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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레이블(19) 인디 - 우리가 인디 정신의 시작이다
[경향신문] 2008-10-29


  홍대권 인디 음악 태동기의 주역으로부터 들어보는 증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대적 유산(앨범)은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된다. 1994년 홍대 근처에 펑크록 클럽 ‘드럭’이 생겨나면서 클럽문화가 꽃피고 인디 음악의 토양이 생성되었다. 인디 음악은 방송과 언론이라는 주류 시스템에서 비켜나 독자적으로 자생력을 발휘하는 홍대권의 음악으로 이해되고 있다. 현재 인디 음악은 아이돌 스타시스템인 한국 음악시장의 대안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을 지탱시키는 정신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 같은 평가의 중심에 쉼 없이 생산되는 인디 뮤지션들의 창작 앨범이 자리함은 당연하다. 태동기의 역사는 잊어서는 안될 오늘의 교훈일 것이다.

96년 5월. 홍대 앞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밴드들이 길거리에서 거하게 난장판을 벌인 이른바 ‘스트리트 펑크 쇼’라 불리는 그것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젊고 새로운 문화의 등장은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매체를 통해 전파된 인디 음악의 태동기 모습은 내용(음악과 정신)보다는 형식만을 보는 본질이 왜곡된 이미지가 난무했다. 일시적인 젊은이들의 광란이나 새로운 유흥문화의 발흥쯤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당시 대중과 매체는 인디 음악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지만 뜨거운 열풍은 홍대 앞을 북적거리게 만들었다. 이듬해인 97년, 열기는 가속화되었다. 레이블 인디와 강아지문화예술이 총대를 메고 치고 나왔다. 98년엔 ‘코코어’를 시작으로 ‘아무밴드’까지 8개팀의 앨범이 인디레이블 ‘인디’에 의해 의욕적으로 연작 발매되었고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줄을 이으며 절정의 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거대한 외형에 비해 실속은 빈약했다. 그 결과 인디 앨범들은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끓는 냄비에 비견되는 언론의 관심도 점차 사라졌다.

이후 초기 인디 레이블을 주도했던 ‘인디’는 시장의 한계에 부딪혔고, 그 부진은 인디 음악의 거품론으로 이어졌다. 과도기를 거친 후 컴퓨터를 통한 홈레코딩 방식의 녹음이 가능해지면서 인디 레이블은 지금의 제작 시스템으로 변신을 모색했다. 2000년 이후 레이블 문라이즈가 그 초석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존립기반이 생성돼 수준 높은 창작앨범들이 탄생되고 있다. 지금은 레이블을 접었지만 본격적인 인디 레이블 시스템을 가동시킨 주역 김종휘 대표(사진)를 만났다. 이제는 인디 음악계에서 한 발 비켜서 제3자의 입장이 된 그를 통해 인디 음반 초창기의 활동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그의 시행착오는 인디 레이블의 현재와 미래에 큰 교훈을 안겨주는 기름진 자양분이 될 것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과 근황을 듣고 싶다.

“인디 레이블을 접고 99년 하자센터 개관 당시에 기획부장으로 왔다. ‘인디’에서 했던 경험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공공성+문화예술+다음 세대’와 같은 복합적인 영역에서 일해보고 도전해서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 음악 엔지니어, 작곡가, 연극배우, 퍼커셔니스트 이런 프로페셔널 10명 정도가 팀을 만들어 인큐베이팅을 했다. 당시 음악, 영상, 웹, 디자인, 시민문화 등 5개의 영역 스튜디오를 놓고 20·30대 문화인들이 10대들을 만나 대안문화를 이끌어내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4년 장르별로 통합된 문화 벤처 ‘노리단’을 창립해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다. 노리단은 2007년 사회적 기업이 되었다. 여러 장르와 프로 및 아마추어가 뭉쳐 문화예술 베이스에 사회적 뱅크를 만들어보자는 의도였다.”

