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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관덕동 삼층석탑[義城觀德洞三層石塔] 보물 제188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65m, 지대석 너비는 1.81m이고, 재료는 화강암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3층 석탑으로, 장식성이 농후하다. 하층 기단은 4장의 돌로 사각형 지대석을 짜고 중석도 4장의 돌로 이루어졌다. 각 면은 넓적한 탱주(撑柱: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로 이분하고, 낮고 넓은 각 면에는 비천상(飛天像) 1구씩이 양각되었다. 이 위에 4장의 갑석(甲石)을 덮어 하층 기단을 구성하고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고, 위에는 각형(角形)·호형(弧形)의 몰딩이 있어 각면 하나의 돌로 된 상층 기단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에도 각 면을 넓은 탱주로 양분하고 오른쪽에 보살상(菩薩像), 왼쪽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초층 옥신에는 각 면에 우주(隅柱:탑신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 모양)를 표시한 가운데 보살입상 1구씩이 양각되었고, 2층 이상은 위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옥개석의 받침은 1·2층이 4단씩이고 3층은 3단이며, 처마는 수평이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이 거꾸로 놓여 있다.
조각 장식에 치중하여 아름답고 화려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 (義城 觀德洞 石獅子) 보물 제202호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제188호)의 기단(基壇) 윗면에 배치되어 있던 네 마리의 사자상 가운데 남아있는 사자상 2구이다. 한 쌍은 1940년에 분실되었고 나머지 한 쌍만 국립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구 모두 조각수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닳아 있다. 암사자는 앞발을 곧게 세우고 뒷발은 구부린 자세로 앉아있다.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굵은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남아 있어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장식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배 밑에 세 마리의 새끼 사자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어미젖을 빨고 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수사자는 암사자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며,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향하고 있어 암수가 서로 마주보는 배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성연대는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세부의 수법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양쪽 발과 앞가슴의 근육 등에서 힘찬 조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의성관덕동석불좌상[ 義城觀德洞石佛坐像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98㎝.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관덕리 마을 뒷산 약 100m 지점에 탑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상은 현재 불두(佛頭)와 불신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돌의 마모 상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한 조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정확한 양식 파악은 어렵다. 목이 잘린 부분을 상정한다면 비례감이 적절하고 단아한 느낌이 든다.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일반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머리 위에 표현된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왜소한 편이다. 머리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는 마모가 심하여 오관의 구체적인 표현이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다. 불신과 비교하여 볼 때 적당한 크기를 하고 있다. 목은 비교적 굵은 느낌으로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불신의 어깨는 적당하게 살이 찐 형태로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다. 팔의 비례감도 사실적이다. 반면 허리는 잘록한 편이 아니어서 가슴과 허리의 구분선이 거의 없는 수직선의 윤곽을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가슴에서 내려오는 윤곽은 양 무릎으로 이어지면서 분명한 구분이 없이 모호한 형태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착의의 형식은 우견 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으로, 옷주름은 마모로 인하여 분명하진 않다. 그러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려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에는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이 있으며, 양팔에는 팔찌 장식이 있어 보살상으로 보기도 한다. 불신 배면에는 깊이 7㎝, 가로 6.5㎝, 세로 7㎝의 광배공(光背孔)이 남아 있다.

불상의 형식을 취하면서 영락 장식을 하고 있는 이 불상과 같은 예는 동화사비로암(桐華寺毘盧庵)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판에 새겨진 사방불 중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존상은 인도·중앙아시아·중국·동남아시아 등지에서는 8세기에 유행하던 형식으로 여러 예들이 남아 있다.

중국 당나라 현장(玄奘)은 그의 저서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서 인도 여행 중 보드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실견했던 정각상(正覺像)을 기록하여 묘사하기를 “보관을 착용하고 각종 영락 장식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습의 존상을 보리수 아래의 정각상으로 비정하고 있다.

만약 이 존상이 비록 보관은 착용하지 않았지만 목걸이나 팔찌 등 영락 장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조성된 것이라면 통일신라와 인도, 혹은 중국과의 문화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반면 동화사 보관불상과 관련된다면 밀교적(密敎的)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한편 어깨를 부드럽게 처리한 점이나 가슴과 허리선이 거의 구분되지 않은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주는 단아한 느낌에서 불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반임을 알 수 있다.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석조보살좌상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않았다
이정표 거리가 애매한 좁은 마을 콘크리트 길을 따라 끝까지 가고도 산길을 100m 정도 더 가서야 나타난다
처음 가는 사람은 가는 길이 약간 거부감이 들 수 도 있다
탑은 상당히 멋있고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안내판이는 많이 헤어져 있고 석조보살 좌상은 관리상의 문제겠지만 닫힌 문을 열고 서야 친견 할 수 있었다
석사자는 대구박물관에 한쌍은 분실되고 한쌍은 대구 박물관에 있다 하니, 깨끗하고 마모가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복제품 인것 같다
찾아 가기는 힘들지만 한번 꼭 가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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