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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주류음악 - 민중음악 30년, 인디음악 10년>
박준흠(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전문웹진 ‘가슴’ 편집장)

음반으로서의 민중음악의 효시를 김민기 [공장의 불빛](1978)과 메아리 [메아리 1](1979)로 본다면 한국 민중음악은 어언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음반으로서의 인디음악의 효시를 배드 테이스트 [One Man Band... Badtaste](1996/BMG)와 V.A. [Our Nation](1996/드럭)으로 본다면 한국 인디음악도 어언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제 이 둘의 역사를 훑고, 서로의 작업을 평가하며,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음악적 제언과 음악외적(음악환경) 개선방향에 대한 제언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1. 한국의 인디음악 10년사

1-1. ‘인디뮤직씬’이 생성되기까지

인디뮤직씬(Indie Music Scene)은 보통 인디뮤지션, 인디레이블, 인디음반유통망, 라이브클럽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여기에 이들을 다루는 매체와 필자들이 공존한다. 한국에서는 영미권이나 일본에서 ‘문화적으로/산업적으로’ 정착된 ‘인디뮤직’의 개념이 들어와서 인디뮤직씬이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우발적으로, 특히 얼터너티브록의 전세계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너바나(Nirvana)와 같은 그런지록(Grunge Rock) 밴드의 인기 여파로 그 뿌리인 70년대 펑크(New York/London Punk)가 장르적인 재조명을 받았고, 이는 한국에서 인디뮤직이 초기에 펑크와 그런지록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즉, 인디뮤직은 ‘장르’가 아닌데도 말이다. 펑크(일반적으로 ‘런던펑크’로부터 유래된 펑크를 가리킴)가 ‘(라이프)스타일’과 ‘음악장르’ 둘을 아우르는 단어라면, 인디뮤직은 ‘태도(뮤지션쉽)’와 ‘산업’이 결합된 단어로 볼 수 있다.  

대중음악에서 뮤지션쉽과 자본간의 갈등의 역사는 길다. 진정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되고 싶어했던, 즉 자본의 논리(제작-유통-공연-마케팅)에 휘둘리지 않고 음악을 하고 싶어했던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과 같은 밴드도 초기 몇 년간은(60년대 중반) 그 태도를 고수했으나 음악활동을 영위하기 위하여 결국 메이저 음악시스템에 편입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뮤지션 스스로가 음반제작에서부터 유통에 이르는 음악생산/배급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의 뮤지션들이 언더그라운드 ‘정신’만 남고 몸은 자본가들에게 의탁한 결과 70년대에는 ‘거리의 음악’이라는 록음악 장르에서조차 ‘스타디움 록밴드’가 나오리만치 음악과 자본의 결합은 극대화되었고, 이를 두고 “록음악은 죽었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영미권에서 인디뮤직씬이 태동되기 이전인 70년대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은 없었다고 봐야한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 훌륭한 뮤지션’임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태도를 존중하자는 것이고, 그런 태도에서 뛰어난 음악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당연히 언제나 훌륭한 뮤지션은 ‘뛰어난 창작곡을 부르는 사람’을 지칭한다.)

앞서 말한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의 ‘우발적인 시작’은 첫 번째 라이브클럽이었던 ‘드럭(Drug)’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드럭은 처음부터 라이브클럽이 아니었고, 인디뮤직씬 내에서 기능하는 공연공간의 모습도 아니었다. 클럽 드럭은 1994년에 영국의 전설적인 펑크밴드 클래시(The Clash)의 [London Calling](1979) 재킷 사진이 복사된 4절지에 ‘펑크록의 이상’이 격문처럼 쓰여진 포스터를 문에 붙이고 개장하였지만 당시는 정기적인 공연을 염두하거나 인디뮤지션들의 근거지 개념은 없었다.

초기 드럭의 공간은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조그만 TV들을 소도구로 이용한 ‘바/카페’의 개념이었고, 단지 한쪽에 밴드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그믈망이 앞에 처진 작은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당시 신촌의 현대백화점 뒷쪽에 있었던 록카페들(우드스탁, 놀이를 하는 사람들, 도어스 등과 같이 매니아 취향의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때로는 자발적인 가무를 하던)의 확장된 개념의 클럽이었다. 하지만 너바나의 여파로 그런지록이 인기를 얻고 70년대 펑크가 재조명을 받으면서, 특히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사망하여 ‘그런지의 전설’로 남으면서 한국에서도 카피밴드 수준의 그런지록과 펑크밴드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연주가 수용될 수 있었던 드럭은 흔히 말해 드롭아웃(drop-out)들의 해방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공연장’의 개념만 있어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수준의 연주를 하는 밴드들(대개 헤비메틀 밴드들)은 무대에 설 수 있었지만 그 이하 수준의 밴드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브클럽이 ‘아마추어 밴드들이 공연하는 장소’는 아니고, 클럽마다 ‘오디션’을 통해서 최소한 어느 정도 연주 수준을 가진 밴드들을 무대에 세운다. 하지만 1994-1995년 당시 아마추어 카피밴드일 수 밖에 없었던 그런지/펑크밴드들도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개념’의 장소로 라이브클럽이 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인디뮤직씬이 탄생될 수 있었다.   

1995년 4월에는 드럭에서 커트 코벤인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 때를 즈음해서 ‘드럭 밴드’라는 이름으로 정기 공연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부터 크라잉 넛,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등이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크라잉 넛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럭은 점차 펑크록 중심의 클럽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럭이 펑크록의 메카로 자리잡은 것은 1996년에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있었던 모잡지 주최의 ‘스트리트 펑크쇼’에 드럭의 밴드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이 당시 보여주었던 관중들의 폭발적인 열기는 매체를 타고 전파되었고, 이런 호응을 얻어서 드럭이 처음 만든 음반이 바로 [Our Nation](1996/드럭)이었다.(이 음반에는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이 독립적인 모양새로 참여하였다.) 이게 바로 인디레이블 ‘시스템’ 이전에 만들어진 초기 인디 앨범이고, 그 해에는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1996/BMG)도 발매되었다.

1997년에는 클럽 재머스에서 [Rock 닭의 울음소리](고스락, Hot Dog!, 재머스밴드2, 청년단체, 아무밴드, 내귀에 도청장치, 악마야, 허벅지밴드, 이초롱, L.O.R, 사운드 디자인 참여)과 강아지문화예술이라는 신생 레이블에서 [One Day Tours](최희경, 갱톨릭, 기완, 강아지, 옐로우 키친, 배드 테이스트, 박현준, 민경현 참여)이라는 음반이 나오는 등 각개 약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인디레이블 시스템 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인디레이블 ‘인디’가 1998년에 코코어의 1집 [Odor]를 발매하는 것을 기점으로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생겼다고 할 수가 있다. 이후 인디레이블 ‘원년’ 멤버인 인디나 강아지문화예술이 없어지는 등 씬에 많은 부침이 있어 왔고, 아직도 보통 인디음반 제작비(자가레이블이 아닌 일반레이블 체제 기준) 손익분기점으로 얘기되는 3000장 판매를 대부분 못하고 있다.

