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PageViews   Today : 4 Yesterday : 190 Total : 5760904
Counter Status   Today : 4 Yesterday : 35 Total : 419092
조회 수 261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소설의 시대가 가고 시의 시대가 왔다..'광주' 를 노래하다
[노래여 나오너라 31]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광주항쟁을 계기로 창작자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해드렸었는데요. 오늘은 광주 5월과 관련된 노래 두 곡을 갖고 왔습니다.
  한곡은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히 알구요. 또 한 곡은 외국곡을 가지고 가사를 바꿔부른 형태의 노래인데 누가 가사를 지어서 퍼뜨렸는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그런 노래입니다.
  
  첫 곡은 '부서지지 않으리' 라는 노래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계신 곡은 아마도 안치환의 '노스탤지어' 라는 음반에 수록된 곡일거예요. 락 스타일로 편곡해서 실은 곡인데요. 오늘은 원곡의 느낌이 나는 음원으로 들려드릴까 해요.
  
  원래 이 곡은 김준태 시인의 시입니다. 원래 광주가 고향이신 분이구요. 80년 광주항쟁 직후에 '광주여 우리들의 십자가여' 라는 시를 실어서 많은 주목을 받은 시인이었습니다.

시인들은 또 얼마나 충격이 심했겠습니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이었을 거구요. 80년 광주를 지나고 나서 한동안 광주이야기, 그 이후 들어선 군부정권 등 상황의 변화를 담은 소설이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당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소설이 84~5년 까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참 희한하죠. 그런데 한편으로 시는 왕성하게 생산됐습니다.
  
  당시 '소설의 시대가 가고 시의 시대가 왔다' 라는 얘기들을 했었는데요.
  
  지금 돌아보면 그런 것 같아요. 80년 광주항쟁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소설이라고 하는 건 특히 그 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거리가 있어야 됩니다. 뭔가 정신을 좀 차려야 된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정도였죠. 내가 겪고있는 이 시대의 실제 이야기들을 쏟아놓고는 싶지만 소설의 형태로는 쏟아놓을 수 조차 없죠. 검열에 걸리니까요. 그래서 80년 전반까지는 주로 시가 이런 새로운 욕구를 담아내는 장르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그 사건을 사건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 시가 딱 그래요.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닷속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 살아가며 끝없이
  파란 불꽃을 퉁긴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이 시는 어떻게 보면 쓰여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광주항쟁 당시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시가 쓰여졌을때도 그랬을거구요. 그 시대를 사는 비판적 지식인이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아는 겁니다. 이 시에다 곡을 붙였는데요. 당시 이대 노래패 '한소리' 활동을 했던 이미영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노래가 좀 어려워서 대중적이지는 못한 노래였습니다. 노래팀들이 공연할 때는 참 많이 불렀죠.
  '민문연' 87년 음반에서 들어보시겠습니다.
  
  두 번째로 들려드릴 노래는 여러분들이 80년 광주를 떠올릴때 맨 먼저 부르게 되는 노래일거예요. 흔히 '오월의 노래2' 라고 부르기도 하는 노래인데요.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도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기 때문에 학교마다 다 다르게 불렀습니다. 또 제목도 없었어요. '미셀 폴라네프' 라는 샹송가수의 노래가 원곡이구요.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그 당시 조금씩 라디오를 통해서 우리 귀에 조금은 익숙하기도 했던 노래였습니다.
  작곡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있는 노래에다 하고싶은 말을 갖다붙인 그런 노래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장 직접적인 언어로 충격적으로 광주항쟁을 그린 노래가 됐죠. 가사가 너무 끔찍해서 당시 저희는 과연 이 노래를 입을 벌려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잖아요.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이하 생략)
  
  가사를 누가 지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게 그리 큰 의미는 아닐것 같습니다. 분명히 어느 대학생이었거나 광주항쟁의 참상을 어떻게든 목격하거나 들었던 사람이 그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썼겠죠. 적어도 제가 생각할때는 예술계 근처에 계셨던 분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정말 살떨려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쓰지는 못합니다. 작품을 많이 만들어보지 않은 아마추어의 가사인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광주항쟁, 그리고 위로가 되어준 교회권 민중가요들
[노래여 나오너라 32]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은 80년대 전반의 노래중에서 조금 소홀하기 쉽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가면 좀 섭섭한 그런 노래들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그 중의 하나가 기독교 관련 노래들입니다.
  
  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워낙 엄혹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교회가 갖고 있는 영향력들은 굉장히 컸습니다.
  70년대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 관련 노래들이 진보운동의 우산이 되어줬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죠. 적어도 어떤 단체가 이상한 짓을 했다면 그 단체를 해체시킬수는 있지만 교회는 불가능하죠. 목사를 잡아가는 것도 굉장히 신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익환. 박형규 목사님 등 많이 잡혀가시긴 했지만요.
  교회권이 그 시대에 해줬던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70년대의 '흔들리지 않게' '가라 모세' 등의 가스펠 송들이 많이 불려졌구요. 또 새로운 노래들도 계속 나오고있었습니다. 80년대의 감수성에 맞는 교회권 노래들이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면 선택이 되서 불려진 모습을 많이 볼수있습니다.
  
  첫 곡은 '군중의 함성' 이라는 노래입니다.
  
  들어보시면 교회권에서 만들어진 노래라는 느낌이 딱 들죠. 4부합창으로 부르면 딱 좋을 그런 찬송가스럽습니다. 중간 가사에 또 이런 구절이 나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끝까지 가오리다."
  
  하지만 보통의 찬송가와는 확실히 다른, 즉 오랜 시련 속에서 헐벗은 군중들의 모습이 먼저 그려지구요. 이 군중들이 하늘을 향해서 뭔가를 갈구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 노래를 지은 분은 김의철 님입니다.
  
