보이는, 내용을 보아하니 그렇게 추측이 되는 노래예요. '바람이 분다' 라는 노래인데요.
  
  제목이 따로 있는게 아니죠. 왜냐하면 첫 시작이 '바람이 분다'에요.
  그런거 많죠? 여러분, 황성옛터라는 노래 아시죠?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요.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이 '황성의 적(흔적)' 이거든요. 그런데 처음 시작이 "황성옛에..."로 시작이 되니까 그냥 제목이 "황성옛터" 가 되는것처럼 말이죠.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가 특히 자연발생적으로, 누가 지었는지 모르게 집단적으로 창작된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구조가 민요의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예요. 후렴귀가 확실합니다.
  
  아리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진도아리랑에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가 반복되잖아요. 이 부분만 알면 노래에 합류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한사람씩 뭔가 하나씩 내용을 덧붙여 가는 거죠. 4절이니 5절이니 정해놓을 필요 없이요. 이런걸 '민요의 개방성'이라고 하는데요. '바람이 분다'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라는 후렴귀가 반복이 되죠.
  1절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현해탄에서 불어온다" 이렇게 시작되고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태평양에서 불어온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해주에서 불어온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동빙고에서 불어온다" 이렇게 2,3,4절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일정한 구조가 있고 그 구조안에 새로운 말을 집어넣으면 노래가 되도록 돼있구요. 가사를 봤을때 처음 시작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노래를 시작했을거라고 보여지구요. 미국,소련...이렇게 절이 계속 불어나거든요.
  
  이 노래가 6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을것이라고 추측되는 이유는 60년대중반 한국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있었죠? 일본과의 관계에서 말이죠. 그래요. '한일수교'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나 지식인 세력들은 이런 굴욕적인 한일수교는 할 수 없다는 반대시위를 굉장히 많이 벌였는데요. 그 유명한 '6.3데모' (6.3사태)라고 하는 시위를 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5년에 수교를 하게되죠. 그런 맥락을 생각하시고 이 노래를 한번 들어보시죠.
  
  "물이 있어도 안 끈다. 소방서원은 휘발유 뿌린다" 굉장히 통쾌하죠? 머리 싸매고 앉아서 오선지 놓고 짓는다고 하면 노래가 이렇게 나올 수가 없죠. 학생들끼리 모여 앉아서 쿵짝쿵짝하면서 만들었을 것 같지 않나요?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게 부르기도 했어요.
  
  2절에서 "양키놈은 엉덩짝만 돌린다" 이렇게 돼있는데 이걸 "양키놈은 츄잉껌만 씹는다" 이렇게 부른 사람들도 꽤 있었죠. 엉덩짝 돌리면서 춤이나 추고 껌이나 찍찍 씹는 미군의 향락문화에 대한 풍자라고나 할까요?
  
  3절은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해주에서 불어온다 로스께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로 시작이 돼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연령대부터는 '로스께'라는 말을 확실히 아실 것 같은데요. 소련사람을 좀 비하시킬때 '로스께'라고 많이 불렀죠. 양키, 쪽바리 이런 말처럼요.
  
  이 노래는 역시 지난주에 들려드렸던 '해방가'를 부른 노래모임 '새벽'이 불렀어요. 앞으로 이 카세트 음반을 자주 틀어드리게 될 텐데요. 왜냐하면 당시 서울에서 가장 열심히 중심적으로 활동했던 노래팀이기 때문에 편곡과 연주, 녹음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이 노래 85,86년에 녹음했을 거에요.
  
  뒤에 나오는 "불이야" 하는 부분은 원래 노래부를 때는 없는 부분이에요. 그냥 계속 절이 늘어나면서 쭉 끝이 없이 불렀던건데 음반으로 취입하려면 뭔가 마무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당시에 이걸 어떻게 끝낼까 궁리를 하다가 그냥 "불이야" 라고 장난기있게 끝내자고 해서 "불이야" 로 끝냈습니다.
  
  4절에 대한 설명도 좀 드려야할 것 같은데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동빙고에서 불어온다 동빙고 5적촌에 불이 붙었다" 이렇게 부르잖아요. 이건 김지하의 당시 '5적'의 영향인데요. 그래서 이 4절의 가사는 확실하게 70년대 후반이후에 만들어졌을 겁니다.
  
  '탄아 탄아'
  
  두번째 노래는 '탄아 탄아'라는 노래입니다. '최루탄가'라고도 하는데요.
  
  '바람이 분다'와 같은 시기의 노래에요. 이 노래역시 처음 시작이 "탄아 탄아 최루탄아" 이렇게 시작이 되서 제목이 '탄아 탄아'이죠.
  
  곡은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일제시대에 불렀던 창가의 곡에다가 불렀구요. 가사는 당시 '6.3데모' 의 주동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붙였다고 하죠.
  
  그런데 드라마를 보니까 그 당시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이 곡에다가 붙여서 불렀나봐요. 하지만 70년대에는 확실하게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이 곡에다 불렀어요.
  
  '탄아 탄아'는 노래모임 '새벽'도 취입해서 불렀던 적이 한번도 없는 노래예요. 작년에 방영이 되서 요즘에 재방송을 다시 하고 있는 EBS 다큐멘터리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 중에서 연기자들이 이 노래 일부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음원으로 들려드릴까 합니다. '지금은 노동자시대'에서 이 귀한 음원을 발췌해주셨는데요. 한번 들어보시죠.
  
  교가보다 더 많이 불렀다는 가사가 인상적이죠?
  가사중에 “탄아 탄아 최루탄아 팔군으로 돌아가라" 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미8군이니까 미국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고 미군이 지원한 최루탄이라는 생각이 있는 거겠죠.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저희 세대가 80년대 불렀을때는 이랬거든요. "탄아 탄아 최루탄아 자유의 광장을 넘보지 마라 주책없이 넘보는 최루탄속에 민족의 영혼은 통곡한다 봉아 봉아 경찰봉아 자유의 광장을 넘보지마라..." 이랬거든요.
  그런데 드라마속에서는 "법아 법아 반공법아..."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역시 개방된 노래구조라는게 읽혀지죠. 얼마든지 붙일 수 있죠.
  
  이런 종류의 노래가 모여앉아서 하나씩 돌아가면서 새롭게 붙여가고 새롭게 창작을 하고 그러면서 이 노래가 우리의 것, 내 것이 되어가는 경험을 했던 거죠.
  
  이 당시에는 이렇게 '6.3 데모'와 관련된 60년대 중반의 노래가 굉장히 많았구요. 물론 당시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데모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해요. 요즘에는 데모 현장에서 노래가 빠지지 않잖아요? 당시의 데모 양상은 정치 연설 중심의 분위기였다고 그래요. 데모 주동자들이 나중에는 국회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구요.
  
  제가 60년대 학번 선배들에게 "당시에는 도대체 뭘 부르면서 데모를 하셨어요?" 이렇게 물었더니 해방가는 확실히 불렀다고 그러구요. 또 3.1절노래도 불렀다고 하시더라구요 "기미년 3월1일 정오..."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반일감정을 살려주는 노래로써 '3.1절노래' 가 어떤식으로든 필요했던 거죠. 그 노래를 부를때 굉장히 가슴이 뭉클하셨다고 해요.
  