드럭 개장 이후로는 홍대/신촌 일대에 많은 라이브클럽들이 생겨났고, 1999년에 블루노이즈(www.bluenoise.com, 1월), 웨이브(www.weiv.co.kr, 7월), 가슴(www.gaseum.co.kr, 11월)이라는 ‘독립매체’들이 생겨나면서 인디씬을 조명하는 기사와 동영상이 본격적으로 양산되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한국 인디뮤직씬이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올 2004년, 드럭 개장으로부터 따져서 ‘한국 인디뮤직 10년’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 그간 발매된 아주 주목할만한 인디음악 앨범들 (민중음악 제외, 발매일자순)
- 허클베리 핀 [18일의 수요일](1998/강아지문화예술/2004/Sha Label)
- 미선이 [Drifting...](1998/라디오)
- 언니네 이발관 [후일담](1998/석기시대)
- 99 [스케치북](1998/강아지문화예술)
- 델리 스파이스 [Welcome To Delihouse](1999/뮤직디자인)
- 노 브레인 [청년폭도맹진가](2000/문화사기단)
- 코코어 [Boyish](2000/The Boo)
- 위퍼 [Weeper](2001/원뮤직)
- 코스모스 [One and Only](2001/석기시대)
- 푸른새벽 [Bluedawn](2003/카바레사운드)
- 플라스틱 피플 [Songbags Of The Plastic People](2003/카바레사운드)
- 스왈로우 [Sun Insane](2003/Sha Label)
- 럭스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스컹크)
- 이장혁 [이장혁 Vol.1](2004/12monkeys records)

1-2. ‘인디레이블’이 필요했던 이유

처음으로 ‘인디레이블 담론’이 제시된 것은 1995년에 문화계간지 ‘오늘예감’에서였고, 인디음반이 레이블차원에서 그 모양새를 가지고 나온 것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1997년 무렵부터였다.

그런데 당시 기존 대중음악판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음반들이 잘 나오고 있었고, 그 때가 한국에서 음반시장이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 시점이기는 해도 그리 심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인디’ ‘인디레이블’이란 새로운 시스템이 당시 필요했었을까? 이유는 음악창작자, 음반제작자, 수용자(청자)가 계속 음악을 생산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었고, 그게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1992년에 서태지가 데뷔한 이래 주류음악판(메이저음반사, 공중파, 신문)에서 구조적으로 체계화 된 ‘스타메이킹 시스템’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훌륭한 뮤지션들과 그런 ‘음반 중심’의 뮤지션들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을뿐만 아니라, 주류-비주류의 간극을 거대하게 벌려 놓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김현식, 신촌블루스, 한영애 등과 같은 언더그라운드의 유명(?) 뮤지션들은 공중파방송에 나오지 않아도 신보를 발표하면 십만장 단위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고(유작이기는 해도 1991년 김현식 6집이 100만장 가까이 팔렸다는 사실을 상기할 것!), 여타 뮤지션들도 음반판매와 소극장 중심의 공연 등으로 어렵기는 해도 음악적인 재생산(차기 음반 제작)과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음반기획사들이 공중파를 중심으로 한 손쉬운(?) 매니지먼트에 골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음악소비자를 10대로 낮추어 잡기 시작하면서, 또한 주요한 구성원이 10대들인 팬덤들을 매체에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음반 중심’의 뮤지션들은 음반을 내놓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음반기획사들은 더 이상 소량으로 팔리는 음반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기 시작했고, 이는 매니지먼트 비용이 많이 들 수 밖에 없는(뮤지션 계약금, 녹음비 등의 음반제작비가 홍보비보다도 적게 책정되는) 구조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음반 홍보통로가 공중파 중심으로 재편되고, 그 공중파가 자신들의 상업적인 이익(광고수익 등)을 위하여 아이돌스타들을 중심에 놓는 편성을 음악FM방송까지 확대하면서 기존의 음반기획사들은 규모가 크던 적던 아이돌스타로 승부를 거는 양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영미권이나 가까운 일본도 음반시장의 주류는 아이돌스타군들이고, 공중파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나라들에는 라이브클럽들(일본만 해도 3,000군데가 넘는다)과 인디레이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어서 전체 음반시장에서 인디음악이 10~20%를 점유하고 있고, 그래서 ‘음반 중심’의 뮤지션들의 활동이 가능하고, 음악수용자들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한국과 다르다. 이와 같은 이유로 90년대 초반, 중반의 암울한 창작/활동 환경을 경험한 뮤지션들과 마이너제작자들이 생각한 것이 인디레이블 시스템이었고, 이는 언더그라운드 애티튜드(음악적인 진정성에 관한 문제)를 견지하고 싶어하는 뮤지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이미 그간 암울한 시기를 겪은 중견 뮤지션들에게는 늦은 일이었지만, 이제 음악을 시작하려는 (진정성을 담보한)뮤지션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일한 창작/활동 터전이 ‘인디씬’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나오는 음반들을 보더라도 ‘예술성’을 따진다면 70% 이상이 인디(비주류)씬에서 나온 음반들인 것이다.

1-3. 1998년 이후의 인디레이블 개별 탐구
(※ 김학선, 2002년 자료 from 가슴)

* 문라이즈 (www.moonrise.co.kr)
2002년 현재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대 인디레이블.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의 김민규와 노동1호(김동영)가 함께 설립한 레이블. 처음 김민규의 솔로 프로젝트 스위트피(sweetpea)의 앨범을 발매하면서 발족(?)하였으며, 김민규의 훼이버릿 뮤지션들인 스미스네 가족들(Elliot Smith, Ron Sexsmith, 그냥 Smith)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포크, 모던락 성격의 앨범들을 주로 발매하고 있다.(Where The Story Ends만은 예외)

Artists
스위트피, 토마스 쿡(Thomas Cook), 전자양, 연진, 마이 언트 메리(My Aunt Mary), Where The Story Ends, Especially When

Release
스위트피 [Never Ending Story] (2000)
V.A [I,m Not Certain, But You Are...] (2000)
토마스 쿡 [Time Table] (2001)
V.A [Moonrise Compilation 2] (2001)
에이든(Aden) [Hey 19] (2001)
론 섹스스미스(Ron Sexsmith) [Blue Boy] (2001)
전자양(Dencihinji) [Day Is Far Too Long) (2001)
Where The Story Ends [眼內閃光] )2001)
마이 언트 메리 [2nd] (2001)
EE [Ramadan] (2002)

* 마스터플랜 (www.mphiphop.com)
1993년 음악감상모임으로 시작한 마스터플랜은 1997년 12월 신촌에 클럽 마스터플랜을 개장하며 당대의 트랜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클럽으로 평가받았다. 스웨터(Sweater), 사이드 비(Side-B), 스위트피 등의 앨범을 발매하며 클럽 운영과 함께 레이블도 겸하던 이들은 마스터플랜을 힙합전용클럽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레이블로의 방향성도 모색하였다. 그동안 한국힙합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한 MP Hiphop 시리즈와 디제이 솔스케잎(DJ Soulscape), 다 크루(Da Crew), 주석(Joosuc) 등을 앨범들을 발매하였으며 외국 레이블과의 제휴, 거리 홍보 등을 통한 가장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2002년 현재 마스터플랜은 클럽운영을 접고 레이블로서의 모습에 주력하고 있다.

