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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포크음악 초석 다진’ 가수 박문옥
영남일보 이춘호기자 발행일 2017-12-22

‘직녀에게’ 작곡가로도 명성…서정적 선율에 진실·아픔 고스란히

20171222
지난해 대구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달빛포크협회 창립행사 때 박문옥이 이끄는 광주 포크뮤지션과 대구 뮤지션이 한자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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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열린 박문옥 40주년 헌정 콘서트 피날레 장면. <박문옥 제공>
20171222전남대 트리오인 최준호, 박문옥, 박태홍(왼쪽부터). <박문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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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옥이 작곡한 ‘저녁무렵’은 제1회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곡이 된다. 뒤에 가요제 기념음반에 수록돼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박문옥 제공>

1976년에 비로소 광주 포크계에선 드문 포크쟁이가 탄생된다. 미술과라서 팀 이름은‘빈센트’. 당시 광주 최대 포크축제는 전남대 캠퍼스송 경연대회였다. 인근 고교생들까지 구경올 정도로 인기절정이었다. 우린 사이먼 가펑클의 ‘더 복서(The boxer)’를 불러 대상을 차지한다. 졸지에 ‘광주의 트윈폴리오’로 불린다. 나름 팬까지 확보한다. 광주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 광주CBS의 ‘밤의 다이얼’, 전일빌딩 안에 있던 지역 방송국 전일방송의 ‘꿈과 음악 사이’ 등에도 출연했다.

1977년 헌주는 성적이 안 좋아 낙제를 당한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 추계예술대로 전학 가버린다. 이제 멤버는 3명. 헌주는 서울에 가서 또 한 명의 후배를 키우게 되는데 그가 바로 ‘시인과 촌장’의 리더인 하덕규였다.

1977년에 제1회 MBC대학가요제가 열린다. 우린 대접을 받았다. 이미 실력이 검정된 덕에 방송국측에서 지역 대표로 찜해뒀다. 오늘의 박문옥을 만들기도 했던 효자곡 ‘저녁무렵’이 그때 작곡된다. 가사는 이번 40주년 콘서트 관련 내 평전을 쓴 전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김수남이 지었다. 우리는 ‘전남대트리오’로 출전한다. 이 팀이 훗날 광주포크의 산실인 ‘소리모아’가 된다.

8남매의 막내로 형제들 예술 감성 영향
유신시대이던 사춘기부터 포크에 매료
형의 기타를 대학 진학 직전 가지며 ‘첫발’
올 10월엔 ‘음악인생 40年 콘서트’까지

77년 첫 대학가요제 전남대트리오 참가
직접 작곡 ‘저녁무렵’ 동상…뮤지션의 길
교직 몸담다 83년 옛 멤버 뭉치며 사표
‘소리모아’ 결성…85년엔 첫 독집 음반

“최강 음질 만들려” 한강 이남 첫 녹음실
소리모아 스튜디오로 광주음악 구심점役
30여년간 범능스님 등 수많은 프로듀싱
97년부터 매달 창작곡 발표 ‘1인 콘서트’