  "3.1운동 정신을 생각하면서 '어찌 일본놈들이 경제력을 앞세우면서 들어올 수 있나 하는 생각, 어찌 우리가 그들하고 손을 잡고 수교를 할 수 있느냐'하는 울분이 당시 학생들에게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주에는 6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노래 두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람이 분다-가사>
  
  1.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현해탄에서 불어온다
   쪽발이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쪽발이는 게다짝만 돌린다 불은 붙어도 물이 있어도 안끈다
   랄라랄라랄라라 랄라랄라랄라라
   소방대원은 휘발유 뿌린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쪽발이는 게다짝만 돌린다
  
  2.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태평양에서 불어온다
   양키놈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양키놈은 엉덩짝만 돌린다 불은 붙어도 물이 있어도 안끈다
   랄라랄라랄라라 랄라랄라랄라라
   소방대원은 휘발유 뿌린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양키놈은 엉덩짝만 돌린다
  
  3.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해주에서 불어온다
   로스께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로스께는 시계줄만 돌린다 불은 붙어도 물이 있어도 안끈다
   랄라랄라랄라라 랄라랄라랄라라
   소방대원은 휘발유 뿌린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로스께는 시계줄만 돌린다
  
  4.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동빙고에서 불어온다
   동빙고 도적놈에 불이 붙었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도적놈은 골프채만 돌린다 불은 붙어도 물이 있어도 안끈다
   랄라랄라랄라라 랄라랄라랄라라
   소방대원은 휘발유 뿌린다 잘탄다(잘탄다) 신난다(신난다
   도적놈은 골프채만 돌린다.


'농민가'는 농민들이 먼저 불렀을까?
[노래여 나오너라 3] 이영미선생님이 들려주는 민중가요이야기


  여러분,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6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두곡을 들고왔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60년대 불려졌던 노래를 녹음기 들고다니면서 지금쯤 예순정도 되시는 또는 더 나이가 드신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음도 하고 채록하는 일을 해야되는데 그걸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런 노래를 많이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없으실거구요. 그런데 숫적으로는 대략 20곡정도는 있었다라고 증언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느 선생님께 "어느분을 찾아가면 이 노래들을 많이, 제대로 녹음해 올 수 있을까요?" "가장 음감이 뛰어났던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라고 여쭤봤더니 하시는 말씀들이 "아마 없을걸, 모두 음치들이어서 노래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까.." 이러시더라구요. 70년대초반의 학번 분들이요.
  조금 아쉽죠. 어쨌든 70년대 후반과 80년대까지 살아남았던 노래들은 지금 몇곡 남지 않은 셈입니다.
  
  '농민가'
  
  농민과 관련된 노래 두 곡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릴께요.
  
  첫곡은 요즘에도 농민들이 시위할 때는 반드시 빠뜨리지 않고 부르시는 곡이에요. 딱 떠오르시는 곡이 있죠? 그래요. 바로 농민가입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요. 60년대 중반부터 불려진 노래라고 해요. 그런데 그 당시 '농민들로부터 시작해서 이 노래가 불러졌겠는냐' 라는걸 생각해보면 그렇진 않았어요. 농민들은 조직이 많이 되어있거나 특히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할 정도로 조직의 문화가 성장이 되어있거나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결국 이런 노래들은 대학생속에서 나오는 노래들입니다. 70년대 농민운동조직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냥 대학생들만 부르는 노래였을 거구요.
  
  그런데 학생들이 왜 농민가를 불렀을까요?
  바로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의 특성과 관련이 있겠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특성은 계급운동보다는 학생과 지식인 운동이 먼저 출발을 하잖아요. 오히려 학생들이 "나는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대학생이야. 하지만 조국과 민족을 생각할 때 난 그냥 있을 수 없어.." 하는 생각들이 있었어요. 6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몇 명 되지 않았죠. 70년대까지도 비슷하구요. 그래서 그때까지는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거나 뭐라고 얘기를 하면 '준지식인들이,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재목들이 뭔가 발언을 하는 것이므로 경청을 해야 한다'라고 생각들을 했어요. "똑똑한 대학생들이 오죽하면 저렇게 데모를 할까" 이렇게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어요. 이런 식의 노래는 거의 학생운동속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해왔죠.
  
  농민가는 아직 누가 작사,작곡을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제가 선생님들을 붙잡고 "대체 이 노래는 언제부터 지어지고 불려진 것 같으세요?" 라고 여쭤봤더니 "이 노래가 아마 향토개척단 때 불렀던 것 같고 그래..아마 그때 나왔을거야" 이러시더라구요. 여러분, '향토개척단'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서울대내의 일종의 농촌관련 연합서클이었는데 서울대학생들이 '향토개척단'이라는 걸 조직을 해서 농촌에 내려가서 일도 돕고 계몽활동을 벌이고 그랬거든요. 벌써 이름에서부터 그런 냄새가 나죠? 오죽하면 이름이 향토'개척단'이겠어요. 엘리트의식이 있었다고 보는데 어쨌든 향토개척단을 조직해서 내려가면서부터 이 노래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이 되요. 그때부터 불리워져서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으니까 엄청나게 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노래입니다. 노래 한번 들어보시죠.
  
  여러분, 혹시 이 노래를 듣고 나서 이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으세요?
  지난번 첫 시간에 소개해 드렸던 '해방가'도 그랬는데요. 80년대에 이 노래를 담아서 음반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갖가지 악기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해방가'는 어코스틱 기타 하나만을 사용했고 지금 들으신 '농민가'도 달랑 북하고 기타만을 썼거든요. 노래도 굉장히 못부른 것 같은데 그냥 넣은 것 같고...왜 그랬을까요?
  
  의도된 것이죠. 또 일부러 못 부른 것이구요.
  사실 이런 노래들은 행진곡풍의 노래인데요. 이런 노래들이 만약에 드럼, 트럼펫, 바이올린 등이 동원이 되서 편곡이 됐다고 한다면 군대에서 부르는 군가풍의 분위기가 나 버려요. 아니면 학교에서 부르는 교가의 느낌처럼요. 그 당시 '우리가 어찌 파쇼군대의 질감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반감이 있었죠. 이질감이 오는 거죠. 학생들이나 농민들은 그냥 박수치면서 부르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반주를 안넣고 녹음을 하면 좀 그러니까 가장 기초적이고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던 통기타를 썼고 특히 '농민가'에는 북소리가 하나 더 들어가 있습니다. 70년대말부터 80년대를 보면 농민들은 주로 한국 북을 치면서 불렀거든요. 가장 질감에 비슷한 분위기로 편곡을 하고 노래도 그런 방식으로 부르는게 올바른 편곡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일부러 노래도 거칠게 불렀구요. 노래를 이렇게 못부르는 가수들이 아니거든요. 더 거칠게 소박하게 녹음을 했습니다.
  
  이후 89년 '전노협진군가'가 나올 때부터 행진곡풍의 노래에다가 온갖 트럼펫같은 금관악기 음색을 넣기 시작했고 그 이전까지는 금관악기의 음색은 절대 사절이었습니다. 파쇼군대하고 비슷해지는 것이기 때문에요.
  