Artists
주석, 디제이 렉스(DJ Wreckx), 원선(Onesun), 디제이 솔스케잎, 데프콘(Defconn), 프릭(Freek), 스케줄 원(Schedule 1), 피제이 핍스(Project Peepz), 인피니티 플로우(Infinite Flow), 본 킴(Born Kim), 슈퍼사이즈(Supasize), 디제이 택틱스(DJ Tactics)

Release
스위트피 [달에서의 9년] (1999)
사이드 비 [In The Place To Be] (1999)
스웨터 [Zero Album Coming Out...] (1999)
V.A [MP Hiphop 2000 超] (2000)
디제이 솔스케잎 [180g Beats] (2000)
다 크루 [City Of Soul] (2000)
주석 [Only The Strong Survive] (2000)
데이트리퍼(Daytripper) [수집가] (2001)
V.A [MP Hiphop 2001 大舶] (2001)
주석 [Beatz 4 Da Streetz] (2001)
원선 [漁夫詞] (2002)
에스피오네(Espionne) [어쩌면] (2002)

* 카바레 (www.cavare.co.kr)
비록 유통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하더라도 카바레는 한국의 인디레이블 중 가장 독립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레이블이다. 카바레는 자체 스튜디오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사운드를 더 새끈하게 뽑아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뮤지션의 개성을 더 빛나게 할 수 있을까, 에 더 중점을 두는 레이블이다. 이런 마인드로 카바레는 이성문의 [불만]과 볼빨간의 [지루박 리믹스 쑈]를 만들어냈고, 곤충스님윤키, 레이디피쉬(Ladyfish)의 앨범들을 발매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형식적 의미에서 인디레이블이라 불리는 것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으며, 뮤지션의 감수성과 그에 대한 스타일을 존중한다. 카바레의 사이트에 가면 슬로-모션이라는 웹진과 카바레 라디오를 감상할 수 있다. (현재 그들은 카바레사운드 5주년 기념 공연과 컴필레이션 음반을 준비중이다)


Artists
이성문, 오! 브라더스(Oh! Brothers), 레이디피쉬, 마이 로우 어레이(My Low Array), 버스라이더(Busriders), 위치 윌(Witch Will),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

Release
이성문 [불만] (1998)
볼빨간 [지루박 리믹스 쑈] (1998)
은희의 노을 [Spring] (1999)
코코어(Cocore) [고엽제] (1999)
메리 고 라운드(Merry Go Round) [Merry Go Round] (2000)
곤충스님윤키 [관광수월래] (2000)
은희의 노을 [Noulpop] (2000)
레이디피쉬 [Grotesque Revolution] (2000)
오! 브라더스 [hippin' hoppin' twistin'] (2001)
오! 브라더스 [명랑 트위스트] (2001)
마이 로우 어레이 [Lo-Fight] (2002)
위치 윌 [Trip On Havana] (2002)

* 문화사기단 (www.munsadan.co.kr)
드럭을 떠난 노 브레인(No Brain)은 자체 레이블인 문화사기단을 만든다. 이들은 드럭에서 이루지 못했던 펑크공동체를 만들려 하였고, 그 후 문화사기단에 하나둘 모여든 수많은 펑크 락커들과 함께 이제 공동체의 실현을 절반 이상 이룬 듯 하다. 98년 역사적인 싱글앨범 [청춘98]을 시작으로 소속밴드들의 EP 앨범들을 발매하며 자신들의 자구책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영원한 펑크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Artists
노 브레인, 99 앵거(99 Anger), 카운터 리셋(Counter Reset), 가라사대(Karasade), 사우스 파크(South Park), 오버 스팅(Over Sting), 배다른 형제,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버닝 헵번(Burning Hepburn)

Release
노 브레인 [청춘 98] (1999)
푸펑충 [푸펑충] (19990
열혈펑크키드 [열형펑크키드] (1999)
Split(리얼쌍놈스/지랄탄 99) [마이너리그] (2000)
노 브레인 [청년폭도맹진가] (2000)
푸펑충 [Tough Like Metal] (2000)
V.A [Christmas Punk CD] (2000)
런 캐럿(Run Carrot) [Oi!] (2001)
아작(Azak) [Azak] (2001)
배다른 형제 [Half Brothers] (2001)
펑크킬라 [Animal Punx] (2001)
가라사대 [Imitation Punk] (2001)
노 브레인 [Never Mind The Sex Pistols, Here The No Brain] (2001)
노 브레인 [Viva No Brain] (2001)
글로벌 코포레이션 [Return To The 77 Punx] (2001)
V.A [Christmas Punf CD #2] (2001)
V.A [문화사기단 합동음반 제 1호] (2002)
노 브레인 [청춘 98 Remastered] (2002)

* 드럭 (www.drugrecords.co.kr)
드럭은 1994년 클럽으로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단순히 펑크 바였던 드럭은 1995년부터 드럭밴드의 공연을 시작으로 차츰 라이브 공연장의 모습을 갖추어 갔고 그해 여름 '스트리트 펑크쇼'를 개최하며 사람들에게 드럭의 존재를 확실히 알렸다. 이후 드럭은 인디레이블로서 등록을 마치고 96년 역사적인 [Our Nation]을 발매한다. 크라잉 넛(Crying Nut),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 노 브레인, 위퍼(Weeper) 등의 스타급밴드들과 함께 드럭공동체를 꿈꾸던 드럭은 크라잉 넛을 제외한 다른 밴드들의 탈퇴로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크라잉 넛을 중심으로 다시 레이블을 재정비하고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제 펑크만 하는 레이블이란 이미지에서 펑크도 하는 레이블로 좀 더 자유로와진 드럭은 마스터플랜만큼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공중파 방송에도 심심찮게 출연하는 등 이제 인디레이블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위상을 가지게 됐다.

Artists
크라잉 넛, 레이지 본(Lazy Bone), 파스텔(Pastel), 18크럭(18Cruk), 신나징(Sinna.Z)

Release
Split(크라잉 넛/옐로우 키친) [Our Nation 1] (1996)
Split(노 브레인/위퍼) [Our Nation 2] (1997)
크라잉 넛 [Crying Nut] (1998)
Split(18크럭/새봄에 핀 딸기꽃) [Our Nation 3] (1998)
크라잉 넛 [서커스 매직 유랑단] (1999)
V.A [조선펑크] (1999)
Split(레이지본/쟈니로얄) [Our Nation 4] (2000)
Crying Nut [하수연가] (2001)

* 라디오(www.radio-music.co.kr)
라디오 뮤직은 랩 사운드 스튜디오의 레코딩 엔지니어 수강생 중 몇 명이 함께 만든 레이블이다. 졸업작품 성격의 옴니버스 앨범 [해적방송]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인 레이블로 첫 발을 디딘다. 문라이즈 레이블과 마찬가지로 모던락, 모던 포크 등의 음악을 주로 다루며 미선이와 루시드 폴(Lucid Fall)로 대변되는 보다 멜로디 위주의 서정적인 음악을 지향하고 있다. 최근 루시드 폴의 라디오 게스트와 <버스, 정류장> 영화음악 작업 등으로 차츰 인지도도 넓혀가고 있다.