  '저 하늘에 구름따라"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 불행아' 라는 노래를 작곡하셨고 90년대 후반 이후의 양희은씨의 대부분의 곡들을 프로듀싱하신 분입니다. 교회권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노래를 지으셨고 포크음악도 꽤 하셨습니다. 교회 안 다니시는 저희 선배들은 "하늘에 계신 광주 형제들이여" 라고 개사를 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적인 노래들이 외국곡으로 들어온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라는 노래가 대표적인데요. 이스라엘의 노래가 교회권을 통해서 들어왔지만 당시 운동권들은 80년대 광주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곤 했습니다.
  
  <'군중의 함성' 가사>
  
  1. 오랜 시련에 헐벗은 저 높은 산위로
   오르려 애쓰는 군중들의 함성이
   하늘을 우러러보다 그만 지쳐버렸네
   산을 에워싼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후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끝까지 따르리라
  
  2. 저 높은 산에 언덕너머 나는 갈래요
   저 용솟음치는 함성을 쫓아 갈래요
   하늘만 바라보다 시들어진 젊음에
   한없는 지혜와 용기를 지내게 하옵소서
  

두 번째 노래는 '사막에 샘이 넘쳐' 또는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라고 불리는데요. 제목이 확실치 않습니다. 앞구절이 제목이 된 노래의 하나입니다.
  
  이 노래는 굉장히 많이 불려졌어요. 단조의 노래이기 때문에 당시 80년대 단조행진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 감수성에 딱 맞아 떨어졌구요. 또 노래가 신납니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은 별로 없었던 그 시대에 이 노래가 들어왔습니다. 가사내용은 성경의 내용이 많이 담겨있죠.
  
  민중이 주인되는 그런 해방세상이 올거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 노래가 교회권에 머물러 있었을때는 '민중이 주인되는' 등의 가사가 아니었겠지만 운동권 학생들쪽으로 흘러들어오면서 가사가 이렇게 바뀐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열심히 불려지다가 83년 이후 즈음부터는 새롭게 창작되는 민중가요들이 나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잊혀졌던것 같아요. 그런 노래들이 이 외에도 참 많죠.
  
  마지막 들려드릴 노래는 당시 소문으로 흘러다녔던 이야기로는 연세대에서 만들어진 민중가요라고 해요. 제목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이구요. 역시 첫구절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교회권의 느낌이 가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들어보면 장조의 곡이고 4부합창에 어울림직한 노래입니다. 가사 어미에 '하시옵소서' 등의 어투가 있어서 교회권의 영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권의 노래들이 너무 비투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그 만큼 절실하고 힘들었던 시대였고 또 활동을 하면 할수록 사실은 더욱 고통이 뒤따랐던 시대였습니다. 그럴때 이런 노래들은 굉장히 커다란 위안이 되어줬다고 생각이 들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고 내가 지금 흘리고 있는 이 수많은 눈물들이 내 생이 모두 끝나고 나면 모두 지워질 것이라는 메시지가 일정정도 위로가 되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80년대 초중반, 노동자들이 즐겨부른 노래
[노래여 나오너라 32]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은 역시 80년대 초중반, 당시 노동자들쪽에서 나온 노래 즉, 노동자들이 불렀거나 노동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당시는 노동자들이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장에서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하면 나를 잡아가라, 나를 짜르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노동자쪽에서 민중가요가 나오기란 굉장히 힘든 노릇이었습니다.

  70년대에도 청계피복노조 등의 튼튼한 노조에서나 나올 수 있었던 거구요. 양도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민중가요가 지식인이나 대학생쪽에서 나와서 노동자들의 야학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형태였죠.
  
  오늘 들려드릴 곡들은 노동자쪽에서 나온 노래들입니다. 학생들쪽에는 나중에 퍼졌죠. 노래를 들어보면 대학생들이 듣기에 별로 매력적일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첫 노래는 "요즘 지식인은 머리가 나빠요"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제목도 따로 없구요. 제목이 없는 이런 종류의 노래들은 개사곡인 경우가 많습니다. 익숙한 악곡에 노동자들이 노래가 필요로 해서 자신들이 직접 만든 가사를 입혔습니다.
  
  대학생들의 개사곡이 주로 원래 노래의 가사 구조를 인용한 노래들이 많다고 한다면 노동자들의 개사곡의 태반은 그냥 노래가 필요한 거였습니다. 즉 있는 노래를 뒤집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노래를 부를 곡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익숙하게 알려진 곡들을 갖다놓고 새로운 가사를 그냥 입히기만 하는 형태죠.
  
  '요즘 지식인은 머리가 나빠요’ 이 노래의 악곡은 외국곡이예요. 제가 어렸을 적부터 이 노래는 이상하고 웃기는 가사로 아이들 사이에서도 불렸습니다. 팝송 중에서 너무나 익숙해져서 원곡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막 불렀던 악곡이었어요.

  당시 노동운동을 하셨던 분들은 “**노조가 뭐 할 때 나왔던 노래네” 하고 아실 수 도 있겠는데요. 70년대 말 민주노조운동의 맥락에 있었던 분들을 통해 나온 노래였고 그것이 80년대 초중반까지도 지속적으로 불려졌던 그런 노래입니다.
  
  가사가 참 소박합니다. 요즘 투쟁가는 자본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빡센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당시 상황에서는 노래 부르는 것도 쉽지 않고 ‘훌라송’ 과 같은 주장을 알리는 정도의 구호를 담은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습니다.
  84년 민청련 음반에서 들려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들려드릴 노래는 노조활동과정 중에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노래였다기보다는 좀 더 공식적인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노총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노래입니다. '큰 힘 주는 조합' 이라는 노래인데요. 많이들 알고계시는 "글로리 글로리 할레루야" 라고 부르는 외국곡에 개사를 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70년대 우리나라에서 조국찬가로도 개사가 되서 많이 부르기도 했는데요. 노총의 주제가처럼 지어져서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많이 불려진 노래입니다.
  ‘85년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에서 골랐습니다.

  다음 노래는 노동자쪽에서 불려졌다기 보다는 어쨌든 대학생쪽에서 먼저 부른 노래는 아니어서 갖고 왔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매스컴이 모든 일상생활을 장악하지는 않은 때였습니다. 그만큼 자연발생적인 노래들이 많았어요.
  