  '스텐카라친'
  
  '농민가' 이외에도 농민과 관련된 노래가 몇곡이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제가 기억하고 있는 노래가 두곡인데 모두 러시아 민요에요.
  
  한 곡은 '스텐카라친'이라는 노래인데요.
  
  러시아 코자크지방에서 농민봉기를 했던 지도자의 이름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아주 유명한 민요이구요. 구 소련시절에도 굉장히 많이 불렀는데 'red army chorus'라고 흔히 얘기하는 '붉은군대 합창단' 음반으로도 충분히 들으실 수 있을 거에요. 일제시대만 해도 '스텐카라친'은 세계의 민요, 가곡집 등에 러시아의 민요를 대표해서 '볼가강의 뱃노래' 와 함께 실리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거에요.
  
  그런데 분단이 되고 나서 러시아 노래를 부를려고 하니까 조금 껄쩍지근 했겠죠. 그래서 쉬쉬하면서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노래를 안 불렀었는데 대학생들이 또 삐딱한걸 좋아하는데다가 봉기를 일으켰던 농민운동가의 노래라고 하니까 이 노래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노래는 '스텐카라친'을 기리는 내용이에요. 저는 사실 이 인물에 대해서 정확하게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가사를 보면 이렇거든요.
  당시 코자크지방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나봐요. 해서 스텐카라친이 농민봉기를 주도해서 일으켰는데 페르시아의 공주가 미인계를 써서 그를 무디게 만들어요. 농민들이 변절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텐카라친이 마음을 고쳐 잡고 공주를 강속에 집어던지고 새롭게 투쟁을 했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민문연에서 발매하고 새벽팀이 불렀구요. 음질이 약간 떨어지는걸 감안해서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민기의 '친구'를 데모꾼들이 사랑하게 된 사연
[노래여 나오너라④] 이영미선생님의 민중가요이야기


  오늘은 70년대의 민중가요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첫번째 시간이네요.
  
  70년대에도 60년대의 데모노래를 계속 불렀을 테지만 새로운 데모노래도 70년대 전반기에 나오기도 했죠. 대표적인 노래 '훌라송'도 있구요. 원래 이 노래는 미국노래인데 "군부독재 물러가라 훌라훌라~" 뭐 이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쩌다가 "훌라훌라~"가 붙게 됐는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훌라송'이라고 불렀어요. 이런노래는 사실 음원으로 찾아서 들려드릴 수 있는게 없죠.
  
  그래서 일단 70년대에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김민기의 노래들, 그리고 그 이후에 민중가요의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편입된 노래들을 먼저 소개해드릴까해요.
  
  여러분들은 김민기에 대한 생각이 어떠세요? 요즘의 특히 20대나 30대초반의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주 많이 궁금해요. 가장 흔히 '친구' '아침이슬' 과 같은 노래를 떠올리실 텐데요. 김민기는 이런 "데모노래만 지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저는 사실 김민기씨의 데뷔때부터 기억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인데 그때부터 저는 김민기의 노래를 좋아했어요. 제일 먼저 들은 노래가 '친구'와 '아침이슬'이었죠. '아침이슬'은 김민기씨가 노래를 지어서 양희은씨에게 데뷔곡으로 주고 또 자신의 음반에도 넣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71년에 데뷔를 했어요. 초등학교때부터 그 노래들을 매스컴을 통해서 들었죠.
  
  말하자면 김민기의 노래는 1971년부터 74,5년까지는 대중가요였다는 거죠.

즉 데모하기 위해서 짓고 부른 노래가 아니라 대중가요 앨범으로 발표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노래라는 거예요. 김민기씨의 의식속에서도 그랬구요. 그 존재방식도 상업적인 음반으로 만들어졌어요. 자켓디자인을 보면 그런 느낌은 별로 없지만 아무튼 저같은 아무런 사회의식이 전혀없는 꼬맹이가 그리고 중,고등학생이었던 언니오빠가 친구와 아침이슬을 즐겼고 또 여고생들이 "와...."하면서 좋아했던 대중가요였다는 거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를 들으면 데모할때 부르던 느낌과 다른느낌이 드실지도 모르겠어요. 대중가요로서의 '친구'..그리고 당시 청년문화, 통기타, 생맥주, 장발, 미니스커트와 함께 이 노래가 존재했었다는 생각으로 듣는다면 더더욱 다른 느낌일 겁니다.
  
  '친구' 음반이 두개가 있습니다. 71년의 데뷔앨범과 78년의 '공장의 불빛'이라는 비합법음반이 있죠. 그리고 80년대에 음반을 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제대로 못냈습니다.
  
  계속 검열에 걸렸는데 내용이 아니라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요.
  
  내용을 약화시켜서 계속 아동물을 만들었는데도 검열에 걸렸어요. 그래서 아주 누더기처럼 낸 '개똥이'라는 앨범이 있구요. '아빠얼굴 예쁘네요'라는 그림책과 함께 끼어있는 아동물같은 앨범이 있습니다. 나중에 90년대 초반에 자신의 모든 노래가 해금이 된 이후에 그걸 다 모아서 새로 녹음을 해서 4장짜리 세트앨범을 냈어요. 71년앨범에서는 대학교3학년때의 김민기, 20대초반의 아주 쌩쌩한 목소리로 들을 수있고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앨범은 40대 김민기의 목소리이죠. 음질은 깨끗합니다만 중년의 분위기가 우러나죠. 그런 느낌이어서 좋은 노래도 있는 것같고 또 그것 때문에 별로인 노래도 있는 것 같아요.
  
  오늘 들려드리는 '친구'는 71년의 데뷔앨범에 수록된 노래인데요. 20대 초반의 김민기의 목소리, 여러분 궁금하시죠? 또하나 감상포인트가 있어요. 이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가요음반의 상당수가 스테레오가 아니라 모노음이 있어요. 오른쪽, 왼쪽이 분리가 안되고 약간 먹먹한 느낌이 있을 거에요. 어쨌든 그 시절에 LP음반으로 나왔던 20대 김민기의 목소리로 '친구' 들어보시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친구' 노래를 민중가요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가사를 보면 이 노래가 이른바 사랑노래는 아니지만 그래도 민중가요라고 한다면 사회의식이 있다거나 하다못해 "나가자...가노라...하소서" 이런 가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도 없죠. 세상에 대한 불만도 별로 없어보이구요.
  
  '친구'를 지은 때는 김민기씨가 고등학교 3학년때라고 해요.
  
  그런데도 음악적 완성도가 아주 뛰어난 곡이에요. 음반 A면 첫곡이기도 하구요. 그 당시 김민기의 친구가 죽었다고 하는데 가사를 한번 볼까요?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정말 밤에 바닷가를 보면 어떤게 물이고 하늘인지 알 수 없잖아요. 나는 이렇게 여기에 살아있고 너는 저기서 죽었다고 그러는데 삶과 죽음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갈라지는 것이냐...뭐 이런 김민기의 물음들이 드러나는데요. 고3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는게 참 놀랍지 않으세요? 저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컴플렉스를 많이 느껴요. 난 도대체 뭐야, 고3때 무슨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거야..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튼 이 노래는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김민기씨에게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노래였구요.
  