Artists
(라디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구 : 미선이, 루시드 폴, 스웨터(Sweater), 에브리 싱글 데이(Every Single Day)
이웃사촌 : 더 벨리(the Valley), 스위티(Sweetie)

Release
V.A [해적방송 A Pirate Radio] (1998)
미선이 [Drifting] (1998)
스푼(Spoon) [Wake Up] (1998)
허벅지 [장마오면] (1999)
서울 머더스(Seoul Mothers) [Seoul Mothers] (2000)
미선이 [Drifting Again] (2001)
루시드 폴 [Lucid Fall] (2001)
O.S.T [버스, 정류장] by 루시드 폴 (2002)

* 튜브앰브 (www.tubeamp.org)
불독맨션 이한철의 주도로 만들어진 레이블로 뚜렷한 레이블의 색깔보다는 소속 뮤지션들 각자의 색깔에 더 주력을 한다. 훵키한 애시드 사운드를 들려주는 불독맨션과 부산의 힙합 팀 BBF(Big Brothers Family), 그리고 최근 앨범을 발매한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프랙탈(Fractal)까지 서로 안 어울리는 음악을 하는 듯 하지만 의외로 튜브앰브 안에서 잘 융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계 안에서 발이 넓은 이한철의 영향으로 문라이즈, 라디오와도 교류가 활발하다.
Artists
불독맨션, BBF, 프랙탈
Release
불독맨션 [Debut EP] (2000)
BBF [서면일번가] (2001)
프랙탈 [Um Hombre Solo] (2002)

* 석기시대 (www.cosmos-net.co.kr)
석기시대는 웹사이트 없이 소속 뮤지션인 코스모스의 홈피만을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자체 웹사이트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홍보에 약간의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석기시대 소리방에서 나온 사운드들은 모두 양질의 것이다. 언니네 이발관 1집을 시작으로 코스모스의 이번 2집 앨범까지 많지는 않지만 순도 높은 모던락 성향의 앨범들을 발표하였다.

Artists
(아마도) 코스모스 (하나인 듯...)

Release
언니네 이발관 [비둘기는 하늘의 쥐] (1996)
언니네 이발관 [후일담] (1998)
코스모스 [Standard] (2000)
코스모스 [One And Only] (2001)

* 롤리팝 (www.lollipopmusic.net)
성향상으로 분류할 때 문라이즈, 라디오 뮤직과 함께 얘기가 되어야 할 레이블. 줄리아하트(Juliahart)의 드러머인 서준호가 설립한 레이블이다. 멤버들의 음악적 성향상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 비치 보이스(Beach Boys) 등의 멜로디와 80년대 동아기획, 하나음악의 감수성 등을 닮고자 하는 레이블이다. 줄리아하트의 정대욱의 군입대 등으로 인한 활동공백과 레이블의 약간은 소극적인 홍보로 아직 인지도는 미미하지만 최근 영화음악들에 줄리아하트의 곡들이 쓰이는 등 차츰 레이블과 줄리아하트의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Artists
줄리아하트, 은희의 노을. 에레나 정

Release
줄리아하트 [가벼운 숨결] (2002)

* GMC (www.gmcrecords.net)
한국의 거의 유일한 하드코어 레이블로서 소속 뮤지션들의 앨범 발매뿐만이 아닌 외국 뮤지션들의 한국공연 등도 추진하고 있다. 소속 뮤지션들 또한 한국 하드코어 뮤지션들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드 뮤지션들이 소속되어 있다. 하드코어 씬의 선구자격으로서 GMC가 대한민국 하드코어 씬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밴드들간의 커뮤니티와 애티튜드는 확고하며, 역시 앨범은 자신들의 웹사이트와 공연장, 그리고 일부 음반점에서만 판매하고 있다.

Artists
삼청교육대, 바세린(Vassline), 녹다운(Knockdown), 13 스텝스(13 Steps), 긱스(Geeks),

Release
V.A [One Family]
바세린 [Blood Thirsty] (2000)
Split(Geeks/In My Pain) [Together As One] (2001)
삼청교육대 [Veageance Is Mine] (2001)

* 스컹크 (www.skunklable.com)
스컹크 레이블은 1997년 [펑크대잔치] 1집을 발매하며 만든 국내 인디 펑크 레이블이다. 스컹크라는 레이블명은 국내 펑크밴드 럭스(Rux)의 첫 번째 자작곡의 제목을 따서 만든 이름이고 한다. 이들은 예전 [펑크대잔치]나 [3000펑크] 등의 앨범을 발표하며 인디 펑크 본연의 D.I.Y 정신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디레이블 중 거의 유일하게 유통을 메이저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유통방식으로 앨범을 판매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문공연장 스컹크헬을 개장, 매주 주말에 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장 앞에서는 스컹크에서 나온 모든 앨범들과 티셔츠 등을 유통마진 없이 저렴한 가격에 팔고있다고 한다)

Artists
럭스

Release
V.A [펑크 대잔치 1] (1998, CD는 2000)
껌(Gum) [Bogus Punk Circle] (1998)
럭스 [I Gotta Go] (1999)
V.A [3000Punk 펑크대잔치 2] (1999)
껌 [You Are So Beautiful] (2001)
Split(Skrew Attack/Propeller 21) [In Store] (2001)

* 엔 바이런 (www.n-viron.net)
벌룬앤니들과 마찬가지로 소리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실험을 해온 엔 바이런은 드럭에서 출발한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이 주축이 되어 만든 레이블이다. 드럭과는 음악적 지향점이 안 맞았던 옐로우 키친은 자신들의 레이블인 엔 바이런을 세우고 자신들과 음악적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은다. 이들은 음악적 성향, 홍보 등에서 벌룬앤니들과 유사성을 많이 보이고 있고, 이들의 최근 앨범 역시도 자신들의 웹 사이트와 (벌룬앤니들보다는 많은) 세군데의 음반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Artists
글래스 패사이드(Glass Facade), 룸(Loom), 레인자켓(Rainjacket), 옐로우키친

Release
글래스 패사이드 [Puekaw]
옐로우 키친 [Clear Fruits]
옐로우 키친 [Mushroom, Echoway, Kleidose]
레인자켓 [Rainjacket]
옐로우 키친 [Random Elements '60]

* 벌룬앤니들 (www.ballonneedle.com)
음악적 색깔과 성향이 가장 비슷한 레이블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벌룬앤니들과 엔 바이런을 꼽아야 할 것이다. 피와꽃, 트레몰로(Tremolo), 퓨어디지털사일런스(Puredigitalsilence) 등이 소속밴드로 있는 벌룬앤니들은 익스페리멘틀, 포스트락 성향의 뮤지션들이 조용조용 자신들의 음악을 선보이며 음에 대한 실험을 계속 진행해나가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멤버 한 명이 여러 밴드에 겹쳐 가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예를 들어 홍철기는 퓨어디지털 사일런스를 비롯한 무려 4개 밴드의 멤버이다) 거의 대부분의 앨범들은 뮤지션 각자의 집에서 작업되고 있다. 음악특성에 맞게 별다른 홍보 없이 신촌 등지에서만 활동하고, 앨범 판매 역시 자신들의 웹 사이트와 신촌의 한 음반점에서만 팔고 있다.