  그 중에 고아원 아이들끼리 부른 노래들이 많았는데요. 이런 구전가요들은 슬픈 가사가 굉장히 많았구요. 또 이런 노래들이 형무소쪽으로 꽤 많이 흘러들어갔습니다. 당시 감옥을 들락거렸던 대학생 출신의 시국사범들이 거기서 그런 노래들을 배우고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경로로 해서 노동자들까지도 부르게 됐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고아' 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상당히 정돈이 잘 돼있어서 단순하게 자연발생적인 노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작곡가가 있어 보이는 노래죠. 제 생각에는 어느 이름없는 대중가요의 하나가 독특하게 이런 경로로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눈물 나도록 서정적인 노래인데요. 역시 ‘85년 노동자를 위한 노래모음 1집’ 에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광주출전가', 패배가 아닌 승리의 광주로 다가오다
[노래여 나오너라 33]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은 80년대 중반에 광주에서 만들어져서 올라온 광주항쟁에 관한 노래를 소개해 드릴까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이 그런 노래였는데요. 이 곡은 80년대 초중반 단조행진곡의 전형으로 말씀 드릴 때 들려 드렸었죠. ‘임을 위한 행진곡’ 은 82년에 음반으로 녹음이 됐고 ‘빛의 결혼식’ 이라는 노래이야기 속에 들어있던 노래였습니다.
  
  광주에서는 이런 광주항쟁관련 노래 창작 작업을 85년에 하게 됩니다. 84년이 되면 제 5공화국 정권이 유화국면, 자율화 국면을 맞습니다. 후반기로 들어서는데요. 학생회도 부활되고 제적학생의 복교를 허용합니다.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동자복지협의회 등 재야단체들이 만들어지죠. 84년 광주에서도 광주문화운동협의회가 만들어집니다. 본격적으로 이런 노래작업, 연극 등의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85년에 노래테잎을 만드는데 광주항쟁의 전 과정을 재현했습니다. 바로 ‘광주여 오월이여’ 라는 작품입니다.
  
  ‘빛의 결혼식’ 이 인물과 사건이 있는 극화된 것이었다면 이 음반은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이 음반에 광주에서 생산된 새로운 창작곡들이 여러 곡 들어가 있는데요. 이 중에서 몇몇 곡은 굉장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중에서 두 노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먼저 '에루아 에루얼싸' 라는 노래입니다.
  
  앞에서 누가 잘 쳐주기만 하면 대동판에서 썩 잘 활용될 수 있는 그런 쉬운 노래입니다. 요즘에도 집회 끝나고 대동놀이판에서 많이들 부르실거예요.
  
  당시 광주에는 노래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노래를 좀 한다는 사람들을 이래저래 마당극패들이 끌어 모읍니다. 노래팀은 없었지만 탈춤반은 70년대 말 부터 있었구요. 광주는 그때부터 마당극을 계속 만들어왔었고 수준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마당극 출신의 박영정 이라는 분이 실질적인 연출을 하신것으로 알려져있구요.
  어쨌든 마당극패의 연극적 영향이 들어와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구성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큐멘터리식으로 공연을 만드는 방식은 84년경부터 있었습니다. 노래모임 ‘새벽’ 에서 시도를 했고 좀더 앞서는 고대 노래 얼(당시 석화) 팀에서 시도를 했었습니다. 멘트하는 사람이 있고 또 시낭송을 하고 뒤로 영상물이 비춰지구요. 또 노래가 나옵니다. 약간의 촌극도 들어가구요. 이렇게 극은 아닐지라도 일관된 흐름을 가진 구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는데요. 76학번 고려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극을 하시던 표신중 이라는 분이 이런 시도를 가장 처음 했습니다. 84년부터 이런 구성의 공연들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90년대 초반까지 주류를 이뤘습니다.
  
  광주항쟁 5월18일 부터 27일까지의 전체 이야기를 이런 구성으로 담아냈습니다.
  아주 살벌한 정황속에서도 ‘에루아 에루얼싸’ 와 같은 대동판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감수성은 그야말로 광주이기 때문에 가능한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광주 출전가'를 지은 정세현 이라는 분은 본명이 문성인입니다. 90년대에 출가를 하신 이후 법명은 범능스님입니다.

요즘에도 환경, 생명, 평화 등의 내용을 담아서 노래 작업들을 하고계시는데요. 이 분은 그 당시에 대학생은 아니었구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종교계쪽에 관여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인연이 되셔서 노래를 지었습니다.
  
  이 노래는 소박하고 초보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광주를 직접 체험한 느낌 때문에 가지고 있는 전율이 있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일단 ‘광주’ 하면 짓눌리는 감정을 느끼죠. 투쟁을 못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우선합니다. 하지만 광주사람들은 함께 투쟁을 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씩씩함이 있습니다.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서울사람들에게 광주항쟁은 죽음이고 패배로 다가왔지만 이 노래를 듣고 나서 드디어 승리의 광주로 읽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세현님이 노래를 직접 짓고 노래를 부르셨는데요. 그 이후 뒤늦게 전남대 국악과에 들어가서 피리를 배웁니다.슬슬 사람들을 규합해서 80년대 말에 광주노래패 '친구' 를 결성한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통일의 나라로 가자' '어머니의 손' '우리님은 언제 와요' 등 국악적인 민중가요를 정세현의 이름으로 다수 창작했습니다. ‘광주출전가’ 정세현님의 목소리로 들어보시죠.