  이런 노래가 민중가요가 된 것은 김민기씨가 워낙 독특했기 때문이에요. 사랑노래를 안지었어요. 대중가요 가수가 사랑 노래를 안 만드니까 사람들이 다르게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죠.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친구' 이외의 다른 노래들에는 뭔가 세상의 어두움, 세상에 대한 약간의 불만같은 것을 표현한 노래들이 1집앨범에 섞여 있기도 해요. 대표적인 노래가 지금 소개해드릴 '아하 누가 그렇게'이고 다음시간에도 한번 더 얘기를 할까 해요. 이러저러한 것으로 김민기를 생각하게 되니까 또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니까 떠나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친구'에 조차도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한 거에요.
  
  특히 70년대후반에 데모하다가 끌려가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불렀죠.
  
  김민기씨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이에요. 아주 다르게 불러버린 거에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고 당시의 대중가요의 수준에 비해서 화성도 꽤 복잡하고 선율도 절제돼있고 편곡도 잘돼있는 노래입니다.
  
  당시 70년대 청년문화에 대해 좀더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70년대 통기타를 들고 청바지를 입고 일군의 젊은군단이 등장한 것은 60년대 말부터인데요. 한편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청년문화의 영향을 받은거거든요 소위 68세대라고 하는..우파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좌파스탈린주의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었는데요. 미국에서는 특히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60년대의 소위 저항적인 포크,락이 쏟아져 나왔고 그 영향을 우리가 받기는 받았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그걸 쳐다본다고 해도 우리문제가 아니기때문에 그렇게 절실한 사회의식으로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재네들은 뭔가를 하고있어..뭔가 멋있어..."하는 심정적 동감이 있었던 거죠.
  
  또 70년대 초반의 청년들은 1940년 후반 또는 19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죠. 즉 일제시대 경험이 없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미국식교육을 받고 민주주의도 미국식 민주주의로 머릿속으로 넣고 자란 첫세대인 셈이거든요. 일제시대를 겪었던 세대들의 문화가 왠지 낡고 유치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과정에서 뭔가 새로운 문화를 찾다가 그것이 미국의 청년들이 좋아했던 문화를 가져왔던 거죠.
  
  70년대 초반의 청년문화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저항문화처럼 그렇게 저항적이지 않은 또 저항을 할려고해도 대중문화공간에서는 할 수도 없었죠. 검열도 심하고 사회분위기도 그랬구요.
  
  결국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었던게 그 당시 문화였습니다.
  
  김민기는 한국의 포크중에서는 가장 저항적인 쪽에 속했다고 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청년문화에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이 세상에 대한 약간의 불만이 있어요.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끼리의 즐거운 삶이 있어요 어른들은 모르죠? 우리는 이런 삶을 가꿀거예요.." 뭐 이런식으로 얘기를 했다면 김민기는 이렇게 얘기를 하죠. '아하 누가 그렇게'의 가사를 볼까요?
  
  아하 누가 푸른하늘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
  구름속에 가리운듯 애당초 없는 듯
  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나의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아하 내가 너의 손을 잡았으면 좋겠네
  높이높이 두터운 벽 가로놓여 있으니
  아하 누가 그렇게 잡았으면 좋겠네
  
  뭔가 이 세상이 내 맘에 흡족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사랑이 넘쳐 흐르지않고 희망이 보이지 않고 파란하늘이 보이지않는 이 세상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는 너무 답답하다라고 얘기를 하는거죠.
  '아하 누가 그렇게' 역시 71년 데뷔음반의 음원으로 들어보시겠습니다.
  다음시간에 뵙죠.


"김민기의 1집음반은 세상에서 두번 사라졌다"
[노래여 나오너라5] 이영미선생님의 민중가요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영미입니다.
  오늘은 김민기의 곡중에서 진정한 포크가수로서의 비판정신을 엿볼 수 있는 두곡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김민기는 애초부터 엄청난 사회의식을 가지고 또는 민중운동진영에서 내 노래가 이렇게 쓰여야지하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한 감수성 예민한 한국청년이 일기쓰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작업이었다고 봐요. 그것 자체가 용기였구요. 그것을 대학생들이 알아보고하는 과정속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김민기가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기의 노래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현실에 대해 비교적 가감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된다라는 말씀을 지난번에 드렸었는데요.
  
  오늘은 조금 더 사회의식이 강화된 노래들 중에서 두곡을 가져왔는데요. 물론 이 곡들도 합법적인 음반에 실려서 공개된 노래예요. 1집 수록곡들인데요.
  
  먼저 '꽃 피우는 아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노래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한동안은 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특히 이 노래는 문제였다라고 많이들 기억을 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음반 전체로 봤을 때 일명 가장 불온한 노래로 찍힐 수 있는 노래였죠. 왜 그랬을까요?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떤 한 아이가 무궁화꽃을 물도 주고 하면서 잘 가꾸려고하는데 무궁화꽃이 자꾸 시들거든요. 이 상징이 너무나 명확하잖아요? 또 2절에서는 급기야 꽃은 시들다가 결국 죽고 그리고 꽃을 키우던 아이도 병이 들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지 않으신지요?
  이 당시에 어떻게 이런 가사의 노래가 사전검열을 통과해서 합법음반으로 나왔는지 참 의심스러울 정도죠.
  
  이 노래는 당시 사회비판의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던진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분들이 이 노래의 제목을 '무궁화꽃 피우는 아이' 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무궁화꽃이 굉장히 중요한 제재이고 그 상징이 너무나도 명확하니까요. 하지만 노래제목은 '꽃 피우는 아이' 입니다

71년에 이 노래가 발표됐는데요. 지금과는 감각이 많이 다르죠. 굉장히 우울한 느낌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진지함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71년 음반은 75년에 '아침이슬'이 공식적으로 금지곡이 되면서 확실하게 음반시장에서 사라졌는데요. 그 이전, 72년에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사실은 사라졌었습니다.
  
  무슨 얘기냐하면 김민기씨가 72년 혹은 73년도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꽃 피우는 아이'와 '해방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그날밤에 모처로 끌려갔고 한참 고문을 당하고 나왔죠. 그 이후로 매장에서 김민기의 음반이 수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법적근거없는 노래를 만든 작가와 그 음반을 낸 음반사에 대한 일종의 압력이었던 거죠.
  
  그 다음부터 70년대 중반까지 김민기의 음반을 사기가 어려웠죠. 노래가 나오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으나 실제로 구입하기가 어려웠구요. 75년이 되서는 확실하게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아침이슬'을 금지곡으로 딱지를 찍은 거죠.
  
  그러다가 71년 음반에 실린 노래들이 다시 매장에서 팔리게 된 것은 87년 6월항쟁을 경유하면서였죠. 특히 노태우가 자칭 '구국의 선언'이라고했던 '6.29선언'을 하던 날, 아침이슬을 확실하게 해금해주겠다는 제스추어를 했습니다.
  