Artists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 오토매틱 핸드드라이어(Automatic Handdryer), 퓨어디지털사일런스, 쓰루 더 슬로(Through The Sloe), 트레몰로, 많이먹고힘내, 피와꽃

Release
Split(피와꽃/퓨어디지털사일런스) [Barcode For Lunch, 즐거운 한때 우리는 외계혹성을 방문했다] (2000)
쓰루 더 슬로 [Through The Sloe] (2000)
아레올라 튠스(Areola Tunes) [Catholic Alcoholic] (2001)
트레몰로 [Tremolo] (2001)

* 로우독 (www.rawdoggrecords.com)
로우독 레코드는 국내 최초의 독립 힙합 레이블로 1999년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는 랩퍼홀릭(Rappaholik)의 앨범 발매를 위해 만들어진 레이블이었지만 이제는 피-타입(P-Type), 4WD 등의 뮤지션들을 영입하며 본격적인 레이블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독자적인 유통방식으로 판매됐던 랩퍼홀릭의 싱글과 1집 앨범은 모두가 팔렸고, 2집부터 메이저 유통사와 손잡고 앨범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언더 힙합계의 숨은 실력자였던 피-타입과 4WD 등을 영입하며 로우독 레코드는 가장 주목받는 힙합 레이블로 성장하게 되었다.

Artists
랩퍼홀릭, 스퀴즈(Sqwizz), 피-타입, 4WD, 스테디 비(Steady B)


Release
랩퍼홀릭 [Eastcoast Fever + Party Groove Pt.1] (1999)
랩퍼홀릭 [Mission : Hold The Crown Of Hiphop] (2000)
랩퍼홀릭 [Codename : Gotti] (2001)

* ZZZ (zz.oo.co.kr)
밴드 잠의 앨범 발매를 위해 만들어진 레이블이다. 슈게이징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잠과 그들의 친구들인 채송화, 룸(Loom), 데이드림(Daydream) 등과의 교류를 위한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Artists

Release
잠 [낮잠] (2000)

* 넘 (www.3rdlinebutterfly.com)
넘(numb) 역시도 삼호선 버터플라이의 2집 앨범 발매를 위해 만들어진 레이블이다. 아직까지 소속 밴드는 3호선 버터플라이밖에 없기 때문에 레이블의 성격을 말하기는 곤란할 듯. 레이블의 자체 웹사이트는 없다.

Artists
삼호선 버터플라이

Release
삼호선 버터플라이 [Oh! Silence] (2002)


1-4. 새로운 패러다임 ‘홈레코딩’ - 뮤지션 스스로가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기

1999년을 기점으로 초기 인디레이블을 주도했던 강아지문화예술과 인디가 시장의 한계에 부딪쳤고, 그로써 부진한 활동을 하면서 잠시 과도기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홈레코딩(home-recording) 기술과 관련 소프트웨어, PC(하드웨어) 발전에 영향받아 인디레이블 자체의 패러다임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개의 인디뮤지션들은 ‘자신이 운영하지 않는’ 저자본 레이블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인디레이블이 메이저레이블과는 매니지먼트 방식이 다르더라도 소속 뮤지션들이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스위트피(Sweetpea, 델리 스파이스의 김민규)가 문라이즈(moonrise) 레이블을 만든 2000년 이후로는 점차 홈레코딩이 보편화되면서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자생적인’ 인디뮤직씬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피의 1집 [Never Ending Stories](2000)를 필두로 전자양(Dencihinji) [Day Is Far Too Long](2001), 마이 언트 매리(My Aunt Mary) [2nd My Aunt Mary](2001), Where The Story Ends [안내섬광](2001), 토마스 쿡(Thomas Cook) [Time Table](2001)이라는 명반들을 발매하였던 ‘문라이즈’는 한국 인디씬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라이즈의 결과물들을 보고나서 뮤지션들은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패러다임을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자신이 음반제작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깨닫았기 때문이다. 

이 여파는 2002년 이후로 인디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년만 보더라도 한국 음악씬을 통 털어서 수작으로 얘기되는 코코어(Cocore) [Super Stars](2003/쌈지), 푸른새벽(Bluedawn) [Bluedawn](2003/카바레사운드), 참피온스(Champions) [Tournament - EP](2003/거북홈레코딩스)와 같은 앨범들은 홈레코딩 작품들이었고, 이제 이들의 앨범이 단지 홈레코딩이란 이유로 퀄리티 문제를 따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특히 타프카 부다(Tafka Buddah) [Trauma](2003/카바레사운드), 킵루츠(Keeproots) [Keepin' The Roots](2003/가라사대)를 위시한 대부분의 힙합 앨범들은 홈레코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인디가 아니더라도 2002년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받는 장필순 [Soony6](2002/하나)나 올초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대상격인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더더(The The) [The The Band](2003/Ezim)도 기본적으로 홈레코딩 앨범이다. 그리고 롤러 코스터의 앨범들이 홈레코딩인지 아닌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는가?

1-5. 한국적 상황에서 ‘인디’가 갖는 의미 - 창작의 절박성과 다양성 문제

인디뮤직은 아마추어들이 하는 음악이 아니다. 인디뮤지션들의 입장에서 인디뮤직은 해당 뮤지션이 간섭받지 않는 ‘창작’과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통’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론’이고, 그 뮤지션들 상당수는 취미가 아니라 생계로써 음악을 하는 ‘전업뮤지션’을 지향한다. 물론 한국의 현실 여건상 남자들은 일정 나이를 먹으면 군대를 갔다와야 하고, 그 와중에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을 포기한다. 하지만 이는 인디씬에서 음악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많은 인디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한 때의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특히 라이브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려는 뮤지션들이라면 생각이 남다를 것이다.)


물론 ‘취미’로 음악하는 것처럼 보이는 뮤지션들도 있긴 있다. 몇몇 부자집 아들네미들이 모여서 나이 먹어도 변치 않는 희안한 ‘펑크정신’(분노도, 절박함도 없는 납득할 수 없는 변종 펑크정신)을 보여 주거나, 인디씬을 기웃거렸던 이방인들이 역시 희한한 ‘실험정신’(작업 결과물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작업하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는 괴변성 실험정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금의 한국 인디씬은 이런 희안한 펑크정신이나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뮤지션들에 의해서 이미지메이킹된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인디씬에는 마치 ‘노래’는 없고 이미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며, ‘창작’은 없고 이벤트만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알다시피 대개의 사람들이 인디씬에 갖는 생각은 ‘저항(반항?), 실험, 아마추어리즘’ 정신이고, 뜨고 싶어서 안달 난 뮤지션들이 서성이는 메이저의 주변부이고, 또는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들의 거점이다. 다 저열한 인식 수준이고, ‘상업적인 기만성’이 그 언저리에 녹아 있다.