대학노래패 출신들, 노래 '운동' 을 시작하다
[노래여 나오너라 34]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오늘부터 드디어 전문 노래패의 이야기들을 들려 드릴까 해요. 오늘은 최초의 전문노래팀인 '새벽'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메아리’ ‘한소리’ 고대 ‘석화회’ 의 학생들이 80년대 초반에 졸업을 하죠. 직장에 들어갈 것인지 계속 노래활동을 할 것인지 기로에 섰겠죠. 이론하는 사람이었던 김창남 선생은 대학원에 갔구요. 그 즈음에 문승현씨가 노래모임 ‘새벽’ 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문승현씨는 창작공연과 관련한 일을, 김창남씨는 책을 만들고 이론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어요, 저 역시 '노래' 라고 하는 부정기 간행물을 내는 책팀에 들어갔었구요. 83년 후반기부터 모임을 갖기 시작했고 84년에 공연을 처음 해보고 또 책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학생의 신분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노래운동이라는 걸 나의 전업으로 삼고 가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가장 먼저 했던 공연은 84년 초 '가지꽃' 이라는 한돌의 노래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던 공연이었어요. 그 공연 당시는 ‘한두레’ 라는 이름을 썼어요. 아직 ‘새벽’ 이라는 팀이름이 없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84년 가을에 공연을 올릴 예정으로 여름부터 내내 공연을 준비했었어요. 그당시 핵심이슈 중의 하나가 한일문화교류 반대였습니다.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려 할 때였고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노래를 가지고 왔다갔다하던 때였습니다. 일본의 경제침투나 식민지적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굴욕적인 이런 처사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대운동이 확산됐었죠. 그래서 '또 다시 들을 빼앗겨' 라는 공연을 만들었어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으로 공연을 만들어서 2회 공연을 했습니다. 합법적인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구요. 전주에 있는 성당에서, 그리고 국민대에서 초청해서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국민대 공연을 어느 어린 아이가 조그만 카세트테잎으로 녹음을 했습니다. 객석에서 말이예요. 그래서 녹음원음이 남게됐고 이걸 가지고 재편집을 해서 1시간짜리 민중문화운동협회의 노래테잎 '또 다시 들을 빼앗겨' 로 복사를 해서 판매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테잎이 일본까지 건너갔어요. 이걸 계기로 노래테잎이 재밌구나 하는 생각을 했구요. 노래모임 ‘새벽’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테잎을 만들기 시작햇습니다. 일본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분이 일본어로 전체 그것을 녹취를 해서 일본어로 번역한 소책자가 저희 손에 들어왔어요. 그걸 계기로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걸 알게되기도 했습니다.
  
  그 공연을 위해 새로 만든 창작곡이 있었는데요. 그때 참여한 분이 나중에 ‘노찾사’ 에서 노래를 불렀던 김삼연씨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를 불렀던 김삼연씨, 그리고 김광석도 그 때가 첫 무대 였어요. 김광석이 ‘녹두꽃’을 솔로로 불렀는데 그 곡을 받아들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부들부들 떨었던 모습이 생각이 나네요.
  
  오늘은 그 공연의 창작곡인 문승현 작사 작곡의 '이 산하에' 라는 노래를 들려드릴께요. 민족의 수난사를 굉장히 스케일 크고 멋있게 지으려고 노력한 곡이죠.
  
  이 노래가 노래운동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공연 때문만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죠. 대학노래패들이 당시의 단조행진곡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구요. 하지만 그것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문승현씨가 이 곡을 지으면서 단조 서정가요 풍으로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습니다. 대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또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않는 수준에서 말이예요. 아주 화려하게 아주 잘 만들어진 문승현의 대표곡이 됐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김삼연씨구요. 노래 뒷부분 코러스에 나오는 목소리는 ‘노찾사’ 1집에서 ‘갈 수없는 고향’ 을 불렀던 박미선씨와 김광석입니다.

  다음 들려드릴 노래는 비슷한 분위기의 곡인데 스케일은 조금 작습니다. 급하게 만들어서 그랬는데요. 당시 택시노동자였던 박종만씨가 분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어요. 전태일 열사 이후에 분신자살한 열사들이 굉장히 많은데요.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추모회때 불러야 될 노래가 좀 급하게 필요해서 ‘동트는 그 날까지’ 라는 박종만 추모곡으로 지어진 곡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이 산하에’ 처럼 유장한 단조의 서정가요로 만들었고 훨씬 더 편하고 조금 더 대중적으로 지으려고 노력했던 곡입니다. 역시 문승현 작사작곡입니다.


노래모임 '새벽' 에 새로운 창작자, 이성지가 등장하다
[노래여 나오너라 35]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주부터 노래모임 '새벽' 의 이야기를 하고있습니다. 전문노래운동팀들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데요. 오늘은 '새벽' 이 80년대 중반에 지었던 노래 두 곡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난 주 두 곡이 모두 새벽을 이끌고 있던 리더격인 문승현씨가 지은 곡이라면 오늘은 이성지 작사작곡의 노래입니다.

  이성지는 가명이구요. 본명은 이창학입니다. 이성지는 82학번 서울대노래패 '메아리' 출신이고 감리교청년회에서 진보적인 노래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시 들을 빼앗겨' 국민대 공연에서 기타반주로 '새벽' 에 합류를 했습니다. 꽤 여러곡의 히트곡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 만한 곡으로는 김세진 열사의 추모곡인 '벗이여 해방이 온다' 가 있죠.

  오늘은 이성지가 '4.19' 를 생각하면서 지은 노래 '사월 그 가슴으로' 라는 곡을 먼저 들려드릴께요. 좀 짤막한 노래인데요. '이 산하에' 나 '부활하는 산하' 보다는 스케일이 작지만 뭔가 탁 쳐올리는 기가 느껴지는 곡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저희는 문승현의 뒤를 이을 괜찮은 작곡가가 또 한명 나왔구나 생각했어요.
  
  이성지의 민중가요 히트곡으로는 첫 작품인 곡입니다. 윤선애의 목소리로 들어보시죠.

아무래도 이런 노래를 잘 부르는 당시의 여자 가수는 윤선애였습니다. 윤선애씨는 이성지의 메아리의 후배이기도 했고 감리교청년회 활동도 함께 했었던 아끼는 후배였죠. '벗이여 해방이 온다' 도 윤선애의 목소리를 생각하고 지은 노래 일 정도였습니다.
  
  지난주에 들으신 곡과 이 곡까지 모두 단조의 느린 노래라는 걸 아시겠죠? '새벽' 이 아직까지 단조행진곡을 짓는데 까지는 안 나간겁니다. 감수성이 안 맞는다는 거죠. 그 대신 유장한 노래는 많이 지었어요.
  