◆전남대트리오와 대학가요제

역시 당시 대회 취지에 가장 맞았던, 범생 창법의 ‘젊은연인들’을 부른 서울대트리오가 기대주였다. 이들의 적수는 단연 우리였다. 두 대학 트리오가 가장 무난했는데 대상은 서울대의 파격적 록밴드 샌드패블즈의 ‘나 어떡해’가 차지해버린다. 우린 동상.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이었다. 당시는 녹음시스템이 후져 실황 음원만으로 음반을 내기 어려웠다. 녹음을 위해 재차 상경해 서울스튜디오로 갔다. 대학가요제 첫 음반은 나름 한국 포크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난 동아리 활동의 연장에서 대학가요제를 생각했다. 그걸 딛고 유명가수로 가려고 하는 욕망은 전무했다. 내가 출세에 목말랐다면 얼마든지 홍보마케팅을 통해 인기가수로 건너갈 수 있었다. 서울의 몇몇 매니저가 우릴 스카우트하려 했다. 당시 매니저는 거의 주먹쟁이, 우린 그 제의를 거부했다. 대신 동상 수상 기념 ‘빈센트 리사이틀’을 기획했다. 하지만 유신 시절, 윗선에선 그걸 불법집회로 규정해 우리에게 징계를 먹였다. 리사이틀은 공중분해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당시 광주CBS 모 PD가 학교를 설득해 공연을 성사시킨다. 9월22일. 우린 비틀스급이라도 된 듯 ‘고별리사이틀’이란 현수막을 붙였다. 젊음이란 자신을 객관화시킬 열기가 최대로 부족한 시절이다. 고수가 보면 바닥권 실력이었던 폼잡던 애숭이 통기타 시절이었다.

◆ 한때 난 중학교 교사

졸업했다. 그리고 난 여수로 갔다. 다도해가 빤히 보이는 개도중학교 교사가 된다. 그 학교에 나와 죽이 맞는 과학교사가 있었다. 그는 시조에 능했다. 그가 건넨 ‘개도의 애수’란 가사에 곡을 붙였다. 그걸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했다. 수업시간 때 그 노래를 제자에게 가르쳐주었다.

난 군대시절에도 음악과 뒹굴 수 있었다. 문선대에서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활동한다. 다른 사단까지 원정다녔다. 모르긴 해도 군바리 신분으로 장교 팬까지 확보한 최초의 뮤지션이 아닌가 싶다. 당시 사단장은 또 다른 대통령이었다. 사단장이 침묵하면 사병들도 침묵, 사단장이 일어나 춤추면 사병들은 비로소 미쳐날 뛸 수 있었다.

1980년 6월1일 광주로 휴가나온다. 전남도청 앞에 장갑차가 서 있었다. 난 5·18광주의 비극스토리를 다 알 도리가 없었다. 광주의 비극을 알리려고 가장 힘쓴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걸개그림의 대명사격인 홍성담이다. 조선대를 다닌 그는 나와 도반이다. 그는 분개를 했다. 하지만 나는 군인 신분이라 어찌해볼 수도 없었다.

목포 앞바다가 보이는 안좌중 섬마을 교사 시절 결혼한다. 1983년 여름방학 때 흩어졌던 그 시절 포크지기들이 속속 광주로 모여들었다. 빈센트 멤버가 한자리에 모인다. 한 공연에 초대받은 날이었다. 동시에 욱하는 맘이 우릴 묶어냈다. 우린 모두 사표를 낸다. 음악이 몇 배 더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 1984년부터 음악과 진검승부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1984년. 그때부터 진짜 음악을 하게 된다. 1985년 첫 독집음반을 낼 때 팀명을 새로 짰다. 그게 ‘소리모아’다. 당시만 해도 광주의 음악은 거의 국악판이었다. 판소리류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나는 포크의 흐름과 광주의 소리 흐름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믿었다.

이번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광주포크사를 조금 정리해 봤다. 서울발 세시봉의 흐름을 광주에 전파한 몇 포크뮤지션이 있다. 내 선배인 국소남, 이장순, 그리고 후배인 한보리, 정용주, 김원중 등을 들 수 있다. 두 선배는 명성제과점·화신다방 등 노래할 만한 곳을 순회하면서 포크를 전파했다.

그 흐름을 이어받아 광주포크를 체계적으로 숙성시켜 나온 게 소리모아랄 수 있다. ‘저녁무렵’은 광주 포크의 창작포크송 1호다. 음반으로도 나오고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상경한 최준호는 솔로로 ‘강변에서’ 등 두 장의 음반을 낸다. 나와 박태홍은 한강 이남 최초 녹음실로 평가받는 ‘소리모아 스튜디오’를 광주 양림파출소 근처에서 오픈한다. 지금은 주월1동 신천아파트 상가건물로 이전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거기서 난 ‘겨울곰’처럼 지낸다. 거기가 내 창작의 산실이고 내 사랑방이고 광주포크문화의 플랫폼이랄 수 있다.