  그날 마침 김민기가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요. 혜화동 극장까지 노태우가 직접가서 공연을 보고 뒷풀이까지 따라가서 그 자리에서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해금을 하겠다는 일종의 신호였죠. 71년음반은 그렇게 다음부터 찍을 수 있었구요. 물론 이렇게해서 이후 다시 나온 1집음반은 김민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윤리위원회에서 딱 한곡, 유독 '꽃 피우는 아이' 이것만은 통과를 시킬 수 없다고해서 이 노래가 빠지고 대신에 정수라의 '아,대한민국'이라는 노래가 건전가요로 들어갔습니다.
  
  김민기의 1집음반이 이렇게 한동안 금지가 됐을 때 암시장에서 굉장한 고가로 팔렸어요. 70년대말과 80년대초반에 LP음반 한장에 당시 30~40만원에 팔렸으니까요. 이렇게 희귀한 71년 1집음반이 있고 '아, 대한민국'이 실리고 '꽃 피우는 아이'가 빠진 88년에 나온 1집음반이 있는 거죠. 참으로 기가막힌 음반이 된 거죠.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노래는 '종이연' 이라는 노래입니다. 71년 1집음반에 수록된 곡이고 88년에 나온 음반에도 실려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래도 역시 71년에 애초에 문제가 됐던 노래입니다. '종이연'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는 별 냄새가 안나죠.
  
  하지만 이 곡의 제목은 원래 '혼혈아'였습니다. 그래서 71년 1집음반을 냈을 때 이 제목이 걸린거죠.

참 재밌죠? 71년 이 음반이 처음 나왔을때 '꽃피우는 아이'는 안걸리고 '혼혈아'는 제목 때문에 심의에 걸렸다는게 말이죠. 어쨌든 노래 '혼혈아'의 제목만 바꾸는 걸로 합의가 되서 음반에서는 '종이연' 이라는 노래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렇게 제목이 바뀌어버려서 가사를 곰곰히 되씹어보지 않으시면 이 노래의 의미를 모르고 넘어갈 수 있어요.

  어머니가 양공주였던 거죠. 주한미군을 상대했던 성매매여성이었던거구요. 노래에 나오는 아이는 혼혈아인 거죠. 그런데 노래가사 전체를 봐도 "나는 혼혈아입니다"라는 대목은 없거든요. 하지만 딱 한구절 "'헬로우아저씨' 따라갔다는데"에서 확실해집니다. 제목이 원제대로 '혼혈아'였다면 이 노래에서 말하고자하는 의미가 듣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될테지만 '종이연'으로 바뀌면서 "헬로우아저씨"라는 대목을 흘려들을 수도 있겠죠.
  
  이 노래를 나중에 김민기씨가 4장짜리 전집음반으로 발매를 했을 때는 '혼혈아'라는 원제를 찾아왔어요. 하지만 71년음반에는 여전히 '종이연'으로 돼있는 거죠.
  
  이런 노래들을 봤을 때 김민기는 당시 확실히 통기타 하나 들고 나와서 미국의 모던포크를 대충 흉내낸 사람이 아니라 확실히 포크의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는 명실공히 한국의 포크가수라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식인 청년 김민기가 '민중'을 노래하다
[노래여 나오너라 6]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안녕하세요 이영미입니다. 제가 김민기의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들려드려서 조금 민망하기도합니다.
  
  하지만 곡이 워낙 다양하고 그 시기에 해야될 이야기를 한 사람이면서 또 이 노래들이 오랫동안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김민기는 상당히 많은 곡들을 양희은의 음반을 통해서 발표를 했구요. 또, 다른가수가 불러서 발표도 했습니다.
  
  물론 김민기의 1집앨범에는 한대수씨가 짓고 김민기씨가 부른 노래도 있어요. 김광석의 '포크 다시부르기' 음반에도 실려있는 '바람과 나' 라는 노래가 바로 이런 곡인데요.
  
  오늘은 김민기의 71년음반이 나오고 난 이후 70년대중반까지 합법적으로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었던 분위기속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온 노래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최고의 학부라고 할수있는 서울대학교에서 미술대학을 다녔던 김민기라는 지식인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기층민중에 대한 시각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곡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이 고생하고 이농하고 공장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또 어떻게 노래에 담으려고 하는가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민중지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노래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대표적인 곡이 양희은의 '서울로 가는 길', '식구생각'이구요. 또 송창식음반에 실려있는 '강변에서'라는 곡입니다.
  
  오늘은 '서울로 가는 길'과 '강변에서'라는 곡을 갖고 왔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느 한 사람이 서울로 가는 길에 집과 고별을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가난이 대물림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학비, 병원비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지금도 고통스러운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죠. 야반도주를 해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 서울에서 돈을 벌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서울로 가는 길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 이후 이야기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려지는 거죠. 그걸 양희은이 아주 맑은 목소리로 불렀구요.
  
  가사에는 직접적으로 노동자,농민,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한마디도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노래는 아무렇지도않게 음반에 실렸습니다. 당시에 TV에서까지도 불려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 노래를 곰곰이 들어보면 볼수록 그 시대의 어떤 전형적인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듣고 있으면 찡한 느낌이 있는 그런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는 서울로 가는 이농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이후에 민중가요의 작가들에게 하나의 모델처럼 됐던 노래예요. 김지하 시에 곡을 붙였던 '서울길'이라는 노래가 그렇구요. 또 여러분들은 노찾사음반으로 많이 들으셨겠지만 80년대 중반에 노래모임 '새벽'에서 만든 '귀례이야기'라는 노래도 그렇습니다.
  
  20대 아주 애띤 양희은의 목소리로 '서울로 가는 길' 들어보시겠습니다.
  
  두번째 노래는 '강변에서'라는 노래인데요. 당시에 송창식의 목소리로 불려졌습니다. 아주 맑은 목소리를 갖고 있죠. 김민기씨가 지은 노래의 암울한 분위기를 상당히 희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할까요?
  
  암울하게 불렀으면 진작에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됐을 텐데 송창식이 부담스럽지 않게 불렀습니다.

이야기는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저녁노을이 으스름할때 강변에 앉아서 보이는 풍경을 수채화 그리듯이 서술한 노래입니다. 미대생다운 발상이 엿보입니다.
  
  공장에 나가 있는 순이를 기다리고 있죠. 강건너 시커먼 공장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고 순이네 댕그란 굴뚝엔 밥 짓는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높다란 철교위로 호사한 기차가 휭하고 지나가죠. 저만치서 순이가 오솔길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강변은 명확하게 한강변이고 그 공장은 구로공단이거나 영등포의 공단쯤이겠고 한강철교가 있습니다. 한강변의 모습이 완벽하게 그려지고 있어요. 국가가 경제드라이브로 밀어제치는 산업화의 물결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민중들의 모습은 이렇게 표현이 되죠.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민중들의 삶은 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눌려 지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요동을 치고 있다는 거죠. 그걸 아주 대비적으로, 그러나 흥분하지 않고 풍경화를 그리듯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70년대 서울 구로공단과 한강변의 모습을 아주 사회적으로 그려내고 있죠. 가사를 보고 있으면 '정말 잘 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송창식의 음성으로 감상해보시죠.
  