  이제 대학 취미써클에서 전문노래패로 거듭난 이 사람들이 드디어 당시 민중가요의 수용층들의 정서와 확실하게 만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있는 노래를 그냥 수집해서 노래를 불러주는 차원이 아니라 이들을 위해서 뭔가 좀 더 정돈되고 잘 만든 노래를 보급하는 창작자의 역할을 이때부터는 확실하게 된겁니다.
  
  다음 들려 드릴 곡은 '부활하는 산하' 입니다.
  
  이성지를 굳이 문승현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스케일은 좀 작습니다. 섬세함에 있어서도 조금 밀리는 느낌이 있죠. 그 대신 '벗이여 해방이 온다' 등을 보면 좀 호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감정으로 소화하는데 있어서도 부르기도 좀 편한 편이죠.
  
  문승현의 '이 산하에' 가 남성적인 노래라면 이성지의 곡은 여자가수 쪽에 맞는것 같아요. '부활하는 산하' 는 여계숙이라고 당시 노래모임 새벽의 멤버중에 음대 성악과 출신이 있었는데요. 아주 유려한 목소리로 벨칸토 발성으로 녹음을 했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풍년가' '닐리리야' 와는 다른 진짜 민요이야기
[노래여 나오너라 36]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주까지 노래모임 '새벽' 이야기를 했었죠. 대학이 아닌 민주화운동 안에서 문화운동으로서의 노래운동을 시작했던 '새벽' 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부터 들려드릴 노래는 '민요연구회' 혹은 민요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노래들인데요.
  
  그 당시 학생 혹은 지식인대중들에게 있어서 민요는 불편한 노래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서양음악에 익숙해진 세대였습니다. 1930, 40, 50년대..특히 30년대에는 놀랍게도 트롯트보다 민요가 훨씬 편한 노래였습니다. 트롯트가 얼마나 쉽고 편한 노랩니까? 하지만 그 당시는 늘 민요가 있었던 사회였기때문에 민요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할 수 있는 노래였다면 트롯트는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최첨단 새련된 노래였습니다. 1960, 70년대에 오면 그 세대들이 다 끝납니다. 그렇게 민요가 익숙했던 사람들이 노인이 되버렸습니다. 80년대의 젊은 친구들은 이제 민요가 불편합니다. 민요를 갑자기 배우려면 굉장히 힘들죠. 따로 배워야되는 불편한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민요운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것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현재 취향에 기댈 수 없는 대중의 자발성에 기대할 수 없는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의식에 의해 노래를 열심히 배우고 그것에 기대어서만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이 민요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첫 곡은 '둥당에 타령' 이라는 노래인데요.
  여러분은 '민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요? 흔히 '아리랑' 을 생각하시죠. '도라지'. '닐리리야', '풍년가' 이런 노래들요. 이런 노래들은 소위 전문 연예인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유행민요' 라고도 하는데요. 어떤 지역에 뿌리를 박고있는 노래라기 보다는 전문적으로 노래와 기예를 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렀던 노랩니다.

하지만' 민요연구회' 등의 당시 민요운동은 그 민요로 고착돼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깨자는게 아주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진짜 민요의 뿌리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 즉 노동요 혹은 의식을 위해서 부르는 노래,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아니면 해당 지역에서 특별한 기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착적으로 그 마을에서만 부르는 노래들이 진짜 민요라고 생각을 한겁니다.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야말로 학교에서나 방송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민요들말이예요. 삶과 생활과 함께 있는 노래를 민요라고 생각한 겁니다.
  
  원래 민요운동 그리고 '민요연구회' 의 뿌리는 마당극운동입니다.
  
  70년대에 탈춤 마당극운동이 있었는데 마당극운동을 했었던 사람들이 80년대에 와서는 여러장르로 분화가 되죠. 이 당시 제가 기억하는 것 중에 굉장히 재미있는 여러가지 실험들이 있었는데요. '진도아리랑' 을 부르면서 마치 '꼭지점댄스' 를 추듯이 삼박자춤 같은걸 추고 그랬습니다. 탈춤 사위의 원형을 응용한 이런 방식의 춤이 유행하기도 했죠. 탈춤체조라는 것도 유행했습니다. 우리가 왜 어어로빅만 해야되는냐 생각하면서 탈춤동작을 응용해서 체조를 만들어서 보급도 했습니다. 70년대의 마당극운동이 이후의 문화운동을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보고가 된 셈이구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민요운동이었습니다.
  
  민요운동을 처음 주창하고 끌어나갔던 사람이 류인렬이라는 분입니다. 현재는 시민방송에 계십니다. 마당극을 연출도 하고 직접 대본을 쓰기도 했었는데요. 1980년대 초반에 '판놀이 아리랑고개' 라는 마당극을 연출했었습니다. 82년즘부터 슬슬 후배들을 모아서 작업을 시작, 84년에 '민요연구회' 라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교사, 시인, 국악과 학생 들을 모아서 민요를 새롭게 계승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합니다. 83년에는 대학에 민요반을 만들었습니다. 후배들을 추동해서 서울대 민요반을 만들고 이런 기세로 여기저기 대학에서 민요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85년. 86년경에 만들어진 대학노래패들은 민요반과 노래패를 겸한 노래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기타도 치고 북도 치고 하는거죠.

  이런 흐름속에서 '둥당에 타령' 을 들어보시겠는데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유행민요들에 비해서 삶의 애환이 진솔하게 들어있습니다.' 둥당에 타령' 은 줄거리가 있는 서사민요는 아니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당시 사람들의 삶이 머리속에서 그려집니다.
  
  그 당시 강습을 했던 노래중에서 '등짐 노래' 의 가사를 볼까요? "바늘같은 허리에다 태산같은 짐을 지고 이 고개를 어이 넘을꺼나" 또 '비타령' 의 가사를 보면 정말 기가막힙니다. "어디를 갔다 이제 왔나 옥중 춘향이 임 만난듯 7년대한에 단비로세" "비를 맞아도 나는 좋고 밥 아니먹어도 배가 불러" 이런 가사들은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서는 못 나오는 가사죠. 지금 들으실 '점아점아 콩점아' 라는 노래는 역시 민요연구회에서 열심히 발굴해서 퍼뜨린 노래중의 하나입니다.