서둘러 녹음실을 차린 이유가 있다. 최강의 음질을 만들고 싶어서다. 당시 광주 운동권의 자금은 거의 민중가요 테이프 판매수익에서 나왔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음질이 형편없다. 당시 광주에선 스튜디오란 말조차 생소했다. 녹음장비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투 트랙 녹음기라서 녹음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렵사리 당시 최고의 시각장애인가수로 인정받던 이용복 소유 8트랙 중고 녹음기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도 이걸로 녹음했다. 지구레코드 소유인데 그걸 이용복이 구입한 걸 내가 재구입한 것이다.

이게 광주로 오면서 광주 포크음반의 사운드도 확 달라진다. 20년 이상 광주에서 생산된 100여장의 음반은 저놈이 감당했다.

◆ 내 분신…직녀에게

‘직녀에게’는 내 분신이다. 광주의 대표적 시인인 문병란의 대표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내 이전에 누가 먼저 그 가사로 곡을 냈다. 미주의 운동단체에 있던 김형성씨다. 그래서 직녀에게는 미국에서 먼저 불렸다. 당시 광주MBC 피디였던 오정묵이 그 곡을 주시한다. 그는 그 곡을 김원중 첫 음반에 수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정묵은 문병란 시인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 곡을 들어봤다. 운동가요로는 좋지만 대중가수가 부르기엔 너무 비장하고 엄숙했다. 그래서 내가 가요적으로 편곡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다음으로 이 곡이 운동권 노래로 사랑받은 것 같다. 광주정서에도 잘 맞았다. 그래서 오 PD가 방송에 많이 노출시킨다. 통일염원 가요를 넘어 지금은 노래방 인기곡으로도 사랑받는다.

명성과 담을 쌓고 사는 한 고수의 목소리도 음반화했다. 잊을 수 없는 작업이었다. 이젠 저승으로 가버린 범능(정세현) 스님의 음반이다. 그는 출가 전 광주출정가를 작곡했다. 스님이 된 직후 발표한 불교명상음악, 스님 되기 전의 민중가요 등 모두 20장의 앨범을 30년에 걸쳐 프로듀싱을 했다. 내겐 평생이 걸린 대작이다. 1985년 당시 노동자 가수였던 그로부터 운동가요 테이프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마땅한 녹음실이 없어 최준호가 잠시 운영하던 예림음악학원 창에 담요를 두르고 인켈 카세트녹음기로 녹음했다. 내가 기타 반주를 했다. 우린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 같은 음악적 도반이었다.

1994년 박태홍씨가 개인사정으로 녹음 일을 그만둔다. 혼자 남았다. 둘러보니 한국음악시장도 붕괴하고 있었다. 2년간 고뇌했다. 음악을 계속할 건지 말 건지…. 그 고민의 결실이 바로 1997년부터 1년간 대동고 앞 별밤문화센터에서 진행된 김광석소극장 콘서트 같은 ‘소리모아음악회 박문옥 1인 매월 콘서트’. 매달 창작곡을 발표했다. 이미 음반시장은 붕괴됐고 음원시대로 넘어가버렸다. 나도 먹고살기 어려웠다. 1998년에 나는 솔로로 독립한다. 박문옥 음악인생도 제3막으로 건너간다. 난 광주포크의 신호등이 되고 싶었다. 그만큼 광주의 포크자산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10회의 개인 콘서트를 했다. 6장의 정규 음반, 1장의 헌정음반, 3장의 라이브 실황음반이 있다.

세상이 팍팍해질수록 포크의 눈망울은 더욱 초롱거려야 된다. 포크는 시대의 길을 밝히는 등대라서 그렇다. 부디, 영원하라 FOLK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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