하지만 인디씬의 존재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씬에서 제대로 음악하는 뮤지션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다. 인디씬은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창작’이 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고, 창작에 대한 ‘절박함’을 가진 (현실에 분노하는) 뮤지션들 때문에 좋은 노래가 터져 나올 가능성이 큰 장소이다. 그래서 인디씬의 창작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스킬의 뛰어남’ 여부로 판단하기보다는 ‘진정성’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는 뛰어난 ‘기능’을 가진 장인보다 높게 평가받아야할 사람이 뛰어난 ‘감각’을 가진 장인이고, 그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할 사람이 훌륭한 ‘정신’이라든지 독창성을 가진 창작자가 아닌가? 그래서 대중음악평론에서도 뛰어난 편곡, 세션, 보컬보다도 오히려 그 뮤지션이 품는 에너지나 멜로디 감각, 가사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그리고 음악산업적인 관점으로 볼 때도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다수의 다양한’ 뮤지션들이 활동하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에 인디씬은 중요하다. 음반산업이 성장하려면 시장에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뮤지션들이 기본적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현재 이런 유형의 뮤지션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포진한 공간이 바로 인디씬이다. 그래서 현재 10대 아이돌스타 위주로 편향된 한국 음반시장의 지형도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은 바로 인디레이블과 함께 라이브클럽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2. 민중음악 작업에 대한 음악적 제언

사실 나는 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의 민중음악에 그리 호감을 갖지 않았었다. ‘록’의 어법이 도입된 천지인 1집(1993), 이스크라 1집(1996), 메이데이 1집(1997)이 ‘대중음악 유통’ 통로로 나왔을 때만해도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음악매니아의 관점에서 봤을 때 록음악에 대한 음악적인, 문화적인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세션 형태’만 가져다 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색한 분칠’ 작업으로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스크라 앨범 발표 전까지만 해도 내가 비록 민중음악을 ‘감상차원’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80년대의 압제적인 사회를 겪었고 그 때 같이 시위현장에 있었던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그 음악이 갖는 사회적인 역할은 존중했었다. 하지만 이스크라 앨범을 들으면서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한국민중음악사에서의 오점으로 느껴진다.

민중음악이 기존의 관습적인 장르를 버리고 외부의 어떤 장르를 차용하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댄스음악 편곡을 가져다 써도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 민중음악이 가져야할 내용과 지향점과 순수함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이스크라 1집은 멤버구성부터 기존 민중음악진영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 의아했을 뿐만 아니라 음반기획방식도 언론플레이에 초점을 맞춘 이벤트성이었고, 그 음악적인 내용이나 형식도 졸렬했다. 이는 심하게 얘기하면 무늬만 민중음악이지 기존 주류음반기획사가 하는 행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씁쓸했던 것은 이스크라 앨범기획이 표면적으로는 주류(매체)를 엿먹이겠다는 발상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다분히 기존 록음악매니아들이나 일반적인 음악청취자들을 ‘계도’하겠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지극히 엘리트적인 태도에 운동방식을 결합한 기이한 행태였다. 이는 외부인들이 보기에 당시 민중음악진영의 ‘정신’을 싸잡아서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후 그런 ‘프로젝트’가 더 이상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스크라 앨범의 ‘사건’으로 민중음악인들이 알아챘으면 하는 바는 다음 네가지이다.

(1)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노래를 만들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고려

난 지금도 의아해 하는 것은 90년대 초반?중반에 대중문화잡지에서 있었던 ‘록음악 담론’이 과연 누구들끼리 누구를 위해서 벌어졌느냐는 점이다. 그래도 명칭이 ‘록음악’ 담론인데, (전통적인) 록음악매니아들끼지 벌린 담론도 아니고, 심지어는 대중음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끼리 (록)음악청취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적인 호기심이 충만한 지식인들과 새로운 운동의제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전개해 나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이는 직설적으로 말하면 진짜로 록음악 음반을 사서 듣는 사람들(음악청취자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도 주지 않으면서 문화잡지나 시사잡지 독자들에게 그저 ‘읽을 꺼리’를 제공한 것 이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록음악 담론이 그렇게 무성하게 진행되었다면 전체적으로 록음악 음반이 많이 팔리거나, 이후 인디씬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거나, 하다 못해 지식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록음악 매니아로 포섭되어서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관련 글이나마 써야 맞지 않겠는가? 록음악 담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음악 담론조차도 없어져버린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록음악 담론은 정말로 대중음악이나 음악청취자들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던 일이다.

여기서 록음악 담론은 첫 번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예를 든 것이었다. 난 아직까지도 민중음악인들 중에 일부는 누구를 대상으로 노래를 하는지가 궁금한 사람들이 있어 보이고, 음악매니아들을 청취대상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의아하다. 만약 그가 음반발표를 고려하지 않고 현장 중심으로 활동하겠다거나 음반을 단지 작업기록 정도로만 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뮤지션이 음반을 발표하는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음악매니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매우 모호한 활동방식이다. 이는 앞에서 록음악 담론의 경우처럼 음악활동 행위가 음악수용자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지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음악의 ‘피드백’도 음악청취자들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음악활동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는가?

(2) 90년대 이후로는 시대적인 상황의 변화로 ‘민중음악’과 ‘민중음악인’이 분리되어 생각된다는 점

적어도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중음악과 민중음악인은 같은 개념이었다고 보고, 민중음악인은 민중음악의 시대적/사회적인 대의를 위해서 존재하고 기능하는 ‘부속 개념’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민중음악인은 ‘뮤지션’의 개념은 아니었고 ‘매개체’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민중음악’의 개념을 “민중가요와 노래운동은, 스스로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노래문화 전체의 건강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영미/안석희)으로 볼지언정, ‘민중음악인’ 개개인들은 ‘개별적 창작의 주체’가 되는 ‘뮤지션’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대중음악을 ‘보컬+반주’에서 ‘뮤지션+세션’으로 보는 관점이 90년대에 들어와서 정착되었음을 상기하면 된다. 그리고 창작의 방향성도 집단의 소리를 내는 것에서 ‘개인의 소리’를 내는 추세로 바뀌지 않았는가? 

그래서 “과연 민중가요에서 작가주의적 창작자는 살아남을 방법이 있는 것일까?”(이영미/안석희)라는 질문은 개인적으로 우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대중음악은 작가주의적 창작자들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고(사실 작가들의 음악만 10년 이상 살아남지 않는가?), 지금의 민중음악은 큰 범주 내에서 대중음악에 속해있고(인디음악과 함께 비주류음악으로써), 앨범 발표를 중시하는 민중음악인이라면 결국 ‘창작’의 품질에 의해서 평가받고 살아남을 수 있다. 현재 한국영화에서도 작가들(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이 대접받고 그들에 의해서 소비층이 형성되는 것처럼, 앞으로의 대중음악에서도 작가들이 대접을 받고 일정 부분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다시 창작이다”라는 말이 앞으로 회자되리라고 생각한다.

(3) 대중음악 ‘트렌드’에 대한 고려

천지인 이후로, 특히 이스크라와 메이데이 때부터 록장르 중에서도 ‘헤비메틀’이 록스피릿(Rock Spirit)의 전형인 것처럼 생각된 것은 매우 의아하다. 아마 80년대에 대중음악을 들었던 세대들이 그 장르를 민중음악에 접목한 것 같은데, 영미권에서 80년대 (일반)헤비메틀은 대개 주류화된 양식과 매니지먼트를 취했고 가사도 사랑타령 등등의 그냥 팝음악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기로 80년대 후반부터 스래쉬메틀이 인기를 얻은 것인데, 이런 고려 없이 민중음악에 헤비메틀을 접목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한때 헤비메틀 매니아의 관점에서 볼 때 헛웃음이 나온다.