'민요연구회' 의 뒤에는 항상 시인들이 있었다
[노래여 나오너라 37]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주부터 민요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습니다.
  민요운동 초기에는 있었던 기존의 민요를 열심히 발굴하고 배우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점아 점아 콩점아' 와 같은 국악식으로 된 민요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만들어진 ‘독립군가’ 들도 함께 발굴해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드디어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민요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창작민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84년에 ‘민요연구회’ 가 만들어지고 한달에 한번 ‘민요의 날’ 이라는 행사를 했습니다. 부지런히 대중과 접하는 활동을 하면서 대중회원들을 늘려갔습니다. 강습하고 테잎도 만들고 창작민요도 만들고 그걸 학교로 보급하는 활동들을 했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노래는 민요연구회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보급된 창작민요 두 곡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텐데요.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라는 노래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곡은 원래 하종오 시인의 시입니다. 하종오 시인은 1980년대 초, 중반에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했고 5월 광주에 관련한 시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 시에 곡을 붙인 분은 최창남 이라는 분입니다. 국악전공은 아니구요. 당시에 전도사 활동을 하셨고 지금도 군포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목사입니다.
  이 분이 지은 노래가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노동의 새벽’ 의 곡을 쓰셨습니다.
  
  판소리에서 놀부 심술타령의 대목의 일부분을 인용한 노래인데요. 그런데 왜 하종오 시인이 하필 놀부이야기를 끌고 왔을까요? 풍자적으로 시대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고 대중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겠죠. 가사를 보면 참 우울한 노래인데요. 이걸 민요풍으로 지으니까 또 신나게 부를 수 있습니다.
  ‘민문연’ 85년 6집앨범 ‘우리가락 좋을시고’ 에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가난뱅이 등 치고
  애비 없는 아이들 주먹으로 때리며
  콧노래 부르며 물장구 치며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어절씨구 침묵의 바다
  호박에 말뚝 박고 똥 싸는 놈 까뭉개며
  애 밴 년 배 차대고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저 놀부 떡 들고 덩실 춤춘다.
  
  
  다음 들려드릴 곡은 ‘돌아가리라’ 입니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는 어떻게 보면 어디 있다가 그냥 굴러들어온 노래인 느낌이 없지않아 있는데요 .

‘돌아가리라’ 는 ‘민요연구회’ 가 훨씬 조직적으로 만든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악인들을 모으고 당시에 관여하고 있던 시인들을 추동해서 말이죠.    
  이 노래는 신경림의 장시 ‘세재’ 라는 서사시의 일부분을 인용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조선후기의 민란에 관한 내용을 담은 시입니다.
  신경림 선생님은 민요에 대한 관심이 참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민요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점점 민요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됐습니다. 주도적인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앞에서 대들보격으로 받쳐주는 분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행사 때 마다 항상 오셨고 시도 주고 그러셨죠. 후에 ‘민요기행’ 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내오기도 했습니다.


'민요연구회', 분단과 광주를 노래하다
[노래여 나오너라 38]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이 '민요연구회' 는 가능하면 우리시대의 시를 우리가락으로 창작하고 보급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역시 창작민요 3곡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곡은 '그리움 가는길 어디메쯤' 이라는 곡이예요.
  
  '민요연구회' 가 활동을 해나가면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돌아가리라' 와 같은 이른바 센 노래를 만들수 있었죠. 초기에는 '둥당에 타령' 같은 노래로 머물고 있다가 조금씩 사회적,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기 시작합니다. 뒤로 갈수록 분단, 광주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시 까지 오는거죠.
  
  지금 우리시대의 가장 아픈이야기를 하는 것이 민요정신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은 광주항쟁을 직설적이진 않지만 묘하게 연상시키는 시입니다. 아주 서정적인 국악적 선율에 얹혀진 노래인데요. 민요연구회 3집앨범에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움 가는 길 어디메쯤' 듣기
  
  두 번재 들려드릴 곡은 제목부터가 광주항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주천' 이라는 노래인데요. 박선옥 시인의 시에다 곡을 붙였는데 당시 곡을 붙인 분들은 모두 당시 국악계 내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어서 실명을 밝히지는 못하셨습니다.
  
  이 노래를 정말 잘 부른 또 한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정태춘씨입니다.
  
  제 기억으로 정태춘씨는 그 전까지 계속 가요 활동만을 하시다가 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나서 부터 집회장에 슬슬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냥 관객, 참여자로 얼굴을 나타냈다가 우연히 그렇게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사람들은 보통 '촛불' 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만 정태춘 씨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노래는 음반사서 그냥 부르시구요" "여기서는 촛불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나서 '광주천' 을 부르는 겁니다.
  
  대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 대목에서부터 감격을 했던것 같아요. 음반으로 발표되지도 않은 노래, 우리만 알거라고 생각했던 노래들을 불러주면서 일종의 연대감이 생겼다고 할까요?
  이렇게해서 최근의 평택투쟁까지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죠. 오늘은 민요연구회의 곡으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앞의 두 곡이 광주에 관련된 노래였다면 이번에 들려 드릴 곡은 분단에 관한 노래입니다. '엉겅퀴야' 라는 노래입니다.
  시는 민요연구회 활동에 열심히 앞장서 주셨던 민영 선생님의 시입니다. 신경림 선생과 함께 '민요연구회' 활동에 끝까지 가장 열심히 참여하셨던 선생님입니다.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을 잃고 홀로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잡고 머리위에 두건쓰고
  곰방머리 주저앉아 부르나니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한탄강변 엉겅퀴야 나를 두고 어딜갔소
  쑥꾹소리 목이메네 엉겅퀴야 엉겅퀴야 철원평야 엉겅퀴야
  난리통에 서방을 잃고 홀로사는 엉겅퀴야
  
  민영 선생의 고향이 철원이기도 합니다. 엉겅퀴는 꽃이기도 하고 엉겅퀴처럼 아주 억세게 살아가는 여인네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엉겅퀴는 실제로 봐도 아주 우악스럽게 자랍니다. 빨간보라색 쯤 되는 연지색 꽃이 피는데요. 대가 올라올때 보면 대 하나가 보통 3~4cm정도로 쭉쭉 기세좋게 올라옵니다. 그러면서도 꽃 자체는 아주 예쁘죠.
  