  다음주에 또 뵙겠습니다.


서유석과 양병집이 민요를 끄집어내다
[노래여 나오너라 7]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번에 무려 3주에 걸쳐 김민기의 얘기를 했는데요. 당시 포크송의 대부분은 보통의 대중가요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구요. 그중 몇몇 곡은 일반적인 대중가요와는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에 나중에 민중가요적 자산으로 들어오게 됐죠. 이런 맥락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강조해서 말씀드린거구요.
  
  오늘은 김민기의 곡이 아닌, 역시 포크송 속에서 발표됐던 노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민중가요라고 하는 문화가 본격화된 것은 70년대 후반이구요. 김민기 외에 한대수씨 등 비판적인 싱어송라이터의 포크송이 들어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서유석의 '진주낭군', 양병집의 '타박네야' 도 민중가요권에서 아주 꾸준하게 불려지는 노래에요. 이 노래가 모두 70년대 초중반에 대중가요로 합법적으로 발표된 노래입니다. '진주낭군'은 나중에 민중가요권에서는 '진주난봉가'로 많이 알려졌어요. 원래 이 노래는 서유석이 직접 지은건 아니구요. 전래민요입니다. 양병집의 '타박네야'도 마찬가지구요.
  
  왜 이렇게 포크송하는 사람들이 민요를 가지고 자신의 노래로 다듬는 노력들을 했던 걸까요?
  
  '포크송'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민요'쯤 되겠죠. 미국에서 '포크송운동'이라는건 민요부흥운동 같은 거죠. 그 이전까지 대중가요가 너무나 상업적이었기 때문에 자기네들의 민요, 즉 백인전통의 민요중에 의미있는 것들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민요라는 것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풍부하고 다양하게 들어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되살려서 소박한 음악으로 부르고 싶었던 노력들을 담은게 '모던포크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 데요. 우디 거슬리, 피트 시거, 밥딜런, 존바에즈까지 오고 있는 거구요. 그것이 60년대의 학생운동, 사회운동과 맞아떨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의 모던포크운동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껍데기를 받아들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받습니다. 한대수씨처럼 사회와 문명을 비판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서유석, 양병집처럼 우리민요를 가지고 포크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세레나 등이 불렀던 향락적인 분위기의 민요가 아닌 옛날에 우리 할머니들이 불렀던 노래들, 삶의 아픈 모습들이 들어있는 노래를 끄집어내서 새롭게 작업을 하고 지금의 젊은이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겁니다.
  '진주낭군'은 줄거리가 있는 서사민요였는데요.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주낭군' 가사>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년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남강 빨래 가라
  진주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 없는 말굽소리
  옆눈으로 힐끗보니 하늘같은 갓을 쓰고
  구름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간다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하다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낭군 오시었으니 사랑방에 나가봐라
  사랑방에 나가보니 온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이것을 본 며늘아가 아랫방에 물러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 매달아 죽었더라
  이 말들은 진주낭군 버선 발로 뛰어나와
  내 이런줄 왜 몰랐던가 사랑사랑 내 사랑아
  하룻정은 삼년이요 본댁 정은 백년인데
  내 이럴줄 왜 몰랐던가 사랑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당시 이 노래를 70년대후반, 80년대초반에 대학생들이 불렀을 때는 자신들의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해서 이 노래를 해학적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농촌활동을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나서 밤에 부녀회같은걸 하잖아요. 그 자리에서 대학생들이 그 당시에 '농민가' 같은 걸 함부로 가르쳐 드릴 수도 없었으니까 이런 노래들을 가르쳐 드리면서 분위기를 만들어가곤 했죠. 그럼 갑자기 여기저기서 이런 이야기들이 봇물 터져 나오듯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타박네야'는 70년대 중반에 양병집의 음반에 처음 실렸구요. 70년대 후반에는 서유석의 음반에도 실리기도 했습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노래를 따라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이 노래는 딱 4가지의 음만 사용하고 있거든요. "레미미미레 미레도도 솔레레 미레도도" 이렇게 더이상 아래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고 이 선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고 있어요. 세상의 음치라도 모두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타박네야' 가사>
  
  타박 타박 타박네야 너어드메 울고가니
  우리엄마 무덤가에 젖먹으러 찾아간다
  산이 높아서 못간단다 산높으면 기어가지
  물이 깊어서 못간단다 물깊으면 헤엄치지
  명태 줄까 명태싫다 가지줄까 가지싫다
  우리 엄마 젖을다오 우리 엄마 젖을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기어 와서보니
  빛깔 좋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길래
  두 손으로 떠서들고 정신없이 먹어보니
  우리 엄마 살아생전 내게주던 젖맛일세
  명태 줄까 명태싫다 가지줄까 가지싫다
  우리 엄마 젖을다오 우리 엄마 젖을다오
  
  
  60년대까지의 조금은 향락적인 민요를 우리는 민요의 전부라고 오해하기도 했었는데요.
  
  이런 노래는 민요의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민요를 재인식하게 만든 대중가요적인 성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70년대 후반이후에 민중가요의 범주내로 이런 노래가 들어오게 되는 거죠. 기존노래에 비해서 민족적이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고통과 맞닿아있는 노래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병집의 음성으로 들어보시겠습니다.


복음성가는 민중가요의 단골 레퍼토리?
[노래여 나오너라 8]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주로 70년대 전반을 마무리하고 오늘부터 70년대후반, 즉 본격적으로 민중가요 '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진 시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지금까지 이 코너를 통해 들려드렸던 노래들이 모두 민중가요에 포함되는 곡들이긴 하지만 75년 이전까지는 본격적으로 민중가요 '문화'라는 게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것이죠. 쉽게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70년대 전반까지의 김민기의 노래는 매체,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서 들었다는 거예요. 또는 그냥 데모노래로 존재하는 거죠.
  
  '해방가', '탄아탄아', '농민가' 등은 데모주동자들이나 데모를 하는 사람들만 부르는 노래로 존재했습니다. 데모를 하는 사람들도 데모를 할 때만 이런 노래를 부르고 평소에는 뽕짝이나 유행가들을 불렀어요. 우리들만의 '노래문화'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75년을 계기로 해서 "대중가요를 부르지 말아야겠다"는 등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75년 5월에 '긴급조치9호' 발효가 되면서 특히 교내에서 데모를 할 경우 경찰이 교내로 진입을 할 수 있게 됐는데요. 이렇게 암울한 유신말기로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은 양적으로 급속하게 줄어든 반면에 학적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결의로 학생운동을 이어나갔던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민중가요 '문화'라는 것이 형성이 됐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 들려 드릴 노래의 첫 곡은 '흔들리지않게'라는 노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는 원래 복음성가에요. 이 시기에 새롭게 들어온 민중가요의 레퍼토리중의 하나가 복음성가들이 많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운동이 이렇게 탄압받는 시기에 살아남는 것이 몇가지 있죠. 특히 종교가 그러한데요. 데모하다가 학생들이 또는 노동자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명동성당이죠. 1970년대 후반에는 웬만한 대학교 운동권보다도 아주 강성인 교회의 대학부가 훨씬 더 강성이었죠.
  