또한 90년대는 음악적인 트렌드가 얼터너티브록으로 바뀌었는데, 왜 굳이 10년 전 장르를 차용해서 음악을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이후 ‘모던록 성향의 민중음악밴드’ ‘바람’이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하지만 현재의 흐름은 또 힙합 등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4) 음악산업의 ‘소스’로서의 싱글의 중요성 인식

향후에 FM라디오 같은 곳에 ‘음악전문방송국’이 생겨난다면 쓸 수 있는 해당 음악 소스 부분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방송국 내에서 민중음악전문 방송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할 때, ‘대중들에게 먹힐만한’ 음반과 싱글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공중파는 일반 대중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당장 하루 2시간 짜리 프로그램 3개 정도를 일년 365일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를 메꿀만한 음악적인 완성도가 있는 소스(다양한 노래들)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까?

3. 민중음악, 한국의 비주류 대중음악

20세기 대중음악의 컨텐츠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엄청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리고 이념적으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부족이 90년대까지 한국의 민중음악진영에서 놓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말부터는 민중음악인들도 민중음악을 인디음악과 함께 ‘비주류 대중음악권’으로 보는 시각이 생긴 것 같고, 이로써 정말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되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연영석과 같은 뮤지션의 태도나 그 결과물들은 매우 훌륭했고, 천지인이 3집에서 보여준 변신도 긍정적이다. 김가영이나 유정고밴드의 지향점도 마음에 든다. 또한 ‘이주 노동자 프로젝트’ [What Is Life](2002)에서 유레카(Eureka)를 중심으로 만든 음악도 의미가 있다.  ‘음악산업 내’에서 주류/비주류 간의 역학관계도 새롭게 따져보아야겠지만, 우리시대 비주류 음악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생각해볼 때인 것 같다.

※ 아래는 이 글과 연관이 있어 보여서, 작년에 연영석과 가진 인터뷰의 일부를 발췌해 붙였습니다.

연영석 : 민중음악은 포괄적인 거고 노동음악은 그 지류라고 부를만한데, 요즘은 노동음악에 대한 정의도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노동음악은 “노동자의 정체성,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갖고 그들이 향유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노래하는 것”이다. 또 나는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데, 그 변화시키려고 하는 끊임없는 자기 시각을 담아내는 음악이 노동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거를 사람들은 축소시켜서 투쟁가요나 집회할 때 부르는 특정한 노래라고 생각을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가요가 대중가요보다 더 리얼하고 대중들과 더 친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음악은 음악이다.

박준흠 : 아까 얘기한 것 중에 현장에서 호응을 얻는 노래가 있고 못 얻는 노래가 있다고 했는데, 호응을 못 얻는다는 건 연영석 씨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연영석 씨가 아웃사이더로 남은 이유는 지금 노동음악의 범위가 ‘현장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협소하게 굳어져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건 장기적으로 보면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그는 그가 공식적으로 속해 있는 노동음악계 뮤지션들과도 다르고, 현재의 라이브클럽 기반의 인디 뮤지션들과도 다르다.) 물론 현장에서 존재성을 인정받는 노래를 부르는 분들도 존중을 하지만, 포괄적으로 대중음악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사람들의 인식을 담아내는(바꾸는) 가사를 가진 노동가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영석 : 사람들이 나에게 가끔씩 “네 노래의 대상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한다. 대공장 공연에서는 잘 부르지도 않지만 나 스스로도 거의 안 가고 주로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기투쟁 현장엘 가는데, 내가 노래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너도 윤도현이나 서태지처럼 대중가수가 돼서 많은 사람들이 널 접할 수 있게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 때 걸리는 게 뭐냐면 운동이라는 건 자기 개인만이 아니고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대중문화시스템의 구조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개련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난 내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어느 순간 딱 던지고 기존의 시스템과 손잡는다면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노래도 노래지만 내 활동방식,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스템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다.

4. 비주류음악 발전을 위해서 해야할 일

한국대중음악 전반에 해당되는 일들이지만 민중음악 비평(최소한 신보의 음반리뷰)과 아카이브 작업은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1) 한국 대중음악전문지 발간

한국에는 ‘한국 대중음악전문지’가 단 1개도 없다. 시장은 작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음악전문지가 없고, 매체가 시장을 키우는 역할을 생각한다면 지금쯤은 정부가 한국 대중음악전문지 발간 사업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생각할 때 ‘비평’을 단순히 고루하거나 딱딱하거나 매니아의 입장에서는 음악 듣는 데 별로 상관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겠지만, ‘비평’은 사실 해당 산업을 ‘내외적으로 키우는 수단’이기도 하다.

(2) 비주류음악 포털사이트 구축

비주류음악 시장을 성장시키려면 비주류음악 포털사이트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DB’와 ‘매체’ 기능을 넣는다.

(3) 비주류음악 유통망 구축

한국에서는 사실상 ‘비주류음악 유통망’(여기에는 음반유통망뿐만이 아니라 비주류음악이 소개되는 ‘음악전문 라디오방송국’ 같은 것도 포함됨)이 없기 때문에 음반을 만들어도 왠만해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힘들다. 그래서 음악홍보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매체인 공중파방송이 반드시 ‘자기 매체’로 존재해야 한다.

(4) 음원시장 수익배분률 재조정 요구

현재 음원시장(모바일, 온라인 관련)은 계속 성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음원시장이 통신업자와 서비스업자, 음반제작자(인접저작권자)만 혜택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음원시장이 성장을 한들 정작 창작자(저작권자)나 뮤지션에게는 별로 이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와 같은 음원수익배분구조에서는 그렇다.(통신업자 : CP : 음반사/창작자 = 50 : 19 : 31) 게다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창작자들도 대부분 주류음악을 만드는 소수의 잘 나가는 작사/작곡가들로 국한될테니 결국 음원시장에서 창작자/뮤지션은 배제가 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음반시장은 그나마 뮤지션들에게 인세가 지급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인디뮤지션들에게는 재생산을 할 수 있게 하는 터전이기 때문에 불황이라는 것에 염려가 드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뮤지션에게 발생하는 수입은 음반인세와 공연수입 2가지 밖에 없다.)

(5) 음악산업대학교 신설

한국에서 80년대만 해도 기획/제작/마케팅/배급/투자 부분에서 대중음악과 ‘같은 수준’이었던 영화가 지금의 규모로 성장하고, 이 시대의 중요한 대중문화(산업)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창작(감독, 시나리오)에 대한 중시와 기획/제작/마케팅/배급 인력이 전문화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영화에 대한 일반인/투자자의 인식이 바뀌고, 외부(금융권 등)에서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게 10년 전쯤 일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충무로는 하길종 감독이 절망하던 그 충무로시스템이었고, 영화매니아라고 자처하던 일부 얼치기 엘리트들은 한국영화 안 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때였다. 그게 불과 10년 좀 더 된 일이다.