  민중의 심성이나 감각은 마냥 이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주 그악스럽고 꿋꿋하게 한탄강변에 뿌리박은 모습으로 대신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민요연구회 3집 앨범에서 듣겠습니다.


'뽀뽀뽀'가 '뿅뿅뿅'으로 바뀐 사연
[노래여 나오너라 39] 이영미의 민중가요 이야기 - 80년대 중반의 개사곡


  오늘은 당시 유행했었던 ‘개사곡’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요즘에는 ‘노가바’ 라고 많이 부르죠. 자연발생적으로 가사를 바꾼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개사곡’ 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런 것을 교육과정으로 집어넣기 시작하면서 흔히 ‘노가바’ 라고 부르기 시작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은 그 당시에 굉장히 유행했었던 노가바 ‘현상’ 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노가바’ 혹은 ‘개사곡’ 의 음원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아쉬운 대목인데요. 민중가요 노래팀들이 노래 테잎을 만들 때 굳이 웃기는 개사곡까지 넣어서 테잎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연도로 볼 때 84, 5년 즈음에는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노가바가 생산됐습니다.
  
  아마 83년 즈음이었을 거예요. 제가 다닌 고려대학교 앞에 전자오락실이 생겼었어요. 대학생들이 매일같이 거기서 갤러그를 하고 있는거예요. 만화방도 생기기 시작했구요. ‘대학 망했다’ 이런 말들이 나오고 그랬죠. 이를 풍자하고 개탄하는 노래들이 또 금방 나왔습니다. 여러분 ‘뽀뽀뽀’ 노래 아시죠? “아침에 학교갈 때 뿅뿅뿅 저녁에 집에 갈 때 뿅뿅뿅 만나면 반갑다고 뿅뿅뿅 내일이면 또 만나요 뿅뿅뿅” 이렇게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대학생들은 뭔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이 당시 유명했던 개사곡 중에는 이런 노래도 있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노래를
  ‘고대는 짭새 땅’ 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그 당시 학원사찰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대학교 안에 형사들이 드글드글 했었어요. 벤치에 두 명씩 앉아있고 아침 8시만 되면 사복형사들이 교문 앞에 줄을 서고 조회를 서요. “지금 학교 현실이 이러한데 고대가 무슨 학생 땅이냐” 이런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독도는 우리땅’ 을 개사한 노래가 나왔습니다.
  "성북서 동남쪽 택시타고 15분 영원한 짭새의 고향 고대생이 제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고대는 짭새땅" "스쿨버스 세대에 짭새차는 열두대... 고대생이 제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고대는 짭새땅" 이렇게 바꿔 불렀습니다.

오늘 처음 들려드릴 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가보위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으로 올라서고 얼마안되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아주 초기의 개사곡인데요. 가수 현숙의 ‘정말로’ 노래 다 아실겁니다.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 대통령이 되었네요 정말로" 대통령이 화자가 되서 역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그런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공연에 써서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 놓은 공연이 있었는데요.
  노래모임 ‘새벽’ 의 '또다시 들을 빼앗겨' 라는 공연입니다.
  이 공연 중에서 전두환 정권이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히로히토를 방문하고 국빈방문했던 일을 풍자한 개사곡을 넣었습니다.
  참고로 이 노래는 제가 불렀습니다. 제가 솔로로 부른 유일한 곡이예요. 앞뒤로 엄청나게 파진 티셔츠를 입고 빨간색 바지에 머리에는 빨간색 스카프를 묶고 막춤을 추면서 불렀습니다.
  이 공연에서 김광석도 조용필처럼 흰 스카프를 목에 길게 늘어뜨리고 '비련' 의 개사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과의 문화교류하면 생각났던 사람이 조용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노래팀이 공연을 할 때 한곡 정도는 좀 웃기는 노래를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개사곡들이 쏟아지는데요.
  
  ‘싼타루치아’ 라는 노래의 가사를 '니 배만 고프냐 내 배도 고프다 쌀 털러 가자" 라고 바꿔 불렀습니다. 재밌죠?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라는 노래를 “폭력 폭력 씨를 말리자... 저 대머리를 간지러주어라”이렇게 바꿔 불렀습니다.
  
  또 'J' 라는 노래도 노가바를 했었는데요. "J, 아홉시 뉴스에 J, 그대 얼굴 나오면 난 테레비 끄고서 난 차라리 무협지 보겠네"
  여러분, ‘땡전뉴스’ 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 당시 모든 뉴스의 맨 앞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이 들어가요. ‘땡전뉴스’ 다음에 나온 게 ‘땡노뉴스’ 였습니다. 이를 비꼬면서 풍자한 노래들입니다

  이런 풍자적인 개사곡을 만드는 유행이 번지고 나니까 이후 노래팀들이 공연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대곡이라고 할 수 있는 개사곡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런 노래중에 수작 중에 수작인 노래로 꼽을 수 있는 노래가 있는데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라는 노래를 '군림한자의 고독' 으로 제목과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화자는 전두환의 입장입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이 공연을 할 때 이 노래를 불렀었는데 한번 들어보시겟습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앉아서 뭔가 스트레스를 풀기위해서 개사곡을 창작한 것과 달리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교육을 하기 위해 만든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림이나 노래 등 문화적 기제를 통한 교육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알고 있는 노래를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 부른 정도이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노래 중의 하나인 남진이 불렀던 '가슴아프게' 를 농민의 노래로 바꿔부른 개사곡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80년대 노래패 공연양식의 변화
[노래여 나오너라 40] 이영미의 민중가요 이야기