예컨대 제일교회 대학부, 새물안 대학부 다닌다고 하면 완전히 골수로 인식이 되기도 했거든요. 이런 학생들이 교회권에서 부르는 노래들 또는 교회권을 타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서양노래들을 운동권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흔들리지않게' 이 노래는 "우린 결코 변치않으리 우린 결코 변치않으리" 이렇게 번역된 노래도 있었지만 "흔들리지않게 우리 단결해 흔들리지않게 우리 단결해" 이렇게 번역된 노래가 살아남았던 겁니다. 이 노래의 중간쯤 가사를 보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성경구절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인데 교회권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 신앙과 사회운동은 하나인 거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인데 이 땅은 하나님의 뜻이 현격하게 어그러지는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복음성가들은 자연스럽게 운동권의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이 노래는 데모를 시작할 때 일종의 시작송으로 많이 불려졌는데요. "모이자!"라는 신호로 말이에요. 특히 80년대 초반에 시작송으로 많이 불려졌구요. 70년대 전반에는 어떤 노래를 시작송으로 불렀는지 당시 선배들에게 여쭤봤더니 가곡 '선구자'였다고 해요. 참 재밌죠?
  
  '흔들리지않게',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새벽'의 노래로 들어보시겠습니다.
  
  '흔들리지않게'를 이렇게 기타반주로 듣는 것도 굉장히 낯설죠? 데모현장에서는 반주없이 농민가 부를 때처럼 박수치면서 불렀습니다. 뒤에 나오는 "민주 올 때까지 민주 외쳐라" "통일 올 때까지 통일 외쳐라" 하는 부분들은 나중에 가사가 붙은 거구요. 원래 복음성가에는 이런 가사가 없습니다.
  
  당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운동권 학생들의 일화가 유명한데요.
  
  일례로 강성인 모 신학대학에서 데모대가 나왔다고 하면 아무리 최루탄이 터져도 스크럼이 끊어지질 않았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놀랍죠. "재네들은 뭐야?" 이랬으니까요. 이 학생들이 잡혀가서 배후가 누구냐면서 고문을 받잖아요? 그럼 "하나님요." 이랬다고 그래요. 공안당국에서는 정말 골치아픈 학생들이었습니다.
  
  두번째 곡은 복음성가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어요. 복음성가라고 하는게 찬송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교회권에서 많이 불려진 노래인데요. 이런 노래가 서양에서 특히 미국의 인권운동 흑인운동에서 많이 불려지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이거든요.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아주 대표적인 1960년대 미국의 사회운동권에서 불려졌던 노래이구요. 왠만한 포크송가수들은 다 불렀습니다.

밥딜런, 존 바에즈, 피터 폴햄메리 등등요. 꼭 운동권 사람들만 불렀다기 보다는 유명하고 대중적인 노래였습니다. 전 이 노래를 고등학교 영어선생님한테서 배웠는데 그 선생님이 특별히 사회의식이 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노래가 일단 쉽거든요. 이 노래 역시 교회권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다시 대학가에 퍼지면서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던 노래들이 묘하게도 녹음본으로 남아있는게 거의 없어요. 녹음본으로 하기에도 너무 쉬운 노래라고, 일부러 퍼뜨릴 필요조차도 없는 너무 기본적인 노래라는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어로 녹음된게 없어서 아쉽게도 오늘은 존 바에즈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아주 맑디맑은, 양희은의 음색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 바에즈의 목소리로 들으시겠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며 이땅의 민주화를 외치다?
[노래여 나오너라 9]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은 정통 찬송가 두 곡을 소개해드릴께요. 찬송가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민중가요 향유자들이 이 노래들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먼저 소개해드릴 '우리의 믿음 치솟아'라는 노래는 교회다니시는 분들도 자주 부르는 노래는 아니에요. 그런데 대사회적인 투쟁을 했던 사람들에겐 굉장히 익숙한 노래죠. 가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우리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사는것은 이 세상에 뜻없이 불의에 무릎을 꿇거나 악한 사람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무관하게 그냥 불러도 가슴이 숙연해지는 그런 노래였습니다. 아주 희한한 경험이었다고 할까요? 70년대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학생들이나 사회정의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그런 의미로 불렀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중적인 집회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죠. 총학생회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긴급조치시대였기때문에 모든 옥내외 집회는 반드시 사전허가를 맡아야 했어요. 그런데 관혼상제 또는 종교행사는 미리 허가를 맡지 않아도 됐거든요. 해서 '동일방직해고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등의 형태로 수많은 집회들이 열렸습니다.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의 앨범중에서 독창곡으로 들어보시겠는데요. 이 노래는 늘 합창곡으로 불러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독창곡으로 불러주니까 종교적인 색채가 덜 하죠.
  
  다음 소개해드릴 노래는 역시 찬송가입니다. '묶인손들의 기도'라는 노래인데요.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죄에 묶여 있잖아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부터는요. 그 죄라는 것을 넓은 의미로 확대하자면 그 당시 1970년대 사회상황 혹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도 어떻게 보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갖게되는 커다란 죄의 한 부분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를 갖고 있는 분들이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정치적 민주주의 정도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1985년 민중문화운동연합에서 녹음을 했구요. 노래모임 '새벽'이 불렀어요. 저도 사실은 이 당시에 노래모임 '새벽'의 회원이었어요. 이 노래를 녹음하는 현장에 저도 있었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당시 이들 노래 말고도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주 부른 찬송가가 몇곡 더 있습니다. '어느민족 누구에게나'라는 찬송가는 이장호감독의 '바보선언'이라는 영화에도 삽입이 됐는데요.

어떤 분들은 '어우동'이라는 영화를 먼저 떠올리실 수도 있는데요. 이장호 감독이 74년 '별들의 고향'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그리고 얼마 안돼서 대마초사건으로 감옥에 갔다오면서 사회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구요. 그 다음 80년대 초반에 나온 작품이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둠의 자식들2'를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는데 계속해서 허가가 안났어요.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을 쓰지 말라는 거였죠. 그래서 이장호감독이 "그래 나 바보다"라는 심정으로 영화 '바보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영화배우 이보희씨와 지금의 문화부장관이 된 김명곤씨가 주인공입니다. 동칠이와 육떡이라는 두 떨거지가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여의도광장에서 거의 발광하는 춤을 추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바로 '어느민족 누구에게나'라는 찬송가였습니다.
  
  "왜 우리는 맨날 이러고 살아야하나? 이 억압을 벗어나기위해 우리는 이제 결단을 해야한다" 이런 메시지를 담고있는 노래인데요. 기독교적인 신앙의 문제가 새로운 해석으로,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때가 바로 197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이들 노래는 찬송가책에 들어있는 정통 찬송가였구요. 데모하는 사람들이 부른 찬송가가 아닌 복음성가들은 이보다 더 많았습니다.
  
