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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서양 선교사들 따라하기
인질 사태에서 본 기독교 선교 역사와 그 교훈…시대에 뒤떨어진 근본주의를 언제까지 고수하나
▣ 황정욱 한신대 교수·신학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납치돼 살해된 두 분의 영혼과 유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두 여성 인질이 8월13일 풀려난 데 이어 8월28일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 결과 나머지 인질들이 모두 풀려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5개 항의 합의가 이뤄졌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항목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은 아프간에서 더 이상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


△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무슬림의 주검 위에서 환호하는 장면. 14세기 세밀화의 일부이다. 아랍 쪽 기록을 보면 성지 회복을 내세운 십자군의 무차별 학살로 7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진/ 아침이슬 제공)

사실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의 한 종파로 시작된 초기부터 선교를 시작했다. 당연히 초기 선교 대상은 동족인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항거한 1차 유대 전쟁(66∼70) 뒤 예루살렘 모교회의 존립이 불가능해지면서 유대 기독교는 비유대 기독교에 지도적 위치를 넘겨주게 된다. 선교 역시 비유대인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기독교 공인 뒤 공격적 종교로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이후 기독교 신앙은 불법으로 간주됐다. 3세기 데키우스 황제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꾀했으나,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기독교 순교자들의 태도에 이교도들조차도 감명을 받고 개종함으로써 교세는 날로 증가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리키니우스와 더불어 313년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공인하기로 합의했다. 황제는 제국 내 기독교를 위해 여러 특혜를 시행했다. 이 때문에 개종자가 더욱 늘게 되었다.

문제는 기독교가 불법 종교에서 합법 종교로 지위가 바뀌면서 생겼다. 기독교는 본래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지만, 공인 뒤 교회사에서 이에 위배되는 사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프랑크왕국의 제왕 샤를마뉴의 작센(Sachsen) 선교가 단적인 예다. 샤를마뉴(768∼814)는 기독교 선교를 사명으로 생각했는데, 작센 선교는 순수한 선교적 의도보다는, 오늘날 독일 동부 지역인 작센을 영토에 편입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더욱 강했다. 작센족은 게르만족 가운데 최후까지 샤를마뉴의 정복에 저항한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정복하기 위해 샤를마뉴는 선교사들을 먼저 앞세웠다. 당연히 작센족 눈에 선교사들은 원수의 앞잡이로 보였다. 작센인에게 기독교 개종은 정치적 독립의 상실을 뜻했으므로, 죽음도 불사하고 선교사들에 맞서며 개종에 저항했다. 772년 이후 샤를마뉴는 작센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그들에 대한 집단 세례를 강행했다.

