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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경주 분지 한가운데 동쪽에 치우쳐 아주 얕게 솟아 있는 산이 있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지만 남북으로 능선이 납작한 누에고치 모양으로 길게 누워 있다. 이 낭산의 동북쪽에 황복사지가 있다. 황복사지석탑은 주변의 자연과 함께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탑파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존재이다

황복사지석탑은 기단이 낮고 지붕돌이 두꺼우면서 폭이 좁다. 그래서 이후에 만들어지는 불국사석가탑과는 달리 둔중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8세기 이후의 탑들은 크기의 감소로 지붕돌과 몸돌[塔身]이 각각 하나이고 기단석은 대체로 네 매의 판석(板石)을 결구하여 만들어진다. 8세기 이전의 탑들은 비교적 큰 탑을 만들다보니 각각의 부재들을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 결구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황복사지탑은 결구 방식에서는 이러한 초창기 신라탑의 잔영이 남아 있어 양식적으로 과도기적인 단계의 탑으로 주목된다

황복사지탑의 묘미는 가람배치상의 파격에 있다. 당시 대부분 사찰의 탑들은 금당 앞, 즉 남북축선상에 위치해 있으나 황복사탑은 금당의 서쪽 편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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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삼층석탑 

통일신라, 706년 이전, 현재 높이 7.3, 국보 제37, 경북 경주시 구황동. 통일신라 시대 불탑의 무수한 확산을 가능하게 했던 대표적 조탑경인 무구정경이 봉안된 최초의 석탑이다.

1942년 여름 이 탑을 해체·복원할 때 2층지붕돌에서 금동으로 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안에는 은합, 금합, 녹유사리병과 함께 금불상 두 구, 금동과 은으로 만든 굽다리접시 각각 두 개, 유리파편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사리함 바닥에 깔린 채 발견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사리함 윗면에 1크기의 글자로 빽빽이 새겨진 명문(銘文)이다. 음각으로 새긴 해서체(楷書體) 글씨는 금동판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획의 흐트러짐이 없이 뚜렷하고 서체가 우수하다. 명문에 따르면 692년 신목태후(신문왕의 왕후)와 효소왕이 먼저 돌아간 신문왕을 위하여 3층석탑을 건립하였고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승하하자 706년 성덕왕이 불사리 4과와 순금미타상(純金彌陀像) 1, 무구정광대다리니경1권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명문의 내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공양품들은 명문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그동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최근 석탑 보수에 참여했던 분의 증언을 통해 대나무로 엮어 만든 경전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황복사지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황복사지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2층지붕돌의 금동사리함 안에서 순금으로 만들어진 불상 두 구와 각종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금동사리함의 측면에는 총 99기의 탑이 선각되어 있다

무구정경(無垢淨經)'번뇌의 때가 없는 깨끗하고 빛나는 큰 주문에 대한 경'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가 가비라성의 정사(精舍)에 있을 때 불교를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1주일 후면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찾아오자, 석가는 이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갈 것이며 그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귀의하오니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석가는 "낡은 탑을 수리하고 따로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주문을 써넣고 섬기면 생명이 연장되고 죽어서 극락왕생하여 백천 겁 복락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 세상에는 모든 죄업이 소멸되어 지옥의 고통이 없이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라고 알려주었고 이때 제개장보살(除蓋障菩薩)이 다른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복덕을 주실 것을 간청함으로서 석가모니가 이 경을 정식으로 설법하게 되었다

이 경전은 704년 인도 출신의 스님 미타산(彌陀山)에 의하여 중국에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로부터 2년 뒤인 706년 이 탑에 최초로 봉안되었다. 이 경전에서는 탑을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대중들은 이 경전에 의거한 탑을 다투어 만들었으며 이 탑의 이름을 '무구정탑(無垢淨塔)'이라 불렀다. 무구정경의 구체적인 법식을 살펴보면,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를 외우고 그것을 99벌 혹은 77벌 써서 진흙으로 만든 토탑(土塔)에 넣어 탑에 봉안한다. 이러한 행위는 77억 또는 99억 개의 탑을 다른 곳에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77이나 99의 숫자는 홀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숫자로 궁극적으로는 무한(無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황복사의 금동제 사리함 네 면에는 99개의 사리탑을 음각함으로써 진흙으로 99개의 탑을 만드는 것을 대신하였다

무구정경의 전래는 우리나라 탑 건립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라 사람들은 탑을 무구정경에 의거해서 세웠던 것이다. 진흙으로 작은 탑들을 만들고 그 안에 별도로 사리와 경전을 넣어 탑에 봉안함으로써 하나의 탑을 건립하는 것이 곧 99억 탑을 세우는 것과 같다는 믿음은 아소카왕의 84천탑 건립이나 중국 수나라 문제의 인수사리탑 건립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무구정탑 높이 5.3~10.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구정경에 따르면 탑을 세울 때 다라니를 외우고 그것을 99개 혹은 77개의 토탑에 하나씩 넣어 봉인하는데, 이는 77억 또는 99억 개의 탑을 다른 곳에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불국사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인정된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즉 불교의 성행과 함께 과학 기술도 발전하여 우리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과 금속 인쇄술을 동시에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무구정경에 의해 탑을 세워야 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법칙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무구정경8세기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파급되어 그 결과 우리나라 곳곳에 수없이 많은 탑이 건립될 수 있었다. 황복사지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무구정탑의 제1호인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황복사지삼층석탑 (한국 미의 재발견 - , 2003. 7. 1., 강우방,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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