결국 인식과 인력과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대중음악은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한류를 통한 성장이나 서비스방식의 다양화 등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마케팅은 좋은 소스가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라는 것은 정설인데, 왜 자꾸 이를 간과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과 인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용음악과만 있는 현 대학과정에 음악산업의 각 분야(기획, 제작, 마케팅, 운영, 재원조성, 평론, 정책 등)를 가르치는 ‘4년제 학부 과정’을 신설해야 한다. 미국만 해도 64개 대학(예술대학 내의 과정 또는 음악전문대학교 형태로)에 Music Business, Music Management, Music Industry라는 4년제 학부가 있고, 여기서 음악이론, 음악학, 음악엔지니어링, 경제학, 경영학, 마케팅, 매니지먼트, 회계, 행정 등을 가르치고 있다. 이래야 기획/제작이 전문화, 투명화되고 외부에서 자금유입(투자)이 이루어지면서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지 않겠는가. 

(6) 음악산업정책 개발

제도적으로 2003년부터 시행된 ‘인디레이블 제작지원 제도’와 같은 것은 음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또한 인디씬에도 영향력 있는 ‘자기 매체’와 ‘독자적인 유통망’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제 인디씬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어찌보면 홍보와 유통 부분이다. 그런데 기존 공중파와 같은 매체는 성격적으로 앞으로도 인디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가진 매체가 인디씬에 필요하고, 통합적으로 홍보/유통을 대행해주는 회사가 마케팅 측면에서 필요하다. 특히 홍보/유통을 대행해주는 회사는 인디 음반들이 일본 인디즈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일본음악시장이 개방되면서 잠재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쪽은 오히려 한국인디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환율 차이로 수출만 한다면 큰 마진을 챙길 수 있고(일본에서는 음반가격이 3만원 정도이다), 한국인디나 일본인디나 정서적인 뿌리는 둘 다 영미권 인디씬이란 점 때문이다. 서로 낯 선 음악들이 아니고, 영어가사를 쓰는 경우도 많으니 언어적인 문제도 오히려 메이저씬보다 유리하다.

5. 비주류음악 축제 개최

올해 있었던 광주 인권평화콘서트를 전향적으로 ‘세계인권음악페스티벌’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한국 민중음악의 역사와 전통이 집대성되면서 현재 활동하는 모든 민중음악인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라는 점,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모티브라는 점,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해서 전세계 민중음악인들이 모일 수 있는 행사라는 점 등등을 고려한다면 ‘음악’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축제(3~7일 정도 열리는)로 거듭날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서 우리사회가 민주화되고 문화적인 소비대상이 다양해지면서 민중음악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점진적으로 이탈되었다. 거기다가 매체의 문화 관련 프로그램/지면도 엔터테인먼트 위주로 재편되면서 이런 콘서트에는 그리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도 많이 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적은 예산으로 작은 콘서트를 기획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오붓한’ 분위기로 치루어진 이번 행사에 그저 만족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기억하는 주요한 음악제가 이리도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다는 점은 우리사회의 부끄럼이자 국가적인 반성을 요한다. 전국에서 활동하는 민중음악인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성격의 행사이고, 현재 유일한 축제성격의 민중음악콘서트여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봐야하지 않을까한다.

정부에서는 국제적인 행사로 사업규모를 확대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려 지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전세계 음악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은 의미도 있을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관심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6. 문제는 역시 ‘창작’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안타깝게도 ‘인디씬의 존재 이유’에서 도외시되는 논점이 하나 있었다. 앞서 얘기한 ‘창작/활동 환경’ 문제는 음악창작자와 뜻 있는 마이너제작자들에게 한한 문제였지 정작 음악수용자들에게는 핵심적인 사항이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얘기냐면, 인디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서 다양한 음악들이 생산되고 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음반들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 음악수용자들에게는 다행한 일이고, 사회 전체적으로 봐도 ‘문화적인 다양성’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단지 시장에서 다양한 대중음악이 제공된다고 해서 음악수용자들이 행복해할 수가 있을까? 이는 국가의 경제가 부흥한다고 해도 ‘내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문제이다. 한마디로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모든 뮤지션들에게 활동의 터전이 마련되는 문제는 기본적으로(문화적으로, 산업적으로) 중요하지만, 음악에서 ‘의미 있는 감동’을 받고 싶어하는 청자에게 있어 허접한 뮤지션들이 활동을 하는 음악씬이라면 그게 수천명이 되어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비록 애정을 갖는 인디씬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1994년 라이브클럽 드럭의 탄생부터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평론가의 관점을 대입시켜서 말한다면, 인디씬이 대중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한 기폭제가 된 ‘스트리트펑크쇼’(1996)가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고, 당시 클럽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의 공연을 보면서도 대체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1998년 이전에 음반으로 발표된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 Badtaste](1996/BMG),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1996/석기시대), 노이즈가든의 [Noizegarden](1996/베이), 델리 스파이스의 [Deli Spice](1997/뮤직디자인)라는 걸작물들이 있었지만, 이는 인디레이블 시스템 하에서 나온 앨범들도 아니었고, 당시의 인디씬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기에는 다소 ‘예외적인’ 결과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슨 얘기냐면, 당시 인디씬에서 ‘창작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고민을 했거나 밀도를 갖춘 뮤지션들은 소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허클베리 핀의 [18일의 수요일]을 듣기 전에는 나 자신도 ‘인디씬(레이블)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 얘기하지만, 대중음악에 있어서도 “문제는 역시 창작”이고, 음악적인 진정성 투영을 보장받기 위해서 탄생된 인디씬이라면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인디씬은 다시 돌이켜보건데 음악생산자의 활동 측면이 강조되고, (그나마)음악적인 다양성에 대한 의의만이 강조되고, 매체에서 상품화시키기에 적당한 이미지만 차용해서 이슈화시키는데 급급했지 “왜 지금 한국에서 진정으로 인디씬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데는 소홀했다. 인디음악도 역시 상품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좋은 노래’가 앞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항, 아마추어리즘,...’과 같은 음악적인 본질과는 무관한 이미지들로 얘기되어온 느낌이다. 그 결과 현재 한국의 인디씬에서 무척 훌륭한 앨범들과 노래들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일반인들은 불구하고 매체에서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어떤 때에는 인디씬 내부에서조차 폄하하는 것을 본다.) 이미 ‘인디의 이미지’는 ‘창작, 노래, 아티스트’와는 무관하게 형성된 탓이다.

인디씬에서 활동하는 허클베리 핀, 언니네 이발관, 델리 스파이스, 코코어, 플라스틱 피플 등을 보면 분명히 80년대 언더그라운드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김현식, 신촌블루스, 어떤날, 시인과촌장,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수준의 뮤지션들이고, 그들이 내 놓은 음반들과 같은 수준의 앨범들을 발표하고 있는데 왜 양자를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지 않는지 의아하다. 특히 이전에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사의 완결성’ 문제를 거론한 평론가들이라면 김민기와 함께 이기용, 이석원을 같이 거론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범 비주류음악으로서의 민중음악도 위와 논점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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