또 다른 예로는 중세 서유럽 나라들이 팔레스타인 성지 회복을 위해 일으킨 십자군 원정을 들 수 있다. 12세기 로마교황의 주도로 일으킨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이슬람교도 주민들을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을 무차별 살육하면서 정복전을 폈다. 역사적 사례들을 보더라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호전적이고 공격적 종교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왜 공격적인 종교로 비치게 되었을까? 어느 종교 현상에서나 마찬가지로 창시자의 정신을 후계자들이 올바로 이어받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이다. 원시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신분 차별 없이 사랑과 은사가 넘쳐났다. 반면 기독교 공인 뒤엔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가 가르친 계명은 이상에 불과했다. 박해받던 기독교가 오히려 박해자로 바뀌었다. 국가의 힘을 빌려 도나투스파나 아리우스파같이 이단으로 낙인찍은 종파들을 박해한 데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기독교의 남성적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본래 성(性)이 없었지만, 이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 테오스(##별도 외국어 표기 참조)’,라틴어의 ‘데우스(Deus)’는 명백한 남성 명사다. 남성들이 성직을 독점하면서, 기독교는 더욱 가부장적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십자군 원정 시대 성모 마리아 숭배가 확산된 이유는 기독교의 남성적·공격적 성격을 상쇄하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서양을 능가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이런 역사적 맥락을 보더라도, 인질 피랍 사태를 계기로 한국 교회는 해외 선교를 재점검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과거 한국 교회는 선교의 은혜를 크게 입었던 나라다.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기독교인이 크게 늘어났을 때 그 운동의 주역은 북미 지역 선교사들이었다. 한국 교회는 1970년대까지도 해외 선교사 파송은 상상도 못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보낼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현안 때문에 해외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한국 개신교는 해외로 선교사를 본격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경제적 급성장과 국내 선교의 한계점 도달, 선교국가로 전환할 때가 왔다는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한다고 한다. 그만큼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가 되지만, 이런 양적 성장은 질적 저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외국 어디를 가도 국내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고, 해외에 장기 체류하는 선교사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이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도 선교 또는 봉사활동의 명목을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앞다투어 선교사들을 보내는 이면에는 일종의 경쟁 심리와 과시주의가 작용하는 듯하다. 한국 선교사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른다며 해외 어디에나 들어가려 한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같은 전쟁 지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과가 어찌됐든, 다른 사람이 못 들어간 지역에 들어갔다는 점을 과시한다. 이런 소영웅주의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2004년 봄 이라크 선교여행 중 무장단체에 억류됐다가 극적으로 풀려난 목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실상을 목격한 바 있다.

또 하나, 오늘날 한국 교회 신앙에서 무엇보다 문제로 지적되는 배타적 근본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가톨릭 인구는 지난 10년간 295만 명에서 514만 명으로 74.4% 늘었으나, 개신교 인구는 876만 명에서 861만 명으로 1.6% 줄었다. 이런 원인 중 하나를 근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신교의 텃밭인 미국의 경우 기독교 근본주의는 반세기 이전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 노선으로 고립됐다. 1924년 북장로교의 근본주의자들은 ‘오번 선언’을 발표해 특정 교리를 강조하는 자신들의 신앙 의지를 재천명했으나, 1925년 총회는 ‘북장로교회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이 특정 교리에 얽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바 있다. 실제로 북미와 서구 교회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선교했던 제3세계 교회들이 선교부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지도권을 이들 신생 교회에 넘겨주게 되었다. 어느 한 교회가 한 민족을 선교 대상으로 여기는 대신, 세계 모든 교회가 복음 전파에 공동으로 책임지는 동반자로서 상호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래서 서구 교회는 이제 과거의 후견자적 권위 의식이나 오만심을 지양하고 선교에 도전적인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며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추세다.

반면 국내에서 개신교 근본주의는 구한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이래 오늘날까지도 큰 고질병처럼 남아 있다.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든 문제를 일으킨다. 자기 신앙의 기준을 설정하고 타인의 신앙을 일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수 한국 선교사들은 옛적 한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의 행태만 모방하고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제국주의식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04년 이라크에서 인질로 잡혔던 김선일씨의 죽음 앞에 온 국민이 경악했음에도 한국 선교단체들은 미군 주둔을 방패 삼아 중동에 계속 선교사들을 내보냈다. 심지어 2006년에는 2천 명이 참가하는 아프가니스탄 평화축제를 추진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서구 기독교의 말로를 되풀이할까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가 가르쳤던 이웃 사랑의 정신을 외면한 채 권력기구화한 로마교황청은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종교개혁 뒤 서구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걷다가 관광상품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국 교회는 기독교 본산지 유럽의 이런 역사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일부 개신교 교회는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지만, 부를 사회에 돌려주기보다 국내외 물량적인 선교 투자에 전력투구한다. 교회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선교를 하는지 망각한 듯하다. 선교뿐 아니라 신앙 자세에 대해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는다면, 서구 기독교의 말로가 우리에게 재현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최근 종교 인구 통계에서 보듯, 이미 개신교의 하강은 시작됐다. 근본적 개혁 없이 그 흐름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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