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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9 18:52

해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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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은날 무더운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바다 물결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 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이룬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없는 우리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해녀 어디로 

#. 해녀 항일가는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해방을 목표로 활동하던 제주지역의 비밀결사인 '혁우동맹'의 일원인 우도 출신의 해녀인 강관순(1909∼1942)씨가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던 중 지은 총 4절의 노래로 당시 '도쿄행진곡'의 곡조에 맞춰 작사한 것이다.

 

강 관 순(康寬順, 1909~1942)

본관 : 곡산
별칭 : 필명 강철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사회주의운동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연평리
주요작품 : 〈해녀의 노래〉
생 존 기 간 : 1909 ~ 1942
관 련 사 건 : 해녀 항일운동 
 
제주 혁우동맹과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 필명(筆名)은 강철(康哲). 본관은 곡산(谷山), 강대길(康大吉)의 차남으로 구좌읍 연평리 929번지에서 태어났다. 산북 우도(牛島)의 사립 영명(永明)의숙 4년을 마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모교 영명의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밤에는 야학(夜學)에서 문맹 퇴치 운동도 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1931년 3월 구좌면에서 청년 운동가들 즉 신재홍(申才弘:우도), 오문규(吳文奎:하도), 강관순(康寬順:우도), 문도배(文道培:세화) 등과 초등 학교 교사 김시곤(金時坤:세화) 및 농민 김성오(金聲五:우도) 등은 신재홍의 주도로 비합법적인 비밀 결사 혁우동맹을 결성, 항일 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면서 우도에서 운동 기반 조성에 노력하였다.

강관순은 1931년 6월 상순 자택에서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사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 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소섬의 고자화(子華) 집에서 고봉준(奉俊), 고원한(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고 칭하는 당외 기관을 만들어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이 되어 적(赤)을 순차적으로 좌경화급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을 도모하였다.

제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은 1930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비밀 조직에 나섰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비밀 조직은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서 결정된 혁우동맹이었다. 혁우동맹은 제4차 공산당에 가입하였던 신재홍이 주도하였다. 신재홍은 1930년 구좌면 세화리 문도배의 집에서 오문규, 강관순, 김성오, 김순종, 김시곤, 부대현 등을 규합하여 혁우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 해방을 목표로 내걸었던 비밀 결사였다.

1932년 1월부터 구좌 지역 해녀 항일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사(秘社)의 내용의 탄로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당시 연평(우도)리 한 마을의 항일 인사 김성오(金聲五), 강관순(康寬順), 신재홍(申才弘), 우봉준(禹奉俊), 이두삼(李斗三), 고자화(子華), 정찬식(鄭贊植), 공덕봉(孔德奉), 고기창(基昌), 강희준(姜熙俊), 양봉윤(梁奉潤), 윤대홍(尹大弘), 고한조(漢祚) 등 13명이 검속되고 그는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 4절을 지었는데 마침 동지 오문규를 면회왔던 오문규의 부인 홍무향이 이 노래의 가사를 몰래 건네 받아 청년 운동가에 전해진 것을 당시 「도쿄(東京)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른 것이다. 이 노래는 전도에 파급되고 출가 해녀에 의해 한반도 및 일본중국까지 전파되어 당시 제주의 노래로 불리어졌다. 형기를 마쳐 출옥하자 동지 김성오와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원산(元山)으로 건너가 항해사 을종(乙種) 시험을 치러 합격, 김성오는 승선의 길을 택했으나 그는 옥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하여 주저앉았다.

1942년 봄 함북 청진(淸津)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린 결과로 폐병으로 병사, 부인 김유생(金有生)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이후 유복녀와 함께 우도에서 정열(貞烈)을 지키며 살았는데 그 미모를 탐내어 젊은이들이 늘 괴롭히자, 하루는 동네 향회에 나가 내 X은 내 서방 강관순이 죽으면서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이 죽어버렸으니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이에 우도 사람들은 참으로 강관순의 아내다운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1996년 여름 우도의 선착장에 그의 「해녀의 노래」 비(碑)를 세웠다. 또 해녀 항일 운동의 진원지 세화에도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가사는 강관순이 옥살이할 때에 몰래 면회하러 간 사람에게 건네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 /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 2)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 어린 아이 젖먹이며 저녁 밥 짓는다 / 하루 종일 헤매었으니 버는 것은 기막혀 /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 3) 이른 봄 고향 산천 부모 형제 이별코 / 일가족 생명 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 저 놈들의 착취 기관 설비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다 /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자료출처 : 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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