-레이블 창립 때로 돌아가 보자.

“레이블 인디의 전신은 ‘뮤직센터21세기’다.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만들던 회사다. 당시 ‘꽃다지’를 비롯해 운동권 안에서 거대한 음악축제를 기획해 만들고 초기의 불법테이프를 사회과학서적 유통망으로 돌렸던 곳이다. 그 전신이 출판사 ‘민맥’이다. 그곳에서 책을 내면서 뒤늦게 인연을 맺었는데 음반 유통사업이 잘 되는 것을 보았다. 96~97년쯤 내가 합류했을 때 사무실이 홍대에 있었다. 그때 ‘드럭’ 등 클럽에서 젊은 밴드들이 한국말로 창작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았는데 놀라웠다. 운동권 문화와 너무 달랐다. 그래 그러면 기존 우리 유통망에다 일반 음반 유통까지 뚫어 이런 식의 인디 음반 판매대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당시 스튜디오 녹음실과 뮤지션 그리고 인디 레이블이 함께 가는 컨소시엄 구성을 시도했다. 이 사업이 될 것 같으니까 비용을 분담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기면 합리적으로 수익을 배분하자고 제안했다. 주류 음악 쪽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시도가 없었다. 그 출구를 홍대 앞 인디로 본 것이다. 하지만 대박 터트리듯 몇 만장 판매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우선 음반당 3000장 판매를 목표로 세우니 규모의 경제가 나왔다. 그래서 한 10 타이틀 정도 나오면 뭔가 이루어지겠다고 생각했다.”

-97년 10개팀을 선발하는 공개 시연회를 기획했다. 그 시연회는 인디 레이블 태동기의 중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시연회 기획과 진행 과정이 궁금하다.

“전속밴드처럼 공연하는 팀이 있어 결속이 강한 클럽 드럭은 ‘아우어 네이션’ 같은 음반을 냈다. 우린 전속이 아니라 클럽을 돌아다녔던 밴드들을 대상으로 삼고 방식을 찾아낸 것이 공모였다. 총 30개팀 정도 참여했는데 부산에서도 세팀이나 올라왔다. 시연회는 클럽 재머스에서 3일 동안 순서를 정해 진행했다. 심사위원은 나와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음반사 기획자 그리고 음악평론가 3명이 맡았다. 코코어, 허벅지, 삼청교육대, 아무, 마루, 오딘, 앤, 프리다칼로 등 8개팀이 선발되었다. 순위보다는 장르나 음악 동기를 다양하게 포진시키려고 했다.”

-총 몇 장의 음반을 발매했고 시장의 반응은 어땠나.

“싱글을 포함해 20여개 제작했다. 강아지문화예술과 여러 제작자들이 가져와 유통만 한 것까지 합치면 50개 타이틀 정도 되는데 전국 유통망에 뿌렸다. 그러나 시장분석을 하지 않고 막연하게 가능성만 보고 시도한 것이라 과욕이 불러온 초기의 시행착오는 분명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역설이고 모순이었다. 공중파 방송 피디들에게는 나같이 3000장 팔러오는 기획자보다 100만장을 파는 스타 가수들의 매니저들이 우선이지 않겠나. 일간지 쪽은 우호적이라 지면에 많이 노출되었지만 레이블로 시스템화되기엔 시기상조였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음반은 ‘드럭’ 다음에 생겨난 이대 앞 클럽 ‘하드코어’의 밴드들이 한 곡씩 참여한 하트코어 컴필레이션인데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겼다.”