  '가라모세'라는 노래는 미국에서 흑인영가로 많이 불렀구요. 영화 '바람과함께 사라지다'에서 노예들이 끌려가는 장면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혹은 '춤의 왕'이라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춤의 왕으로 보는 거죠. 우리는 예수를 엄숙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예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우리 민중과 함께 놀고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플라스틱예수'라는 노래도 있었어요. 여러분, 추억의 광고중에서 '오란씨' 광고 아시죠?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손에 담아드려요~"라는 광고요.
  
  이 광고에 쓰인 음악은 원래 미국에서 인권운동과정에서 나왔던 노래입니다. 음악만 갖다가 써서 우리나라에서는 CM송이 된 거죠. 내용은 그런거에요. 데모를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미국의 감옥은 칫솔같은 것도 다 나오고 취사도구도 좀 있대요. 그 칫솔로 렌즈의 불같은 걸로 녹여서 십자가를 만들어서 재소자들이 신앙의 상징으로 플라스틱 예수를 품고 있는 거죠. "나는 괜찮다. 고향에 못돌아가도 나에겐 플라스틱 예수가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백치아다다' 를 부르며 데모꾼들은 무슨생각을 했던걸까?
[노래여 나오너라 10]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은 아마 여러분께서 "우와 이런 노래도 민중가요로 들어왔나?" 이런 생각을하시게 될거예요. 지난주에 찬송가 들으시면서도 그러셨겠지만 아마 오늘은 더하실거예요.
  
  노래를 지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노래들인데요. 결국 민중가요는 수용자, 향유자들이 만든다는 거죠. 그 작가가 노래를 어떻게 지었든지 상관없이 수용자들이 그렇게 불러버리면 그 노래는 또다른 색깔을 입는겁니다. 물론 약간의 여지는 있겠죠. 어느 구석엔가에.
  
  하지만 전혀 얼토당토않은 노래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민중가요의 범주로 들어온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충분히 그에 해당하는 노래를 얘기해드릴까해요.
  
  '백치아다다' 라는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일제시대 지어진 계용묵의 소설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실거예요. 아다다라는 말을 못하는 백치끼가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결혼실패를 거듭하다가 남자도 못믿고 아무것도 안믿게 되죠.
  
  어느날 굉장히 좋은 남자를 만나서 가슴깊이 사랑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쩌다가 돈이 생깁니다. 여자는 불안해지죠 돈만 생기면 사람들이 변하고 또 그녀의 행복이 깨질까봐 겁이 납니다. 이 돈을 버려버리는데 이걸 목격한 남자가 너무나 화가나서 아다다를 살해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이래저래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졌어요. 195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여주인공이 나애심씨였어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1980년대에 '디디디' 라는 노래를 불렀던 김혜림씨요.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나애심씨입니다. 나애심씨는 영화배우이자 가수이기도 했는데 '미사의 종' '과거를 묻지마세요' 라는 노래도 유명하죠. 나애심씨가 '백치아다다' 의 주제가도 직접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대중가요가 70년대의 민중가요로까지 들어온걸까요?
  
  결국은 민중가요를 불렀던 그 당시 학생들의 심리 속에는 그냥 흔해빠진 사랑타령이 아닌 뭔가 이야기 거리가 있고 고통이 있는 노래는 흡수를 하려는 뭔가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노래는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하고있기때문에 더더욱 대중가요치고는 이야기가 풍부하고 단순한 사랑과 이별이야기로 치부될수없는 그런 내용을 담고있었죠. 즉 재해석의 꺼리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특히 이 노래가 50년대의 인기로 끝나지않고 6~70년대까지 살아남았다는게 중요하다고봐요.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음반을 사서 듣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를 기억하고 계속 불러준 사람, 즉 매니아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것들이 70년대 후반까지 왔구요. 또 어디선가 이 노래를 들었던 운동권 대학생들이 좋다고 불렀던겁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 노래가 민중가요로 정착이 되버렸어요. 당시 이 노래를 부를때 '백치아다다' 라는 작품을 생각하면서 부르기도 했겠지만 이런 느낌도 있었던것같아요.
  
  "말 못하는 아다다여" 이 구절에서 애절함이 있었거든요. 말 못하는 그런 당시 시대에서 아다다가 곧 민중의 분신이었다고나 할까요?
  
  실제 작품안에서의 아다다와는 무관하게 그 당시의 말 못하고 사는 그 상황과 묘하게 동일시되는거죠. 한 구석 뭐라도 있으면 그것이 재해석되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이 시대를 이야기하는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김동진씨입니다. 가곡 '가고파' 의 작곡자죠. 그런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치아다다' 이 노래는 대중가요중에서도 노래가 멋있다고나할까요? 선율이 유려하고 스케일이 큽니다. 영화 '백치아다다' 의 주제음악을 직접 맡았습니다. 이 노래가 죽지않고 대학가에서 계속 불리니까 80년대에 가수 문주란씨가 자신의 음반을 내면서 담기도했습니다.
  
  학생들은 이 노래를 나애심씨나 문주란씨의 음반을 통해서 배운게 아니라 써클선배들을 통해서 주로 들은거라 노래들도 제각각으로 불렀어요. 특히 "아다다여.." 하는 부분에는 그 어려운 꺾임이 있잖아요? 나중에 제가 악보를 채보해보니까 이 학교 악보 다르고 저 학교 악보 모두 달랐어요. 그야말로 구전돼왔던 노래죠. 문주란씨의 목소리로 들어보시겠습니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 을 아시나요?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흘렸네"
  
  이 노래도 민중가요로 불렀습니다. 물론 개사를 해서 말이죠.
  
  "이 땅위에 자유오거든 날 불러주오 이 땅위에 평등오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자유 오지않고 방망이소리 최루탄 연기에 눈물흘린다" 이런식으로 불렀습니다. 자유도 붙이고 민주도 붙이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작곡을 못해서 민중가요가 안만들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는건 다 핑계가 될수도 있죠. 부르고 싶은 욕구만 있다면 민중가요, 노래는 생기는겁니다.
  
  이렇게 그냥 떠돌아다니는 노래들이 이래저래 들어오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대학가에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구전가요가 참 많았어요. 군대를 통해서 들어온 구전가요도 있었는데 야한 노래도 있었죠.
  
  당시 운동권문화라는 것은 남성들의 문화였거든요. 당시 형사들이 학생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색시집을 같이 간다든가 이러기도 했거든요. 이렇게 성인남성들의문화가 대학에 많이 들어와있었어요.
  
  또 이런 구전가요도 있었어요. 30대초,중반정도의 남성분들은 아마 이 노래를 아실거예요.
  
  "소령중령대령은 짚차도둑놈 소위중위대위는 권총 도둑놈 하사중사상사는 모포도둑놈 불쌍하다 일이등병 건빵도둑놈"
  
  기가 막히죠. 군대의 계급화된 비리를 이렇게 단 넉줄로 요약할수있을까요? 명작에 속하죠. 이런 노래들은 입에서 입으로 살아남는것이거든요.
  
  구전가요나 민요가 좋은것은 작곡자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여러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좋은부분들이 모아져서 살아남았기 때문이거든요. 십시일반으로 명작이 만들어지는겁니다. 주체적으로 수용하니까 우리의 노래가 되는것입니다. 박인수의 음성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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