  지난주에 ‘정말로’ 의 개사곡을 들으셨는데 “당시에는 이런 노래들도 공연에 포함됐구나”“요즘의 공연내용과 많이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하셨을텐데요. 1983년~85년 즈음 당시 노래패들의 공연에 커다란 양식적 변화가 찾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요. 오늘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노래공연이라고 할 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노래를 그냥 나열해서 듣는 방식입니다. 서울대 ‘메아리’, 이대 ‘한소리’ 등의 대학노래패들이 공연을 했던 당시는 대중음악계의 관행을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사회자가 나와서 인사하고 멘트하고 노래소개하는 이런 방식은 노래 한 곡, 한 곡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주는 것이지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의식을 전달하기는 사실 쉽지는 않죠. 연극처럼 굉장히 복잡한 주제의식을 갖기는 힘듭니다. 노래팀은 늘 거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노래를 이전처럼 좋아서만 부르던 시기가 아니라 뭔가 이것을 통해서 복잡한 세상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겼던 시기였습니다. 운동성이라는 걸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이에 대한 발상의 시작은 당시 긴 종류의 공연은 늘 ‘극’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연극을 했던 한 멤버가 고대 ‘석화회’ 에 들어가서 83년에 독특한 공연 하나를 만들었는데요. 극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을 가졌죠. 시낭송을 하고 다큐멘터리를 멘트를 입히고 영상을 쏘고 노래를 했습니다. 극적인 요소를 엮어나가면서 구성한 형식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성을 하니까 있는 시와 노래를, 논문의 한 구절등 을 인용할 수 있는 거죠.
  
  뭔가를 구성하는 노래공연을 만들어서 고려대 내에서는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던 공연이었는데요.

바로 고려대 76학번 표신중이라는 사람이 이 공연을 처음 연출하는데 이후 민중문화운동연합 사무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경기문화재단에 계십니다.
  84년에 밖에서 이 공연을 실험을 해 보는데요. 이 공연이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또 다시 들을 빼앗겨’ 라는 공연입니다. 이 공연의 녹음테잎에 영감을 받아서 ‘광주여 오월이여’ 라는 음반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 부터 이렇게 구성된, 즉 일관된 하나의 흐름을 갖는 노래공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극’ 이라고도 부르고 ‘버라이어티쇼’ 라고도 부르기도 했는데요. 저는 ‘모자이크식 노래공연’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공연의 실황을 녹음한 음반에서 오늘 첫 곡을 듣겠는데요. 좀 깁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의 내용을 담은 ‘연대기’ 라고 제목을 붙인 일부분입니다. 1925~1940년까지의 민족수난사를 다큐멘터리 멘트로 소개하고 일제시대 학살사진, 항일운동 등의 사진을 담은 슬라이드 영상이 나갑니다. 이 수난사를 뒤이어 학살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노래인 ‘금자동아 은자동아’ 라는 자장가가 나온 뒤에 학살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러기’ 까지 이어집니다. 공연실황에서 들어보시겠습니다.

  이렇게 구성을 하니까 하나하나 독립적이었던 부분들이 마치 몽타쥬가 되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하는 것처럼 새로운 의제로 정리가 되는 거죠. ‘금자동아 은자동아’ 를 불렀던 가수는 나중에 ‘노찾사’ 에서 ‘눈길 찾는 곳 어디나’ 를 불렀던 조경옥씨였고, ‘기러기’는 남성합창 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산하에’ 를 불렀던 김삼연, 그리고 김광석 등의 목소리가 서로 뒤섞여있습니다.
  
  이 공연의 구성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는데요.
  1부는 문제의 상황, 2부는 이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의 풍자적인 장면들이 나오고 개사곡도 이 부분에서 주로 배치됩니다. 3부는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구성으로 마무리가 되죠.
  80년대 대학가와 노래팀의 공연이란 공연은 거의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번째로 들려드릴 곡은 마지막 부에 배치된 곡인데요. 특별히 이 곡을 듣고 싶은 것은 김광석이 민중가요권에서 ‘녹두꽃’ 이라는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가수로 돼있는데 ‘녹두꽃’ 을 처음 불렀던 공연입니다. 이 곡을 처음 받고서 어찌나 열심히 연습을 하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네요. 이 공연에서 첫 솔로곡을 받은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공연실황의 음원을 듣고 “김광석치고는 너무 못 불렀다” 라고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숨을 헉헉거리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이 공연을 계기로 ‘녹두꽃’ 하면 김광석이 떠오르게 됐습니다.
  김광석의 음성으로 들어보겠습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조회 수 글쓴이 날짜
378 남미의 민중음악 - 새로운 노래(Canto Nuevo)를 중심으로 9622 선재 2007.02.08
377 소주 ‘처음처럼’? NO! 민중가요 ‘처음처럼’ 9377 선재 2009.02.01
376 저항가요, 그 흐름과 과제 - 오창규 (월간 예향, 1988. 5) 5519 선재 2007.02.06
375 음반 소풍가는 날 4540 선재 2009.10.25
374 알려지지 않은 오월의 노래들 - 펌 2894 선재 2009.05.24
373 "임을 위한 행진곡, 님을 위한 행진곡 아직도 헷갈리나요?" file 2852 선재 2013.06.19
372 80년대 초중반의 대중가요 2798 선재 2007.02.06
371 노래책 <노래는 멀리멀리> - 70,80년대 민중가요 750곡 수록 2714 선재 2007.10.04
370 테너 임정현의 새 음반 "아름다운 생애, 아름다운 미래" file 2660 선재 2013.01.04
»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노래여 나오너라 31~40 2610 선재 2007.02.17
368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노래여 나오너라 01 ~10 2595 선재 2007.02.17
367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 운동 2590 선재 2007.02.08
366 민중가수 윤선애 "자연의 울림 닮아가는 노래들… 상처 입은 분들에 위로 됐으면 2502 선재 2012.11.25
365 광주항쟁과 80년대 초반의 민중가요 2492 선재 2007.02.06
364 70년대 후반의 대중가요와 민중가요. 2489 선재 2007.02.0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

우리는 감로로 공양하나니 우리에게 죽음도 이미없도다 - Designed by 선재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