-당시 시도했던 인디 시스템 운영과 지금 인디 레이블 시스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시스템이 잘 운영되려면 이해당사자들 간의 공감이 우선이다. 그런데 당시는 초창기라 화제가 되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까 참여한 것이지 이해당사자들의 욕구가 달랐다. 잘되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안 되니까 충돌하고 갈등이 생겨났다. 요즘은 음악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고 장르도 세분화된 것 같다. 인디 레이블 뮤지션들에게 홈레코딩 방식으로 소량생산, 유통하는 방식이 체질화된 것은 굉장히 성숙한 태도다. 제작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한국 인디 뮤지션들의 내공은 늘었는데 시장은 결코 크질 않는다. 그걸 요즘은 헛된 욕망보다 성숙한 태도로 극복하는 것 같다. 이 현실을 섣부르게 바꾸거나 나아질 것이라는 장밋빛 꿈보다 정중동으로 자기 길을 묵묵하게 가는 느낌이 든다. 그런 면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실패 요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다.

“1년에 한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 10개 정도를 낼 만한 시장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잘못이었다. 실제로 목표였던 음반 하나당 3000장은 전국 유통망을 깔고 했는데도 쉽지 않았다. 대형 매장은 기본이고 전국의 산매장까지 봉고차에 음반을 싣고 직접 뛰었다. 전국에 얼마나 깔렸고 얼마나 팔렸는지 조사를 해 현재 들어온 돈에 대한 데이터를 프린트해 밴드에 돌렸다. 투명하게 하려고 손익분기점까지 다 알려주었다. 한 팀이 “우리가 어느 매장에 알아본 판매숫자와 왜 차이가 나느냐”고 이의를 제기해 유통을 맡은 팀과 멱살잡이를 할 뻔한 적도 있다. 그때 시스템과 유통에 대해 뮤지션들이 가지는 불신감과 몰이해가 얼마나 심한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인디 레이블 창립을 후회한 적은 없나.

“개인적으로 왜 후회가 없었겠는가.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 이 바닥에서 쉽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신을 만든 거다. 시장은 냉혹하고 거품도 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순박했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그때의 시도가 어떤 의미가 있었냐고 평가하는 것은 각자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은 분명 실패했지만 그때의 시행착오가 후대에 어떤 평가로 이어지는가는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선배 기획자로서 지금의 인디 레이블 제작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

“지금 인디 레이블 CEO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계속 고민스러울 것이다. 단지 10년 전에 시장분석을 제대로 못해 내가 경험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무한승부에 승자 우선으로 가지만 농사로 치면 지금의 인디 레이블은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는 엄청난 종자보관소가 된 것 같다. 그게 계속 번식하고 경작면적이 넓어지도록 해야 한다. 한국 대중음악계가 이 시장에 돌려주는 지분이 너무 빈약한데도 그들이 좋은 음악을 생산해 주는 것은 음악계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최소한 시장은 창출해야 한다. 최소한 경제적 행위에 맞게 선순환을 만들어야 하고 합리화되어야 한다.”

레이블 인디 발매 앨범

이스크라(Iskra)
‘반란을 꿈꾸는가’ (1996/21C뮤직센터/인디)
메이데이(Mayday)
‘Ballade For The Living’ (1996/21C뮤직센터/인디)
코코어(Cocore)
‘Odor’ (1998)
허벅지
‘허벅지 댄스’ (1998)
‘장마오면’ EP (1999)
프리다 칼로(Frida Kahlo)
‘자화상’ (1998)
앤(Ann)
‘Skinny Ann‘s Skinny Funky’ (1998)
최소리
‘타악기 솔로 두들림 2 -Open Mind’ (1998)
‘오월의 꽃’ (1998)
마루
‘내가 배운 게’ (1998)
오딘(Oathean)
‘아주 커다란 슬픔의 눈’ (1998)
삼청교육대
‘삼청교육대’ (1998)
아무밴드
‘이.판.을.사’ (1998)
■ V.A.

‘클럽 하드코어 - 하드코어 컴필레이션’ (1998)
닥터코아(Dr. Core)
‘911 Dr. Core 911’ EP (1999)
마고
‘마고’ (1999)
에브리 싱글 데이(Every Single Day)
Broken Street (1999)타카피(T.A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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